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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 브릿 비머, 로버트 L. 슈크가 쓴 '고객이 통치한다'란 책에 미국의 보험회사 처브그룹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회사는 창립 초기부터 신속하고 공정한 보험금 지급 처리로 유명했습니다. 창립 이래 몇 차례 역사적 순간마다 처브는 '옳은 일을 하겠다'는 의지를 보였습니다. 1906년 4월 리히터 8.3 규모의 강진이 샌프란시스코를 강타해 전체 거주민 41만 명 중 30만 명이 집을 잃었고, 3천명이상이 죽었습니다. 이 때 처브는 당시 75만 달러라는 엄청난 액수의 보험금을 곧바로 지급했고, 회사 잔고는 10만 달러로 떨어졌습니다.
파산의 위험을 무릅쓰고 지진 피해로 인한 보험금을 모두 지급한 것입니다. 2001년 9월 11일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졌을 때도 처브는 옳은 결정을 했습니다. 비행기 충돌은 보험금 지급 사유에서 제외되는 '전쟁 행위'라는 의견도 있었지만 회장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해야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이 옳은 일이겠는가? 보험금 지급을 당장 시작하자." 점심시간 이전에 결정을 내리고 처브 사의 직원들이 사망한 2,750명 가운데 처브사 보험에 가입한 1,000명에게 보낼 수표를 작성했습니다. 임직원들은 하나같이 헨돈 처브가 했던 말, 즉 "우리는 보험금을 지급하기 위해 계약서에 명시된 내용 이상의 노력을 하는 회사다"라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 점에서 처브 사는 다른 보험사들과 차별화되었습니다. 그들은 회사의 이익 때문에 그들에게 중요한, 옳은 일을 처리하는데 망설이지 않음으로서 오늘까지 그 명성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삶의 우선순위가 보다 분명해져야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우선순위가 주님께 있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과의 교제로부터 하루가 시작되고, 마쳐지고, 언제나 우리의 생각과 마음이 주님의 뜻에 닿아있어야 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일에 대한 우선순위가 좀 다릅니다. 삶의 환경, 일의 종류에 따라 그러나 어떤 식으로 우리가 맡겨진 일을 처리하든지 반드시 지켜져야할 원칙은 옳은 일을 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옳은 일을 하는 것은 반드시 우리에게 유리한 일만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우리는 손해도 봐야하고, 눈치없다는 말도 들어야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옳은 일은 반드시 열매를 맺고 인정받게 됩니다.
저는 요즘 청년들과 새신자반을 공부하면서 저는 제가 옳바른 방향을 잡았다고 생각합니다. 화요일 오후 4시를 맞추기 위해 저는 아무 약속도 잡지 않습니다. 그들의 성장을 위해 제가 지불해야 하는 댓가를 치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교회가 사람을 세우는 교회가 되어야한다는 비전을 향한 옳은 일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한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은 중요하고 옳은 일에 대한 열정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혼을 향한 열정이 저와 여러분속에서 다시 일어나 사랑축제를 통해 열매맺기를 기대합니다.
갈릴리호수는 해면보다 무려 200m낮은 곳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평균 수심이 40m, 남북의 길이가 21km, 폭은 가장 넓은 곳이 13km, 둘레는 51km이기 때문에 바다라고 불리웁니다. 이 바다로 들어오는 물의 근원지는 북쪽의 헬몬산의 눈과 얼음이 녹아서 생긴 물입니다. 이 물이 시리아 지역의 골란 고원을 거쳐 갈릴리 바다로 들어옵니다. 그리고 이 바다의 물은 요단강을 통해 사해 바다로 내려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갈릴리 호수는 생활을 돕는 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려 주시는 비를 통하여 바다가 채워지고 있기 때문에, 갈릴리 바다 자체가 하나님만 의지하고 살라고 하는 신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바라만 보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바다가 갈릴리입니다. 이 바다는 크지 않지만 동쪽 해상과 서쪽 해상의 파고의 높이가 서로 다른 경우가 있을 만큼 기후와 기압골의 변화에 민감한 지역입니다. 낮에는 뜨거운 기온이 유지되다가 해가 넘어가는 무렵을 전후로 차가운 저녁 공기로 바뀌면서 바람이 일어나는데, 대략 오후 4-5시 경에 자주 관찰이 됩니다.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하시던 주님은 이런 현상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배를 띄우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래야 했을까요? 예수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이었을까? 예수님이 가장 보람을 느끼고 당신의 제자들에게 행하라고 몸으로 가르치고 싶었던 일이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에서 중요한 한가지 포인트를 절대로 놓쳐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주님은 가르치시고, 그것을 실제로 실천해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하시고는 십자가에 달려 고난중에도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고난 당한 자의 이웃이 되라고 말씀하시고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찾아가 위로와 소망을 나누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과의 일치, 아멘!
