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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천 義天」 師弟의 도리에 불교 흥망 달렸다
스승과 제자의 도는 실로 크나큰 인연이다. 그래서 『남산초(南山抄)』에 “불법이 더욱 널리 퍼지고 왕성해지는 것은 진실로 스승과 제자가 서로 협력하기에 달려있다”고 한 것이다.
요즈음 불교가 쇠퇴해지고 지혜의 바람이 몰아치지 못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이는 스승된 자는 제자를 인도하려는 마음이 없고 제자는 스승의 뜻을 받들어 행하려는 뜻이 없기 때문이다. 스승과 제자가 서로 버리고 등을 진다면 아무리 도를 빛내고자 한들 될 수가 없다.
『발진초(發眞抄)』에는 “출가한 뒤에는 부족한 사람은 나보다 나은 이를 의지하고 범부는 성인을 의지하여야 비로소 스승이 없는 자리에 올라 성불할 수 있다”고 하였고, 『필삭기(筆削記)』에는 “선지식과 수행하는 사람이 서로 만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발심한 사람이 있어도 선지식을 만나지 못하거나, 선지식이 있어도 발심한 사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도를 전하고 받을 길이 끊어진다”고 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도 있는 이에게 나아가 의심을 푸는 것은 실로 세상에서 어려운 일 가운데 하나라 하겠다. 때로는 같은 시대에 살면서도 서로 만나지 못하고, 때로는 시대가 달라 서로 만나지 못한다면 언제 깨달음을 증득하여 생사를 초월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부처님이 입적하신지 오래 되어 이미 법이 쇠퇴해진 말세다. 따라서 사람들이 무지하고 어지러운 때라서 건성으로 공부하는 무리는 많으나 뜻을 세운 사람은 적으니, 시작은 있으나 끝맺음이 없다. 그러므로 『정심계관(淨心誡觀)』에는 “말세의 중생들은 마음이 야박하며 은혜와 의리를 저버리고 혼자 제멋대로 놀아나니 이렇게 법대로 아니하다가는 나쁜 길에 떨어질까 두렵다”고 하였다.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는 실로 쉬운 것이 아니니라. 내 이제 몇 마디 하리니 그대는 잘 들어라. 도를 얻은 스승이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진심이요, 외람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도를 잃고 그 이름만 훔치면 그것은 외람된 것이요, 진심이 아니다. 또 그 제자가 교훈을 받들고 그것을 행하면 의리요, 아첨이 아니다. 그러나 그 법만 취하고 은혜를 저버리면 그것은 아첨이요, 의리가 아니다.
외람된 것과 아첨은 군자가 부끄럽게 여기는 일이다. 이제 만일 내가 그대를 외람되게 인도하면 그것은 내가 그대를 속이는 것이요, 그대가 만일 내게 아첨으로써 구한다면 그것은 그대가 나를 속이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 중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이름만 알고 진심을 모르는 이가 많다. 진실로 스승과 제자가 그 도로써 행하지 않으면 불조(佛祖)의 가르침을 어떻게 전하겠으며, 뒷날의 스승은 무엇을 배워 그 자리에 서겠는가? 도가 행해지지 않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아, 나는 그대가 외람된 자인지 아첨하는 자인지 뒷사람의 비판을 기다릴 뿐이다.
■ 의천스님은
의천(義天, 1055∼1101) 스님은 문종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했다. 개성 영통사에서 난원 스님으로부터 화엄을 배우고 30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여러 절을 찾아다니며 불법을 공부했다. 귀국 후 개경 흥왕사 주지가 되어 그곳에 교장도감을 두고 송, 요, 일본 등에서 수집해 온 불서 등 4700여 권을 간행했다. 교종(敎宗)과 선종(禪宗)으로 갈라져 대립하던 당시에 교선일치(敎禪一致)를 역설했으며, 천태종을 개창해 선종의 종파를 통합하고자 했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은 고려 문종의 넷째 아들로서, 어머니는 인예왕후(仁睿王后)이다. 속성은 왕(王), 본명은 석후(釋煦) 또는 후(煦)이며, 자는 의천(義天), 호는 우세(祐世), 흔히 대각국사(大覺國師)라는 시호로 많이 부른다. 순종, 선종, 숙종의 친동생이어서, 형들의 각별한 지우를 받았다고 한다.
