로드킬링(road-killing)을 통한 죽음의 美學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
로드킬(road-killing)
박소란
죽은 것이 있다 어쩌면
죽어가는 것이
죽어가는 것은 무엇인가
너와 내가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갈 때
건널목에 나란히 서서 잠시 신호를 기다릴 때
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있다 어쩌면
형체를 알 것도 같은 것이
그러므로 징그럽고 무서운 것이
그러므로 어쩐지 눈을 뗄 수 없는
그것이
자꾸만 고개를 돌려 내가 그것을 볼 때
왜,
묻던 너의 얼굴은 괜스레 슬퍼지고
아마도 나는 좋아하고 있다
비명을 지르는 척 속으로 탄성을 지르고 있다
깨진 컵
피 흘리는 손, 그런 손을 맞잡을 때
아마도 나는 사랑하고 있다
사랑하는 것은 무엇인가
컵인가 손인가
피 묻은 컵을 들고 웃는 나인가
나는 무엇인가
건널목 나란히 서서 잠시 신호를 기다릴 때
핏발 선 너의 눈처럼 붉은 것이
그러므로 한없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
너와 내가 땀에 흥건한 손을 맞잡을 때
왜,
너는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1.
화자는 죽음에는 서로 다른 무늬와 색상이 있다는 것을 로드킬을 통해 비로소 着目한다. 즉, 로드킬을 단순히 물질적 현상으로써 “길에서 죽은 혹은 죽어가는 동물”이 아니라 그렇게 갑자기 “허무”하게 路上에서 죽어가는 운명적인 존재로서의 시공간을 초월하는 인식의 문제로 다루고 있다. 그것은 결국 죽음이라는 통상적인 우리들의 자의식을 초월하는 슬픔의 사랑으로 까지 승화시키고 이를 통해 나(我)라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측探測해야 한다는 물음표를 던져주고 있어서 이 시를 주목하게 된다. 물론 그와 같은 존재론적 물음에 대한 답은 인식의 문제가 되지 않음을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죽음의 한 끝은 무한한 아름다움과 탄성으로서의 抽象이요 , 다른 한 끝은 두려움과 진실로서의 구체를 오롯이 행간을 통해 쏟아내고자 한다. 이 시의 독특한 면모面貌이며 시를 읽어내는 묘와 미가 아닐까 한다.
2.
말하자면 그러한 중의적 단상은 결코 눈을 떼지 못하는 인간존재로서의 한계적 본성인 '죽음'에 대한 심미적인 인식과 깨우침을 가능케 해주고 있는 것이다. 즉, 주체가 동물일 수밖에 없는 로드 킬(road -killing)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죽음의 무늬는 아라베스크처럼 복잡하고 추상적인 구조로 엉켜있으며 더욱이 그 색상마저 핏발이 선 눈처럼 붉은 빛을 발산하는 프리즘 굴절 같은 환상으로도 비쳐지고 있다고 화자는 시인의 書로 고백하고 있다. 구조상 詩라는 틀 안으로 못 들어가는 詩人은 틀 안에서 움직이는 내시경 같은 존재인 話者에게 작심하고 모든 걸 맡겨두고 있을 뿐이다. 바로 이점이 詩人이 로드킬을 통해 着目했던 죽음의 문제를 대담하게도 美學의 관념으로까지 견인 할 수 있었던 탁월한 시적 구상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참신하다 아니 할 수 없다. 이 詩가 시적 구성이 다소간 허름했음에도 유독 독자들로부터 눈길을 끌었던 이유다.
3.
따라서 이 詩는 단숨에 읽어낼 수 없는 妙味와 죽음의 미학을 가늠케 하는 시적 여운을 지니고 있기에 시적 해석의 가늠자를 조금더 깊게 들여대야 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러니까 로드킬이란 詩題의 행간에 숨겨두고 있는 주제에 대한 형이상학적인 존재 인식이라는 해석을 놓치면 안 될 일이다. 나아가 죽음과 사랑 그리고 태생적 인간 한계로서의 自我에 대한 절절한 물음이요 이를 우리는 어떻게 구체화시키고 형상화 시킬 수 있을 것인지를 염두에 두고 이 시를 읽어 달라는 시인의 간절한 吐露를 행간을 통해 읽어 내주길 시인은 바라고 있는지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들 자신이 울컥 쏟아내야 할 죽음의 美學에 대한 자연스러운 告白일지도 모를 일이다.
4.
