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1897.9.16.~1956.12.10.) 호는 쌍공이다. 평안북도 의주 출신으로 1922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통의부(大韓通義府)에 입단하여 여러 보직을 거친 후 제5중대장으로 국내 진공 작전 전개와 일본 경찰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항일독립전쟁에 참전하였다.
정이형 선생은 '반듯하고 치열한 항일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는 자신의 소신에 맞추어 그리고 독립운동을 더욱 조직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핵심단체를 결성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각계 각층의 대표들이 모여 개최되는 연석회의에 정의부 대표로 참가하여 그 결과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창당하는 주역이 되기도 하였다.
항일 무장투쟁에 몸담은 김평식으로부터 한학과 항일의식을 전수받았고, 친형도 독립 운동을 하였다. 선생은 3․1운동 참여한 후에 선룡사립보통학교를 세우고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임정 연통제 의주 군감으로 일하다가 중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선생은 1926년 3월 하순 정의부 의용군 제1중대장으로 소대장 김형명(金亨明) 및 부하 병사 20여 명을 이끌고 길림성에 잠입하여 한인동포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였다. 아울러 독립군 활동을 정탐하는 친일 밀정배에게 사형 선고를 한 다음 발각 즉시 사살하도록 명령하였다.
훗날, 선생 등 고려혁명당 주요 간부들은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투쟁을 전개하였고, 나아가 1927년 12월 19일부터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열린 공판에서는 신문에 대해 일체 묵비권을 행사하면서 법정 투쟁에 나섰다.
일제강점기 만주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 중 가장 오랜 기간 옥고를 치른 인물이 바로 정이형 선생이다. 1927년 일경에 체포되어 수감되면서 1945년 광복 때까지 무려 18년간 옥살이를 견뎌낸 인물이다. 그렇다면 과연 ‘불굴의 항일 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과 ‘다물’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일제강점기 실천적(행동적) 무장항일운동의 대표적인 결사체를 꼽으라면 단연 의열단, 다물단이 맨 앞에 거론된다.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에서 조직된 항일 무장독립운동 단체인 ‘의열단’은 대체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되었고, 1920년대에 일본 고관 암살과 관공서 테러 등의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의열단의 강령과 이념을 체계화한 인물로, 정신적인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의열단은 1926년부터 사회주의 이론을 수용하기 시작하였고 1920년대 후반 무렵부터는 순수한 민족주의 노선에서 계급적 입장까지도 고려한 급진적 민족주의 내지 사회주의 노선으로 전환해 나갔다. 1929년 12월 북경에서는 ML파와 합동하여 조선공산당재건동맹을 조직하였는데, 의열단은 이를 계기로 본격적인 급진좌파로 변신해 갔다는 사실이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다물단’ 역시 의열단과 비슷한 시기의 대동소이한 성격의 항일단체였다. 다만 의열단보다도 훨씬 과격(?)하고 비밀결사였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다물단은 1925년 4월 북경에서 결성되었으며 중심인물은 배천택, 한진산, 유청우, 서왈보, 김세준, 서동일 등으로 알려져 있다. 다물단 선언문을 기초하고 조직결성을 지도한 인물 또한 단재 신채호 선생이었다.
다물단의 ‘다물’은 용감·전진·쾌단(快斷) 등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입을 다물고 실행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1920년대 중반 이후 의열단과 다물단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항일 연합테러 활동을 펼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의열단이 사회주의로 흘렀다면, 다물단은 무정부주의(아나키즘) 성향을 나타냈다.
18년 5개월 최장기 옥살이 독립운동가
이처럼 단재 신채호 선생과 의열단, 다물단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으나 독립운동가 정이형(鄭伊衡, 1897~1956) 선생과 ‘다물청년당’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불굴의 항일 독립운동가 정이형 선생’과 ‘다물’은 어떤 인연이 있었던 것일까. 평북 의주의 대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정이형 선생은 항일의식이 투철한 형의 영향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다. 전남 장성으로 내려가 3·1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1920년대 만주의 독립운동단체인 대한통의부, 정의부 등에서 무장투쟁을 주도한다. 1925년 3월 정의부 의용군 제6중대장으로서 평북 벽동경찰서를 습격해 일본 순사 3명을 살해한 일이 대표적인 성과이다.