그가 11세 되던 해에 부왕 문종이 왕자들을 불러놓고, “누가 출가해 복전(福田)이 되겠느냐.”고 물었을 때, 그가 스스로 출가를 자원했다고 한다. 문종에게는 13명의 왕자가 있었는데, 세 명은 왕이 되고(12대 순종, 13대 선종, 15대 숙종), 두 명은 승려가 됐다. 대각국사 의천(義天), 도생승통 왕탱(道生僧統 王竀, ? ~ 1112)이다.
그리하여 1065년 5월 외삼촌인 경덕국사 난원(景德國師 爛圓)을 은사로 출가해, 영통사(靈通寺)에서 공부했다. 문종은 경덕국사 난원을 불러서 불일사(佛日寺) 계단(戒壇)에서 직접 의천을 삭발하게 했다.
일찍이 출가해 승려가 된 경덕국사 난원은 의천의 외할아버지 김은부(金殷傅)의 아들로, 의천의 외삼촌이며 원혜왕후, 원성왕후의 친정 오라비가 된다.
그 후 13세에 우세(祐世)의 호를 받고 승통(僧統)이 됐다. 그리고 그해 10월 불일사(佛日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우세(祐世)’란 세상을 돕는다는 말인데, 의천이 본디 문종의 넷째 왕자로 태어났으나, 11살 되는 해에 출가해 구족계를 받았다. 그런 그가 저 법호를 받은 때는 고작 나이 13살, 출가한 지 2년이었다. 의천이 나이 13살, 중이 된 지 2년 만에 무슨 대단한 고승이 되었다고, 의천이 무슨 세상에 대단한 일을 했다고 법호에 ‘우세’라는 거창한 표현이 들어갔겠는가?
헌데 대승불교는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 下化衆生)’, 즉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함을 이상적인 자세로 삼는다. 그러니 임금이 대승의 중을 칭송해서 내린 법호에 '세상을 돕는다.' 하는 내용이 들어갔다고 특별한 일은 아니다. 대승의 중에게 “깨달음만 구했다.”고 하면 소승불교의 중이나 다름없다는 욕이 될 수도 있겠으나, 하화중생(下化衆生)이라 중생을 구제한다는 말이 곧 백성을 돕는다는 말과 같기 때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했으며, 출가한 이후에도 학문에 더욱 힘을 기울여 대승과 소승의 경⋅율⋅론 삼장(三藏)은 물론, 유학의 전적과 제자백가의 사상에 이르기까지 섭렵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그래서 ‘우세(祐世)’ 하는 승려가 되라는 격려의 의미에서 그런 호를 하사한 것이다.
의천은 승려이면서 불교학자로서, 당시 고려의 불교 종파에는 계율종(戒律宗), 법상종(法相宗), 열반종(涅槃宗), 법성종(法性宗), 원융종(圓融宗), 선적종(禪寂宗) 등이 있었으나, 의천은 평생 계파에 구애 없이 선교양종을 두루 연구해 불교학의 대가가 돼, 그래서 아버지 문종으로부터 ‘광지개종홍진우세승통(廣智開宗弘眞祐世僧統)’의 법호를 하사받았다.
이러한 그의 명성은 거란의 요(遼)나라에도 알려져 요나라 도종(道宗) 천우황제(天佑皇帝)의 초청을 받아 요에 갔었다. 요 도종은 그에게서 계를 받아 국사(國師)와 사자(師資)의 인연을 맺고, 그에게서 법문을 배웠으며, 요 도종은 그가 고려로 돌아간 이후에도 여러 번 그에게 경책과 다향(茶香), 금백(金帛) 등을 보내왔다.
1084년(선종 1)에는 송(宋)나라 정원(淨源)법사의 초청을 받고 왕에게 송나라에 가서 구법(求法)할 것을 청했으나 왕이 말리므로 1085년(선종 2년), 31세 의천은 결국 형인 선종에게 편지를 남기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몰래 제자 수개(壽介)만 데리고 송으로 밀항했다. 이때 송의 상인들이 의천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중국 산둥반도 밀주 판교진(교주시)에 도착해 고려관(高麗館)에 잠시 머물렀다. 고려관(고려정관/高麗亭館이라고도 함)은 의천이 밀항하기 1년 전인 1084년 왕명으로 지어진 고려인들을 위한 숙소였다.
