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바오에서 산세바스티안으로 향하는 중에 피카소의 그림으로 세인들에게 알려진 도시 게르니카가 있어 방문합니다..
스페인 내전이 한창 벌어지던 1937년 4월 26일, 나치가 게르니카를 폭격합니다..
1936년 시작된 스페인 내전은 좌파 인민전선을 소비에트 연방이, 우파 프랑코파를 나치와 이탈리아가 지원하는 양상으로 전개된 것으로, 1939년 프랑코파의 승리로 종전될 때까지 스페인 전 지역을 황폐하게 만들었습니다.
내전당시 바스크 족의 주도인 게르니카가 나치에 폭격당하면서 1500여 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검증 되지 않았지만 히틀러의 무기 성능 시험 요청에 프랑코가 협조 게르니카등 바스크 지역을 제공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피카소가 분노한 지점은 바로 전투로 인해 군인들이 아니라 무고한 민간인이 희생되었다는 점이라고 전합니다..
(일설에 의하면 게르니카 폭격전 이미 게르니카라는 그림을 창작중이었으며 폭격이 보도된 후 "게르니카"로 명명하여 완성했다고도 합니다..)
저는 레이나소피아에 전시된 창작 기록 사진으로 확신하기도 했는데 이번에 방문시에는 기록사진이 철거되었네요..ㅠㅠ
파블로 피카소는 우리 나라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대표적인 현대 미술 작가이며 그는 92세(1981~1973)라는 나이로 장수를 누리고 생을 마쳤지만 생전에도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습니다.
조르주브라크(1882-1963)와 함께한 '입체주의'의 탄생은 인류 조형의 역사에서 일대 혁명적 사건으로 기억되며, 피카소는 브라크와 더불어 그 ‘혁명’의 리더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게르니카>는 <게르니카> 폭격에 분노하여 작업에 들어가 5월 1일 이를 위한 첫 스케치를 내놓는다고 언급합니다만 신빙성이 살짝 부족..
<아비뇽의 처녀들>과 함께 피카소의 2대 걸작으로 일컬어지는 <게르니카> 작업에 들어가기 직전, 사실 피카소는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 스페인관에 들어갈 작품을 의뢰받은 상태였고 피카소는 이를 위해 파리 그랑 오귀스탱 가에 작업실을 얻어 세로 349.3cm, 가로 776.6cm의 대작을 제작하기 시작한 것이 게르니카입니다..
1937년전에 이미 작품을 의뢰받고 준비중이었으며 게르니카 폭격은 1937년 4월 26일..
파리박람회는 1937년 5월25일부터 11월 25일~~
천재화가 피카소라고 하지만 불과 한달만에 게르니카같은 대작을 완성 박람회 개최에 맞추어 전시하기는 불가능한 시간이죠!
스페인 내전을 모티브로 그린 그림에 상업적인 성공을 위하여 "게르니카"라는 이름을 명명했다고 보아야 합니다..
살짝 야비하죠..ㅠㅠ
<게르니카>에서는 나치의 폭격이나 내전의 구체적인 참상과 그 과정은 찾아보기 힘들며 다만 정형적이지 않은 인물과 대상의 표현이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는 작품을 이루는 각 요소들의 조형적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거의 흑백 톤의 컬러만을 사용함으로써 더욱 극대화되었다.
캔버스 왼쪽부터 보면 불이 난 집, 죽은 아이의 시체를 안고 절규하는 여인, 멍한 황소의 머리, 부러진 칼을 쥐고 쓰러진 병사, 광기에 울부짖는 말, 상처 입은 말, 램프를 들고 쳐다보는 여인, 여자들의 절규, 분해된 시신 등등 전쟁터에서 볼 수 있는 모습들이 뒤엉켜있는데 스페인 내전의 참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피카소는 게르니카등 체제의 반항적인 작품의 소개로 반체제인사로 지목되어 스페인에 체류하지 못했으며 프랑코 사후 게르니카는 레이나 박물관에 전시되었습니다..
그리고 피카소는 생전에 게르니카 그림 한점을 다시 그려서 UN에 헌정 유엔 빌딩 일층에 전시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