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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 고령 > 기획 특집
최종동 기자등록 2020.07.17 17:58
본지는 조선시대 이후 고령출신 유학자(儒學者)를 각종 문헌의 근거에 따라 사승(師承) 관계를 고찰하여 학맥(學脈)을 분류하고 학문 및 업적 등을 기술(記述)하여 고령출신 유학자에 대한 이해를 돕고자 하오니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관심을 바랍니다.
● 학암(鶴巖) 박정번(朴廷璠 : 고령, 1550년∼1611년) / 향년 61세
한강(寒岡) 정구(鄭逑)와 내암(萊菴) 정인홍(鄭仁弘)의 양문(兩門)에서 수학하였다. 임진왜란 때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 휘하에
서 참모장서기(參謀掌書記)로 모획(謨劃) 활동을 하였으며 학암정(鶴巖亭)을 건립하고 문연서당(文淵書堂)을 개설하여 후학을 양성
하였다.
대암(大庵) 박성(朴惺), 존재(存齋) 곽준(郭䞭),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었다.
공과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는 종매제간(從妹弟間)이므로 선조 30년(1597년) 정유재란 때에는 경상좌도(慶尙左道) 방어사
(防禦使)인 곽재우(郭再祐)와 함께 화왕산(火旺山)에 입성하여 왜군의 진출을 막았다.
선조 32년(1599년) 일천(逸薦)으로 예빈시(禮賓寺) 주부(主簿)를 제수 받았으나 불취(不就)하고 학암정(鶴巖亭)을 복구하였다.
1603년 부래정(浮來亭)을 영건(營建)하고 매월 초하루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주석] 일천(逸薦)
학행(學行) 등이 출중(出衆)하면 지방장관의 천거, 이른바 ‘유일천(遺逸薦)’을 통해 벼슬길에 나갈 수 있었던 제도를 말한다.
● 동호(東湖) 이서(李 : 광산, 1566년∼1651년) / 수(壽) 85세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문인으로 선조 30년(1605년)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선조 41년(1608년)에 유일(遺逸)로 천거(薦擧)되었
으나 불사(不仕)하였다. 고모부(姑母夫)인 한강선생(寒岡先生)이 운명(殞命)하매 심상(心喪) 3년을 복(服)하고 창의(創議 : 의논을 시
작함)하여 회연서원(檜淵書院)과 선생의 신도비(神道碑)를 건립(建立)하였으며『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과『한강유사(寒岡遺
事)』를 저술하니 동문(同門)의 여러 현자(賢者)들이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에 견주었다.
또한 선생의 문집(文集) 간행(刊行)에 전심(專心)하였다. 동문(同門)의 여러 현자(賢者)들이 공자(孔子) 문하(門下)의 유약(有若)에
견주었으며 문인(門人)들이 사시(私諡)하여 가로대, ‘덕요선생(德耀先生)’으로 칭하였다.
[주석1] 심상(心喪) :
상복은 입지 아니하나 상제(喪制)와 같은 마음으로 말과 행동을 삼가고 조심하는 것으로 스승에게 하는 것이 원칙이며 마음속으
로 3년의 복을 입는 것이다.
[주석2] 공자(孔子) 문하의 유약(有若)
공자의 제자로 언행(言行)이 공자를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한다. 공자 사후(死後)에 제자들이 스승으로 추대한 적이 있다.
[주석3] 사시(私諡)
문장(文章)과 도덕(道德)이 뛰어난 선비이긴 하나 지위(地位)가 없어서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내리지 않을 때, 일가(一家)나
친척(親戚), 고향(故鄕) 사람 또는 제자(弟子)들이 울리던 시호(諡號)를 말한다.
● 죽포(竹圃) 이현룡(李見龍 : 성산 1580년∼1654년) / 수(壽) 74세
일찍부터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인조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창의(倡義)하여 의려(義旅 : 의병)를 이끌고 충주(忠州)에 이르렀으나 강화(講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척화(斥和)하는 소장(疏章)을 지어 상경(上京)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인조 13년(1635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또 격문(檄文)을 도
내에 띄우고 창의(倡義)하여 험요(險要 : 지세가 험하여 방어하는 데에 중요함)를 지키고 장령(將領 : 장수)을 차출하여 간략한 시설이
있었더니 도리어 ‘성하(城下)의 맹세(盟誓)’가 있었으므로 통곡하고 돌아왔다.
그후 사정별제(司正別提) 주부(主簿)로 역임하였는데 인조 15년(1637년) 상국(相國) 이경석(李景奭)이 학행(學行)으로 천거하여 인
평대군(麟坪大君)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인조 17년(1639년)에는 군위현감(軍威縣監)으로 출재(出宰)하여 대흥(大興)·유화(儒化)
등지의 현감(縣監)을 역임하였는데 고을마다 공이 학문을 흥하게 하여 선정비(善政碑)가 있었다.
