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념 정리
이주노동이 발생하는 이유 노동력의 부족을 국가 간의 노동 이동으로 메우는 과정이다. 높은 질의 노동과 낮은 임금의 노동으로 구분한다.
높은 질의 노동은 연구자, 과학 기술자, 농업기술자, 경영자, 외국어 교사, 의사, 변호사 등의 전문직 노동자이다.
낮은 임금의 노동은 공장, 광산 노동자, 선원, 농민, 택시기사 등 대체로 3D업종의 노동자이다. 1960년대 이래 정부는 저임 노동을 지탱하려고 낮은 농산물 가격 정책을 썼다. 최근에는 농산물의 수입 개방 때문에 농촌 사정이 계속 어렵다. 농촌에 결혼해 온 여성 이민은 농촌의 낮은 임금 노동 때문에 발생한다.
2. 이주노동의 역사
(1) 한국에서 외국으로 나간 역사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끌려간 포로는 일본의 도자기와 유교 문명을 일으켰다. 일부는 이탈리아에 노예로 끌려갔다는 설이 있다.
1860년대 기근으로 만주 간도지방에 이민을 갔다. 유민이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중국이민이 급증했다. 현재 중국동포 180만 명이다.
1905년 모집이민으로 하와이 멕시코 쿠바에 노예 이민을 갔다. 지금까지 한국과는 단절돼 생활했다.
일제 강점 아래 일본 이민은 1920년대까지는 돈벌면 돌아온다며 갔다. 그러나 1930년대에는 강제징용으로 일본의 공장이나 동남아 전쟁터로 갔고 8․15 뒤 200만 명 가운데 상당 부분이 눌러 앉아 교포가 되었다.(60만 명) 당시 조선인의 노동운동은 일본 노동자보다 강했다. 생활근거가 잡히고 자녀를 두면 살던 곳을 떠나 고국으로 돌아오기가 쉽지 않다. 한국에서 사는 이주노동자도 마찬가지이다.
러시아는 1937년 스탈린이 대 일본전쟁 때 조선이민이 일본 편을 들 수 있다면서 연해주 조선인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소련이 무너진 뒤 독립한 각 나라에서 차별이 심해 연해주로 조금씩 돌아오는 경향이다.
6․25 전쟁 뒤 미국은 6․25전쟁 때 전쟁고아, 1950년대의 저임 노동자 수입, 그 뒤 한국의 전문직 노동자를 수입했다. 재미교포는 200만 명 정도이다. 유럽에 간 입양 이주민은 열악한 노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전쟁 포로의 일부가 인도 브라질 등의 제3국으로 갔다.
1960, 70년대에 독일 베트남 중동에 이주한 간호사 광산노동자 건설노동자, 1960년대 중반의 미국 이민, 파라과이 농민 이민, 1970년대 동남 아시아와 오스트레일리아, 최근의 젊은이와 교육 이민이 있다.
해외에 있는 교포는 140국에 560만 명이다. 한국 이민이 세계 곳곳에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길게 보면 더 나갈 것이다. 젊은 층의 해외이민 추세를 보면 그렇다. 유럽은 지난 4세기에 걸쳐 인구의 절반이 밖으로 나갔다.
여러 가지 사건 이민사에서 여러 사건이 있었다. 도쿄대지진의 학살(1923), 자유시 참변(1921), 연해주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1937), 사우디 현대건설 노동자의 파업, LA폭동(1992) 등이다. LA폭동은 이민간 한국인들이 주변 히스패닉과 흑인을 무시하고 이익만 챙기다가 당한 사건이다.
독일에 간 간호사 광산노동자는 싸워서 영주권을 쟁취했다. 독일의 진보적 노동조합과 진보정당의 도움이 큰 힘이 되었다. 미국 독일 일본 교포가 1970년대부터 한국의 민주화운동 노동운동 통일운동을 지원했다. 현재 미국 LA의 노동운동에서는 한국 기업에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노동운동이 있다. 호주에는 한국인 타일공 노조가 있다.
