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35 - 송나라 금과 협력해 요를 멸한후 금에 패해 황제가 포로로 끌려가다!
먹는 나이는 거절할 수 없고
흐르는 시간은 멈추게 할 수 없다
생장(生長)과 소멸(消滅)
성(盛)하고 쇠(衰)함이 끝나면
다시 시작되어 끝이 없다
장자(莊子) 에 나오는 말인데.... 옛날에 석가모니도 “생노병사(生老病死)” 라고 했으니 무릇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 것인데, 이는 생명체에만 해당하는게 아니고 나라도
마찬가지로, 나라가 세워지면 성장해 전성기를 누리다가 쇠퇴해서는 결국 망하게
되니... 송나라도 1차로 망해 남송이 되고, 2차로 원나라에 망해 역사 무대에서 퇴장합니다.
당나라와 오대십국에서 절도사들의 폐해에 대한 반성으로 문치주의를 택한 송나라는 교양
과 지식을 갖춘 사대부가 우대를 받았으며 당나라 고문 부흥이 송대에 성공해 중당시
를 이었으니 수많은 시인들이 출현했는데 그 중에 여류 시인 이청조(李淸照) 가 유명합니다.
그녀는 송나라 말기 산동에서 태어나 금석학자 조명성과 결혼해 호를 이안거사(易安居士) 즉 '편안
하게 지내는 사람' 이라고 했으니, 시(詩)와 사(詞)도 고적한 규중생활이나 남편에 대한 사랑과
그리움을 노래하다가 금나라 침공으로 피란중 남편을 여의고는 신세한탄과 애상적인 시로 바뀝니다.
그녀는 술을 너무나도 좋아한 애주가였으니 술에 대한 시가 50수가 넘는데 하기사 당나라 시대
지어진 5만수 시 중에 술은 10% 나 되고 이백은 1,500수 중에 170수, 두보는 1,400수
중에 300수에 도연명도 술에 대한 시가 많았다니 유독 그녀만 별난 것은 아닌가 본데 그녀
의 시 중에 여몽령(如夢令)은 남송편에 적기로 하고 오늘은 沈醉不知歸路(심취부지귀로) 입니다.
몾있겠어 개울가 정자에 날저물 무렵
너무 취해 돌아오는 길도 잊었었지
실컷 놀고 뒤미처 배로 돌아오다가
실수로 연꽃속에 갖혔었지
북송(北宋)은 960년 오대십국시대 다섯번째 나라인 후주(後周) 의 신하 조광윤(趙匡胤) 이 후주
의 황제로 부터 선양(宣揚)을 받아 건국한 한족 (漢族) 왕조이며 수도는 개봉(카이펑) 인데
그가 송주(宋州)에 절도사로 부임했기 때문에 나라 이름을 송나라라고 했으며 960 ~ 1127년
까지 존속했지만..... 남송 1127 ~1279년을 합쳐 송(宋)은 960~1279년까지 319년간을 말합니다.
당나라 시기에 선발 관료제가 정착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으나 655년 한해 동안 겨우
44명만 합격했으며, 측천무후때는 기존의 무천진등 지배 가문을 바꾸기 위해 활성화되어
매년 수백, 수천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왔으나 거의 대부분은 진사(進士) 자격만 받고는
지역에 명사로 대접받는 걸로 끝이었으며 실제 관료로 임명되는 것은 1~2% 에 불과했습니다.
측천무후 이후의 과거제 관료 발탁은 연 평균 23명에 불과했고 황소의 난 이후 절도사의 흥기로
정부가 마비되면서 과거제가 유명무실해졌는데, 송나라는 수많은 과거시험 합격자에게
실제로 관작을 주었으니 혁명이자 급진적인 사회 발달이었는데 수,당 시기 부터 이어진
관롱집단 귀족층 계급을 와해시켰으며... 부르주아 신사층으로 대체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송은 천민 계급을 폐지해서 진정한 황제 밑의 평등을 이룩하게 되는데 당나라에서 범죄자
와 외국인을 제외한 자유민을 노예로 삼는 것을 금지하긴 했으나, 자기 자신을 스스로
노예로 파는 행위와 외국인과 소수민족의 노예화를 허용한데 비해 송은 노예 매매를
불법화하고 자유인이 자신을 노예로 팔거나 스스로 노비로 전락하는걸 금지시켰습니다.