[주석] 성하(城下)의 맹세(盟誓) :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게 항쟁을 하였던 인조가 항복하고 1637년 1월 30일 남한산성을 나와서 성 밑인 한강의 동쪽에 위치한 삼
전도(三田渡)에서 인조(仁祖)가 청나라 태종(太宗)에게 세 번 절하고 한 번 절할 때마다 머리를 땅바닥에 세 번 부딪치는 행위를
세번 반복하는 방식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의 의식을 행하여 신하(臣下)의 맹세를 하였던 굴욕적인 맹세를 뜻한다.
● 국포(菊圃) 이문룡(李文龍 : 성산, 1584년∼1655년) / 수(壽) 71세
일찍이 용담(龍潭) 박세호(朴世豪)의 학문을 따르다가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
자호란(丙子胡亂) 때 백씨 이현룡(李見龍)과 창의(倡義)하였으나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나와서 항복(降伏)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
한 후 고향으로 돌아와 미산(薇山) 아래에 조그마한 정자(亭子)를 짓고 세상을 피해 살며 강도(講道)에만 힘쓰니 세칭 ‘미산처사(薇山
處士)’라 하였다. 당대의 명류(名流)인 완정(浣亭) 이언영(李彦英), 백천(白川) 이천봉(李天封), 동호(東湖) 이서(李), 등암(藤菴) 배
상룡(裵尙龍) 등과 교유(交遊)하였다.
● 매포(梅圃) 이택룡(李澤龍 : 성산, 1588년∼1620년) / 향년 32세
한강(寒岡) 정구(鄭逑) 문하에서 수학(修學)하였다. 천자(天姿)가 영민(英敏)하고 비범(非凡)하며 총명하고 남보다 훨씬 뛰어났다.
광해군 10년(1618년) 증광(增廣) 생원시(生員試)에 입격(入格)하였다. 문장(文章)과 풍모(風貌)가 일시에 빛났고 강론하며 글 뜻 가
운데 의심(疑心)이 나는 곳을 묻는 것을 보고 선생의 문하에 있는 청휘당(晴暉堂) 이승(李承)이 일찍이 이 사람은 후일 반드시 대유(大
儒) 즉 학식(學識)이 높은 선비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③ 17세기 유학자
● 매헌(梅軒) 이유석(李惟碩 : 성산, 1604년∼ 1657년) / 향년 53세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며 인조 8년(1630년) 진사에 합격하였고, 인조 17년(1639년) 문과 식년시에 병과로 급제한 후
성균관학유(成均館學諭)와 전적(典籍)을 거쳐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역임하였다. 그 후 통훈대부(通訓大夫) 행(行) 사헌부지평(司憲
府持平) 등을 지냈다.
이어 전라도사(全羅都事)와 충청도사(忠淸都事)로 나가 군비증강(軍備增强)에 힘썼으며,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지냈다.
효종 2년(1651년) 함평현감(咸平縣監)을 거쳐 안주판관(安州判官)·영암군수(靈岩郡守) 등을 역임하면서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청렴
강직한 성품으로 선정을 베풀고, 문교(文敎 : 문화와 교육)를 크게 진흥시켜 영암에 흥학비(興學碑)가 세워졌다.
청천(聽天) 장응일(張應一), 현와(弦窩) 이도(李), 태허정(太虛亭) 곽홍지(郭弘址),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과 도의(道義)로 절차
탁마(切磋琢磨)하였다.
● 운계(雲溪) 정홍석(鄭弘錫 : 동래, 1607년∼1671년) / 향년 64세
치재(癡齋) 허명신(許命申)에게 수업(受業)하였다. 인조 20년(1642년)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벼슬에 나
아가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문학(文學)과 행의(行誼)로 영남의 명유(名儒)가 되었다.
인조 14년(1636년) 발생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장인 이천봉(李天封)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며 운계정(雲溪亭)을 구축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하였다. 제자들이 숙종 30년(1704년) 선생의 학문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고령군 덕곡면 반성1리 만하동에 형산사(刑山祠)
를 세워 영상(影像)과 위패를 모시고 제향(祭享)을 모셨다.
● 매헌(梅軒) 곽수강(郭壽岡 : 현풍, 1619년∼1660년) / 향년 41세
한강(寒岡) 정구(鄭逑) 선생을 사숙(私淑)하였다. 15세 때 성리(性理)와 천리(天理) 및 오행(五行) 등의 이치를 깨닫고 그에 대한 「천
인감응(天人感應)」이란 설(說)을 지었다. 효종 5년(1654년) 식년(式年) 생원시(生員試)에 급제한 후 백패(白牌)를 가묘(家廟)와 묘
전(墓前)에 올리고 통곡하였다.
사위 월촌(月村) 이익량(李翊亮)과 성리학(性理學)을 강론하고 토론하면서 교유하였으며 간송(澗松) 조임도(趙任道), 계헌(戒軒) 배
일장(裵一長) 등 당대의 명사(名士)와 사귀면서 자신을 낮추어 같은 무리로 대하며 존경하는 예를 표하고 반평생을 경의(敬義)의 진리
를 실천하였다.