(2) 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역사
북방계와 남방계 길게 보면 한반도 인구 구성은 북방의 육로와 남방의 해로를 통해 이민 유민이 들어온 역사이다. 이들의 일부는 일본으로 건너갔다. 전라도를 거쳐 큐슈로, 경상도를 거쳐 교토 지역으로 갔다. 한국의 역사는 정치적으로는 북방계가 중심이었지만 문화적으로는 북방 남방이 혼합된 것으로 본다.
어느 나라에서나 먼저 자리를 잡고 사는 거주민이 새로운 거주민이 들어오는 것을 거부하는 경향이 있다. 민족주의의 발달과 더불어 단일혈통주의가 생겼는데 이런 관념의 역사가 긴 것은 아니다. 단일혈통주의는 독재와 결합한 경우가 많다. 일본의 군국주의, 독일의 파시즘, 한국의 군사정권이 단일혈통주의를 특히 강조했다. 이것은 지배층의 대중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선동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자세이다. 이승만 박정희는 겉으로는 일본의 국가나 국민 모두를 적대시했지만 이면으로는 일본의 정치 경제적 지원을 받아 권력을 강화했다. 현재 일본의 우익교과서파동에 대해 우리 국민들이 일본의 우익과 국민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적대시하는 것은 이런 대 일본 정책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사실 노동자 농민은 이주노동자가 들어왔을 때 잃을 것이 거의 없다. 오히려 3D업종을 지키고 문화와 유전자의 다양성 확보하는 길이다.
고구려와 발해는 한국인이 중심인 다민족 국가였다. 신라와 고려는 대외 교류를 통해 외래 문화를 들여왔다. 신라 때에는 서역, 지금의 파키스탄 이란 지방의 문물을 들여왔다. 고려의 벽란도는 국제항이었다.
조선은 문화적으로 자족하면서 이민이 들어오는 것은 대체로 거부했다. 그러나 일단 들어온 이민은 수용했다. 조선 초기에 국경을 개척하려고 그 지역에 죄인을 유배시켰다.
일제 강점 시기 1920년대에 일제는 일본이민을 기후가 좋은 조선에 들여오고, 조선 이민을 추운 만주나 일본에 보내는 정책을 썼다. 일본이민은 최고 71만 명(1940년)에 이르렀으나 전쟁이 끝난 뒤 거의 모두가 일본으로 돌아갔다. 이들의 직업은 총독부 관리, 상업, 공업의 순이었다. 이 때 일본은 한국의 말 글 성씨 문화를 말살하는 정책을 썼는데 이것은 한국을 일본을 동화하려는 정책이었다. 일본은 이런 방식으로 오키나와, 홋카이도(1868)를 동화 흡수했고 대만에서 상당 정도 성공했다.
1930년대에는 중국인 노동자가 한국에 많이 들어왔다. 1949년 중국 혁명 전후에 중국인들이 배를 타고 한국에 많이 들어와 화교를 형성하고 전국 곳곳에 중국음식점을 냈다. 그러나 이들은 한국의 강한 거부정책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 일본 등으로 이주해 현재는 2만명 정도 남아 있다. 인천과 서울 연남동에 차이나 타운이 있다.
6․25 전쟁 뒤 6․25전쟁 때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혼혈아가 많이 탄생했는데, 한국인들은 이를 배척했고 결국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 북유럽으로 가서 저임 노동자 계층을 형성했다.
1986, 88년 올림픽 뒤 산업이민이 많이 들어왔다. 한국의 임금수준이 올라가면서 많은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는데 그렇지 못한 부문에 외국인 노동자들 들여왔다. 외국인 노동자는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한국에 왔다. 아시아 여러 나라의 실업률이 60%, 월 임금이 30달러인 현실을 반영한다.
1990년대가 되어 농촌 파괴가 절정에 이르러 농촌 총각들의 결혼 대책으로 제3세계 여성들이 들어왔다. 인구의 고령화와 저출산의 대책이다. 그러나 현재 이민 허용에 아주 인색하며, 백인 위주로 소수가 귀화하고 있다.
