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서원: 尊賢養士 스크랩 서원을 찾아 떠나는 여행, 三山書院(삼산서원)!
이장희 추천 0 조회 35 14.07.11 10:5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난 해 12월, 세계 유산 잠정목록으로 등재 신청한 조선 시대의 대표적 서원 9개소로 구성된 한국의 서원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 확정된 사실을 알고 계셨나요?

 세계 유산 잠정목록은 세계 유산적 가치가 있는 유산들을 앞으로 충분한 연구와 자료 축적을 통해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도록 하기 위한 예비목록으로, 최소 1년 전까지 잠정목록에 등재된 유산만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할 자격이 주어집니다!

 

 이번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포함된 9개 서원은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소수서원(경북 영주),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산서원과 병산서원(경북 안동),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입니다. 이들 서원은 모두 국가지정문화재인 사적으로 지정된 서원으로서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637개 서원 중에서 지금도 잘 보존·관리되고 있으며, 문화유산으로서 가치가 빼어난 서원들입니다.

 

 

 

서원이 생겨난 배경은 15세기 말 지방의 국립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향교의 기능변질로 사림이라는 재야 지식인들에 의해 설립되었습니다. 최초의 서원은 주세붕(周世鵬,1495~1554)이 고려 때 처음으로 성리학을 소개한 안향(安珦,1243~1306)의 옛 집터에 세운 백운동 서원입니다.

 퇴계 이황(李滉,1501~1570)이 백운동 서원의 격을 높이고 나라에 널리 알리기 위해 서원에 서적과 편액, 토지와 노비를 내려줄 것을 조정에 건의하였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사액과 함께 서원의 노비와 학전에는 면역과 면세의 특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이로써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 사원이 된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향 기능과 교육 시설로의 강학 기능을 하고 있습니다. 사색서원이란, 조선 시대 국왕으로부터 편액(扁額)·서적·토지·노비 등을 하사받아 그 권위를 인정받은 서원을 말합니다!

 

 

 이후 서원은 명종 때의 초창기 발전을 거쳐 선조 때 사림이 정치의 주도권을 잡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설치되어 명정 이전에 건립된 것이 29개소, 선조 때는 124개에 이르렀고, 당쟁이 극심하였던 숙종 때는 1개 도의 서원이 80~90개소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서원이 후학양성과 제향의 기능을 벗어나 정치 세력의 기반으로 폐단이 생겨나고 폐단은 끊이지 않고 계속되어 1864(고종1)에 흥성대원군은 사액서원이 아닌 것은 철폐시키는 서원 철폐령을 내렸으며, 사액서원 중에서도 일인일원(一人一阮) 원칙에 따라 모범이 될 만한 47개 서원만을 남기고 모두 철폐하였습니다.

 

 수많은 서원들이 남아있지만 그중에서도 세계유산 잠정목록에도 포함되어있는 삼산서원, 옥산서원, 도산서원, 덕천서원을 향해 떠나볼까요?

 

 

 

▲ 옥산서원(좌) ,내삼문(우) 

 

 

도산서원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옥산서원은 성리학의 거두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서원입니다. 경상북도 경주시에 있는 옥산서원은 1967년 사적 제154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임진왜란 때도 변화를 면하고,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때도 제외되어 보존되었으며, 6·25 당시 치열한 격전지였음에도 그대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서원의 정문인 외삼문은 역락문으로 논어<학이>편에 나오는 벗이 멀리서 찾아오니 즐겁지 아니한가 (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입니다. 서원에 있는 문들의 의미를 보고 있으면 그 시절에 지내시던 선생님은 어떤 마음가짐으로 생활하였을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 이언적 기적비각    ⓒ다음 블로그

 

 

 

  이언적에게는 정실 부인에게 아들이 없어 양자를 들이고 둘째 부인에게서 낳은 아들 이전인이 있습니다. 옥산서원을 건립하는데 아들 이전인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이언적이 유배지 생활을 할 때에도 책을 쓸 수 있도록 유배지에 따라와 많은 시중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서자라는 이유로 옥산서원에 출입이 거부되기도 했습니다. 이언적은 둘째 부인에게 재산을 주고 서자인 아들에게도 독락당을 물려줍니다! 서얼 차별 철폐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옥산서원이 이렇게 서얼소통을 시작하자 더는 서얼소통을 가로막을 힘을 잃게 되고 최종적으로 서원 전체에 서얼이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하게 됩니다. 이 때문에 조선 초기부터 조선사회의 부조리 중 하나였던 서얼 차별은 그 막을 내리게 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작은 행동으로 보이는 선택 하나가 조선 사회를 느리지만 크게 바꾸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전인 기적비각은 이렇게 승산이 없어 보이는 싸움에서 이겨내고 후손들에게 서얼 차별의 굴레를 벗게 해준 이전인의 은공을 기리기 위한 비각이라 할 수 있으며 서자의 신분이면서도 결국 아버지 이언적의 명예를 지키고 옥산서원을 통해 아버지의 학문을 널리 알리고 계승시켜 나간 이전인의 기적을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 도산서원 전경

 

 

 

 도산서원은 도산십이곡에도 잘 나타나듯 자연의 아름다움을 찾고 학문에 매진하였던 퇴계 이황을 모신 곳입니다. 사적 제1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을 가르쳤던 계상 서당이 너무도 옹색하여 지금의 도산서원 아래에 도산 서당을 지었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이 세상을 떠난 후 그의 제자들에 의하여 1574년 도산서당 뒤쪽에 건립되었고, 이듬해에 사액을 받았습니다. 도산서원 역시 서원철폐령 당시 훼철되지 않고 남아있는 서원 중 하나입니다.