행간을 살핀다. 연 구성이 혼잡스러운 면이 없지 않으나 문제 될 것 없다. 행간에 녹아 흐르는 주제의 흐름이 起承轉結의 모양새를 지니고 있기에 詩心을 짚어 내기에는 무리가 없어 보인다. 화자는 첫 연에서 죽음의 문제를 심오하게 묻고 시작한다. 그것은 로드킬이 우리에게 던지는 “암묵적 지식”을 전제로 가능 할 일일 것이다. 죽어 있는 혹은 죽어가는 동물은 예기치 못할 인간의 운명적 “허무”로 幻喩되기에 “죽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라는 화자의 물음으로 인해 이 시는 이미 완성 된 거나 다름없다. (제1연=起)
5.
동물이 횡단해야 했을 그 路上은 인생의 險路로 은유되고 따라서 너와 나는 어딘가를 향해 서둘러 그 險路를 건너야만 하는 운명을 안고 살아 갈 수밖에 없다. 로드킬 처럼 무지몽매한 바퀴에 으스러진 우리의 육체는 형체를 알 수 없거나 알 것도 같은 것이기에 그저 그 죽음은 징그럽고 무서울 뿐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눈을 떼지 못하고 자꾸만 고개를 돌려 그 죽음을 들여다 볼 수밖에 없는 것이며 또한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는 인간 한계로서의 우리 자신이 죽음 앞에 슬픈 존재일 뿐이다.(제2연∼제5연/承)
6.
시의 反轉은 역설(paradox)을 내포하는 경우 더욱 빛을 발한다. 슬픔이 극에 달하면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승화되는 것일까? 화자는 그러한 죽음의 운명론을 슬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과 심지어 사랑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그것은 로드킬이라는 “허무”한 죽음에서 視空間으로 피어나는 심미적인 아름다움이요 사랑으로 승화되는 죽음의 역설로 받아들여야 하는 인간의 운명적인 한계를 고백하는 절절한 몸짓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러한 시전개의 반전은 그러한 역설에 머물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깨진 컵, 피 흘리는 나의 손, 그 손을 맞잡은 또 하나의 너의 손을 통해 진정 슬픔을 초월하는 죽음에 대한 사랑을 절절하게 묻고 있다. 도대체 죽음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슬픔인가? 아름다움이요 사랑인가?에 대한 화자의 吐露는 결국에는 “나는 무엇인가”라는 극단의 하이데거식 自我 存在意識의 문제로까지 확대하여 죽음의 문제를 승화시키고 만다. 이 시의 白眉라 할 수 있다. (제6연 ∼제9연/轉 )
7.
로드킬로부터 받은 시적 靈感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險路에서의 뜻하지 않는 갑작스런 운명적 죽음이기에 “虛無”일 수밖에 없다. 그러하기에 인간의 숙명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없는 너와 나는 슬픔을 넘어 한없이 아름다움과 사랑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죽음의 모습으로 귀결된다. 시를 매듭지으면서 화자는 다시한번 죽음의 美學을 노래한다. 너와 내가 땀에 흥건한 손을 맞잡을 그 때에 왜 네가 내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에 대한 답을 마지막 행간에 은밀하게 그러나 명징하게 그려 넣고 있다. 그 답을 우리는 이미 가슴으로 또한 감정의 끈을 흔들어 대는 진동으로 알고 있다. 죽음은 너와 내가 함께 바라보는 우리의 핏발 선 눈처럼 붉게 타오르는 아름다움이요 사랑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러한 죽음의 문제에서 우리는 결코 눈을 뗄 수 없는 존재일 뿐이라는 것을(제10연 ∼제11연/ 結)
8.
끌으로 이 시를 종합적으로 眺望해보면 우리는 詩題인 로드킬로 인한 “죽은 혹은 죽어가는 동물”에 대한 着目이 “깨진 컵‘과 ”피 흘리는 손“으로 換置되는 허무한 죽음에 대한 테마의 시적 전개상 妙味를 발견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를 바탕으로 ”슬픔“과 ”아름다움“과 ”사랑“의 경지로 반전시키고 승화되어 결국 나는 무엇인가라는 自我意識으로서의 죽음의 美學에 대한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으리라 추측 해 본다. 비현실적인 형상화를 가능케 하는 것도 시의 고유한 몫의 하나라고 본다. 따라서 잣대로 재고 화학기호를 탐색하듯 완벽한 해석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행간에 암시되어 있는 분위기와 이미지가 갖는 미묘한 연계성을 음미하는 수준에서 시 읽기는 끝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이 시가 해석상 難解한 면이 없지 않으나 시인이 노래하고자 하는 바를 類推하고 吟味하는 수준에 머무른다면 시 읽기가 한결 수월 해 보이지 않을까 첨언 해 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