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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먹방 TV 프로그램에 계절의 별미인 막국수가 한창 소개되고 있다.
막국수.
면 종류 음식 중에서는 제일 좋아하는 메뉴다.
겨울에 먹어야 제격이지만 여름에도 그에 못지않게 맛있는 먹거리이지 않을까 싶다.
춘천 홍천 양양 등이 잘하기로 이름났다.
강원도 방면 7번 국도를 따라 여행하던 중에 별 기대 없이 들렸던 식당에서 막국수를 맛있게 먹었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막국수를 처음 맛보았던 때는 80년대 초반이었다.
소양호로 낚시하러 가는 길에 들렸던 춘천 시외버스터미널 부근의 허름한 식당에서였다.
그집은 손님이 올 때마다 그때부터 반죽을 하여 막국수를 만들어서 음식이 나오기까지 30~40분이 걸렸는데, 오래 기다린 것이 하나도 아깝지않을 만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난다.
그후 차를 가지고 다니면서부터 소양댐 진입로에 있는 천전리의 어느 식당에서 자주 먹었었는데 식당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그집은 막국수와 감자전도 맛있었지만 '옥로주(玉露酒)'란 이름의 맑은 옥수수 막걸리가 일품이어서 회사 직원들과 같이 먹으려고 여러번 사다 나른 적이 있었다.
30년에서 20년 전까지의 일이다.
2년 전에 가 보았을 때 그때랑 너무 많이 변해서 그 식당을 찿지 못했었는데, 손님이 많았었던 집이었기에 폐업하지는 않았을 것이고 어디론가 장소를 이전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예전에는 모두 살림집들을 식당으로 개조하여 영업을 하였는데 요즘은 모두들 번듯한 건물에 넓은 주차장을 마련해 놓고 춘천의 대표적인 먹거리인 '닭갈비'와 '막국수' 간판을 걸어 놓고 영업을 하고 있다.
제각기 '맛집'이란 이름으로 성업중이지만 옛날의 즉석 익반죽으로 만든 막국수의 맛은 기대하기 어렵지 않을까 싶다.
이곳의 천전리(泉田里)는 북한강의 큰 지류 중 하나인 소양강을 옆에 두고 자리잡고 있다.
많은 강변지역이 그렇듯이 이곳도 수 천 년 전에 사람이 모여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천전리 지석묘군이다.
청동기시대의 무덤인 고인돌과 돌무지가 100m 거리를 두고 10여기가 남아 있는데 돌화살촉과 무문토기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청동기 중기에 해당하는 BC.1200년, 즉 3000여년전 이야기다
학자에 따라 인류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는 신석기시대라는 설이 있다.
한 곳에 정착하며 농경생활과 수렵?어로생활을 병행하며 살아 왔다.
하지만 철기를 발명하면서부터 농기구의 발달과 함께 잉여농산물이 생겨나게되고, 약탈과 정복전쟁이 시작되고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발생하였다.
고인돌과 같은 거석문화는 정복자의 상징이다.
착취를 당한 피지배자 계층의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역사는 소수의 지배자 계층의 기록이며
대다수를 차지하는 피지배자 계층의 역사는
묻혀버려 흔적조차 찿아볼 수 없다.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오봉산 아래에 있는 청평사(淸平寺)다.
정확히는 청평사의 옛터이다.
초창기의 청평사 흔적을 살펴 보고 싶었다
1973년 소양댐이 준공되면서 길이 끊어진 청평사는 소양댐 선착장에서 뱃길로 10분 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어서 대부분 배를 이용해 가는데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찻길로 가고 싶었다.
긴 배후령터널을 지나 간척사거리에서 우회전하여 배치고개를 넘어가는 길은 20여년전에 군용도로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오봉산을 넘어가는 길이니 당연히
굴곡지고 경사도가 있었지만 생각보다 도로 상태가 좋았다.
소양댐의 제방을 보거나 배를 타는 재미가 아니면 찻길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편할 것 같다.
청평사는 창건 역사가 좀 독특하다.
고려 태조 왕건의 3째 아들 4대 광종(光宗)때인 973년에 백암선원(白岩禪院)이란 이름으로 창건되었는데 1068년 이자연(李子淵)의 아들 이의(李顗)가 중건하면서 보현원(普賢院)으로 명칭을 바뀌었다.
1089년에는 이의의 아들 이자현(李資玄)이 대대적으로 중창하면서 또 다시 문수원(文殊院)으로 명명되었다. 그후 1367년 공민왕때 나옹화상이 주석하였고, 1457년 단종 폐위사건 후 매월당 김시습도 3년간 머물렀다고 한다. 1550년에 보우(普雨 : 고려말 태고국사 보우普遇가 아님)선사가 주석하면서 청평사로 그 이름을 고쳐 불렀다고 하는데, 그 이전의 문헌에 이미 청평사의 명칭이 나타나는 것으로 볼 때 의구심이 간다.