1923년 겨울 대한통의부에서 활동하던 27세의 열혈청년 정이형은 새로운 이념과 전략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여야 한다고 마음먹었다. 그러한 때에 마침 평안도 출신들을 중심으로 만주 흥경현에서 ‘다물청년당’이라는 비밀결사가 조직되자 여기에 가담하게 된다.
1925년 당시의 ‘다물청년당’ 주요 간부는 강복원, 김창헌, 이인근 등이었다고 일제 고등경찰 비밀문서 기록에 남아있다.
다물당 강령 - 자수, 자양, 자작, 자급
1925년 5월 15일에 작성한 ‘다물청년당’ 당헌은 제1장 총칙, 제2장 당원, 제3장 회의, 제4장 회의, 제5장 재정, 제6장 상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일경 조사에 나타나 있다.
다물청년당은 당헌에서 “민족의(民族義)의 소정(素精)에 기(起)하여 인류애의 본진(本眞)에 돌아간다”는 그 주의(主義)를 밝히고 있다.
이어서 강령으로 1. 지연으로부터 문화로, 의뢰로부터 독립으로 옮겨갈 때, 자수(自修)․자양(自養)하고 자작(自作)․자급(自給)할 것 2. 공존공영의 사회성을 기초로 해서 계급상잔의 구생활을 변혁할 것 3. 전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운동과 동일 보조를 취할 것 등을 채택하였다.
‘다물청년당’은 본부를 처음에는 흥경현에 두었다가 유하현 삼원포로, 그리고 1924년 이후에는 길림성 화전현의 정의부 중앙간부 소재지로 이전하였다.
▲일제강점기 복역중인 정이형 선생 모습(위)과 옥중에서 딸(아래 오른쪽)에게 보낸 편지(아래 왼쪽).
1926년 2월 당시 당원은 2백여명에 달했으며 삼원포, 길림, 흥경, 왕청문 등 20여개 지역에 조직을 두었으며 그 중 삼원포, 왕청문, 도령의 순으로 당원이 많았던 것으로 조선총독부 경무국 비밀문서에 나타나고 있다.
다물청년당에 가입한 정이형 선생은 1926년 고려혁명당을 결성하고 1927년 3월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될 때까지 길림 지역을 중심으로 이성근, 김이영, 김상범 등과 함께 활동하며 보다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고 전해진다.
선생은 1927년 하얼빈에서 일경에 붙잡혀 신의주로 압송돼 재판에 회부됐으나 법정에서 “나의 직업은 독립운동이다”라고 밝히는 등 일제의 법정심문에 끝까지 굴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을 보여준 일화로도 유명하다. 1928년 4월 20일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18년 5개월 17일 동안 옥고를 치르다 광복 때 최장기 복역수로 출옥했다.
정이형 선생의 항일 민족의식은 1945년 광복과 함께 더욱 꽃을 피운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한 그는 ‘부일·반역·전범·간상배에 대한 특별법’의 제정을 주도하는 등 친일파의 척결을 위해 노력했다. 또 김구, 김규식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가하는 등 통일운동에도 기여했다. 흔히 친일파 청산이 1948년 제헌의회에서 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에 앞서 정이형 선생 등은 1년 전 과도입법의회에서 친일파 숙청법의 초안을 만들기도 하였다.
이같은 선생의 행적과 다물청년당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선생이 옥중에서 딸에게 보낸 편지가 2004년 8월, 63년만에 공개되면서 부터다.
서울 마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던 1941년 당시 이화여고보 3학년에 다니던 맏딸 문경 씨에게 보내기 위해 쓴 편지에는 아버지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미안함과 험난한 세상을 헤쳐가야 할 딸에 대한 안쓰러움이 가득 묻어나, 목숨까지 내걸고 일제에 맞설 정도로 강인했던 독립운동가의 인간적인 면모를 엿보게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정이형 선생에게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