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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정신 일깨워준 새벽종
부산시 부산진구 부전2동
새마을 지도자반 제54기 정 윤 석
현재 저는 부산진구 부전2동에 20여 년을 살면서 새마을정신을 시민의 생활에다 직결시켜 도시 새마을운동은 “시민 정신교육의 도장이다.” “그러므로 지식인과 고소득층이 앞장서야 한다.” “국민정신 개조이다.”란 구호를 내걸고 내 마을, 내 동내는 내가 가꾸며, 시민정신개혁고취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동내는 항도 부산의 중심지에 위치하여 일반 상가와 시장이 많으며 빈부의 차가 심하고 매일 유동인구 7, 8십만 명이 오가는 부산시에서 가장 복잡한 곳 중의 하나입니다. 저는 이런 동내를 부산에서 가장 모범적인 우수한 동으로 발전시켜 자립단계 도시기초환경정비의 표본 동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제가 구입한 승용차에 앰프를 설치하여 매일 손수 운전하고 다니면서 새벽 5시부터 조기청소캠페인을 벌이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부산시 새 생활 실천 8대사업, 3대 질서 지키기, 부조리척결, 서정쇄신, 상가정화. 일반 사회정화, 연말연시 조용히 보내기, 여름철 해수욕장 정화 등 각종 캠페인용 시나리오를 손수 작성하고, 방송용 테이프를 제작하여 제가 손수 구입한 털털이 코로나 자동차로 이동방송 차를 만들어 시민정신 앙양을 위한 국민 정신자세 확립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저의 이런 모습을 본 시민들은 처음에는 “미친놈”이라 하여 손가락질하고 오해하였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꾸준히 끊임없이 이 일을 해 나온 결과 이제는 저를 “새벽종”이란 호칭으로 불러주게 되었습니다.
저는 40여 년 전 고향인 경남 산청군 시천면에서 태어나 일찍이 아버님을 여의고 18세에 6.25 동란으로 단 한 분 뿐인 백씨(형님)가 공산빨치산의 손에 무참히 학살을 당하는 쓰라린 경험을 맛보았습니다. 저의 어머님은 “너만이라도 살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단신 부산으로 뒤쳐 나오긴 했으나, 그때 공산 빨치산의 학살과 충격이 준 뼈저린 원한이 오늘날까지 제게 반공과 애국에 대한 불굴의 의지와 신념과 집념을 일깨워 준 동기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당시만 해도 전란으로 민심은 흉흉했으나 다행히도 국민학교 은사이신 하종배 선생님의 주선으로 의지할 곳을 마련하고 6.25사변으로 중단했던 학업을 늦게나마 계속하게 되었습니다.
하 선생님은 평소 말이 없는 분이었으나 그때 제게 주신 잊을 수 없는 교훈은 “그저 맡은 바 책임을 꼭 완수할 줄 알아야 하고, 내가 아니면 그 회사나 단체가 안 된다는 말을 들을 때까지 노력하여라.”이 말씀 한 마디였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간에도 하 선생님의 교훈을 좌우명으로 삼고 무엇이든지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일해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낮이면 직장에서 밤이면 학업에 전념하였는데 과로와 영양실조에 겹쳐 일년 후에는 불행하게도 폐결핵이란 당시에는 무서운 병을 얻어 앓아 눕게 되고 말았습니다.
어머님의 정성 어린 간호로 부산 인보관 구호병원에서 폐 절제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은 7시간 40분, 폐 동공은 직경 5cm, 3일 후에 마취에서 깨어났던 일과 사망진단이 내려 시골에서 친척들이 수의와 관을 만들어 시체 인수 차 왔을 때 기적적으로 살아 거동할 수 있었던 일들은 잊을 수 없는 기억들입니다.
이러한 고난과 역경에서 새 생명을 얻은 저는 제일의 재산이 건강이라는 신념으로 수술 후 1년간 휴양으로 건강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겨울철의 감기 이외에는 오늘날까지 몸 져 누워본 적이 없습니다. 절망적 포기상태의 5년간의 투병생활에서 재생한 저는 굳은 집념과 신념과 투지를 배웠습니다.
28살 되던 가을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마침 부산극장에서는 이광수선생의 원작 “사랑”이라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저 자신의 환경과 비슷한 주인공의 처지에 깊이 공감하고 한없이 울면서 이제부터 살아가는 동안에는 선을 행하고 약한 자를 도우며 정의를 위해서는 무슨 일이든지 하려고 굳게 굳게 결심했습니다. 그리고 나약한 인간(人間)이 되지 말고 열심히 일해 나와 같이 외롭고 병고에 허덕이는 모든 불행한 사람을 위해 심신을 이 사회에 바칠 것을 거듭 눈물로 다짐하고 결심했습니다.
