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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9;1-34. live는 simply, joy와 laugh은 always, love은 deeply. 2017. 4. 2
오늘 우리는 사순절 5번째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사순절은 주님께서 우리의 죄악과 죽음을 속죄하시기 우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 날을 기준으로 40일 동안, 이 땅에 계실 때에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무엇을 남기시고 무엇을 전하여 주셨는가? 왜 십자가에 돌아 가셔야만 했는가에 대한 의미를 되새기는 절기입니다. 그렇다면 사순절 속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시는가요? 지난 3주 연속 주님이 어떤 분이셨는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특별히 오늘은 한 사람의 삶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주님은 삶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데 삶은 심플하게 살고 기쁨과 웃음은 항상 열어 놓고, 사랑은 생명 다하여 깊게 주고받으라고 합니다. 이것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말씀을 하신대로 원하신 대로 그렇게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1.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명제가 너무 넓지요? 그런데 여러분, 폭이 넓고 갈 길이 멀고, 깊이가 깊으면 그래서 명제가 제한이 없으면 없을수록 간단해야 합니다. 심플해야 합니다. 들어서 쉽게 알아야 합니다. 비전과 목표도 간단하고 단순해야 합니다. 삶은 심플해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오늘 제자들은 예수님께 묻습니다. 누구의 죄로 이렇게 살아야 합니까? 누구의 잘못으로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요 9: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 된 사람을 보신지라. 돌을 들어 쳐 죽이려는 바리새인들을 피해 성전에서 나오신 예수님과 제자들은 길 위에서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시각장애인이었습니다. 그냥 시각장애인이 아니라,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같은 장애도 차등을 한답니다. 장애인 본인들이 그렇게 한데요. 특별히 선천적이냐? 아니면 후천적이냐? 뭐 이런 것으로 따진데요. 제 말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처음(태생)부터 장애인 분들은 후천적 장애인을 같은 급의 장애로 인정해 주지 않는답니다. 그만큼 날 때부터의 장애가 훨씬 더 아픔이 있고, 더 고통이 있고, 힘들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을 보는 시각도 어렵고 기쁨과 웃음이 없고 사랑이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복음서에 대한 신학적인 부문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는 말씀이 우리들에게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을 포함, 마태, 마가, 누가복음을 4복음서라고 입니다. 특별하게 공관 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입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의 공관 共觀이란, 고대 그리스어로 ‘함께’라는 의미의 ‘syn’과, 보는 것입니다. ‘봄’이란 단어 ‘opsis’ 가 합성되어 ‘Synopsis’ ‘함께 봄’이란 말이 공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영화를 제작하려면 시나리오가 있어야 하지요? 시나리오가 작성되면 투자유치나 배우들의 캐스팅을 위하여 줄거리를 먼저 작성하는데, 이 줄거리를 ‘시납시스’ 라고 부릅니다. 공통적인 관점과 시각과 배경이지요. 그래서 마태, 마가 누가의 세복음서는, 같은 관점에서 기술한 것으로, 내용과 그 배열순서, 표현 등이 서로 일치하고, 저자들이 상호 의존하였기에 공관복음이라 하지만 요한복음은, 여러 가지 면에서 세 공관복음과는 확연히 다릅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시간과 장소 면에서 공관복음은 주로 갈릴리 사역을 다루고 있으나 요한복음에서는 유대지방에서의 사역이 강조되었을 뿐만 아니라 시간상으로도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이 3년 조금 넘습니다. 관점 면에서 공관복음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하나님의 나라’에 중점을 두고 있지만, 요한복음의 강론들은 대부분이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과 예수님 과 하나님과의 관계, 그리고 특별히 영생이라는 주제에 집중합니다.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전체 구조면에서 세 공관복음이 제시하는 세계와 역사의 구조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 현재와 미래 사이의 종말론적인 이중 구조이나, 요한복음은, 현재와 미래가 아닌, 위와 아래, 하늘과 땅, 하나님의 영역과 세상의 영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지난주일 본문 중에 요8:23,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 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위와 아래, 세상에 속하고 세상에 속하지 않고, 천국과 현재를 드러냅니다. 요3:12,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 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주로 영적인 부분을 다룹니다. 요한복음이 주는 메시지는,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 ‘로고스’ 말씀으로서의 예수님을 주제로 삼고, 보혜사, 곧 성령님의 사역에 대하여 유일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이적이 3복음서에 40여 가지 나오는데 요한복음에는 그중 7가지만 있습니다. 따라서 요한복음에 증거 되어진 이적은 예수님의 이적 중 대표적인 것으로서 매우 상징적이고 신학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그래서 7가지를 ‘표적’이라 부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일어난 표적도, 같은 맥락입니다. 소경된,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예수님으로 눈을 뜨게 되는 기적, 단순히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사건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은, 예수께서는 그 누구에게나 이 같은 긍휼을 베풀어 주셨다는 영적 사실을 나타냅니다. 본문의 사건은, 예수님께서 길을 가실 때, 나면서부터 시각장애자가 된, 한사람을 만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때 제자들이 “선생님 이 사람이 시각장애가 된 것은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질문을 합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시각장애가 된 것은 그의 죄 때문도 아니고 그의 부모의 죄 때문도 아니라.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고자 하심이라.” 이어서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내가 세상의 빛이로라” 더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하여야 하리라’가 아닌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상한 행동을 하시는데, 땅에다 침을 뱉고 뱉은 침으로 진흙을 이겨 시각장애인의 눈에다 발라 주십니다. 그런 후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시키시는 데로 그 시각장애인은 실로암 못으로 갑니다. 못에 가서 씻고 눈이 떠져서 돌아오게 됩니다. 할렐루야!
