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사도행전 10 : 17 - 33
사도행전은 사도들의 전도 사역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교회가 세워진 것을 기록한 책입니다. 사도행전에는 특별히 두 사도의 행적을 중심으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먼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세운 베드로의 전도사역이며(1-12장), 안디옥교회의 파송을 받아 이방인들을 비롯하여 로마까지 복음을 전한 바울의 전도사역(13-28장)입니다.
그런데 바울과 베드로는 너무나도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였습니다. 환경이 바뀌어도 일관성이 있었습니다. 풍랑이 일어난 바다위에서나, 옥에 갇혔을 때나, 대접을 받을 때나, 핍박을 받을 때나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한 마디로 조석변이(潮汐變異)이였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사람이였습니다. 바울이 체질적으로 타고난 지도자라면, 베드로는 실패와 좌절이란 경험을 통해서 만들어진 지도자라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3년을 따라다녔던 복음서에서와 전혀 다른 사람이였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후가 완전히 달랐습니다. 먼저 생각하는 사람으로 바꾸어졌습니다. 전에는 별로 생각없이 행동을 하였습니다.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러한 신앙고백을 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자신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가르쳐도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내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은 베드로는 곧 바로 ‘예수님을 붙들고 향변(諫)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잡혀 죽으실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때 예수님으로부터 ‘사탄아 물러가라’고 무서운 책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제자들에게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고 도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는 즉시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큰 소리쳤지만 그날 밤에 베드로는 주를 부인하였습니다(마26장).
이렇게도 감정에 따라 살았던 베드로가 생각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19절에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한 그릇이 내려오는 데 그 안에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는 소리가 났습니다.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릇은 하늘로 올려 져 갔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환상을 보고 생각을 했습니다. 율법에는 먹지 말라고 하는 것을 먹으라는 환상에 대해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환상을 통해서 내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을 한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했을 때 그 속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떤 사건을 보았을 때 그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아야 합니다. 말씀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주시려고 이 말씀을 하시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생각할 때 성령께서 그 사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만약 베드로가 생각하지 않았더라면 더 이상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으므로 성령께서 깨닫게 하시는 말씀을 더 이상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생각했을 때 성령께서 그 환상에 대한 의미를 가르쳐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 베드로에게 ‘두 사람이 너를 찾으리니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가 생각하지 않았다면 이 말씀을 듣지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높은 벽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임을 자랑하며 이방인들을 구원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께서 가라고 하신 말씀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베드로가 쉽게 할 수 없는 것이였습니다.
28절에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 너희도 알거니와”라는 말을 한 것은 이방인과 가까이 하는 것을 위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고 말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오는 것은 위법인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지시하시기로 내가 사양하지 않고 왔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전과 같았다면 고넬료가 청하였도,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도 올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고넬료의 집에 왔다는 말입니다.
베드로뿐 아니라 예루살렘 교회도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것을 위법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15장에 예루살렘 교회가 베드로를 불러 이방인 고낼료에게 복음전하는 것에 대해 의논을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 앞에 하나님이 보여주신 환상과 성령께서 말씀하신 것을 증거하면서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해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게 하셨다’(행15:8)라고 말했습니다.