2. 세계적인 추세
(1) 세계 이민의 역사
현재 이주노동자, 이민이 세계적인 추세이다. 신자유주의 등장 이후 더욱 그렇다.
유럽인의 이주 16세기 이후 유럽이 산업화면서 이농민과 실업자가 아메리카(3천만명), 러시아, 오세아니아(300만 명)로 이주했다. 반대로 흑인노예가 미국 영국 등으로 이주했다.
아시아인의 이주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전반에 유럽 상품에 밀려 일자리를 잃은 인도인 600만 명이 실론 동남아시아 라틴아메리카로, 비슷한 수의 중국인은 동남아시아로, 일본인 100만 명은 아메리카와 동북아시아로 떠났다. 한국은 300만 명이 동북아 다른 나라로 이주했다.
이주노동 이전의 이민은 농업경영을 목적으로 인구 밀집지역에서 인구 희소지역으로 이동했다. 세계 제2차 대전 이후에는 후진 공업국의 실업자가 선진국 공업국 노동자가 되려고 선진국으로 이동했다. 아랍인은 서유럽으로, 라틴 아메리카인과 아세아인은 미국으로, 동북아시아인은 일본, 한국으로 계속 이동하고 있다.
(2) 여러 나라의 이민정책
일반적으로 단순노동은 이주노동자도 받아들이고 전문 인력은 이민으로 받아들인다.
유럽연합 유럽연합은 이주노동을 이민노동으로 간주한다. 영국 스페인 동유럽은 이민의 이동의 자유를 전면 보장하자고 주장하고,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은 제한하자고 주장한다. 노동조건이 상대적으로 좋은 나라는 제한을 두자고 한다.
미국 미국은 노동력을 최대한 싸게 사용한 뒤 영주권 허용한다. 미국은 전통적으로 남북전쟁 이전에는 흑인노예를 사용했다. 그 뒤에는 히스패닉과 이민노동자들 사용했다. 한국전쟁 베트남전쟁 때 전쟁 고아를 대량 수입했다. 인도와 한국의 과학기술 이민이 미국 발전의 원동력이다.
일본 일본은 생산력을 유지하려면 연간 50만 명을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노동은 하되 끝나면 귀국하라는 것은 국민국가의 이기심이 극에 달한 형태이다.(설동훈, 전북대 교수)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오키나와인 차별, 조선인차별, 페루계 U턴 이민이 사회문제이다.
ILO UN의 협약 ILO 보충협약(1975)과 유엔의 이주노동자 권리협약(1990)은 내외국인을 실질적으로 균등하게 대우할 것을 규정하고, 각국의 준수를 촉구하고 있다.
3. 한국의 이주민 실태와 대응
(1) 실태
실태 지금까지는 주로 3D업종에 들여왔으나 앞으로 인구대책으로 이민을 허용해야 할 것이다. 농촌의 결혼 대책은 이미 그런 단계에 들어왔다. 현재 이주민의 숫자가 국민의 1~2% 수준이나 앞으로는 절대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2004년 말 현재 이주노동자가 42만 명이다. 한국 거주 외국인의 절반이다. 이주노동은 첨단산업이나 3D업종으로 국내 노동자들과 충돌이 적다. 대부분이 미등록 노동자로 한국인 기업주가 저임금, 체불임금, 산재, 퇴직금 안주기 등의 방법으로 마음대로 부려먹는다.
외국인 아내는 5만 5964명이다. 2004년 한국 남자와 외국인 여성의 국제결혼 2만 5594건 가운데 농어업 종사자는 1,814건(7.1%)이었다. 농어촌은 6,629건 가운데 외국인 각시가 1,814건(27.4%)이다. 이혼율은 8.9%로 평균 7.1%에 비해 그다지 높지 않았다. 농어민이 주로 거주하는 읍 면 지역 40살 이상 남성은 1995년 24.3%에서 46.6%로 늘었다.