송이 개국할 무렵 인구는 5천만이었는데 생산력의 급증으로 경제가 발달해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1억명을 넘었고 수도 개봉은 인구 130만으로 세계 최대 도시로, 유통이 늘어나니
화폐로 '천희통보' 를 매년 엄청 찍어내도 수요를 따라잡지 못했으며 원거리는 어음을
발행했고 1024년 세계 최초의 지폐인 "교자" 가 발행되었으며 근대적 회계방식인
복식부기를 시행했으니 일본 후지와라 정권에서도 중국의 화폐를 배에 실어가서 썼다고 합니다.
태조 조광윤은 10국의 잔존 나라들인 후촉, 남평, 남한과 남당을 멸망시켜 중국의 대부분을 차지
하고 죽으니 동생인 후계자 태종 조광의가 오월과 북한을 멸망시키고 천하통일을 했으나 그후
2차에 걸친 대요(遼 거란) 북벌이 실패하고 요나라와의 일전에서 대패해 군사력을 소진했습니다.
요나라는 1004년에 성종 야율융서가 200,000명이 넘는 대군을 동원해 파죽지세로 전주까지
밀고 내려오니 송 조정은 대군의 남하에 기겁해 천도론이 대세가 되자, 진종은 구준의
진언을 받아들여 전주에 친정해 요 성종의 기세를 꺾는데 성공했으며 이후 전황이
소강 상태가 되자.... 결국 송과 요는 전연의 맹(澶淵之盟) 을 맺게 되었고 요군은 철퇴합니다.
전연의 맹(澶淵之盟) 은 송과 요는 형제 관계가 되며 송은 요에게 매년 비단 20만필과 은
10만냥을 세폐로 지급한다는 것이었으며, 이후 평화롭게 성장해 나가던 송(宋)에
새로운 적국이 생겼으니 탕구트계 민족이 세운 서하(西夏) 였는데 이원호가 즉위한
뒤 부터는 송은 호수천 전투 등에서 패전을 거듭하는 중에 범중엄이 몇 번 막아냅니다.
서하는 고작 10만에 불과한 적은 병력으로 100만 대군 중에 60만 이상을 전선에 투입한
송을 몰아붙였지만 전쟁이 장기화 되자 전에 받았던 세폐와 조공 무역이 끊겼으니,
약탈물 정도로는 물자 부족에 허덕이게 되자.... 결국 송의 인종과 서하의 경종 이원호는
불편한 타협을 받아들이고 세폐와 조공 무역을 부활하는 것으로 전쟁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송나라가 고전한 이유는 석경당이 거란에 연운 16주를 바친 때문에 요나라는 만리장성
이남에서 세력을 기르다가 바로 평야지대로 내려올수 있었고, 두 번째는 당나라
에서 절도사의 폐해로 문치주의를 택한 결과 장수와 병사가 서로 분리됐으며
세 번째는 거란이나 서하가 이미 부족을 통합해 강대한 국가가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흐르고 다시 서하와의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자.... 송나라는 문치주의 인지라
총사령관을 무신이 아닌 문신으로 심괄(沈括)을 추천하는데, 그는 송나라 학자
로 박학다식해서 온갖 저술을 해 온 만물박사이자 대학자로 1080년 부연로경락
안무사(延路經略安撫使)로 임명되자 군비를 정돈해서 서하의 침입을 막아냈습니다.
이 전투의 승리로 기세가 오른 송나라는 다음 해인 1081년 서하의 내분을 틈타 아예 이번참에 서하
를 멸망시키려고 했으나, 지휘관끼리 단합이 되지 않았고 사령관 중 하나였던 이헌이 환관이었던
점 등으로 북송군 내부 문제가 심각하여, 서하군의 역공을 받아 실패하게 되니 오로벌하 전투입니다.
이원호와 “경력의 화의” 이후 세월이 흐르면서 북송과 서하 사이에 산발적인 충돌이 일어나는
데, 1066년 서하의 의종 이량조가 북송을 공격했으며 북송의 영종이 즉위하자 서하가 오종을
파견하나 북송 측에서는 오종의 태도가 맘에 들지 않아 이량조에게 적절한 조치를 취하라고
하였는데...... 이에 불만을 품고 서하군이 진봉과 경원 일대를 공격하여 많은 피해를 입혔습니다.