베드로의 이와 같은 증언을 예루살렘 교회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므로 그때부터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되어 진 것입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독선적인 선민사상을 깨고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잘못된 이방인에 대한 편견을 버리므로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편견이 오늘날에도 있습니다. 미국과 같은 민주주의가 발달된 나라도 정치적으로도 흑인에 대한 편견을 없앨 수 없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편견이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안 된다는 편견입니다. 가까운 이웃 사람들을 잘 알기 때문에 저 사람은 전도해도 절대로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편견입니다. 편견은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상종도하지 않는 이방인인 고넬료는 이미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였습니다(22). 고넬료는 지금까지 베드로가 생각했던 이방인으로 구원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하나님의 백성이였습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해주는 자가 없으므로 하나님께서 베드로를 보내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편견 때문에 마땅히 전해야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 사람은 도저히 예수 믿을 사람이 아니라는 편견 때문에 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택함을 받았는지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도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부산에서 목회를 할 때 알콜 중독자가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들어왔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 사람을 인간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한번 술을 마시고 시동이 걸리면 일주일 정도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밤낮 술병을 들고 다니며 사람들을 두렵게 하는 것입니다. 그때 제가 그를 서재로 모셔 들이고 ‘목사가 술을 사서는 대접 못하지만 가지고 온 것은 내가 드리겠다’고 하며 가지고 온 술을 한잔 따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술을 마시지도 못하고 갔습니다. 그리고 며칠 후에 역시 술에 취한 체로 예배시간에 왔습니다. 그리고 예배를 마친 후에 통곡을 하는 것입니다. 몇 번을 그렇게 참석하기에 ‘심방을 하면 어떻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반갑게 ‘오시라’고 하여 교인들과 함께 그 집에 심방을 한 일이 있습니다. 명륜 시장에 생선 장사를 하는 사람이였습니다. 놀라운 것은 심방하는 교인들을 대접한다고 밤중에 삼천포까지 가서 싱싱한 횟고기를 경매해서 샀다고 하며 대접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한 맺힌 사연들을 내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말을 들었을 때 그가 알콜에 중독될 정도의 마음의 고통을 이해할 수가 있었습니다.
모두가 그를 알콜 중독자로 인간취급도 하지 않았지만 그를 받아 주었을 때 그는 감동을 받아 몇 번이라도 예배에 참여하고 심방을 받고 주의 종들을 극진히 대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편견은 악독입니다. 편견을 버려야 하나님의 백성을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베드로가 집에 들어 올 때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려고 하기에 베드로가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26). 고넬료는 당시 로마 황제의 령을 받은 백부장으로 가이사랴의 치안을 맡은 군인이였습니다. 이러한 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려고 했다는 것은 로마인들이 황제를 신성시하여 경배하였던 것처럼 베드로를 신성시하여 경배하는 것 이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고넬료가 베드로에게 엎드려 절하려고 했다는 것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종으로 경배를 한 것입니다. 로마의 백부장이 베드로를 높이고 존경하는 것입니다. 아직 하나님의 진리를 알지 못한 고넬료로서는 베드로를 최고로 존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황제나 신을 대하듯이 자신에게 절하는 고넬료의 경배를 겸손히 사양했습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하며 고넬료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경배를 받아야 할 존재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만이 경배를 받아 마땅하며, 그 외의 어떤 피조물에게 경배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문선명이가 신도들이 높여주는 것을 막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까지 올라간 것입니다. 박태선이도 많은 사람들이 경배하는 것을 받으므로 이단의 고수 천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으므로 이단의 교주가 된 것입니다. 요즘 신천지의 이만희가 신도들의 경배를 받으며 신과 같은 존재라는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고 하므로 경배를 받지 않았습니다.
베드로는 겸손의 사람이였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의 겸손을 배워야합니다. 칭찬을 들을 때 교만해질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합니다. 남이 실수를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나도 실수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겸손해야 합니다. 범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를 책망하고 저주하기보다는 나도 저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설교하여 하루에 삼천 명이 회개하는 능력이 있었다 할지라도 경배를 받아야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앉은뱅이를 고치는 자라 할지라도, 옥에 갇혀 매였던 쇠사슬이 풀리고 옥문이 열려 나올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경배를 받아야 할 사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고넬료의 경배를 받았더라면 베드로는 끝장이 났을 것입니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이 되지 못하고 사탄의 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오직 경배를 받아야 할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 외 어느 누구도 경배를 받아야 할 존재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완전히 변화된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기 전과 만난 후는 완전히 변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 가를 배워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실수하고 잘난 체 했더라도 예수 믿는 사람으로 만들어져야 합니다. 베드로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서 어떤 사건이나 말씀을 듣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고질적인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겸손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