지난 해 농촌으로 시집온 외국 여성은 90%가 중국(879명), 베트남(560명), 필리핀(195명), 몽골(54명), 타이(34명), 우즈베키스탄(25명), 캄보디아(15명) 등이었다. 지역별로는 전남지역이 269명, 경북 256명, 충남 243명, 전북 213명, 서울 33명이었다.
권리를 쟁취한 과정 1994 경실련 강당에서 산재 피해 보상하며 처음으로 농성했다. 1995년 명동성당에서 농성하며 고용허가제를 요구했다. 고용허가제(2003년)는 4년 근무한 뒤 일단 귀국하고 1년(최근 6개월로 바뀜)을 지나 재입국을 허용하고 있다. 현재 법적으로 노조를 결성할 수 있다. 그러나 미등록 노동자가 대부분인 상태에서 노조 위원장 아노아르를 강제 추방시키려 하고 있다. 이주노동자들은 연수제도의 철폐, 고용허가제 대신에 노동허가제 실시, 강제추방 금지, 영주권 시민권을 요구하고 있다.
제도의 문제점 이들이 한국에 들어올 때 1천여 만원 쓰는데, 한국의 중소기업협동조합 등이 중간 착취하고 있다. 연수생의 임금이 적어 직장을 이탈하면 벌금을 물린다. 미등록 노동자를 고용한 업주에게 2천만원의 벌금을 물린다.
한국은 국적의 근거가 속인주의이라서 아버지가 이주노동자이면 자녀는 아버지 나라로 돌아가야 한다. 자녀 교육문제가 심각하다. 한편 500만 달러를 투자한 사람에게는 바로 영주권을 준다.(F5 비자)
재외국민에게 취업 등의 특혜를 주고 있지만 한국에 들어와 있는 이주 노동자에게는 주지 않고 있다.
이주노동자의 조직 1992년부터 국가별 공동체를 조직하기 시작했다.(필리핀 네팔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 1998년 경기도 대성리에서 국가별 대표가 모여 ‘한국이주노동자기구’를 결성했으나 실패했다. 2000년 안산지역에 태업이 일어났다. 이주노조의 맹아이다.
2001년 5월 민주노총 소속 서울경기평등노조(아노아르 후세인 지부장)를 조직했다. 평등노조는 이주노동자와 한국인 활동가들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조직으로 한국인이 조직의 책임을 맡았다.
2005년 4월 24일 서울경기인천이주노조는 노동조합법이 개정돼 이주노동자의 노조 결성을 인정한 뒤에 필리핀 방글라데시 네팔 인도네시아 노동자 100여명이 조직한 것이나, 현재 아노아르 후세인 위원장(34, 1996년 입국, 방글라데시 학생운동가 출신)이 미등록 노동자로 청주 외국인보호소에 붙잡혀 있는 상태로 노조 신고필증이 나오지 않고 있다. 노조를 사실상 불허하는 것이다. 미등록 노동자의 추방은 출입국법의 문제이며, 노조 인정은 노동조합법의 문제로 상호간에 직접 연관이 없다.
현재 수도권이주노동조합을 추진하는데, 조직방법을 두고 노동조합과 지원단체를 결합하는 단일 조직을 추진하며 민주노총은 단체 배제를 주장하고 있다. 한국노총은 한국인 노동자와 이주노동자가 함께 참가하는 지역노조를 조직했다. 일본은 이주노동자와 지역 노동자가 함께 지역노조(시티 유니온, 보수적인 렌고聯合계) 일반노조(제너럴 유니온, 진보적인 전국노동조합연락협의회-전노협-계)를 조직해 운영하고 있다. 홍콩에도 이주노조가 있다.
중국 동포의 조직이 강하다. 재외국민 특별혜택을 확보했다.
지원단체로 외국인(이주)노동자대책협의회, 각 지역 센터, 의료지원단체(700여 병원 참가, 월회비 5천원)가 있다.