의천이 송나라로 떠나자, 왕은 크게 놀라 관리와 제자 몇 명을 보내 수행하게 했다. 의천은 몰래 배편으로 송나라에 입국했지만, 소문이 알려져 송나라 철종(哲宗)은 특별히 주객낭중(主客郎中)인 양걸(楊傑)을 보내 의천을 수행해서 인도하게 했다.
이후 의천 일행은 송나라의 여러 곳을 순례하고, 변하(汴河-지금의 南京)에 도착해 신전(宸殿-궁궐의 정전)에서 철종을 접견했다. 의천은 송 황제 철종에게 송나라에 들어온 목적을 적어 올리고, 송 황제 철종의 극진히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차례로 여러 큰스님들이 있는 사찰을 방문, 양연(懹璉), 택기(擇其), 혜림(慧琳) 등 50여 인을 만났다.
그리고 항주(杭州)로 내려가 고려에서부터 그렇게 소원하던 정원(淨源)법사를 만나 많은 가르침을 받고 불경 170권 3부를 기증하고 금을 시주해 화엄각을 짓도록 해서 이후 이곳이 항주 혜인고려사(慧因高麗寺)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1958년에 없어질 때까지도 고려사라는 이름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특히 의천(義天)은 항주 상천축사(上天竺寺)에서 천태종(天台宗) 승려 종간(從諫)을 만나 천태종(天台宗)의 기본 교리와 수행법을 배웠다.
이후 송나라 철종(哲宗)이 영접해 계성사(啓聖寺)에 있게 하고, 화엄(華嚴) 법사 유성(有誠)으로 하여금 상종하게 해서, 화엄종과 천태종 양종의 교의에 대한 문답이 이루어짐으로써 많은 것을 배웠다.
이후에도 여러 곳의 주요 사찰과 대덕들을 만나 뵙고, 자변(慈辨) 대사에게서 천태종의 경론을 듣고, 천태산 지자(智者)대사의 부도(浮屠⋅浮圖)에 예배, 발원문을 지어 천태종을 본국에 중흥할 것을 맹세했다.
그런데 송나라를 순례 중이던 의천에게 본국의 선종이 갑자기 돌아오라는 요구가 있었다. 문종이 직접 흥왕사(興王寺)를 창건했지만, 문종 사후 오랫동안 흥왕사 주지 자리가 비어 있었다. 그리하여 선종은 의천의 귀국을 종용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1086년(선종 3) 의천은 왕과 왕후의 영접을 받고 환국해 석전(釋典)과 경서 1천 권을 바쳤으며, 흥왕사 주지가 돼 그곳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두고, 요⋅송⋅일본 등에서 경서를 구입하고, 고서를 수집해, <초조대장경>에서 제외된 중국 및 한국 학승들의 저술인 장⋅소(章⋅疏) 등을 모아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을 작성하고, 이를 목판본으로 판각해(통칭 속장경이라 잘못 알려진 것임), 4천 7백 40여 권을 간행했다.
※신편제종교장총록(新編諸宗敎藏總錄)---고려시대 의천(義天, 1055~1101)이 만든 장ㆍ소(章疏)에 관한 목록집이다. 대각국사 의천은 우리나라와 중국ㆍ거란ㆍ일본 등에서 유행하던 장ㆍ소(章疏)들을 널리 수집해 그 동안 모은 책들을 간행하기 위해 선행 작업으로 이 목록집을 만들었다. ‘속장목록(續藏目錄)’ 혹은 ‘의천록(義天錄)’이라고도 한다. 헌데 고간본(古刊本)이 우리나라에 전하는 것이 없다.