눈을 뜬 사람이 장님이었던 것을 아는 이웃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보고 놀랍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 그들의 눈앞에서 일어났습니다. 시끌벅적 야단났습니다. 그들의 눈을 스스로 의심합니다. 사람의 생각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들이 마치 눈뜬 봉사와 같습니다. 이전의 소경이었든, 눈뜬 사람이 “내가 그로라”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시 깜짝 놀라면서, 어떻게 네 눈이 떠졌느냐?” 질문을 합니다. 이에 11절, “예수라 하는 사람이 내 눈에 진흙을 이겨 바르고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다” 고 대답합니다. 이 사람의 삶이 단순합니다. 심플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그대로, 주님께서 시킨 신대로 했다고 합니다. 주님께서 고치셨다고 합니다. 단순합니다. 다른 표현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예수님의 행위가 중요합니다. 주님께서 하신 4절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 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까? 성부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왜 보내셨나요?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계시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요, 그 빛이 있는 동안은 낮이기 때문에 그 기간에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하십니다. 보내신 이의 일 가운데에, 소경으로 태어난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하시는 사역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모두의 눈을 뜨게 하는 사역을 감당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여러분, 육신의 눈을 뜨고는 있지만 사실상 참다운 빛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흑암의 세력에 의하여 빛을 잃었습니다. 세상 권세 자에게 마음과 정신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만났지만, 그 누구도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기다리던 메시아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소경처럼 영의 눈이 감겨진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히려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나, 육신의 눈을 뜨게 되면서 예수님이 안식일의 참주인임을 믿는 영의 눈도 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본문에 나오는 ‘실로암 못’의 ‘실로암’이란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누가 어디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하나님에 의해 예수님이 죄 많은 이 세상에 보내지셨습니다. 누가 어디로 보냄을 받았습니까? 시각장애인이 눈에 진흙을 바른 채 예수님에 의해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에 보내심을 받은 분이십니다. 실로암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과 실로암의 뜻을 비교하면 둘 다 ‘보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실로암으로 가라는 것은 예수님께로 가라는 뜻입니다. 실로암 못으로 가라는 주의 음성을 들으면, 순복하고 실로암 못으로 가야 합니다. 보냄을 받은 데로 가야 합니다. 그러면 보냄을 받은 곳에서 치유가 되고 회복이 되고 두 눈을 씻어 영안의 눈이 떠집니다. 예루살렘에는 실로암 과 베데스다라는 못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베데스다 못의 물이 동할 때 병이 치유된다는 소문과 자신들의 생각으로, 실로암 못에 가라는 주님의 음성을 외면하고, 보냄을 받은 곳을 외면하고, 베데스다 못이나 다른 못으로 가려고 합니다. 내가 판단하고, 내가 상상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 마음대로 행동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나요? 실로암 못으로 향하고 있나요? 주의 음성을 들으시나요? 보냄을 받은 곳으로 가야 합니다. 이 것이 심플한 삶입니다.