이주노동자 인터넷 방송국 http://www.mwtv.or.kr(2005. 4 개국)
www.migrantsinkorea
국제이주노동자기구(Intrenational Organization for Migration, www.iom.int). 아시아이주노동자센터(AMC, www.asian-migrants.org) 등 국제연대조직이 있다.
까다로운 귀화 이민법에서 귀화가 아주 까다롭다. 한국인이 남편인 경우는 그 배우자의 귀화를 허용하나 그 반대는 잘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호주제를 폐지했으므로 이 제도도 바뀔 것이다.
귀화할 때 보는 시험을 고시라고 할 정도로 배타적이다. 전문직은 귀화를 허용한다. 축구선수 신의손, 방송인 이한우, 박노자 교수 등.
이주노동은 필수 한국은 OECD 나라 가운데 출산율(1% 수준)이 가장 낮고 2050년에는 최고로 고령화된 사회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
결혼한 여성 이민은 남성 우월의식과 가부장제, 후진국 출신 외국인 차별의 이중 삼중의 고통을 받고 있다. 마을에서 농사를 짓고 후손을 낳고 기른다는 점을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국제 결혼 외국인 여성의 상당수는 가정폭력 때문에 남편이 무섭다고 한다. 학력이 낮은 남편과 잦은 의견충돌을 빚으며, 사회생활에 반대하는 시어머니의 강압에 하루종일 허드렛일에 시달리고 있다. 국제결혼을 했으나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외국인 여성이 6만 2천명이다. 블링크 최은미 소장은 “현행 출입국관리법이 국제 결혼한 외국인여성들의 인권을 침해하는 부작용을 초래하고 있는 만큼 체류자격 등에 관한 개선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한다.
(2) 대응 방향
받아들이는 마음 고려시대에는 ‘내자불거’(來者不拒) 즉 ‘오는 자는 거절하지 않는다’는 포용책을 펴 많은 외래인을 귀화시키고 우월한 고려문화의 용광로 속에 녹여서 문화 단일민족(단일문화)의 구성원으로 만든 것은 역사에서 보기 드문 지혜의 소산이다. 조선시대에는 대체로 거부하면서 일정 부분만 허용했다. 왜구의 잦은 침범 영향도 있고 전통적으로 중국의 이민물결을 경계해 외국인의 접근을 규제했다. 이런 전통과 의식이 아직 변하지 않았다.
실질적 균등 대우 이주노동자가 차별 → 균등대우 → 실질적 균등대우의 과정을 거쳐 내국민과 제도나 감정뿐만 아니라 생활 문화에서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되어야 한다.(최홍엽, 조선대 교수)
먼저 정당한 대우를 해주어야 한다. 이주노동자를 노동자가 아닌 학생으로 간주하는 연수생 제도를 철폐해야 한다. 이주노동자의 단결권을 보장해야 한다. 고용허가제 대신 노동허가제를 택해야 한다. 한국에 직장과 가족을 가진 이주노동자에게는 영주권 시민권 참정권을 주어야 한다.
이주민 이주노동자는 대개 2~4년 한국에 머무르며, 한국 정착을 희망하는 비율은 50% 수준이다. 실업률이 높은 나라 사람들이 잔류 희망 정도가 높다. 미국인 중국동포는 귀국을 희망한다.
들어오는 것은 제한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지만, 일단 들어와 노동하는 사람은 이주민으로 여겨야한다. 귀화, 일자리, 교육, 문화적 동화, 노후 문제 등이 뒤따른다. 한국어를 말하고 읽을 수 있다면 차별은 훨씬 줄어든다.
나간 이주민에 관심을 나간 이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미국에 60만 명, 일본에 20만 명의 한국계 이주민이 있다. 미등록 노동자로 법의 사각지대에 있다. 그곳 단체의 의료지원 등을 받는데, 한국 정부나 노동단체를 외면하고 있다. 이들은 장기간 가족과 떨어져 있어 가정이 많이 무너졌다. 민주노총 등에서 활동가를 파견해야 챙겨야 한다.
4. 외국 이민의 한국 정착에 필요한 내용
(1) 한글교육
문장의 구조 문장의 구조는 우랄 알타이어계와 영어 중국어가 다르다.