1610(광해군2)에는 김굉필·정여창·조광조·이언전 등과 함께 문묘에 종사 되었고, 이들을 동방 5이라 합니다.

 

 도산십이곡은 도산서원을 짓고 인간속세를 떠나 자연에 흠뻑 취해 사는 생활을 노래한 것으로 총12수로 전반부 6수는 자연의 감흥을 내용으로 하는 '언지'이고 , 후반부 6수는 학문수양의 자세를 노래한 '언학'입니다.

 

 

이런들 엇더하며 뎌런들 엇다하료

초야우생(草野愚生)이 이러타 엇더하료

하물며 천석고황(泉石膏?)을 고텨 므슴하료

 

연하(煙霞)로 지블 삼고 풍월(風月)로 버들 사마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病)으로 늘거가뇌

이 듕에 바라는 이른 허므리나 업고쟈

...

 

 

  자연과 벗삼아 함께 살아가고 싶어하는 이황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안동의 도산서원을 가게되면 이황이 도산십이곡을 쓸 수 밖에 없었던 자연의 아름다움을 같이 느껴보고 싶네요 ^^  

 

 그러나 여기서 tip!  도산십이곡을 지금의 서정시로 여기면 안된다고 합니다. 가곡의 노랫말을 지은것으로 남녀노소가 함께 불러도 좋은 건전가요로 보급시키고자 하는 의욕에서 창작된 것입니다.  도산십이곡의 발문에는 '아이들로 하여금 춤과 노래를 하게 하였다.'기록된 점을 보아  학문과 자연을 주제로 아이들이 춤을췄다니 얼마나 건전했을지 상상이 됩니다. 과연 어떤 춤을 추고 어떤 가락으로 불렀을지 궁금하네요. 더불어 문학적 가치로도 뛰어나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있답니다.

 

 

 

 

▲ 남명 조식 초상(좌), 덕천서원(우)

 

 

 

덕천서원의 처음 이름은 덕산서원이었습니다. 1609(광해군1)덕천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지만, 옥산서원, 도산서원과 함께 삼산서원의 하나로 불립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모두 불타고 말았지만 1602년 사림에 의해 중건되었으며, 흥성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1870년에 훼철되었다가 지방 유림에 의하여 다시 한번 중건되었습니다.

 

 

   "전하의 국사가 잘못된 지는 이미 오래입니다. 나라의 근본도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났으며, 백성의 마음 또한 이미 전하에게서 떠났습니다. 비유하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 벌레에게 속을 파먹혀 진액이 이미 빠지고 말라 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불어 닥치면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위험한 상태에 이른 지가 오래입니다.”

 

 

  이는 목숨을 걸고 상소를 올려 왕과 대비를 진노케 하였던 남명 조식(南冥 曺植,1501~1572)<을묘사직소>입니다. 벼슬길에 오르지 않으면서도 당시 조정의 중신들 모두를 두렵게 만든 지식인으로 벼슬길에 나서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였습니다.

 남명은 항상 몸에 성성자라는 방울과 내명자경內明者敬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이 손잡이에 새겨진 작은 칼을 지니고 다녔는데, 이는 자신의 수양을 닦는데 힘써 항상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다닌 성리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철저한 자기 수양과 더불어 왕에게도 거침없이 직언하는 모습은 선비의 기개가 느껴지기에 충분합니다.

 

 벼슬길에 오르지 않고서도 많은 후학을 양성해낸 남명의 모습을 통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사회적 지위에 얽매이지 않고 올곧이 자신의 학문에 힘쓰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현실을 판단할 수 있는 통찰력이 우리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서원에 배향되어 지금까지 남아있다는 자체가 배향된 인물들 모두가 학문뿐만이 아닌 그들의 인품과 덕성도 높이 평가되어 후학들에 의해 세워진 만큼 더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교육적 기능으로 서원은 산수가 수려한 곳에 있어 주변 전경 또한 훌륭한데, 단지 지역의 문화재로만 남아있어 발길이 뜸한 현실이 안타깝습니다.

 

  제향 공간으로만 사용되는 서원이 아닌 강학 공간, 교육의 장으로 더욱 발전시킬 수 있는 서원이 되어 멀게만 느껴지는 문화재에서 벗어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느 한 초등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바른 몸가짐을 학습하기 위해 성성자 체험활동을 시행한 바가 있다는데요, 요즘과 같이 가슴 아픈 기사들을 접하다 보니 유년시절부터 산 좋고 물 좋은 서원으로 가서 공부해보는 체험활동도 좋은 경험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각각의 서원마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고 조선 시대에 많은 서원이 생겨난 만큼 다양한 역사가 있습니다. 살아있는 역사공부를 직접 가서 느끼며 알아보는 시간은 어떠신가요? 서원이라고 하면 '도산서원'밖에 몰랐었는데 서원에 대해 좀 더 알게 되었고 또한, 조선 후기를 이끈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이념적 사상도 알게 되면서 남명 조식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대학생 시절 내일로 여행으로도 많은 지역을 두루 돌아다니게 되는데 서원을 중심으로 인물과 역사를 배워가는 시간도 좋을 것 같습니다. ^^

 

  

<참고도서 및 사이트>

조선의 서원, 가람기획, 이호일

문화와 역사가 여행을 만나는, 그곳, daum블로그

한국의 서원세계유산 잠정목록 등재 확정, 문화재청 홈페이지

네이버 지식사전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