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樂行品(안락행품) 第十四
2. 수행방법(修行方法)을 해석하다
(2) 게송으로 거듭 밝히다
② 진리는 멀고 가까움이 아니다
진리는 멀고 가까움이 없다 그랬어요.
편견이 없다, 치우침이 없다 이 뜻으로 우리가 이해를 해야 됩니다.
또 상품·중품·하품의 법과 유위(有爲)무위(無爲)와 진실과 진실 아닌 법을
그런 법을 행하지 말라.
편견을 행하지 말라 이거죠.
사실 알고 보면 유위도 없고 무위도 없고
그러면서 또 유위일 때는 유위일 수가 있는 것이고
무위일 때는 무위일 수가 있는 것이고,
진실과 진실 아닌 진실 이것도 다 편견입니다.
어느 것은 진실이고 어느 것은 진실 아니고, 그것 다 편견이죠.
앞에서는 여러 가지 형식적인 것에는 온갖 그런 치우친 소견을 이야기 하는 것 같지만
정작 진리의 됨됨이를 이야기할 때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남자와 여자를 분별하지 말라, 천한 사람 귀한 사람도 분별하지 말라,
또 왕이나 백성이나 분별하지 말라, 백정이나 양반이나 그것도 분별하지 말라
이렇게 얼마든지 발전해서 이야기할 수가 있죠.
사실은 그것이 옳은 말이죠.
그러니까 앞서 있었던 행처와 친근처에 대한 그런 내용을
잘 소화하시라는 이런 뜻입니다.
또한 남자와 여자를 분별하지 말라.
모든 법을 얻지 못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므로
이를 일러 보살의 행할 곳이라 하느니라.
일체의 모든 법은 공(空)하여 아무것도 없고
항상 머무는 것이 없으며 일어나지도 멸하지도 않나니
이런 것을 지혜 있는 이의 친근할 곳이라 하느니라.
여기에 있는 말이 진짜예요.
'남자와 여자를 분별하지 말라.
모든 법을 얻지 못하여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므로'
불교를 전혀 모르는 유생에게 반야심경을 던져주고
반야심경의 핵심을 집어내시오 하면
우리 불교공부를 한 사람들은 대개 ‘색즉시공 공즉시색’
이것을 반야심경의 핵심이다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뜻으로는 맞아요.
그런데 전혀 불교를 모르는 사람이 반야심경의 핵심을 집어내면
그 글 모양새나 짜임을 보고 뭘 집어내는고 하니
‘이무소득고’ 라고 하는 낱말을 집어냅니다.
사실 반야심경 핵심은 ‘무소득’이예요. 얻을 바 없다.
아무것도 얻을 바 없는 것이 사실은 불교의 본래의 취지고 본분사항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을 얻었다 하지만 깨달은 바가 어디 있습니까?
사실은 부처님도 평생 설하시고서 “나는 한자도 설한바가 없다”
이런 것이 다 ‘무소득’의 이치가 근본으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법을 얻지 못하여 하는 ‘무소득’ 이
한마디로 표현하면 진리에 대한 올바른 견해다 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면서 안다고 한들 안다는 게 따로 있습니까,
본다고 한들 또 보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그런 게 존재하는 게 아니거든요.
‘이를 일러 보살의 행할 것이라 하느니라’ 그랬지 않았습니까.
마음자세가 이래야 되고 견해가 이래 해야 된다.
어디에도 치우치면 그건 편견이다.
그건 병이다 이거죠.
‘일체의 모든 법은 공하여 아무것도 없고 항상 머무는 것이 없으며’
뭐라고 했죠? 제법공상 그랬지 않습니까.
공하다고만 보면 제법공상인데 거기서 묘유, 참 묘하게 이렇게 읽지 않습니까.
우리마음이 텅 비었지만 이렇게 마음에 들어서 말을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을 듣지 않습니까.
이렇게 활발한데 그것을 찾으려면 찾아낼 수가 없어요.
손가락을 들어서 보여주기도 하고 옆구리를 찔러서 보여주기도 하고
고함을 쳐서 보여주기도 하고
주장자로 한번 후려 쳐서 보여주기도 하는 방법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곧 설법은 아니에요.
그러면서 또 이렇게 활발발한 큰 작용이 있거든요.
보여줄 수도 없으면서도 있고, 있으면서도 보여줄 수가 없는 것,
그게 제법의 실상인 것입니다.
일어나지도 아니하고 멸하지도 아니하니
모든 존재는 실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지혜있는 이의 친근할 곳이니라 하니라.
더 확실하게 집고 넘어갑니다.
전도(顚倒)되게 분별하는 것은 모든 법이 유(有)다, 무(無)다.
진실이다, 진실이 아니다.
생(生)이다, 불생(不生)이다. 라고 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전부 전도몽상 이다, 잘못 보는 것이다 이거예요.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고
진실도 아니고 불진실도 아니죠.
그래서 일체법이개시불법이다.
참 아주 나는 이런 표현 만나면 환희심이 납니다.
생도 아니고 불생도 아닙니다.
어떤 존재가 생이고 어떤 존재가 불생입니까,
생이면서 불생이고 불생이면서 생이거든요.
생이라고도 할 수도 없고 불생이 라고도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가 없는 게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입니다.
그것을 일러서 ‘중도’ 그런 말을 하죠.
그래서 불교의 이런 이치를 초기경전에서 부터 아함부 경전
또 온갖 논서 대승경전에 이르기까지 중도이론을 총정리해서
중도 사상만 주장 하신분이 있었죠.
이론으로 표현 하자면 중도라는 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불교의 이론이에요.
한적한 곳에 가만히 있어 마음을 거둬들여 닦으면서 안주(安住)하여
움직이지 말기를 수미산과 같이하라.
'안주부동을 여수미산 하라' 대단 합니다.
티벳 사람들은 히말라야산 밑에 있는 한 6000미터쯤 되는
모양이 한 덩어리로 생긴 산을 수미산이 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만
경전 상에서 나타나는 수미산하고는 좀 다르죠.
어떻든 히말라야 설산을 우리가 수미산이라고 칩시다.
그런 히말라야산 같이 안주부동하는 그런 자세, 참 좋죠.
온갖 법이 모두 공(空)해서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견고한 것도 없고
생기지도 않고 나오지지도 않으며,
흔들리거나 물러가지 아니함을 관찰하여
항상 한 모양에 머무는 것이
이것이 친근할 곳이니라.
제법공상을 중심으로 이야기는 하고 있습니다만
내용에 있어서는 중도적인 사상을 깔고 이렇게 표현 합니다.
중도를 이야기 하려면 말하자면 대긍정인데
대긍정은 부정을 거치지 아니 하면 긍정이 제대로 안되거든요.
내가 불교가 모든 존재를 보는 시각을 셋으로 정리해서 자주 말씀을 드리는데
모든 것을 가상으로 보는 것을 가관이라고 하고
공으로 보는 것은 공관,
공도 아니고 유도 아닌 것은 중관, 중도관 합니다.
그런데 중도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대부정,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라고 하면
그 다음에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 라고 하는 부정을 거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고, 산으로 치면 정상이예요.
‘가관’은 산에 올라가기 이전의 입장이고
‘공관’은, 제법공상은 산꼭대기에 올라간 것이고
‘중도’는 그 산꼭대기를 넘어서 다시 산 밑으로 내려온 자리가 중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올라갔다가 내려온 그 자리여야지
올라가지도 않은 평지는 아니죠.
그건 가관에 해당되는 것이고 제법가상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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