효종 9년(1658)년에 성균관에 들어가 경의(經義)의 연구에 몰두(沒頭)하니 동료들이 모두 스승으로 대접하였다.
하루는 대사성(大司成)이 여러 유생(儒生)들을 모으고 성균관에 와서『대학(大學)』을 강론(講論)하게 되자, 그 질문에 잘 응답하여 참
된 선비의 유도(儒道)를 참되게 체득한 유학자인 ‘진유(眞儒)’라고 하였으며 여러 유생(儒生)들의 참다운 스승을 얻었다고 하였다.
양천인(陽川人) 월계(月溪) 최형망(崔衡望)을 제자로 두었다. 숙종 33년(1707년) 지방유림의 공의(公議)로 곽수강(郭壽岡)과 오선기
(吳善基)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매림서원(梅林書院)을 창건하여 위패를 모시고 매년 3월 중정(中丁)에 두 배향인(配享人)의
향사(享祀)를 지낸다.
● 한계(寒溪) 오선기(吳善基 : 고창, 1630년∼1703년) / 수(壽) 73세
단계(丹溪) 장용우(張龍遇)와 임곡(林谷) 임진부(林眞) 선생 문하에서 학업을 닦았다. 젊었을 때 과거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였으며 필
법(筆法) 역시 훌륭하였다. 여러 차례 향시(鄕試)에 합격하였으나 어버이를 여읜 후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
다.
고령군 쌍림면 귀원리 재동 서재골에 ‘한계정사(寒溪精舍)’를 축조(築造)하고 은거독서(隱居讀書)하면서 규달(閨闥 : 안채의 방)에서
행의(行義)를 닦았다. 후진양성에 매진(邁進)하여 공부를 배우러 오는 선비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으며 모두 나아가 예를 올리며 ‘오공자
(吳孔子)’로 지칭하였다.
공의 명성(名聲)을 듣고 고령현감 남궁 억(南宮 億)과 구문유(具文遊)가 찾아와 경의(敬意)를 표하였다.
당대의 석학(碩學)들이었던 한사(寒沙) 강대수(姜大遂), 금강(錦江) 장신(張), 농암(聾巖) 이광언(李光彦) 등과 종유(從遊)하였다.
공의 덕행과 학문을 기리기 위해 고령의 매림서원(梅林書院)과 영주의 남계사(南溪祠) 등에 입향(立享)되었다.
● 청천(青泉) 신유한(申維翰 : 평산, 1681년∼1752년) / 수(壽) 71세
가정이 빈곤하여 김해김씨(金海金氏) 어머니에게 배웠다. 25세인 숙종 31년(1705년) 을유(乙酉) 증광시(增廣試)에서 진사시(進士
試)에 입격(入格)한 후 성균관에 들어가 그 문장이 널리 알려졌으며 33세인 숙종 39년(1713년) 계사(癸巳) 증광시(增廣試) 문과(文
科)에 급제하였다.
39세인 숙종 45년(1719년) 4월 제술관(製述官)으로 통신사(通信使) 홍치중(洪致中)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으며『해사동유록(海槎東
遊錄)』과『해유견문록(海遊見聞錄)』등의 사행록(使行錄)을 저술하였는 바『해사동유록海槎東遊錄)』즉『해유록(海遊錄)』은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열하일기(熱河日記)』와 함께 ‘조선 기행문학(紀行文學)의 쌍벽(雙璧)’이라 불린다.
문인(門人)은 이조참판을 지낸 정원시(鄭元始), 정난(鄭瀾), 진사(進士) 수백당(守白堂) 이회근(李晦根),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등 45명으로 파악된다. 70세인 영조 26년(靑泉集)(1750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을 경모하여 가야산 기슭 고화동에(高花洞)에
‘경운재(景雲齋)’를 지어 호를 ‘가야초수(伽倻樵叟)’라 하고 은거(隱居)에 들어가『경학약설(經學略說)』과『역리조해(易理粗解)』
를 저술하고『시서정종후제(詩書正宗後題)』와『문장곤월(文章衮鉞)』을 찬술하였다.
④ 18세기 유학자
● 수백당(守白堂) 이회근(李晦根 : 경주, 1728년∼1809년) / 수(壽) 81세
일찍이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선생 문하에서 수업하여 문장을 일찌감치 깨쳤다.
6대손 춘희(春熙)가 쓴 가장(家狀)에 의하면 10세 이전에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독파(讀破)하였는데 특히 주역(駐驛)에 통달했다고
한다.