그런데 실로암으로 갈까 베데스다로 갈까 아니면 다른 못을 찾는 사람들에게 계3:15-17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 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여러분! 주님은 우리들의 눈을 바로 떠있게 하시려고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십니다. 성령님을 진심으로 모시고 세상 가운데서 예수님 말씀에 순종해야 영안이 열립니다. 실로암이신 예수님만이 우리들의 눈을 밝게 해 주십니다. 밝은 눈을 가져야 심플하게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삶이 심플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눈을 가져야 합니다.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두워진 우리 눈을 뜨게 해주시려고 주님의 생명을 바치셨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주변에 아직도 두 눈의 씻음을 제대로 받지 못한 이웃은 없나요? ‘내가 하여야 하리라’ 가 아닌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아니고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합니다. 이 것을 주님께서 요구 하셨는데 이 것이 심플한 삶입니다. 여러분! 성도들의 삶은 두 세상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한 세상은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삶입니다. 또 한 세상은 하나님 나라의 삶입니다. 이 두 삶이 합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여러분의 언행이 곧 복음입니다. 오늘 앞을 못 보는 사람이 주님을 만나고, 실로암으로 보냄을 받습니다. 그리고 치유가 되어 세상과 주님의 나라를 봅니다. 예수님 때문에 이렇게 되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이 본인 자기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 앞에서 주님을 선지자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것이라고 합니다. 소경은 심플합니다. 요한 복음에 나오는 7가지 표적이 이렇습니다. 내용이 심플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만나시고, 보내심을 받고, 치유와 회복이 되고, 그리고 증거하며 영광을 돌리는 여러분들의 삶이 심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joy와 laugh는 always, 항상 입니다. 언제나 열려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표적 이후에 웃음과 기쁨이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주님을 만나서 기쁨과 웃음이 항상 있고, 사마리아 수가성 여인이 주님으로부터 해답을 찾고 joy와 laugh 가 있습니다. 웃을 수 없는 사람이, 기뻐할 수 없는 사람이 웃게 되고 기뻐하게 됩니다. 38년된 중풍병자가 베데스다 연못에 들어가지 못했지만 주님으로 이런 은혜의 삶을 삽니다. 시작이 기쁨과 웃음이고 나중도 웃음이고 기쁨입니다. 오늘 앞을 못 보는 사람은 주님을 만난 이후에 죠이와 라프의 삶을 삽니다. 바리새인 앞에서도 당당하고 죠이와 라프가 그의 삶을 윤택하게 합니다. 여러분, 주님을 만나면 기쁨과 웃음이 항상 있습니다.
그래서 빌4;4-7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리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근심, 걱정, 염려가 있으면 기쁨이 달아나고, 웃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안 보입니다. 오늘 주님을 만나기 전의 소경은 기쁨과 웃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현실의 문제에서 “왜 사람들이 고난당할 때 주님께 화를 내는가? 왜 우리는 사랑하는 누군가가 고난 받을 때 그처럼 괴로워하는가?” 여기에 답이 있는데 우리가 주어진 답을 모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비난을 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우리의 고통 때문에 상처받기로 결심하셨고, 주님은 우리가 고난 받을 때 스스로 고난 받으시고 우리의 슬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친구 나사로의 무덤을 보고 우셨던 것처럼, 주님은 우리의 슬픔에 주님의 심장이 움직이십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이 고난의 세상에서 주님이 나와 결속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인간의 길 위에 서서 같이 걷기로 작정하셨고, 그 슬픔과 고통을 나누기로 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 하셨습니다. 그 주님께서는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이의 어두운 길 위에 함께 서서 그의 어둠을 빛으로 밝히십니다. 밤으로 채워져 있던 그의 고통의 시간을 밝고 빛나는 하나님의 낮으로 채우십니다. 여러분, 이 세상엔 고난이 상존합니다. 그 고난은 위협적입니다. 우리 자신으로는 고난을 통제할 능력도 제어할 힘도 없습니다. 속수무책으로 고난 앞에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삶을 심플하게 살지 못하도록 하는 이 고난을 왜 하나님은 허락하실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하나님은 선하신데, 왜 우리에게 고통을 주실까?”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 왜 고난을 거두지 못하시는 걸까?” 여러분, 신앙인에게 고난은 어려운 문제입니다. 단지 그것이 가져다주는 고통과 두려움 때문만이 아닙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과 신앙 깊숙한 곳, 가장 은밀한 곳까지 헤집어 놓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선하신 주님을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고난과 고통이 기쁨과 웃음으로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고통 다음에 기쁨이고 고난 다음에 우습이 있습니다.