막4:35절에 보면 예수님과 제자들이 바다에 배를 띄운 시점은 저물때입니다. 옵시오스라는 이 말은 초저녁 혹은 밤이라고 말할 수 있는 늦은 저녁때입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그렇지만 2천년전의 갈릴리 바다에서 밤에 배를 띄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아니 시도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바다의 사면은 거의 칠흑같은 어둠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방향을 잡는 것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배는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거세게 일어 배에 부딪쳐 배에 물이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제자들은 죽음의 위협앞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예수님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무모한 시도를 하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이 위험에 처하도록 일부러 끌고가시는 분도 아니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위험한 밤 바다에 배를 띄워 제자들을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 위험을 무릎쓰고 배를 띄우신 예수님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요? 중요한 일을 가르치고 싶으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건너편으로 가자는 한 마디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막4장에서 예수님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 비유는 뿌려진 씨앗이 여러 배로 결실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26절부터 하나님의 나라를 씨를 땅에 뿌리는 비유로, 겨자씨의 비유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십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씨를 뿌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가르치고 싶으셨습니다. 씨를 뿌리는 일의 중요성을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건너편으로 가서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는 현장을 보게 하시기 위해서 밤바다에 배를 띄우셨습니다.
예수님에게 그 일은 밤바다의 위험을 무릎쓰고서라도 중요하게 해야할 일이었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할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 아니 가장 중요한 일은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입니다. 전도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귀중한 존재이고,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인지를 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아는 것처럼 거라사 지방에서 예수님은 한 귀신들린 사람을 만났을 뿐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만나서 그에게 복음의 씨앗을 심으셨던 것입니다. 제가 거라사 지방의 사진을 인터넷으로 찾아보았더니 지금도 사람들이 사는 건물이 없는 언덕과 산이 있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더구나 그곳은 이방의 땅이었습니다. 돼지떼를 키우는 것을 보면 이방인들이 모여살고 있는 곳이었고 주님이 환영받지 못할 곳임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안에서 회복되고 치유되어야할 한 영혼이 무덤 사이에서 사슬에 묶인 채, 벌거벗고 소리지르며, 자기 몸을 돌로 상해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그렇게 중요한 일로 여기시고 밤바다를 건너셨을까요? 한 영혼의 가치를 믿으셨기 때문입니다. 밤바다에 배를 띄우면서, 위험을 무릎쓰면서 예수님에게는 옳은 일을 한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조건들을 제시하는 데 익숙합니다. 밤이기 때문에, 바람이 불기 때문에 이 일은 늦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합리적이고 논리적이지만 영혼을 소중히 여기는 태도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적인 생각에 매이지 말고 믿음으로 도전하라고, 옳은 일을 한다고 확신함으로 배를 띄우라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예수님은 풍랑을 잔잔하게 하셨습니다. 위험에 처한 제자들을 돌보아 안전하게 지키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위험을 무릎쓰지 않는 믿음으로는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할 수 없다고,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1941년 폴란드 내 모든 유대인들이 크라코우 시내 강제주거지로 이동되고 ,1943년 3월 플라초프 수용소로, 독일이 패망하기 7개월 전 그들은 죽음의 수용소인 아우슈비츠로 옮겨지며 최후를 맞습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휴먼드라마가 펼쳐지는데 그 주인공은 독일인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였습니다.