27세 때인 영조(英祖) 30년(1754) 갑술(甲戌) 증광(增廣)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다. 영조 48년(1772년)에 한방윤(韓邦
胤)이 고령김씨 문중의 서책이 보관되어 있는 상자에서 김면(金沔)의 시문과 일기를 발견, 이를 최재억(崔載億)과 공이『제선생유집급
문견신록(諸先生遺集及聞見新錄)』에 수록하여 후손들이 정조 9년(1785년) 이를 보충하여 송암실기(松庵實紀)를 편집, 간행하였
다.
고령 유생(儒生) 대표로 고령향교(高靈鄕校) 이전(移轉) 정문(呈文)을 지었다. 향리(鄕里) 직동(直洞)의 직양재(直養齋)와 고령읍치
(高靈邑治)내 미산서당(眉山書堂)에서 많은 후학(後學)을 가르쳤다. 저서로 수백당유고(守白堂遺稿) 2권이 전하는데 609제(題) 640
수의 시문(詩文)이 실려 있다.
● 지촌(芝村) 박이곤(朴履坤 : 고령, 1730년∼1783년)
어려서는 청천(靑泉) 신유한(申維翰)으로부터 학문의 기초를 닦았으며, 장성하여서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문하에서 수학하
였다. 수차례 과거에 낙방한 후 관직에 나아갈 뜻을 접고 성리학(性理學) 연구에 전념하며 저서에 힘썼다.
향우(鄕友)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 등 유망(儒望 : 선비로서 명성이 있는 사람)과 교유하였으며 금연
(錦淵) 신체인(申體仁), 묵헌(默軒) 이만운(李萬運) 등 제현(諸賢)과 서로 도와 학문을 닦고 힘썼다. 저서로 정서유요(程書類要), 주서
유요(朱書類要), 근사석의(近思釋義)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1933년에 간행된 지촌집(芝村集)이 있다.
● 정관재(靜觀齋) 곽기(郭基 : 현풍, 1735년∼1775년)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과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 양선생의 문인(門人)이다. 일찍이 명회재(明悔齋) 김경중(金敬中), 두
와(蠹窩) 최흥벽(崔興璧)과 교유(交遊)하였다. 도산시집(陶山詩集)에 주해(註解)가 없는 것을 흠결(欠缺)로 여겨 일찍이 뜻을 두고 궁
구(窮究)하였으나 완성하지 못하였다.
죽재공(竹齋公) 곽간(郭趕), 태허정(太墟亭) 곽홍지(郭弘址)와 함께 처음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월암동에 있었던 월암사(月巖祠)에 제
향(祭享)되었으나 1869년 월암사(月巖祠)가 훼철(毁撤)되자 1932년에 다시 세워 종산재(鍾山齋)로 개칭하여 이곳에서 제향(祭享)하
고 있다.
● 두와(蠹窩) 최흥벽(崔興璧 : 경주, 1739년∼1812년)
족형(族兄) 백불암(百弗庵) 최흥원(崔興遠)과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수학하였다. 1784년 가을 대과(大科) 정시(庭試)에 응
했으나 실패하자 모친의 만류로 과거 보기를 포기하였다. 주자(朱子)의 사창법(社倉法)을 의방(依倣)하여 향약(鄕約)을 개설하여 실시
했다.
대산(大山) 문하의 가장 탁월한 고족제자(高足弟子)로서 ‘호문삼로(湖門三老)’라 불렸던 후산(后山) 이종수(李宗洙), 천사(川沙) 김
종덕(金宗德),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천옹(喘翁) 최흥립(崔興岦) 등과 교유하였다. 만년(晩年)에
고령에 우거(寓居)하면서 십수년간 문학을 창도(唱導)하였는데 문하에서 대소과 급제자가 7, 8명이나 되었다.
●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 : 고령, 1779년∼1841년)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문하에서 심경(心經)을 배웠으며 학문을 닦아 문장이 뛰어나고 시를 잘 지었으며 순조 10년(1810년) 식년
(式年)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한 후 학음서당(鶴陰書堂)을 열어 지북헌(芝北軒) 전광흡(全光潝), 죽은(竹隱) 곽훈(郭壎), 월은
(月隱) 곽보(郭堡) 등 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이 지은 상사박공경가묘갈명(上舍朴公慶家墓碣銘)에서 ‘한 지방의 사숙(師宿 : 학식이 높은 선비)이자 남
방의 성두(星斗 : 별)〔一方師宿 星斗南國〕’라고 평하였으며 문집인『학양집(學陽集)외에 저서는『사칠정음운고(四七正音韻考)』,
『동언고(東言考)』,『동성고(東姓考)』 등이 있다.