<고난이 묻다, 신학이 답하다>의 저자 앨리스터 맥그래스(Alister McGrath)는 고난으로 인한 고통과 슬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고난에 정면으로 맞선다면서 주님께서도 직접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셨다고 말합니다.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의 원장이었던 존 맥케이의 두 가지 관점, ‘길 위의 시각’과 ‘발코니의 시각’이 있는데 이 것을 비유로 들어 고난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각이 존재함을 설명합니다. 여러분, 길은 치열하게 삶을 살아가는 곳입니다. 사람들은 길 위에서 목표를 추구하고, 위험을 겪으며, 혼신의 힘을 다 쏟습니다. 길 위의 시각은 실제적인 고난의 문제에 직면한 사람들의 시각입니다. 굽어진 길 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가운데 혼자의 힘으로 길을 가야 합니다. 반면, 발코니는 거리를 바라보거나 일출과 일몰이나 별을 감상할 수도 있는 곳입니다. 동시에 먼 곳을 내다볼 수 있는 곳입니다.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은 높은 곳에서 앞에 놓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지금까지 이 길을 걸어갔던 수많은 사람들이 어떤 질문을 던졌는지, 어떻게 이 길을 갔는지, 그리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 알고 있는데, 그들이 바로 신앙의 앞 선 사람이고 신학적 시각이라고 합니다. 발코니에 있는 사람들은 과거에 그 길을 걸어갔던 여행자들의 경험을 길 위의 사람들에게 들려줌으로써, 그들의 고난을 이미 많은 사람들도 겪었음을 알려 주며, 그들에게 적절한 정보를 알려 주어 그들의 여정을 훨씬 수월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신학이 모든 고난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수는 있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상황에 반응하는 방식은 변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 속에 침입해 있는 고난의 위치를 바꾸어 주시고, 끝처럼 보였던 고난이 주님께서 열어 가실 새로운 세계의 출발점이 되게 하십니다. 그래서 기쁨과 웃음으로, 다가올 미래의 영광으로 현재의 고난이 손을 들게 하십니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주님께 치유의 손길을 구하면, 고난은 영광스러운 것으로 변화되고, 기쁨과 웃음이 항상 우리의 삶 가운데 있게 됩니다. 고난은 우리가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갈 수 있는 통로이며, 마지막 때 새 예루살렘을 드러내는 징조입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고난에 괴로워하시고, 고통 속에서 함께 하시며 같이 울고 계십니다. 주님께서 발코니에서 직접 길 위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고난을 경험으로 알고 계시며, 가슴 아파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고통과 고난 가운데서 기쁨과 웃음을 가지게 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입니다. 믿음은 믿어야 할 어떤 명제들이 있으며, 그 명제들이 어떤 일을 감당하는지 알지 못한 채 그에 대해 마음을 정하도록 내몰지만, 주님께서는 다 알지 못해도, 다 설명할 수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십니다. 당신과 함께 길을 걷자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계신 인간의 삶에는 어둠을 몰아내는 빛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세상의 빛입니다. 기울어진 운동장 같은 세상 속에서 아파하고, 고난당하고 있는 우리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이 계십니다. 그 주님으로 인해 지금의 고난은 고난 자체로 끝나지 않고 부활의 영광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땀과 먼지로 범벅이 된 나의 인생의 길 위로 찾아오셨습니다. 인간됨의 저주처럼, 죄의 댓가로 겪는 고난과 슬픔의 자리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라며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지도 못한 채 원인과 책임의 소재를 따지던 현장 속에서 주님이 하신다며 고난의 프레임을 바꿔주셨습니다. 끝처럼 보이던 고난이 새로운 세계를 여는 출발점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답을 알 수 없는 오늘을 살고 있다하더라도 좌절하지 않게 하시고 소망의 끈을 꼭 잡게 하시고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아버지의 방법으로 이 고난을 영광으로 바꿔주실 것을 기대하며 지금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 앞을 못 보던 사람이 주님을 만난 이후로 항상 죠이와 라프가 있습니다. 늘 기쁨과 웃음이 충만합니다. 오늘 이후로 항상 죠이와 라우프가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love는 deeply입니다. 사랑은 깊어야 합니다. 겉도는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까지 딮 입니까? 엡3;16-19절, 그 영광의 풍성을 따라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옵시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옵시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 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여러분, 사랑의 딮 을 말합니다. 사랑을 하되 넓이와 길이와 깊이를 알고 하라고 합니다. 사랑 가운데 뿌리가 내리게 하랍니다. 터가 굳어지게 하랍니다. 여러분, 사랑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깊이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예수님과 함께 조우하셨던 날 때부터 앞을 전혀 보지 못한 그 사람을 보며 제자들이 건넨 첫 말이 9: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까? 자기 본인입니까? 그의 부모입니까? 오늘 제자들의 질문을 보면 누군가의 아픔을 보면서 전혀 공감을 못하는 사람의 질문입니다. 사랑이 없습니다. 아파하는 사람을 보면서도 그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슬픔을 표하기 보다는 누구의 죄 때문에 저지경이 되었는지 그 원인과 사실관계를 묻습니다. 사실을 사실대로 보지 못하는 사랑이 없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유형이 3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태어 날 때부터 공감능력이 없는 사람. 소시오패스 (Sociopath)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런 사람은 어릴 때부터 잔혹성을 가지며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합니다.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이들은 공감능력을 담당하는 뇌의 거울신경세포에 문제가 있다고 합니다.