처음에는 선원으로 시작했다가 사찰로 발전한
고려 거사불교의 모습을 보여주는 불교문화사적으로 귀중한 사찰이다.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또는 사상적으로 흥미로운 점을 살펴볼 수 있다.
918년 고려 태조 왕건이 나라를 세윘을 때,
중국대륙은 당나라가 멸망한 후 오대십국시대(五代十國時代)가 시작되고 북쪽은 거란국이 세워지고(916),
동북쪽에는 여진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고려는 태조때부터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에 대해 적대정책을 취해 왔는데,
960년 대륙을 통일한 송(宋)나라를 넘보기 시작한 거란은 국호를 요(遼)나라로 고치고 사전 정지작업으로 송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고려를 침략하였다.
993년부터 1018년까지 3차례에 걸친 침략이 있었고, 1010년 고려 현종 1년 강조(康兆)의 정변(政變)을 빌미로 요나라가 침입했을 때는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은 공주로 피신을 갔었다.
당시 공주 절도사로 있던 김은부가 세 딸을 왕에게 바쳐 왕후가 되게 하였는데,
김은부의 처는 경원 이씨로 이허겸의 딸이었다.
세 왕비의 외할아버지가 된 이허겸은
왕실의 외척집안이 되어 문벌귀족의 일원이 되었다.
그의 손자이자 왕비의 외사촌인
이자연(李子淵 :1003~1061)이 현달하여
과거에 장원급제를 하면서 승승장구하였고,
그 역시 세 딸들을 현종의 아들 문종에 출가시키면서 왕실의 외척으로서 자리를 굳혀 이후 한동안 경원이씨의 딸들이 고려국의 왕비자리를 차지하였다.
예종의 장인이며 인종의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이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난을 일으킨 이자겸은 이자연의 손자이다.
태조 왕건 이래 왕실에서는 권력 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근친혼을 장려하고
왕건의 3째 아들인 광종 때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과거제를 실시한지 100년이 지났으나
문벌귀족들의 전횡은 여전하였다.
고려는 불교를 국교로 숭상했었기에 사찰은
나라에서 많은 특혜를 받았고 하나의 큰 세력집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문종의 4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처럼 왕실뿐만 아니라 귀족들도 자녀를 출가시켜 불교계에 영향력을 가지고자 하였다.
따라서 고려에는 불교사상이 당나라의 도교사상과 함께 지배계층에 팽배해 있었다.
청평사의 전신인 문수원을 중수하고 고려정원으로 가꾼 이자현(1061~1125) 역시 이자연의 손자이고 이자겸과는 사촌이 된다.
이자현이 8살때 아버지 이의(李顗)가 춘천지역에 감창사(監倉使)로 있을 때 경운산(慶雲山) 아래에 있던 백암선원(白巖禪院)을 중건하면서 보현원(普賢院)이라 했던 것을, 20년이 지난 후 이자현이 와서 암자를 새로 짓고 보현원도 중창하여 문수원(文殊院)이라 하고 산은 청평산(淸平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청평사는 사찰 외에도 문화사(文化史)적으로 두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고려시대 정원의 조경양식이 온존히 보존되어 남아 있고, 또 하나는 이자현에게서 보여주는 고려시대 "거사불교(居士佛敎)"의
역사가 남아 있는 곳이다.
거사의 원조는 붓다와 동시대에 살았으며 대승불교의 재가주의(在家主義)를 주창하는 유마경(維摩經)에 나오는 유마힐(維摩詰)이다.
정통불교와 또 다른 불교의 조류(潮流)이다.
거사라 함은 지배계층의 지식인으로서 벼슬을 한 적이 있으며 불교적인 수행을 하고 귀의한 사람을 말한다.
초기 청평사를 가꾸어 온 이자현은 고려의 전형적인 거사(居士)이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성행하기 시작한 선종의 영향을 받았고 수능엄경(首楞嚴經)을 경전의 핵심이라며 심취했었다.
능엄경에 보면 이근원통(耳根圓通)의 반문문성(反聞聞性)에 대한 부처님의 말씀이 있다.
바깥의 소리나 내면의 소리를 듣고 본성을 깨달으면 귀로 듣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감각기관도 원통해져서 자기의 본성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진실한 본성을 본다는 견성(見性)이며, 견성을 하면 깨달은 자가 되어(成佛) 즉 견성성불(見性成佛)이 된다는 뜻이다. 즉 수행방법에 대한 가르침이다.