영어 중국어 : 주어 + 동사 + 목적어(s + v + c)
한국어 일본어 몽골어 : 주어 + 목적어 + 동사(s + c+ v)
외국인들은 한국어의 조사를 어려워한다.
발음 가르치기 조선 세종 때 한글을 만든 지 5백년밖에 안 되는 최신형 글자라서 구조가 매우 합리적이다. 나라에 따라서는 본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한글로 생각을 기록하는 것이 편리할 정도이다.
모음 모음은 다섯 가지로 구분하여 발음을 연습한다.
아야 :
어여 : 아래윗니 사이에 손가락 두 개를 넣고 발음한다.
오요 : 입술을 모아서 발음한다. 충청도 사람은 ‘외’ 발음을 잘 못한다.
우유 : 대체로 발음을 잘 한다.
으이 : 입꼬리를 귀에 거는 모양이다.
자음 자음은 나라에 따라 사정이 다르다.
러시아 몽골 등 한반도의 동북에 위치한 나라 사람들은 ‘ㄲ’ ‘ㅆ’ ‘ㅉ’ ‘ㄸ’ 등 된소리를 발음하지 못한다. 경상도 사람처럼 ‘쌀’을 ‘살’이라고 한다. 고치기가 어렵다.
인도 서북부의 구자라트에서 온 사람들은 한국어 발음을 거의 완전하게 할 수 있다. 한글을 만들 때 중국어 몽골어 산스크리트어(인도의 고어) 학자도 참여했다고 한다. 그것보다는 인도의 발음이 100여 개나 되어 귀가 발달한 것으로 본다.
일본인은 받침 가운데 ‘ㄴ’ ‘ㅁ’ ‘o’을 구분하지 못한다. 일본에서는 이것들을 ‘ん’ 하나로 통일해 사용하고 있다. ‘김치’를 ‘기무치’의 3 음절로 늘여 발음한다. 우리는 ‘ㄹ’ 발음을 영어의 ‘r'과 ’l'을 구분하는 데 일본인은 그렇지 못하다.
몽골 우즈베키스탄 등 겨울이 추운 나라 사람들이 한글 공부를 열심히 한다. 몽골인은 유목민의 전통에 따라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경향이 있다.
인도네시아 미얀마 등 동남아의 더운 나라 사람들은 한글공부보다는 축구처럼 모여서 하는 놀이를 좋아한다. 두 번 이상 가르치기가 어려우니 단번에 한글 공부의 핵심을 가르쳐주어 배울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해야한다. 첫날에 핵심을 모두 가르치고 그 다음날에 풀어서 자세하게 가르친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영향으로 말을 딱딱 끊어서 한다.
필리핀 사람들은 다른 동남아인들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산업의 쇠퇴로 방대한 이민노동이 국가와 가족에게 비중이 큰 수입원이다. 4세기에 걸쳐 서양의 영향을 직접 받았고 필리핀의 가톨릭교회와 KMU(필리핀 민주노총) 한국지부 등 독자적인 망을 갖춰 지원하는 구조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네팔 미얀마 공동체가 강하며 이들 가운데 일부는 민주화운동과 직접 관련이 있거나 지원하고 있다. 네팔 공동체는 네팔 국내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하고 산재 피해자와 그 가족을 돌보는 공제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일부는 한국 정부에게 정치적 망명을 요청하고 있으며, 인색하게 단지 몇 명에게만 허용했다.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인도 사람들은 영국식 영어를 쓰며 발음이 좋은 편이다. 이들이 반대로 한국인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것도 한가지 방법이다. 필리핀 여성이 농촌에서 이웃 어린이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경우를 보았다.
몽골 파키스탄 인도 사람이 한국어를 배우는 속도가 빠르다.