⑤ 19세기 유학자
● 송애(松厓) 최호문(崔虎文 : 양천, 1800년 ∼1850년)
일찍이 학양(鶴陽) 박경가(朴慶家)에게 수업(受業)하고 퇴계학맥(退溪學脈)을 꽃피운 ‘영남의 소퇴계(小退溪)’ 대산(大山) 이상정(李
象靖)의 제자인 입재(立齋) 정종로(鄭宗魯) 문하에 나아가 학문을 닦았다. 헌종 7년(1841년) 정시(庭試) 문과(文科)에 급제한 뒤 승문
원(承文院) 정자(正字)가 되었고, 다음해 저작(著作)·박사(博士) 등을 거쳐 1843년 성균관(成均館) 전적(典籍)·예조좌랑(禮曹佐
郞)·가례도감(嘉禮都監) 낭청(郎廳)을 지냈다.
그 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에는 과거(科擧)의 부조리(不條理)를 엄단할 것과 시험종목에 현실성이 없는 시(詩)·부
(賦) 등을 없애고 경국지문(經國之文)을 위주로 할 것을 건의하였다. 또한, 문교진흥(文敎振興)에 힘쓰자는「흥학소(興學疏)」와 당시
의 정책적인 시폐(時弊)를 개혁하자는「시폐소(時弊疏)」를 올렸다.
봉화현감(奉化縣監)과 안동진관병마절제도위(安東鎭管兵馬節制都尉)로 재직시에는 선정(善政)을 베풀어 많은 치적을 남기기도 하였
다. 심성론(心性論)에 있어서는 심(心)이 이미 생긴 뒤에 성(性)이 마음에 갖추어지게 되므로 심(心)이 성(性)보다 앞선다는 심선성후설
(心先性後說)을 주장하였다. 저서로는 송애집(松厓集) 4권 2책이 있다.
● 성암(誠庵) 신상선(申相 : 평산, 1835년∼1900년)
어릴 때 병이 많아 13세에 비로소 고헌(顧軒) 정내석(鄭來錫) 선생에게 나아가 학문을 배웠다. 과거 공부를 하여 한번 향시에 합격하였
으나 성시(省試)에 번번이 실패하자 집에 머물면서 마음에 느끼는 성리학에 관한 서적을 가까이하면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연구하였으며
10경시(十警詩)를 지어 자기 스스로 힘썼다.
문장이 뛰어나 문하에서 겸재(謙齋) 조진환(曺鎭煥), 청계(聽溪) 조병직(曺秉直) 등 많은 선비들을 배출하였으며 이재(齋) 권연하(權
璉夏), 유재(由齋) 신재석(申在錫) 등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 : 전의, 1837년∼1902년)
조선유현연원도(朝鮮儒賢淵源圖)에 공은 허전(許傳)의 문인(門人)으로 기록되어 있다. 유일(遺逸)로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제수
(除授)받았지만 헛된 이름으로 임금을 속일 수 없다고 하여 부임하지 않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이기설(理氣說)을 수용하였지만
이(理)와 기(氣)에 치우친 이론의 획일화(劃一化)에 반발(反撥)하는 개방적(開放的)인 태도를 보였으며 이(理)와 기(氣)의 조화(調和)
와 공존(共存)을 강조하는 균형(均衡)잡힌 태도를 견지하였다.
안동의 도산서원(陶山書院) 원장(院長)에 두차례나 천임(薦任)되는 등 도덕(道德)과 문장(文章)으로 통달하여 일세(一世)의 사표(師
表)로서 추앙(推仰)을 받았다. 이종기(李種杞)의 사상적 특징을 살펴보면 첫째 성리사상(性理思想)의 특징은 가학적(家學的) 전통과
자신의 학문적 취향을 따라 정통적인 퇴계학파의 입장을 견지하고 지나치게 이발(理發)‧기발(氣發)만을 강조하는 성리적 입장에서는
회의적이었으며 이기공존(理氣共存)의 입장을 강조했고 그는 퇴계(退溪)의 ‘심합리기설(心合理氣說 : 마음은 리(理)와 기(氣)가 합한
것)’을 지지하고 한주(寒洲)의 ‘심즉리설(心卽理說 : 수양의 주체인 마음이 곧 바로 리(理)로 보는 것)’은 비판하였다.
둘째 예학사상의 특징은 예(禮)의 실행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상황논리(狀況論理)를 강조했다. 즉 실질과 현실의 측면을 중시하고 형
식논리에 얽매이지 않았다. 셋째 불교(佛敎)와 서학(西學)에 관한 견해에 관해서는 불교에 관해서는 비교적 온건한 비판적 입장을 견지
하였으나 서학(西學)에 대해서는 강경한 척사의식(斥邪意識)을 보였다.
고령군(高靈郡) 다산면(茶山面) 상곡(上谷) 마을에 서락서당(書洛書堂)을 만들고 200여명의 제자를 양성하였으며 대표적인 인물은 수
파(守坡) 안효제(安孝濟 : 의령), 금주(錦洲) 허채(許埰 : 김해) 성헌(省軒) 이병희(李炳熹 : 밀양),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 성주),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 창녕), 수봉(壽峯), 문박(文樸 : 대구) 등이 있다.