이에 맞서 북송 조정에서 서하에 대한 세폐 지급을 중단해야 한다는 논의가 나오고, 연주
지주 육선과 한기가 이에 동조하였으며 한기는 더 나아가서는 접경 지역의 호시도
중단해야 한다고 하자 1067년 서하가 북송에 사죄했으며, 또한 충악이 조정의 승인
도 없이 숙주성을 공략하니 서하군이 반격하여 보안군이 많은 인명 피해를 보았습니다.
이후 신종 시기인 1068년 왕소가 평융책 세편을 지어서 올렸고 이는 신종과 왕안석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한동안 방치되다가, 1071년이 되어서야 왕소는 군사적
인 행동을 개시하였는데, 1073년까지 희, 민, 탕, 하, 조 등을 수복하였고, 하황(하서
주랑) 일대로 영토를 개척함으로써 서하를 양면으로 공략할 태세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이후 1081년 서하에서 이병상이 북송과 화친하려고 했으나 양태후에게 감금되는등 내분
이 생기자 송나라 신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라 여기고 서하를 지도 상에서 없애려고
하였으니..... 이헌과 충악, 왕중정, 고준유, 유창조 이 다섯 명으로 하여금 서하를
정벌하게 하였으며 그리고 토번으로 하여금 서하의 우측을 견제할 것을 명하였습니다.
작전은 이헌은 희하로, 충악은 연로, 고준유는 환경로, 왕중정은 하동, 유창조는 경원 이렇게 진군
함으로써 서하 수도 흥경부를 함락시키고자 하였으나... 그러나 북송군의 문제가 심각하였으니
하나는 지휘관중에 이헌이 환관인데다가 다른건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오로 중에 이헌은 대장 이호를 선봉으로 린타오 현에서 출발하여 마빙산을 넘어 강고성
에 이르렀고, 다시 서시신성을 취하여 9월 2일 난주를 공격하여 수복하니 이헌은
성안에 사령부를 두고 난주를 세웠고 이호는 지주로 삼았는데..... 이듬해 정월, 북송
조정은 희하로를 희하난황로로 바꾸었으니 이로써 난주는 북송의 판도에 편입되었습니다.
충악은 부대를 이끌고 무정하를 따라 서쪽으로 진격하여 파죽지세로 징군했으니 서하의
미지, 석주, 하주, 인주 등지를 차례로 공략하였지만 군량미 공급이 끊기고 폭설까지
겹치면서 3분의 2가 죽었고, 환관 왕중정의 군대는 몇리만 행군해 놓고 국경지대
에 이르렀다고 허위 보고를 하였으며 양식이 다하여 6만명 중에 2만명이 아사했습니다.
그리고 경원로의 유창조 부대는 용맹하게 싸워 승세를 몰아 영주성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고준유는 공성기구가 부족하고 병참이 부족한 상황에서 유창조에게 직접 성을 공격
하라고 명령해 18일간 포위 공격을 하는중 서하군은 황하 수로를 방류하여 송군의 진영
을 침수시키고, 군량과 급료의 길을 끊음으로써 송군 병사들은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습니다.
비록 이 원정은 실패하였으나 북송군은 은, 석, 하, 유제주와 횡산 북쪽의 군사 요점만은 점령하여
서하가 횡산 연변 지대에서 200여리를 감히 경작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그리고 이 대규모 원정은
엄청난 군사비를 지출해야 했으니 왕안석 신법때 모았던 재정이 악화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원정은 실패로 끝났는데 그 원인을 보자면 명령 체계가 통일되지 않았던 점이 가장 큰
문제였고 다음으로는지휘관 중에 이헌과 왕중정은 환관이었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로는
군량 보급이 원활하지 못했던데다가 마지막으로 서하의 청야전술이 한 몫 했다고 여겨집니다.