그는 탁월한 사교성을 십분 발휘해 독일군 장성들을 미리 포섭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그는 파산한 공장을 인수해 군용식기 공장으로 개조하고 값싼 유대인 노동자를 고용합니다. 평소에 확보한 군의 인맥을 통해 받은 제품주문으로 그는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들을 장악하고 있던 프라초프 수용소장 괴트 소위를 자기 사람으로 만듭니다. 괴물이었던 괴트는 신들러를 만나 점점 인간으로 변모해 갑니다. 그리고 순간 순간 그의 관대함과 재치 덕분에 많은 유대인들이 생명을 건집니다.
유대인들에게 쉰들러의 공장은 안전이 보장된 유일한 천국으로 통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그는 '한 인생 생명의 무한한 가치'에 대해 눈뜨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절명의 위기가 곧 닥쳐옵니다. 전쟁 막바지에 이르러 모든 유대인은 아우슈비츠로 이동시키라는 명령이 내린 것입니다. 그때 그는 잠못이루는 번민 끝에 놀라운 선택을 합니다. 수백만 마르크의 돈으로 유대인의 생명을 산 것입니다. '돈'에서 '생명의 고귀함'으로 그의 가치가 확고하게 전환된 것입니다. 무려 1,100명의 유대인이 그를 따라 안전한 곳으로 이동합니다. 7개월 후 독일이 항복하자 유대인들은 자유인이 되고 그는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이별의 순간, 유대인들이 금니를 빼서 만든 금반지를 그에게 선물합니다. 그 반지에는 탈무드에 나오는 한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면 그는 곧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Whoever saves one life, saves the world entire)'
쉰들러는 이 글귀를 보고 통곡합니다. 그리고 외칩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을 거야, 좀더 구해 낼 수 있었어. 왜 이 차를 안 팔았지. 최소한 열명은 구했을텐데. 왜 이 금뱃지를 팔지 못햇지. 두명은 구했을 거야. 최소한 한명은 더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구하지 못했어.....". 그의 통곡은 계속되었습니다.
사랑축제를 통해서 쉰들러의 리스트가 우리에게도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모두 39명, 우리의 리스트에 기록된 이름들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생명책에 기록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사랑축제를 통해서 생명의 축복과 기쁨을 맛보는 기회가 되야 합니다.
예수님은 씨를 뿌리면 30배, 60배, 100배로 열매맺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씨앗을 심으면 그것이 언제 자라는지 보지 못하지만 어느새 자라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도 그와 같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겨자씨는 작은 것이지만 그것이 자라면 아주 큰 나무가 되어 새가 깃들어 쉴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얘들아! 분명한 사실이 있다. 누군가 씨를 뿌리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 것도 거둘수 없단다. 몇배를 거둘 수 없고, 놀랍게 성장한 것도 볼 수 없으면 새가 깃드는 겨자씨나무도 볼 수 없다. 나는 너희들에게 씨를 뿌리는 삶을 가르쳐주길 원한다. 나는 너희들이 그저 나를 따르는 삶을 살아가는 제자가 아니라 나를 전하는 제자가 되기를 원한다. 그 일은 결코 주저할 수 없는 일이다, 언제까지 마냥 결심만 하는 그런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지금 이 밤바다에 배를 띄워 건너편으로 가야 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할 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어서 모든 풍랑과 바람으로 너희를 지켜줄 것이다."
그리고 거라사 지방에서 한 영혼을 만나 회복시키시고 그를 데가볼리로 파송하셨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예수님을 만남으로서 데가볼리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가겠다고 했을 때 주님은 그를 그의 집으로 돌려보내셨고, 나를 증거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데가볼리는 헬라지명을 따른 10개의 성읍들이 연합된 지역이었습니다. 대부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이 이방인들이었기에 그가 전한 복음은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습니다.
다우마조는 창송했다는 의미도 함께 담겨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영혼을 통하여 우리가 그저 예수를 따르는 사람에서 만족하지 말고 주님을 전하는 자가 되어야한다는 새로운 변화와 미션을 제시해주셨습니다. 이것이 이번 사랑축제를 우리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주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전도하는 교회, 전도하는 성도로 변화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교회에 부어주시는 축복을 누리고 비전을 이루어나갈 것입니다.
미루지 마십시오, 그리고 주님을 따르는 삶에서 주님을 전하는 삶으로 전환을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십시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