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가 내린다는 상강은 진작 지나도 아직 남녘엔 서리다운 서리가 내리진 않았나 보다. 그래도 거리의 가로수들이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가는 때다. 창원 시내에선 도청 뜰과 주변 거리 가로수가 유난히 아름답다. 내가 사는 아파트 단풍도 괜찮은 편이다. 벚나무는 붉게 물들었고 은행나무는 노랗게 물들었다. 수학능력시험일이라 평소보다 조금 일찍 퇴근해 등산화를 신고 뒷동산으로 산책을 나서 보았다.
중학교 교사들도 수학능력시험 감독관 지원을 나가야해서 이틀 동안 일과는 단축 운영했다. 캡틴과 일부 동료들은 계곡 산장으로 올라 이틀째 고스톱에 몰입하고 있을 때였다. 산적 소굴 같을 그 산장에 나는 한 번도 가보질 않았다. 남의 지갑에 든 돈을 넘어다볼 처지도 아니지만, 내 얇은 지갑의 돈도 지킬 자신이 없어 아예 처음부터 조합원으로 가입하질 않았다. 그러니 구속 받지 않은 자유의 몸이었다.
정기고사 문제를 출제하느라 시간이 걸렸고 고민 좀 했다. 어제 오후는 일찍 퇴근해서 시립도서관에 들려보았다. 통일벼 품종개발 비화로 조선일보 논픽션 공모에서 대상을 받은 이완주 박사가 쓴 그린음악 농법이 눈에 들어왔다. ‘식물은 지금도 듣고 있다’라는 책이었다. 이튿날 오후는 어떤 모임 독서토론회를 앞두고 읽었던 책에서 원고를 써느라 학교에 잠시 머물렀다. ‘사람을 얻는 기술’이라는 책이었다.
십일월도 중순에 접어들었다. 일주일 전에 입동(立冬)이 지났다. 입동부터 석 달 동안이 겨울이다. 겨울에 든다는 의미이지만 ‘들 입(入)’이 아니라 ‘세울 립(立)을 쓴다. 아마 선인들은 이때를 계절의 기준점으로 보았기에 그 푯대로 세운다는 뜻으로 썼던 것이다. 내가 오르는 뒷동산 숲에도 단풍이 물들고 낙엽이 뒹굴었다. 저녁밥 짓기 전에 주부들이 더러 산책 나왔다. 연세가 지긋한 노인들도 몇 분 보였다.
이 시간대는 아이들은 눈에 띄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학원으로 내몰려 억지 공부를 하고 있을 때다. 고3 수험생들은 대학입학 관문에서 넷째시간 사회탐구 과학탐구 시험지를 풀지 싶었다. 뒷동산 꼭대기에 올라 의자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잠시 명상에 잠겨보았다. 도청 뒤 창원대와 사림동을 굽어보았다. 갈색 계절에 은행나무 가로수가 샛노란 옷을 입고 줄지어 서 있었다. 하늘엔 엷은 노을이 번졌다.
나는 반지동 까치아파트 쪽으로 내려섰다. 응달 텃밭엔 누군가 심어 가꾸는 배추는 속이 꽉 차고 있었다. 산비탈 단감은 수확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창원천은 생태하천 공사가 한창이었다. 공사기간도 기간이지만 공사비도 만만치 않게 들지 싶었다. 현장사무소를 지나다 완공 후 조감도를 보니 청계천에 버금갈 수준이었다. 하천 바닥으로 산책로가 있고 물고기가 뛰노는 모습이 그림으로 그려져 있었다.
쉬엄쉬엄 걸어 뒷동산 올라 산정에서 잠시 머물렀다. 이후 하산 방향은 반지동으로 내려서 창원천 따라 퇴촌삼거리로 돌았다. 노랗게 물든 사림동 은행나무 가로수는 오가는 이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바삐 걷지 않았는지라 집을 나선지 두 시간 가까이 자났다.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내가 사는 아파트에서 멀지 않은 곳에 반송시장이 있다. 이 시장에 들리면 인간적인 체취가 흠뻑 묻어난다.
반송시장만큼 사람 냄새가 나는 상가가 우리 동네에 있다. 우리 아파트 단지 건너편에 다른 아파트 단지가 두 개 더 있다. 하나는 일동아파트고, 다른 하나는 무학아파트다. 이 아파트가 마주한 곳에 상가가 있다. 이름 붙여 용호동 일동상가와 무학상가다. 두 상가에는 학원도 있고 병원도 있다. 미장원도 있고 목욕탕도 있다. 부식가게도 있고 헌옷 수선가게도 있다. 문구점도 있고 부동산 중개사무소도 있다.
퇴근 후 이 상가에 내가 가끔 찾아가는 곳이 있다. 그곳에 들리면 서민들의 애환이 물씬 묻어났다. 자리를 먼저 정해 놓고 앉은 지기가 전화로 불러내서 나간 경우도 있다. 내가 먼저 동료들과 자리를 주선해 약속하기도 했다. 아니면 혼자 자작으로 잔을 채우고 비운 적도 가끔 있다. 맥주는 어쩐지 격에 맞지 않고 어색했다. 소주나 막걸리가 제격이었다. 명태전이나 데친 주꾸미로 만족했다. 배추쌈만으로도 좋았다.
첫댓글 소박한 산책 잘 읽었습니다. 조합원에 가입하지 않길 잘 했습니다. 선생님의 삶이 보입니다. 열심히 운동이나 하시고 약주 한 잔씩 하는 게 얼마나 소박한 삶입니까. 진주 잘 다녀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