2015년 10월 9일 한국국학진흥원(韓國國學振興院)에 소장되었던 만구(晩求) 이종기(李鍾杞) 선생의 문집 책판 413장이 ‘유교책판
(儒敎冊版)’과 함께 ‘제12차 유네스코 지정 세계기록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 : 성산, 1856년∼1918년)
계당(溪堂) 류주목(柳疇睦)과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문하(門下)에서 수학하였다. 고종 23년(1886년) 스승인 한주(寒洲) 이진
상(李震相)이 별세하자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등과 고령 반룡사(盤龍寺)에서 강학(講學)하였다.
고종 33년(1896년) 동문(同門)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대계(大溪) 이승희(李承熙), 교우(膠宇) 윤주하(尹胄夏) 등과 함께 상
경하여 연명(連名)하여 대궐문에 나아가 을미사변(乙未事變)을 성토(聲討)하고 단발령(斷髮令)의 철회(撤回)를 요구하는 상소(上疏)
를 올렸으나 수령이 거부되자 일본의 행동이 국제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함을 호소하며 국제적으로 협조를 구하는 ‘포고천하문(布告天下
文)’의 초고(草稿)를 작성하였으며 최종본을 미국, 영국, 러시아 등 주한(駐韓) 각국 공사관(公使館)에 발송하였다.
고종 34년(1897년) 고령군 대가야읍 내상리에 내산서당(乃山書堂)을 짓고 은거하면서 제헌국회의원(制憲國會議員) 및 반민특위(反
民特委) 위원장(委員長)을 지낸 영주(令州) 김상덕(金尙德), 성균관대학교(成均館大學校) 총장(總長)을 지낸 변희용(卞熙瑢), 임시
정부의 법무총장(法務總長)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친 남형우(南亨祐) 등 제자를 배출하였다.
고종 39년(1902년) 스승 한주(寒洲)의 학설을 이단(異端)으로 규정한 통문(通文)이 전국 유림에게 발송되자 동문(同門)들이 시류(時
流)에 편승(便乘)하여 스승의 문하를 떠나갈 때에도 흔들림없는 지조(志操)를 지키는 의리(義理)를 보였다.
1905년 제2차 한일협약 즉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배일(排日) 언론투쟁(言論鬪爭)을 하였다. 1907년 대구를 중심으로 국채
보상운동(國債報償運動)이 일어나자 고령군 단연상채회(斷煙償債會) 회장(會長)으로 활동하였다. 2015년 3월 1일 독립유공자로서
공훈을 기려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받았다.
● 성와(省窩) 이인재(李寅梓 : 성산, 1870년∼1919년)
어려서는 재종질(再從姪)되는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에게 배웠고 고종 26년(1889년)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주선으로 곽
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영향으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학문을 계승하여 한주(寒
洲) 주리론(主理論)를 그의 학문적 주장의 근거로 삼았으며 특히 한주(寒洲)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이론적으로 해명하는 데 많은 노
력을 기울였다.
그는 이이(李珥)의 주기론(主氣論)을 반박하고 이황(李滉)의 주리론(主理論)을 옹호하였다. 변법자강론자(變法自强論者)인 위암(韋
庵) 장지연(張志淵)과 교유하면서 신사조(新思潮)에 눈을 뜨게 되어 초기 서양철학 연구서 가운데 가장 체계를 갖춘 업적으로 평가받는
『고대희랍철학고변(古代希臘哲學攷辨)』을 내기도 하였다.
향리에 ‘하산정사(霞山精舍)’를 짓고 후진교육에 힘썼다. 1909년 고령에 지방 자치제를 위해 설립한 단체인 자치민의회(自治民議會)
를 조직하여 회장을 맡아 민지(民智)의 개발, 자강(自强)의 추진 등을 통하여 보국(保國)할 것을 지향하였으며 이를 바탕으로 영신학교
(靈新學校)를 설립하는 등 1929년 사망하기까지 계몽운동(啓蒙運動)에 투신하였다. 유교를 근본으로 하면서 새로운 서양의 학문을 수
용해야한다는 유교개혁(儒敎改革)을 주장했다.
● 봉강(鳳岡) 조상(曺塽 : 창녕, 1876년∼1945년)
10세 때 부친의 명(命)에 따라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의 문하(門下)에서 수제자(首弟子)가 되었으며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사후에 간재(艮齋)의 문하생(門下生)이 되었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오상(五常)과 부모가 낳으시고 임금이 먹이시고 스승이 가
르치시니 한 마음으로 섬겨야 한다는 ‘생삼사일(生三事一)’을 강조하였다.
사교론(四敎論)’에서 악(樂)은 화창한 소리이니 봄에 마땅하고 시(詩)는 발양(發揚)하는 것이니 여름에 마땅하고 예(禮)는 닦아서 이루
는 방법이니 가을에 마땅하고 서(書)는 거두어 간직하는 것이니 겨울에 마땅하다는 공부방법을 논하였다. ‘기질변화(氣質變化)’를 통해
소인은 군자로 군자는 성인으로 다가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변화기질(變化氣質)의 수양론(修養論)을 주장하였다.