오로벌하 전투 2년후인 1083년 북송과 서하 사이에서 또 전투가 벌어지니 영락성 전투라 부르는데
송나라 신종은 저 오로벌하 전투에서 병력을 나누어 진격한게 문제였다고 보고 이번에는 한
방면으로 모든 군대를 이끌고 진군하고자 하니 이전에 영락성을 건설하였던 충악이 이에 반대합니다.
영락성은 수원 부족 등의 문제가 심각하였기 때문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희와 심괄 등은
영락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고 신종은 이에 적극 찬동했는데.... 이에 서하군이 대대적
인 공세를 가하자 영락성은 함락되고, 서희는 서하군과의 난전 중 전사하였으며 여기서
충악은 영락성이 공격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관망하였고 그 해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전투 패배후 신종은 신하들 앞에서 크게 통곡하였고 서하가 여전히 강한 상대임을 깨닫게 되었는데...
서하도 경제적 피해가 만만치 않았고, 송나라에서 신법당 실각 이후 구법당이 집권하자 하황(하서
주랑) 일대를 토번에 넘겨주게 되는데 신종은 서하를 이기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영락성 전투 패배 43년 후인 1126년 북송이 여진족의 금나라에 패하여 수도 변경(카이펑, 개봉)이 함락
되고 송의 황제였던 휘종과 흠종을 포함한 황족들이 모두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을 “정강의
변” 이라 하는데 중국 역사에서 영가의 난, 토목의 변과 함께 한족 왕조의 3대 굴욕 사건으로 거론됩니다.
1115년 북만주 흑룡강 하얼빈에 거주하던 여진족의 완안아골타가 통일국가 금을 건국하고 쇠락해 말기
현상을 보이던 거란족의 요나라를 크게 쳐부수자.... 북송의 황제 휘종은 요(遼)에게 바치던 공물을
금(金 에게 바치면서 협공을 제의하자 금나라 입장에서 손해볼 것이 없는 제안이라 이를 수락했습니다.
이 동맹 소식을 들은 고려측은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여진족은 거란족과 뿌리가 별반 다르지
않아 그 신뢰성 또한 마찬가지라며 여진족과 손잡아선 안 된다고 조언했으나 송은 “ 이이
제이(以夷伐夷)” 라고 간주한데다가 또 “적의 적은 우리 편” 이라는 생각에 이를 무시했습니다.
당시 휘종과 송나라 조정은 여진을 이용해 거란을 제압하고, 숙원인 연운 16주를 회복
하여 북송의 입지를 강화시키려는 손 안대고 코 푸는 달콤한 생각이었지만....
그러나 당시 송군은 병력만 많았을 뿐 내부적인 여러문제로 허약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북송때 "좋은 철은 못으로 쓰지 않고, 훌륭한 인재는 군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라는 말까지
있었고, 이 때문에 질 나쁜 범죄자들이 주로 병사가 되었기에 규율이 잘 서지 않았으며
주력 부대는 보병이었으니 기병을 기르기 어려웠던 이유는 주요 목초지인 당나라
말과 5대 10국 시대에 연운 16주 등을 요나라에 빼앗기면서...... 상실해 버렸기 때문 입니다.
특히 북송은 기본적으로 문치 위주의 통치방식이다 보니 군대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약했고 심지어 전시상황에서도 군대가 중앙정부에 휘둘리는 모습을 보였으며,
거기에 북송은 방랍의 난을 간신히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은 피해도 제대로 회복
되지 않은 상태인지라 말기 현상을 보이는 요나라 조차 이길수 없는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송은 금나라로 부터 협공하기로 맹세한 뒤에도 무너져 내리던 요나라를 상대로도 패퇴하던
한심한 모습만 보여주었으니..... 심지어 요군은 제대로 된 군대도 아니고 금나라의 침략을
피해 도망쳐 온 거란족 피난민들로 이루어진 수군(瘦軍) 이라는 임시 군대에 불과했는데도
수천명의 수군(瘦軍)에 10만명의 송군이 패배하고 쫓겨났으니 얼마나 허약했는지 알수 있습니다.
협공하자고 해놓고 제대로 된 승전 하나 없는 송나라의 행태를 본 금은 분노할수 밖에 없었으니....