교육 언어 이주민의 언어는 러시아 몽골 중앙아시아계는 러시아어, 중국 동포와 중국인은 한국어나 중국어, 베트남인은 베트남어, 나머지는 영어를 쓴다. 교육할 때 사용하는 대체로 한국어가 가능하지만 미묘한 부분은 외국어를 쓴다. 이주민을 가르치는 교사는 영어 중국어 러시아어 등 외국어를 약간이라도 배우면 교육이 능율적이고 서로 거리감을 줄여준다.
교재 유치원 어린이용 한글카드, 한국 생활에 필요한 단어 카드, 한국어회화테이프를 사용한다. 집안이나 사무실 구석구석에 한글 단어나 문장을 적어 놓는다.
(2) 생활 교육
먼저 어떻게 마음의 문을 열고 친해 질 수 있을까? 한국 사람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한다.
상호교류 이주노동자 돕기는 전에 많이 했는데, 이들도 한국에 생활근거가 있는 만큼 이주민으로 보고 대등하게 상호 교류하는 단계로 나갈 필요가 있다.
이주민을 이해하기 이주민이 한국에 오게된 과정, 결혼과정을 들어보고, 이들의 전통 옷 입어보기, 현지 악기 들어보기, 음식 먹어보기 등도 이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된다.
부천외국인노동자의 집은 이주노동자를 강사로 소개하고 대사관을 통해 전통 옷과 사진 등 문화자료를 구해 문화체험 행사를 지원하고 있다. 최근 부천의 고리울 청소년 문화의 집에서는 초등 3, 4학년 학생들이 페루에서 온 노동자를 강사로 초빙해 인사하기, 지도에서 페루 찾기, 페루 전통옷 입고 사진 찍기, 페루음식 만들어먹기, 춤배우기 프로그램을 소화하며 이주노동자와 그 자녀들과 어울렸다.
일산 ‘아시아의 친구들’은 사무실에 작은 평화박물관인 평화방을 만들어 각국의 의상 놀이기구 전통악기와 아이들의 평화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안산에서는 영화마을을, 인천에서는 도서관을 설치했다.
필요한 교육 내용 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은 한국어, 근로기준법 노동조합법 산재법 등의 노동법과 이민법의 교육, 한국인의 풍속, 산업안전과 공해 환경문제의 이해(말 핵산 피해 태국 노동자), 한국의 역사, 농업기술 특히 환경농업의 이해, 도서의 제공 등이다. 반대로 한국인은 그들한테 문화, 좋은 생활습관, 열대농업에 관한 지식을 배울 수 있다. 이런 과정이 있어야 이들의 2, 3세가 한국인과 동등하게 차별 없이 살 수 있다. 당장 한국어를 말해야 인권과 노동권을 대접받는다.(아노아르)
(3) 실천 방법
입체적 접근 이주민을 돕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먼저 위에서 말한 한글 교육 등을 하는 것이 우선이다.
동시에 이주민 당사자와 자녀 혹은 가족과 관련된 사람들이 협의하며 입체적으로 문제 해결에 접근한다. 이주민 지원단체, 농민회, 전교조, 생태환경운동단체, 여성단체, 문화단체, 병원 약국 한의원 등 의료인, 마을도서실 만들기, 군의원 등이 서로 협의하며 직접 또는 간접적인 방법으로 문제 해결책을 마련한다. 이런 접근은 지역 사회운동을 통합적으로 전개하고 자율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해외 현지를 지원 1970, 80년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 아시아 지역의 민주화운동을 지원한 자금 가운데 7, 80%가 한국에 들어왔다. 그러나 지금 한국이 어느 정도 민주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루었지만 한국인은 다른 나라를 도와 보답하는 데 아주 인색하다.
지역 사회에서 이주민의 모국을 한 두 곳 택해 한 달에 몇 만 원 또는 일년에 몇 십만 원을 지속적으로 지원한다. 사회단체나 마을, 학교 등 운동성을 가진 곳을 지원한다. 요즈음 해외관광을 많이 나가는데 그 때 현지를 방문하고 반대로 초청도 한다. 이런 사고 방식과 국제연대의 실천은 세계화 시대에 홍성 지역 주민의 생활과 자녀교육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