이자현은 29세 때인 1089년에 입산하여 1125년 입적할 때까지 37년간 13,000평의 공간에 암(庵), 당(堂), 정(亭), 헌(軒) 등 10여채를 지어 선원을 완성하였다.
특히 경내에 물길을 만들어 선원 법당 밑으로 물이 흘러가도록 설계되었을 뿐만아니라
경내 어디에서도 물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자현은 물소리를 들으며 수능엄경의 수행방법을 따르고자 했으며 그것을 화두로 삼아 간화선을 수행하였다.
이렇듯 청평사는 1000년 세월이 지난 지금도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있어 고려시대 "거사불교(居士佛敎)"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역사가 있는 곳이다.
청평사의 고려정원은 사찰문화와
도가(道家)의 무위사상에 따른 자연정원이 만나 이루어진 선원(禪院)이다.
입구의 구송폭포에서부터 오봉산 정상 아래 식암(息庵)까지 3km에 이르는 넓은 구역을 청평사 경내로 삼아 4구역으로 구분하여 선찰(禪刹)의 정원으로 가꾸었다. 형체가 지금껏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인공정원이라고 한다.
여태껏 그 모습을 잃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들 가운데 영지(影池)와 그 옆에 자연석으로 쌓아 올린 돌무덤(壘石)이 남아 잘 보존되고 있다. "사람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완연히 하늘이 만들어 낸 것과 똑 같다."라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치석기법(置石技法)을 보여준다.
옛부터 선종사찰에서는 일주문 부근에 영지를 조성했다. 불국사, 해인사, 대흥사, 쌍계사 칠불암, 불영사 등에서 그러한 예를 볼 수 있다.
영지는 무언가 비춰지는 연못이라는 뜻이다.
탑이 비춰지는 탑영지, 부처님이 비춰지는 불영지, 산이 비춰지는 산영지가 있는데 청평사는 산영지(山影池)에 해당된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영지의 크기는 60평 정도의 타원형에 깊이는 30~50cm로 그다지 깊지 않고 수초와 물고기를 키우지 않는다.
파랑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다.
청평사 영지에서는
물이 들어 오고 나가는 것도
잠복수로(潛伏水路)를 이용했던 것이 1981년 학술조사에서 밝혀졌다고 한다.
따라서 여느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나무에 홈을 파서 물길을 내는 비구(飛溝)에서 물이 떨어지게 만드거나 물고기를 기르는 연못은 수면에 파랑을 일으키기 때문에 영지(影池)라고 볼 수 없다고 한다.
청평사는 조선 명종때 문정왕후의 후원을 받은 보우선사가 주석하면서(1557년) 지금의 사찰배치를 완성하였다.
왕실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고 선대(先代)의 명복과 극랑왕생을 위한 원찰(願刹)이 되었다는 뜻이다. 왕실의 원찰에는 원찰만의 독특한 사찰구조와 상징물들이 배치되었고 청평사에는 이러한 것들이 남아있다.
숭유억불(崇儒抑佛)을 국시(國是)로 하고 있는 조선시대에서 사찰을 대규모로 조성한다는 것은 유학을 숭상하는 대부분의 관료들의 반발 때문에 쉽지 않는 일이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명종의 어머니 문정왕후의 뛰어난 정치력 덕분에 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보우선사는 불교의 부흥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정왕후가 죽고나자(1565년) 그동안 유림 관료들에게 미운털이 박힌 보우는 곧바로 요승(妖僧)이란 말을 들으며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참형을 당해 죽었다. 당연히 보우가 시행했던 불교정책들은 폐지되고 불교는 다시 억압을 받게된다.
그후 청평사는 퇴락의 길을 걷게 되었으나 폐사는 되지않고 사세(寺勢)를 유지하다가
보우가 세상을 떠난지 100년후 또 한사람의 걸출한 스님이 주석하게 되었는데 환성 지안(換醒 志安 :1664~1729)스님이다.
1711년에 청평사에서 불전승료(佛殿僧寮)를 새로 고쳐짓고 전국을 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화엄법회를 주도하였는데, 그 역시
모함을 받고 보우처럼 제주도로 유배가서 의문의 죽임을 당하였다.
1861년 대웅전이 불에 타자 그자리에 요사를 새로 짓는 등 소실과 신?개축을 반복한 가운데
1950년 국보로 지정되었던 극락전이 방화로 전소되었으며, 대웅전 자리의 요사도 한국전쟁 중에 불타버렸다.
근래에 들어 1970년대 중반까지 회전문만 남고 폐허로 변모되어 가다가 소양댐 완공 후 관광객과 신자의 급증으로 각종 불사가 이어져
오늘날에 이어졌다.
청평사의 오늘날의 모습은 과거와 단절된 느낌을 준다.