임진왜란때 왜군이 부산에서 걸어와도 20일 넘게 걸리는 서울을 그 20일만에 내주자 조선이
일본군과 짜고 길을 인도하고 있다고 오해한 명나라 처럼, 송나라가 일부러 진군을 늦추고 금나라
와 요나라 사이에 어부지리(漁父之利)를 노린다고 생각하여 괘씸한 마음에 사신을 보내 항의합니다.
송은 고려가 몽골의 9번 침략 때 마다 재물과 음식을 들려 사신을 보내 철군하면 왕이 입조하겠다는
거짓 약속으로 순간만을 모면하려고 했듯, 마음에도 없 는“연주 6주(송 연산부)의 토지만 챙기는
대신 연주 내의 모든 재물과 금이 공략한 운주를 양도하고 공물을 더 바치는 조건을 제시” 하여
숙이고 들어가니..... 금도 이런 송의 태도에 만족해 화를 풀면서 당장의 갈등은 일단 해소되었습니다.
자고로 2곳(두 나라) 에서 동시에 전쟁을 하지 말라고 했거니와 이후 1125년에 거란족의 요나라는
여진족의 금나라와 송나라의 남북 협공 속에 무느지니, 마지막 황제였던 천조제가 금나라 군대에
포로가 되어 금나라 수도로 압송되면서 잔당은 서쪽으로 달아나 카라키타이(서요)를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요가 멸망하자 북송이 원래 마음에 없는 약속이었던지라 입을 싹 닦아버렸다
는 것이었으니.... 송이 금에게 바친다는 공물은 바치지도 않고, 오히려 이미 거덜난
요나라의 천조제와 접촉하여 금의 내분을 조장하는 정치공작을 폈다는 게 드러난 것입니다.
송은 그나마 당나라 시절에, 당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거란이 당과 연합(용병?) 하여
고구려 수도 평양을 함께 함락시키고 전리품으로 고구려인과 말갈인을 다수 잡아
거란의 수도 영주로 데려오는등 중화의 문물에 감화된 거란족의 요나라를 비록
이민족이라 할지라도..... 어느정도 수준에 도달한 국가라고 인식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송은 외지인 북만주 송화강 유역에서 일어난 완안부 여진족의 금나라의 경우는
단순히 미개한 야만족의 집합체 그 이상으로는 보지 않았으니... 실제 같은 북방민족
이라 하더라도, 오랫동안 중국과 교류하며 거대한 행정국가를 운영해온 거란과,
이제 막 부족연맹체 단위에서 초기 국가로 거듭난 금나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습니다.
고려인들 또한 여진족을 자신들과 동등한 인간이라 여겨준 적이 없었으니 왕건은 "여진족은 겉은 사람
처럼 생겼지만 속은 짐승 같아서 배 고프면 와서 붙고 배 부르면 등 돌려 가버리니 도무지 믿을
수가 없는 족속들이다" 라며 그들을 성안에 들이지 말고 성밖에 관사를 지어서 대접하도록
명했으니 하물며 동시대 세계 최고수준의 문명국가임을 자부하는 송나라인들의 눈에 여진족들이야.....
조선 인조가 군사력도 기르지 않은채 무책임하게 만주족(여진족)을 무시하다가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을 맞았듯 송나라도 마찬가지니 군이 오합지졸인데도 금나라를 무시했으니.... 1126년 2월
송의 지방관 한명이 공을 세우겠답시고 지나가던 금나라 사신단을 공격했는데, 이때 송나라
장군 이간과 보병 2,000명은 금나라 호위무사 17명에게 쫃겨났고 금의 사신은 제갈길을 갔다고 합니다.
이때 금나라 호위 무사 17명은 중앙에 7명, 양익에 5명씩 배치하는 진까지 짰다는데, 사실 송군
2천명이 줄기차게 공격했으면 중과부적으로 사신 일행이 몰살당했겠지만, 오합지졸인
송군은 애초에 진을 짜기는 커녕 금 기병들이 양익에서 궁시를 닐리고 중기병 7명이 대열을
짓밟자 장창으로 버티기는 커녕 멘붕상태가 되어 자기들끼리 밟고 도망가며 와해돼 버렸습니다.
