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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서로에게 고향이고 꿈이었다
수년째 상암 DMC의 외국인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던 장률 감독이 예컨대 사람 냄새 맡고 싶을 때 터널을 지나 뒷동네로 건너가 보곤 했다지요. 거기서 그는 조선족 동포 예리(한예리)와 탈북민 정범(박정범), 동네 건달 익준(양익준), 좀 모자란 건물주 종빈(윤종빈) 패거리를 만들어냈습니다. 예리의 세 남자가 모두 고유한 작품세계로 주목받는 실력파 젊은 감독들이라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무산일기〉(2011)의 박정범, 〈똥파리〉(2008)의 양익준, 〈용서받지 못한 자〉(2005)의 윤종빈은 각각 자신의 작품들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를 그대로 입고 출연했습니다. 인생이 꼬일 대로 꼬인 네 청년이 모여 있는, 〈춘몽〉의 동네는 수색입니다.
‘고향주막’을 운영하면서 식물인간 상태의 아버지를 돌보는 예리는 수년 전 아버지를 찾아 한국으로 왔습니다. 한국에 가정을 둔 아버지가 중국에서 바람을 피워 낳은 딸이었어요. 한국에서 찾은 아빠는 얼마 지나지 않아 쓰러졌고, 예리가 그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탈북 노동자인 정범은 눈이 슬프다는 이유로 구박받고 조울증 약을 복용한다고 해고당하면서 6개월 치 월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매일 같이 회사 앞에 나가 시위를 합니다. 시위라고 해봐야 지나가는 사장의 차에 90도로 깍듯이 인사를 해서 시선을 끄는 것뿐이지만요. 고아원에서 자란 익준은 한때 잘나가던 조폭이었으나 ‘형님’의 상갓집에서 웃음을 참지 못해 내침을 당했습니다. 정범은 슬픈 눈 때문에, 익준은 웃음 때문에 버림을 받은 셈입니다. 예리의 집과 주막 건물주인 종빈은 이른바 ‘유산계급’이고 한국 사회에 기반을 지닌 유일한 인물인 것처럼 보이지만, 그는 간질과 틱 장애를 앓고 있어 심심찮게 발작을 일으킵니다.
세 청년의 일상은 그들의 ‘여신’ 예리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예리의 고향주막을 아지트삼아 매일 어울리고, 예리가 영상자료원으로 무료 영화를 보러 가면 줄줄이 따라갑니다. 예리의 집을 수리할 일이 생기면 또 우루루 몰려가고, 외출했다가 밤늦게 돌아오는 예리를 마중하러 약속이나 한 듯 수색역으로 모여들기도 하지요. 이토록 예의바르고, 모자란, 건달들이라니요. 예리는 그들을 ‘내 남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축구하고 시를 쓰는 레즈비언 주영(이주영)도 예리를 좋아하는 주변인입니다.
그들에게 예리는 고향이었고, 시였고,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부모와 가족이었고(익준은 예리의 아버지를 “장인어른”이라고 부릅니다), 유일한 친구였겠지요. 그저 하는 일 없이 노닥거리는 것처럼 보이다가도 그들은 어느 한 사람이 위기에 빠졌을 때 결정적인 도움이 되고 서로를 위해 분노하고 싸우는 최고의 아군이 되어 있습니다. 헌데 그들의 싸움이란 친구가 악에 빠지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의 표현이었어요. 정범의 가방에서 우연히 칼을 발견한 세 친구가 정범 몰래 악덕 사장(김의성)을 찾아가 담판을 짓겠다고 나서는 ‘웃픈’ 장면이 있는데요. 어떤 영화들이 자극적으로 잘 다루는 것처럼 절망과 고통에 처한 ‘루저’들이 모두 사악하고 폭력적인 것은 아니라는 무언의 항변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디아스포라 지식인으로서, 재일조선인 2세인 서경식은 “디아스포라에게 조국은 향수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국경에 둘러싸인 영역이나 혈통과 문화의 연속성이라는 관념으로 굳어버린 공동체도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식민지배와 인종차별이 강요하는 모든 부조리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곳을 의미한다”고요. 이 땅에서, 그것은 정말 꿈에서나 가능한 일일까요?
꿈이 현실이 되기도 하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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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감독의 전작 〈두만강〉(2009)을 생각하면, 인물들에게 가까이 다가서서 그들과 함께 움직이는 〈춘몽〉의 카메라는 한결 유머러스하고 친절한 편입니다. 〈두만강〉은 배가 고파 경계를 넘나드는 탈북 소년 정진과 그와 축구를 하고 싶어 쌀을 나누어주는 조선족 소년 창호의 이야기를 멀찍이서 그림처럼 묵묵히 지켜보기만 했지요. 영화가 다룬 사건만으로도 두만강변은 가난과 죽음, 선의가 배신으로 돌아온 강간의 현장과 간통, 살벌한 경계와 처벌이 존재하는 폭력적인 공간일 수 있었지만, 〈두만강〉은 탈북민들을 다룬 다른 영화들처럼 연민과 공포를 동력으로 삼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마지막은 담담해서 더욱 처연하고도 강력합니다. 나약한 소년의 몸으로 죽음이 아니고서는 지킬 수 없었던 우정과 약속, 치매가 아니고서는 기억할 수도 건널 수도 없었던, 오래 전 사라진 두만강 다리가 유독 기억에 남습니다. 그 다리는 치매노인의 말을 들을 귀가 있었던, 언어장애를 지닌 창호의 누나가 그림으로 그려낸 것이었다는 사실도요. 여하튼 엔딩크레딧이 오르기까지 노인은 지팡이를 짚고 두만강 다리를 하염없이 건너갑니다.
꿈같고 죽음과도 같은 이 장면은 얼마 전 우리가 생중계로 목격했던 ‘도보다리’ 장면과 오묘하게 겹칩니다. 남북의 지도자가 나란히 걷고 있는데, ‘묵음’의 영화 같아서 지독히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던 다리 말입니다. 그것은 분명 꿈이 아닌 현실이지만, 누구랄 것도 없이 오래도록 꾸어왔던 꿈이기도 합니다. 얼마 전 저는 임진각에 다녀왔는데요. 끊어진 경의선 철교의 ‘독개다리’를 보며 두만강의 사라진 다리가 되살아나는 영화의 ‘꿈’이 판문점에서 잠시 현실이 되었듯, 이제 파주에서도 곧 열차 소리를 듣게 될까 싶었어요.
북미정상회담 소식과 함께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춘몽〉을 다시 생각합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줄곧 흑백인데요. 결정적인 순간에 색상이 감도는 부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어디서부터 꿈이고 어디서부터가 현실인지, 꿈이라면 누구의 꿈인지를 파악하려고 드는 것은 사실 부질없는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심결에 하늘거리는 예리의 춤사위가 내 것이 되고 우리 것이 되어 좀 모자라 보여도, 다들 그렇게 어우러져 살면 좋겠다고 우리도 함께 꿈꾸게 하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앞으로 경계를 넘어올 이들은 물론 이 땅에 이미 넘어와 있는 이들과 함께 우리도 기꺼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겠지요.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