또한 ‘경천애인설(敬天愛人說)’을 지어 하늘을 높이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유학의 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서경설(鋤說)’에
서 벼를 재배하듯이 천리(天理 : 하늘의 바른 도리)를 보존하고 잡초를 제거하듯이 인욕(人慾)을 막아야 한다고 하였다.
‘혈기잠(血氣箴)’에서 모든 재앙(災殃)의 출발은 혈기(血氣 : 힘을 쓰고 활동하게 하는 원기)를 조절하지 못함에서 기인(基因)하였다고
보고 혈기를 조절하여 중화(中和)의 상태에 이르는 것을 학문과 수양의 목표로 삼았다. 당대의 명유(名儒)이었던 긍재(兢齋) 이병운(李
柄運), 덕천(德泉) 성기운(成璣運), 석농(石農) 오진영(吳震泳), 고암(苦庵) 이종익(李鍾翼), 덕암(德庵) 박순호(朴純鎬) 등 간재(艮
齋) 전우(田愚)의 문인(門人)과 교유하였다.
● 고재(古齋) 최곤술(崔坤述 : 경주, 1870년∼1953년)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약관(弱冠)의 나이로 경상관찰부(慶尙觀察府)가 실시한 영재선발시험(英才選拔試驗)에 수석
(首席)으로 합격하여 영남(嶺南) 13영재(英才)로 선발된 후 낙육재(樂育齋)에서 3년간 수학(修學)하였으며 고령향교내에 만하(晩霞)
이봉조(李鳳朝)가 설립한 사립(私立) 명륜학원(明倫學院) 교장(校長)과 전교(典校)를 역임하였다.
35세인 1904년 대한제국 때에 둔 비서원(秘書院)의 정3품 관직인 비서승(祕書丞)에 임명되었으나 내부대신(內部大臣) 이재극(李載
克)에게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겠다는 뜻을 전달하여 불취(不就)하였으며 경술국치(庚戌國恥) 후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초야에 묻혀 자
연과 더불어 일생을 보냈다.
1925년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선생의 글을 모아 현존 최고(最古) 문집인『고운집(孤雲集)』상•하권 양권을 발간하였으며 이듬
해 중간(重刊)하였다. 1963년 200명 내외 인사가 공을 추모하는 후학들의 모임인 ‘고재계(古齋稧)’를 만들어 정기모임을 하고 있다.
● 송강(松岡) 김성하(金聲夏 : 경주, 1863년∼1909년)
창번(蒼樊) 이이건(李以鍵)과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이다. 사자심근(四子心近)의 모든 서적을 마음을 가라앉히고 깊은 생
각에 잠겨서 묵묵히 속속들이 깊이 연구하여 침식(寢食)까지 잊기에 이르렀다. 부모상(父母喪)에 있는 힘을 다하여 예를 다하였다.
상복의 기간이 끝나자 난곡(蘭谷)에 서당을 짓고 날마다 정좌(靜坐)하여 서책(書冊)을 대하니 학도(學徒)가 운집(雲集)하여 많이 성취
(成就)시켰다. 공은 침착하고 의지가 강하였으며 깊이 삼가고 성실한 자질로서 각고(刻苦)의 사색(思索)을 하여 탁연(卓然)히 뜻을 세워
서 서책(書冊)에서 구하고 사우(士友)에게 묻고 무릇 천인성명이기지설(天人性命理氣之說)과 삼천삼백(三千三百)의 예문(禮文)과 경
사시소(經史詩騷)에 조금이라도 이해되지 않으면 앞서 배운 것이 많고 학식이 넓은 사람과 오랜 벗으로 들은 것이 많아 잘 아는 사람에
게 물어서 풀고 기어코 그 본원(本原)을 궁구(窮究)하고 그 요령을 얻고 그 지당한 것을 얻은 연후에야 그쳤다.
공은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선생으로부터 호학자(好學者)란 추익(推翊 : 칭찬)의 말을 들은 고제(高弟)로서 실학중심(實學中心)
의 독학자(篤學者)였다. 송강(松岡) 선생 사후에 문인(門人)들과 추모인사(追慕人士)가 추모계(追慕契)인 ‘경산계(敬山契)’를 창설
(創設)하여 묘갈수비(墓碣豎碑), 송강문집(松岡文集) 간행, 경산정(敬山亭) 건립 등을 하였으며 2003년 문집국역(文集國譯)과 유적
비(遺蹟碑)를 건립하였다.