저는 기왕에 한 번 죽었던 몸 무엇을 부러워하거나 부끄러워하거나 무서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국제신보사에 일하게 되면서 잃었던 가정을 다시 꾸밀 수 있었으며 그 후에는 지업계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오직 근면과 성실로서 상당한 성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최대한 사회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그마한 사업체를 마련하여 아내로 하여금 운영토록 하고 저는 사업에서 물러나 물질문명이 발달하여 갈수록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가는 인심과 사회정의 구현을 위해 일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제가 현실사회 정화의 필요성을 깊이 느끼고 지역사회개발에 앞장서서 사회봉사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의 일입니다. 그간 불우청소년선도사업 등 적고 큰 봉사를 위해 노력하면서 하나의 힘은 약하나 단체의 힘은 크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고 69년 3월에는 지역사회개발에 앞장서고 지도자훈련을 기조로 하여 국제우호증진을 도모할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청년회의소에 가입하였으며 76년 6월에는 북 부산 청년회의소를 창립하여 내 고장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저는 내가 살고 있는 내 마을부터 내가 개발하여야 한다는 생각으로 동장님을 찾아 의논하여 청소년 선도사업의 일환으로 지역 내 중심가의 어린이 놀이터를 개수하여 오늘까지 매일 아침 청소를 하여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산시 새마을담당관을 찾아 새마을부락을 소개 받고 현황을 알아서 청년회의소와 자매결연을 맺고 마을 발전을 위하여 협조하는 계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또 불우한 고아원과 BBS 재건학교 등과 사회단체를 자매결연케 하여 장학금을 지급하는 등 협조체제를 마련하였습니다.
거리정화를 위해서는 시내 각 요소에 쓰레기통을 설치하고 거리정화 캠페인 탑을 세우며 부산역전에 앰프시설을 하여 계몽하고 일선경찰관 모범자녀 장학금을 마련하는 등 나름대로 여러 가지 활동에 동분서주하며 힘껏 뛰었습니다.
한편 저는 저대로 일하기 위해서는 우선 “알아야 한다”는 것을 깊이 느끼고 낮에는 사회문제 전문가들과 지도자를 방문하여 여러 가지를 배우고 자문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방방곡곡의 단체 조직망을 통해 각 분야의 세미나와 연수, 심포지엄 등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배우고 제 자신도 여러 가지 적고 큰 행사를 개최하여 시민들의 현실참여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기에 앞장섰습니다.
이렇게 공부하고 활동하던 중에 지역사회 개발과 복지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봉사와 새마을운동이 드디어 하나로 승화되기 시작한 10월 유신의 출범으로 저는 새로운 희망과 보람에 설레기 시작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새마을운동과 지역사회개발사업의 효율적인 추진은 시민의 정신혁명 즉 의식구조의 개선이 있어야 하며 도시새마을운동은 도시인들의 국가사회에 대한 사명감과 자발적 협동 참여가 우선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소신이었습니다.
또한 저는 1972. 1. 11 박대통령 각하께서 연두기자회견 때에 시(詩) 한 수를 인용하시며 『진일심춘불견자 귀래정전간매화』(盡日尋春不見者 歸來庭前看梅花)라 하시던 말씀 즉 “진리는 먼데 있는 것이 아니고 오직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애국은 큰 것이 아니고 명동거리에 담배 꽁초를 버리지 않는 것도 애국하는 것이다”라고 풀이 하시고 도시새마을운동은 내 앞 내가 쓸기부터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신 말씀을 듣고. 그 후 저는 지금까지 사회개발의 봉사활동에 내 몸과 정성을 다 바쳐 일하기로 했던 것입니다.
그간 저는 50여 개의 각종 표창과 상패를 수상하기도 했으나 저는 여기에서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소속 되어 있는 10여 개의 단체 활동도 중요했지만 진정한 새마을운동은 내 주위에 산재해 있는 작고 쉬운 일부터 개선해 나가는 것이 더 시급하다는 것을 뒤늦게나마 다시 한번 깨달은 저는 우선 내가 살고 있는 부전2동 동회를 찾았습니다. 동장님은 평소부터 저와 개인적으로나 공적으로나 친분이 깊은 터이라 그로부터 매일같이 동장님을 찾았으며 동 직원들과 어울렸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질서하고 어지럽고 더럽고 누추한 우리 동내를 밝고 깨끗하고 명랑하고 질서 있고 아름다운 거리를 만들 수 있을까 하고 의논하고 연구하였습니다.