임진왜란 용인전투에서 전라관찰사 이광과 충청도등 7만 대군이 왜군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1,600명
에게 무참히 패배해 도주한 것이나..... 병자호란에서 인조가 남한산성에 포위됐을 때 경상 좌병사
허완과 우병사 민영의 1만(4만?) 이 광주 쌍령에서 청군 기마대 300기(후방에 3천기 정도!) 의 돌격
으로 지휘부가 전원 죽는등 몰살당하고 병사들은 죽거나 흩어져 달아난 것 같은 일방적인 전투입니다.
송군 이간의 2천 중에 사상자가 1,000명인데 싸우다가 죽은게 아니고 용인전투나 쌍령전투
처럼 자기들끼리 밟혀 죽었으니.... 그중 금군과의 전투로 발생한 사상자는 채 100명이
안된다는 점에서 수준을 알 수 있으며 게다가 해당 기록은 금나라도 아니고 송나라 사람
서몽신이 쓴 “삼조북맹회편 三朝北盟會編)” 권36, 정강(靖康) 원년 2월에 나오는 기록입니다.
그러니까 저 기록은 승리자가 멋대로 부풀린 이야기가 절대 아니며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닌게...
금은 이 전투를 보고 송군의 상태가 형편없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다음해 20만 대군을 동원해
수도 카이펑(개봉, 변경)을 공격해서는 휘종과 흠종을 포로로 잡는 “정강의 변”을 일으키게 됩니다.
송의 배신에 분노한 금은 바로 군대를 파견했으니 막으러 나온 북송의 군대를 격파하고 수도인 변경을
포위했는데, 그 와중에도 정신 못차리고 사치와 도교에 심취하던 휘종이 곽경이라는 도사인척 하는
사기꾼에게 홀려서 고려가 강화도에 숨어 8만대장경을 지어 부처님의 힘으로 몽골군을 물리치려고
했듯 “육갑신병” 이라는 진법을 세우면 막을수 있을 거라며 자만심을 보이다가 어이없이 박살이 납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원인제공자였던 휘종은 재빨리 장남 흠종에게 양위하고 남쪽으로 피난가서
책임을 회피했고, 흠종은 얼떨결에 제위를 물려받자 이강이 개봉에서 금군을 막아내고 구원군
들이 몰려오는 판세하에서 태원부, 하간부, 중산부의 하북 및 하동 영토 할양과 금 1천만냥,
그리고 은 2천만냥, 비단 1천만필 배상금 지불 조건으로 화의를 맺어 일단 금나라는 철수합니다.
흠종은 이러한 사태의 주범인 동관, 양사성, 채경, 채유, 주면 등 간신들을 유배하거나 처형
했으니, 아버지 휘종보다는 좀 나은듯한 행동을 보였지만 귀가 얇은 탓에 주전파 대신들
의 의견에 찬동해 주전론에 불을 지펴버렸고, 조선 인조가 병자호란을 불러왔듯이....
금과 한 약속을 파기하자 이 소식을 들은 금은 분노해 포위만 하던 이전과 달리 수도를
공략하였고 1126년 11월 변경(개봉) 이 장장 8개월 이상의 공방전 끝에 결국 함락됩니다.
함락된 수도 변경에서 금나라군은 송조의 재상 장방창을 협박해 괴뢰정권인 초(위초)
의 황제로 즉위시켰으며, 휘종과 흠종은 사산조 페르시아에 포로가 된 로마 황제
발레리아누스나 의자왕이나 보장왕 처럼 북송의 황족 및 관료 3천명과 함께 끌려
가는데 그외에 대량의 서적, 보화, 재물, 보물, 그림 등과 함께 북방으로 끌고 갔습니다.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자면 송나라는 병력은 많지만 문치주의라 장수들의 권한이 없이 문신들의
지휘를 받아 훈련이 안된 오합지졸이고, 요나라는 쇠락해 망해 가는 조짐을 보이며 사나운
여진족은 불같이 일어나니 송은 그간 요나라에 농락당한 원한을 잊고 냉정하게 판단해서
약자인 요나라와 연합해 솥의 세발 처럼 3자간 균형을 이루었다면 망하지 않았을수도 있었을까요?