둘째, 본인의 아픔이 깊게 패인 사람. 과거 너무나도 큰 고통을 겪었기에 이 사람은 자기 고통이 너무 커서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을 못한 경우입니다. 어떤 심리학자는 세월 호 때 박 근혜 전 대통령이 유족들 고통이 공감되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 것이라고 합니다. 박 전 대통령은 아버지 죽음이후에 18년 동안 집에서 나오지도 않고 사람도 안 만나는 등 어둠속에 오랜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세월 호 유족들의 아픔에 별로 공감하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겪었던 처절한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까짓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겪은 고통에 비하면, 몰라서 그렇지 나는 그것보다 더 큰 고통을 겪었고, 그 것을 혼자서 다 이기고 여기까지 왔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셋째, 신념이 공감능력을 억압하는 경우입니다. 종교적, 정치적인 신념, 국가에 대한 신념이 공감능력을 누르는 경우입니다. 여러분, 물론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이냐고 물었던 것은 당시 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보편적 시각이고, 종교적 신념입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에게 닥친 고난과 불행을 죄와 결부시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날 때부터 소경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매우 큰 죄가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라면 다른 사람들과는 생각하는 것이 달라야 하고,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는 것 역시 달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심장이어야 하고, 긍휼의 마음이어야 하고 예수님의 사랑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믿는다 하면서도 믿음 밖의 사람들과 생각하는 것, 바라보는 관점이 같다면, 우리는 참으로 부끄러운 신앙인이 됩니다. 제자들이 이렇습니다. 먼저 차지하고 먼저 자신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은 죄의 시각으로 봅니다. 여러분, 한국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다 아시니까요. 한국에서 지지난 주중 세월호가 드디어 물 위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바닷 속에 가라앉은 지 1,073일 만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감격했고, 슬퍼했습니다. 안타까워 했습니다. 세월 호는 미수습자 9명을 포함해 304명이 사망함으로써 씻지 못할 슬픔과 아픔이 있습니다. 먼저 보낸 분들의 눈물이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을 당한 사람들 앞에서 피자, 치킨을 배달해 먹으면서 조롱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상금 더 받으려 시체팔이한다고 비난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국가를 위해 일한 것도 아니고 놀러가다가 사고 난 것인데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느냐고 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천문학적 비용을 운운하며 인양에 반대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가 무엇인데? 이제 좀 그만하자. 지겹다”고 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일본이나 미국은 자국민이 납치를 당하거나 외국에서 생을 다하면 살아 있든지 생을 마감했든지 전세기를 띄워서 본국으로 모시고 옵니다. 여러분,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울지 못하던 사람들이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삶의 현장입니다. 사랑이 없고 용서가 없고 긍휼이 없습니다. 주님의 베푸시고 주셨던 그 사랑이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는 지금, 오늘도 우리들을 사랑하십니다. 사랑하시기 때문에, 사랑하는 자가 낙망되길 원치 않으시고, 사랑하는 자가 잘되기를 바라시고, 사랑하기 때문에 복을 주십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런 주님을 롬8:31-35.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여러분, 주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덧입으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깊게 사랑하십시오. 넓게 사랑하십시오. 높이 사랑하십시오. 공감하시고, 공관 하시고, 사랑을 deeply 하십시오. 그래야 참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참 복을 받고, 참 소망이 있습니다. 사순절 5째 주일을 맞이해서 주님의 사랑을 deeply 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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