저는 먼저 내 집 앞 내가 쓸고 휴지 쓰레기 안 버리기 운동을 벌여 매일 아침 나 자신부터 빗자루를 들고 나서서 이웃을 권유하였으며 내가 살고 있는 532번지를 기점으로 부전2동 『새마을 상록회』를 조직하여 우리 동내의 기존 조직체인 개발자문위원회, 부녀교실, 새마을친목회 등을 재조직 강화케 하고 서구시장 상가정화위원회, 서면 철물상가 정화위원회 등 각종 이웃 친목회 등을 조직하도록 했습니다. 또한 거리 정화위원회, 새마을금고 등도 조직했습니다. 그 때만해도 새마을운동은 초창기여서 새 생활실천 8대 사업을 도시새마을운동의 추진방침으로 삼아 이제 막 추진할 시기였습니다. 민가나 상가나 시장과 유흥업소가 매일같이 간판이 바뀌고 서면의 중심가에는 아침 저녁 쓰레기 오물이 여기 저기 널려져 있었고 간선도로변에는 낮이나 밤이나 잡상인과 포장마차들이 진을 쳤습니다. 시장거리에 도로는 있어도 통행인들은 위험부담을 느껴 시장거리를 잘 드나들기를 싫어했습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유흥업소가 많은 거리에는 쓰레기를 도로복판에 버려 아침 맑은 공기 대신에 쓰레기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고 점포 앞과 거리에는 자동차와 승용차들을 제멋대로 세워 두었으며 지저분한 돌출 물들 때문에 자동차 사고도 잦았습니다. 또한 간판이나 상점 위의 천막도 무질서하고 더러웠습니다. 사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도시민 전체가 복잡한 환경 속에서 바쁘게 돌아가는 생활에 항상 쫓기는 형편들이었습니다. 도시생활이란 모두가 그러했지마는 특히 우리 동은 이런 나쁜 여건하에서 모든 일을 무시해 버리고 어떠한 일이든지 흘러가는 물거품처럼 방치해 버리는 타성에 젖은 생활들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온 세상이 더러움에 덮여 있고 거리의 질서가 엉망이라도 이는 관청에 관여 되는 일이요, 주민과는 하등 관계가 없는 일로 생각하고 무관심하게 생각하며 살아오고 있었습니다.
이같이 무질서하고 협동하는 의식을 찾아 볼 수 없이 이기주의 타성에 젖어 살고 있는 우리 동네를 어떻게 하면 밝고 깨끗하고 명랑하고 질서 있고 풍요한 도시새마을로 가꾸어 나갈 수 있을까 하고 고심한 나머지 동장님과 동 직원들과 어울려 고물상이며 시장 통으로 노점상들을 찾아 다니며 막걸리도 사드리고 얻어 먹기도 하고 하면서 주민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 “마음 하나 고쳐먹기”운동의 정신계발을 위해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저는 마을사업을 더욱 효율적으로 해나가기 위하여 기동력을 보장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집 사람과 의논해서 털털이 코로나 승용하 한 대를 구입했습니다. 또한 동장님과 의논하여 자동차에 스피커를 설치하고 운전을 배웠습니다. 이렇게 해서 75년 10월 3일 개천절, 희망찬 이른 새벽 5시부터 손수 운전을 하면서 마이크를 통해 주민들의 새벽잠을 깨우며 “내 집 앞 내가 쓸어 환경개선에 앞장서자”고 골목골목을 돌면서 외쳤습니다. 이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아침에 단잠을 깨운다느니, 미친 사람이라느니, 정신이 이상하다느니, 일부 고급 호텔이나 여관에서 외국 손님이 들어 있으니 우리 집 앞에는 나팔 좀 불지 말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구청 청소 감독차인 줄 아는 주민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영세민들과 구멍가게 정도를 하는 영세상인들은 호응과 참여율이 높았으나 지식층과 고급요정을 하는 분들은 오히려 구청장이나 동장 실을 찾아가 새벽에 나팔불고 다니는 놈이 어떤 미친 놈이냐고 호통을 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기에 굴하지 아니하고 새마을운동 홍보지를 토대로 각종 시나리오를 작성하고 방송녹음 테이프를 제작하여 거리와 시간과 장소에 따라 계몽하며 나름대로 활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이제는 제가 하루라도 가두계몽을 중단하면 주민들은 “새벽종이 어디 아프나, 어디 갔나”하고 이상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도시새마을운동이 결실 되는 그날까지 계속 활동으로 노력할 것을 다짐하고 1년 만에 낡아서 못 쓰게 된 자동차 한 대를 폐차처분하고 또 다시 한 대를 샀습니다. 이러다 보니 제 개인 경제사정에 무리는 갔습니다. 휘발유 대금, 수리비, 테이프 제작비 월 20-30여 만원은 있어야 했으니까요.
그러나 저의 집사람의 이해와 성원에 힘입어 자식들의 위로에 감명 받으며 주민들의 격려와 치하를 들을 때마다 저의 열과 성을 다해 더욱더 노력하려고 다짐합니다. 앞으로도 더욱 연구하고 실천하여 더욱 알찬 새마을의 기수가 될 것을 맹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