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박명희
정림사지 너른 터에
사비성 말발굽 소리
치미 (鴟尾) 끝을 둥글게 날아오르고
계백장군 오천 결사대
황산벌
깃발의 함성
인화문(印花文)으로 박제되어
침묵하는 백제 꿈
고란사 저녁 종소리에
나그네 발길을 재촉하고
백마강 황포 돛대
초승달에 걸려 멈추어서면
금동 대 향로에
생멸의 연기 오르는 향불
경건히 두손으로
피워 올려 보네.
가을밤 밖이 나를 바라다보다
박 명희
잠이 오지 않는 밤
창가에 다가서면
밖이 나를 바라다 본다
멀리서 늦게 돌아온
헬리오스의 태양 마차가
덜컹 굉음을 내며 멈추어 서면
산기슭에서 놀다가
가을볕에 가벼워진 한 무더기 낙엽이
숲을 빠져나가는 소리 들린다
풀 벌레도 한껏 소리를 낮추어
숨죽여 울고
산 짐승이 사람의 마을로
내려서는 인시(寅時)
달빛
지붕 위 박꽃에
하얗던 밤.
낙엽
박명희
굴참나무 아래
햇볕에 그을리고 붉어져
빛바랜 초록이
가벼워진 제 몸을 떨구는
낙엽이 아니고서
저리 초인의 모습으로
나무와 이별 할수 있을까
빛으로 찬란했던 별이
두려움 없이 떨어져
그림자에 밟이듯
가을 바람에 나뒹굴다
한 무더기로 만나 부둥켜안고
한번더 뜨거운 불길로 타다가
낙엽 태우는 연기로 피워 올라
초승달 끝에
매달려나 볼꺼나.
언 니
박 명희
섬진강 변
볕 바른 언덕
이슬 젖은 풀숲을 헤치고 오르면
목련처럼 환히 웃던
언니가 들꽃으로 서 있습니다
멀리
사람 하나 떠나느라
세상에 석류 꽃 툭 지고
천둥처럼 울었습니다
하얀 집 창에
새 한 마리
가느다란 숨을 고르며 쉬는 동안
순간과 영원히 맛닿은
종소리 울리고
그때는 허투루 들었던
가고 오지 않는다는 말을
흉내라도 내듯
섬진강물은 흘러만 가고
가여운 언니
스틱스강 카론의 배를 타고
레테강을 건너 갔겠지요.
1학년 미술 시간
박명희
동그랗게 텅 비운
빨강 해님
노랑 다섯잎꽃
파랑 바오밥 나무
물가로 이어지는 길
엄마는 하늘에 둥둥 떠서 걸어갑니다
나는 너무 작아 보이지 않습니다
우주를 다 그린 겁니다
순천역에서
박 명희
눈발이 철로 위를
나비 팔랑이듯 맴돌고
진군해온 적들처럼
급행열차가 들이닥쳐
번개치듯 오분의 수선을 떨다
긴 꼬리를 멀리하고
진눈깨비 한개의 점으로 떠나가고
내 아픈 가슴이
숨차게
서울까지 따라올라
내 어린 사랑이
용산역 플렛폼에
사뿐히 내렸겠지
떠나가는 곳에 떠나온 사람들
처음과 끝이 하나로 만나는곳
하늘도 어느새 높게 개이고
긴 기다림의 반가움
분홍빛으로 풀어 녹여
순천의 선한 눈을 닮은 사람들이
반갑게 손 흔들며
사뿐이 내렸지.
빈 집
박 명희
어머니
그토록 정갈하게 다스리던 장독대에
송홧가루 노랗게 쌓여 날리는데
큰 항아리 뒤에 앉아 쉬고 계시나요
울타리 가득
알뜰히 가꾸시던 채마밭에
풀만 무성한데
바쁜 손길 내려놓고
뒤꼍 서늘한 마루에
낮잠이라도 드셨나요
낮은 언덕에 옥잠화 접시꽃
저리 하얗게 피워 놓으시고
여름 태풍에 무너진 돌담으로
능소화 넝쿨째
넘어가고
이제 집으로 돌아 와야 할
저녁 늦도록
굴뚝 연기는 피어오르지 않고
별빛 달빛만
감잎 수북한 마당을 쓸고 갑니다.
운주사(運舟寺)
박 명희
춘양면 돛대 봉에
닻을 올려 노를 젓는
운주사
천불천탑 묵언 수행
해탈문에 닿았으리
천불산 와불(臥佛)
일어서는 날
환한 세상 열린다는
전설을 따라
바람 한끝에도
마음 정하지 못한
중생의 번뇌
해인의 꽃 피웠으리
수발아.(穗發芽)
박명희
용기내어 뒤돌아서서 가는것들은 아름답다
지난 여름은 내일의 여름
찬란했던 초록별 지고
작은 새가된 낙엽
무게 줄인 가볍고
자유로운 낙하의 지혜는 아름답다
다가오는 시간에 내어 준
멈추지 않는 윤회의 숭고함
때맞추어 떠나는 계절의 뒷 모습은
차라리 눈물겹다
떠나지 못한 망자의 혼령처럼
서성이는 늦더위
그 페러독스의 강한 뜨거움에
기형의 생명을
싹 틔우는 수발아`
처음 시를 쓰다
박 명희
파블로 네루다의 시 처럼
반백 꺾인 나이에
"시가 나를 찾아 왔어"
세상을 돌아 굽이쳐 오며
두렵기도 위태롭기도 했던길
잘 익어 돌이된 가을의
쓸쓸한 단맛을 더해
세상을 향해
사람을 향해
내안의 나를 향해
시선을 외눈으로 모아
총구를 겨누듯 응시하며
민들레 처럼 낮게 엎드려
시를 쓰는 지금
시가 내게로 왔다
전령의신 헤르메스와
일포스티노 마리오의
편지처럼
첫댓글 시산의 기대주~ 박명희 선생님!
가슴에 품고 품어 깊은 울림을 주는 시 8편, 원고 감사합니다.
(교정할 부분을 개인 카톡으로 보냈으니... 수정해 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