● 죽와(竹窩) 나찬기(羅燦基 : 수성, 1872년∼1953년)
열성(熱誠)으로 학문(學問)을 닦고 사물의 이치를 깊이 연구하여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 선생의 문인이 되었으며 경서(經書)를 강
론(講論)하고 의리(義理)의 가르침을 듣고 성취한 것이 많았다. 또 임재(臨齋) 서찬규(徐贊奎), 미강(渼江) 박승동(朴昇東), 시암(是
菴) 이직현(李直鉉) 등 제현(諸賢)과 학문연구에 힘쓰고 다곡(茶谷) 이기로(李基魯)과 함께 학문(學問)을 갈고 닦았으며 서로 보태고
늘여 도움이 되게 하였다. 고향의 문회(文會)에 참여하니 사람들이 인망(人望)을 추앙(推仰)하였다. 저서로는 죽와집(竹窩集)이 전한
다.
● 석년(石年) 이정우(李正宇 : 여주, 1881년∼ 1924년)
만하공(晩霞公) 이봉조(李鳳朝)가 당대의 거유(巨儒)인 면우(俛宇) 곽종석(郭鍾錫), 양명학파(陽明學派)의 거장(巨匠)인 난곡(蘭谷)
이건방(李建芳)을 비롯하여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과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던 시례지가(詩禮之家)의 유풍(遺風)을 이어 면
우(俛宇) 곽종석(郭鍾錫)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시예(詩禮)에 능달(能達)하고 경학문장(經學文章)에 전도(傳道)한 절행지사(節行之士)로 그 이름이 세상에 드러났으며 경릉참봉(敬
陵參奉)을 제수(除授)받았던 성산인(星山人) 진화(珍和) 이경(李俓)과 종유(從遊)하였다. 성리학에 전념하여 경전(經傳) 천인성명(天
人性命)의 은미한 이치를 꿰뚫고 실천하였다. 특히 시(詩)와 문장(文章)에 능통하여 ‘시서(詩書)’를 저술하였다.
● 몽와(夢窩) 곽수빈(郭守斌 : 현풍, 1882년∼1951년)
임재(臨齊) 서찬규(徐贊奎)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19년 3월 38세 때 파리장서(巴里長書)에 지역인사 중 최연소, 최초로 서명하여
지역 유림 6명의 서명(署名)에 큰 영향을 끼쳤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고령향교의 직원(直員 : 현재 전교)을 맡아 향풍교화(鄕風敎
化)와 민족의식(民族意識)을 고취(鼓吹)하는데 마음과 힘을 다하였다.
1942년 서간도(西間島)로 망명(亡命)하여 2년 동안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였다. 해방 후 정남택(鄭南澤), 곽태진(郭泰珍) 등 지역
정객(政客)들의 자문(諮問)에 응하고 탁견(卓見)을 제시하였으며 ‘강세계(講世契)’를 만들어 혼란기(混亂期)의 도덕(道德)을 바로 잡
고자 노력하였다.
정부는 고인(故人)의 공훈(功勳)을 기리어 1996년 8월 15일 ‘건국포장(建國褒章)’을 추서(追敍)하였다. 2005년 9월 24일 ‘애국지사
(愛國志士) 몽와(夢窩) 곽선생(郭先生) 추모비(追慕碑)’를 고령군 쌍림면 월막리 동네 입구에 세웠다.
송애재(쌍림면 학동길 56-5)
⑥ 20세기 유학자
● 진와(進窩) 이헌주(李憲柱 : 성산, 1911년∼2001년)
15세에 척숙(戚叔) 포서(浦西) 배주환(裵疇煥)에게 수학하고 19세 이후로는 희당(希堂) 김수(金銖) 선생에게 수학하여 고문(古文)과
서법(書法)의 정수(精髓)를 얻었다. 1943년 희당(希堂) 김수(金銖) 선생께서 별세한 후에 중재(重齋) 김황(金榥) 선생에게 경학(經學)
의 진전(眞詮 : 참뜻)을 들었다.
공은 또 당대의 석학(碩學)인 회봉(晦峯) 하겸진(河謙鎭), 소눌(小訥) 노상직(盧相稷), 공산(恭山) 송준필(宋浚弼), 수산(壽山) 이태식
(李泰植), 제서(濟西) 이정기(李貞基) 등 여러 선학(先學)들에게 직접 나아가 배움을 청하고 혹은 편지로 질정(質正)하여 학업의 진전
(進展)을 구하였으니 호학자(好學者)라고 말할 수 있으며 마침내 문원(文苑)의 거벽(巨擘)이 되었다.
영남 일대에 1,200여수(餘首)의 서문(序文) 및 갈문찬(碣文撰)이 산재(散在)되어 있으며 서예(書藝)의 필치(筆致)도 주경(遒勁)하여
공이 쓴 비문(碑文)과 편액(扁額)이 전역에 두루 퍼져 있으며 대문자(大文字)의 대가(大家)이었다. 모년(暮年)에 문인(門人)들이 수계
(修契)하고 미강정사(薇岡精舍)를 옛 터에 짓고 문집 12권 6책을 간행하였다.
집필 : 향토사학자 이동훈(李東勳)
정리 : 최종동 고령신문 편집국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