이 목록집이 우리나라에서 언제 없어졌는지 알 수 없으나, 일본에는 이 책이 일찍부터 전해져 필사본으로 유행되다가, 1693년에 이노우에(井上忠兵衛)에 의해 간행됐고, <대일본불교전서(大日本佛敎全書)>와 <대정신수대장경(大正新修大藏經)>에 수록된 것이 있다. 그 뒤 일본 학자들은 장ㆍ소류(章疏類)의 유무를 이 목록집에 의거해 파악했다고 한다.
이 목록집이 귀중한 자료로 높이 평가되는 이유는, 다른 목록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장ㆍ소(章疏)가 많이 있기 때문이다. 이 목록집에는 상권에 경에 관한 장⋅소 561부 2,703권을 수록했고, 중권에는 율에 관한 장⋅소 142부 467권, 하권에는 논에 관한 장⋅소 307부 1,687권 등을 수록해 총 1,010부 4,857권의 책명이 수록돼 다른 목록집에는 수록되지 않은 장⋅소(章疏)가 많이 있다. 특히, 신라 승려의 장⋅소 181부가 수록돼있는데, 그 중 이 목록집에만 들어 있는 것이 90부나 된다. 흔히 이것을 <속장경(續藏經)>이라 잘못 불리어지기도 했었다.
1094년(선종 11) 흥원사(興圓寺) 주지가 됐다가, 그 후 해인사(海印寺)와 흥왕사를 오고갔는데, 국청사(國淸寺)가 새로 세워지자 주지를 겸하고 처음으로 천태교를 강의하면서 천태종(天台宗)을 개창해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함으로써 우리나라 불교 특징이라 할 회통불교의 맥을 계승했다.
의천은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한 장본인이지만 어디까지나 화엄종의 승려였다.
의천은 당나라 징관(澄觀, 738~839) 스님의 사상에 근거해서 화엄종의 성종(性宗)과 법상종의 상종(相宗)을 함께 공부할 필요가 있다는 성상겸학(性相兼學)과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장하기도 했다.
대한불교 천태종을 세운 한국 천태종의 중흥시조로서, 대한불교 천태종에서 3대 종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추앙받고 있다.
그리고 다시 흥왕사 주지로 재직 중 모후인 인예태후와 둘째 형인 선종이 승하하자 의천은 다시 해인사로 물러났다.
그 후 헌종(獻宗)이 즉위한 뒤에도 융숭하게 대접받았고, 헌종은 불교의 중흥을 시도하려고 해인사로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서 의천을 개경으로 오도록 했다. 헌종의 초빙으로 의천은 다시 흥왕사 주지를 맡아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한편, 숙종(肅宗) 때에는 국가이익과 민생복리를 위해 주전론(鑄錢論)을 주장해 사회경제 면에도 많은 공헌을 했고, 1098년(숙종 3) 왕자 징엄(澄儼)이 승려가 되자, 그의 스승이 됐다. 형인 숙종은 자신의 다섯째 왕자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 1090∼1141)을 손수 삭발시켜 의천의 제자로 법통을 계승하게 했다.
그런데 의천이 1101년 병을 얻어 병세가 점차 깊어지자, 문병 온 형왕(兄王) 숙종에게 말했다.
“원한 바는 정도를 중흥하려 함인데, 병마가 그 뜻을 빼앗았나이다. 바라옵건대 지성으로 불법을 외호하시와 여래께서 국왕, 대신에게 불법을 외호하라 하시던 유훈을 봉행하시오면 죽어도 유감이 없나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총지사(總持寺)에서 입적했다. 당시 그의 나이 향년 47세, 법랍 36세였다.
숙종은 그의 부음을 듣고 조회를 파하고 친히 다비식을 한 뒤 영골사리(靈骨舍利)를 개성 오관산(五冠山) 영통사(靈通寺) 동쪽 산에 석실(石室)을 세워 안치했다. 영통사는 조선시대 완전히 폐허가 되었다가 2005년 천태종에서 50억원을 지원해 북한 개성에 복원됐다. 이곳에는 당대 명문장가 김부식(金副軾)이 명문(銘文)을 쓴 대각국사비가 남아있다. 또 경북 구미 남숭산(南嵩山-현 구미 금오산) 선봉사(仙鳳寺)에도 임존(林存)의 명문으로 해동 천태 시조 대각국사비(보물 제251호)가 세워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