전각을 새로 짓거나 단청을 다시 입힌다던지 기와갈이를 하는 것은 여느 절에도 늘 있는 일이다.
어딘가 모르게 답답하면서도 산만한 분위기는
좁은 공간에 왕실의 원찰로서의 전각 배치를
하다보니 나타나는 현상인가 생각한다.
어쩌면 이자현의 별서정원이자 선원에서 출발한 태생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인가 싶기도 하다
사찰을 둘러보는 여행은 눈에 보이는 것만 보는 단순한 공간여행에서 그치기 보다
보이지 않는 과거의 역사를 살펴볼 수 있는 시간여행으로 이어질 수 있을 때 그 여행의
참맛과 묘미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에서 과거로 연결이 잘 되지
않을 때가 이따끔 있다.
청평사가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춘천의 3대 막국수 맛집의 하나.
샘밭막국수집.
항상 손님들이 바글 바글하다.
샘밭 막국수.
육수를 타면 물국수가 된다.
수요미식회에 나온 우리동네에서 가까운 방화동 '고성막국수집'보다 맛이 훨씬 좋았다.
메밀전과 감자전의 "섞어전"
먹던 거 찍었네.
공주설화 안내문에는 당나라 태종(재위 626~629년)의 공주라고 되어 있다.
당나라는 907년 멸망되었고,
그때 당나라에서 많은 유민(流民)이 고려에 들어 왔다.
청평사 자리에 처음 선원이 들어선 것은
935년 고려에 들어온 당나라 승려였던
영현(永玄)이 973년 백암선원(白巖禪院)을 창건했을 때였다.
시기적으로 잘 맞지않는다.
고려는 무신정권 때 몽골족과의 40년에 걸친 전쟁 끝에(1270년)
고종은 원종(충경왕)을 보내 원나라 태조인 쿠빌라이칸에게 항복하고
원종의 아들 충렬왕과 쿠빌라이의 딸 제국대장공주를 결혼시킨다.
이후 5명의 고려왕이 원의 공주를 왕비로 맞이하면서 부마국이 되는 시련이 있었다. 제국대장공주의 아들 충선왕은
어려서부터 외가인 원나라 황실에서 자라고 원나라 서울 북경에 있으면서
요동지역을 관장하는 심양왕과 고려왕이라는 두개의 왕위를 가졌었다.
충선왕의 처남이 되는 원의 태정제 때
황후가 불경 한 상자와 돈 1만민(萬緡)을 청평사에 보시하고
원황실의 원찰로 삼은적이 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
"문수사 장경비"이다.)
이러한 사찰의 역사를 볼 때 공주설화는 원나라에 끌려갔던 공녀(貢女)이거나
출세를 위해 원나라에 여식을 보냈던 부원배(附元輩) 세력의 딸들 중 하나가 원황실에 들어갔다가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한다.
혹자는 원나라 말 순제의 황후인 고려여인 기황후(奇皇后)의 공주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고려의 기씨(奇氏) 집안이 원나라의 후광을 업고 사리사욕을 채웠었다는 기록으로 볼때 그러한 전설이 만들어지지는 않았을 것으로 본다.
근처에 9그루의 소나무와 구송대란 누각이 있었기에 구송폭포라고 한다.
9가지 소리가 난다 하여 구성폭포라 하기도 한다.
영지의 구조를 밝히고자
1980년대 초에 유구를 발굴 조사했었다고 한다.
때 이른 연꽃 한송이가 홀로 피어있다.
도랑 위의 건물.
예전에 사용되었던 주춧돌을 가지런히 세워두었다.
물길을 복윈해 놓았다.
회전문을 비껴서 보았다.
회전문을 경운루에서 보았다.
좌우에 사천왕상 그림을 안치한 공간이 보인다.
사천왕문 역할을 했으며 회전문의 명칭은 윤회사상에서 유래되었다.
건물 석축밑에도 수로가.
청평사에는 수로가 곳곳에 잘 만들어졌다.
경운루.
강선루의 자리이다.
회전문부터 대웅전 앞에 까지 답도가 이어져 있다.
원래 극락전이 있던 터였는데 요사가 지어졌었고 소실되었었다.
대웅전 앞 석계.
돌계단의 태극문양은 왕실원찰에서 볼 수 있는 특징이다.
양주 회암사터에서 찍은 석계사진.
조선초 왕실의 원찰이었다.
극락전의 모습.
100여년전의 극락전 사진.
앞 면의 한칸이 툇마루식으로 열려있는 특이한 형태이다. 복원한 지금의 극락전은 폐쇄된 일반적인 양식으로 변형되었다.
회전문의 옛모습.
지금은 좌우에 개방된 회랑이 세워졌는데,
원래는 스님이 거처할 수 있는 행각이 있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