오늘날에 본다면 한국이 제3국의 침략 위협에 직면한다고 칠 때 6. 25를 일으켜 동족을 살해한 저
무도한 북한과 연합을 한다든지 또는 반대로 북한과 중국, 러시아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일제 36년의 원한을 깨끗이 버리고 진심으로 화해해 일본군과 연합해서 대적하는게 어려운
것 처럼.... 당시 송의 조정에 저런 냉정함과 실리를 기대하는 것은 역시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이때 변경(개봉)에서 붙잡힌 송조의 관료와 황족들은 금나라의 강요로 인해 장방창의 즉위
를 지지하는 서명을 강요당했는데 이 와중에 딱 한 사람만이 '송나라의 황성이 될 수
있는 건 조씨뿐이다.' 라며 반대했는데, 이 충성스러운 인물이 바로 훗날 악비에게
누명을 씌워 처형되게 만드는 중국의 최대 간신인 진회이니 아이러니가 아닐수 없습니다?
이로 인해 송은 한 차례 멸망하고 수도 변경을 비롯한 화북 지역은 금나라의 점령하에 들어
갔으며 금에 의해 강제로 세워진 장방창의 위초는 괴뢰 국가로서 송의 백성들에게 인심을
사지 못했으니, 이에 금나라로 끌려가지 않았던 철종의 폐후 소자성헌황후 맹씨를 복권
시켰으니 장방창은 그녀를 다시 황태후로 복위시켜 이를 통해 정통성과 적법성을 노렸습니다.
하지만 황태후는 친필서한을 써서, 흠종의 동생이자 수도 변경에서 떠나 제주 지방에 있던
강왕 조구에게 보냈으니 이 서한을 통해 강왕이 선양을 받아 즉위하니, 송고종은 즉위
하면서 '장방창은 적법성, 정통성, 명분이 없으며 강왕이 어서 빨리 천자 자리에
올라야 한다' 는 소자성헌황후 맹씨의 친필서한을 읽고 이를 하늘에 고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강왕이 고종이 되어, 나라가 완전히 몰락하는 꼴을 겪지 않고 남쪽 제주에서 명맥
을 이어나가는데..... 그리고 강제로 황제가 되었던 장방창은 이후 탈출하여 남송에 귀순
했으나 용서받지 못하고 자살을 명받았으니, 아무리 본의가 아니며 강요받아 강제로
된 것이라 하지만 고종 입장에서는 감히 제위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큰 죄였던 것입니다.
고종도 처음엔 장방창을 귀양보내려 했으나 장방창이 휘종의 후궁인 화국정공부인(華國靖恭夫人)
이씨와 간통으로 의심되는 짓을 하고 궁중에서 멋대로 술을 마시거나 황제만이 할수 있는
사면령을 내리는등 행위를 했음이 밝혀지자 더는 용서하지 않고 자살을 명한 것이며 후궁 이씨
역시 장형을 받고 작위를 박탈당하여 군영에서 잡일을 하는 벌을 받았으며 얼마 안가 죽었습니다.
이런 송의 움직임에 격노한 금나라는 여세를 몰아 다시 침공하여 송의 고관인 유예를 또
다른 괴뢰국가인 제(위제)의 황제로 세우니 고종은 저항했지만 송의 군사력으로는
대항할수가 없었으니 피난을 떠나니 금은 장강을 건너 고종을 추격하여 양주, 남경,
임안(항주), 월주(소흥), 명주(영파)를 잇달아 점령하고 일군은 강서성까지 진격
했으며, 도망친 고종을 온주에서 급기야 해상으로 내몰아 전 중국을 정복할 기세였습니다.
하지만 금은 건조한 땅인 화북과는 다른 강과 하천이 많은 화남의 기후, 지리에 악비, 한세충 등을
주장(主將)으로 송군의 반격, 벼락출세한 여진족들이 화북을 점령해 통치하면서 살육과 약탈을
하도 저질러 화북 전체를 초토화시켜 버리는 바람에 일어난 한족들의 반란등으로 고전하게 됩니다.
그러는 중에 금은 관중을 점령하고 사천성 입구 까지 침입하는 등 금과 송이 장강을
경계로 에워싸고 일진일퇴를 전개하였지만 이후 불리한 금이 개봉 및 황하
이남을 포기하고 다시 하북으로 퇴각하려고 했는데 뜻밖에 진회가 도와줄줄이야.....
진회를 위시한 송의 화평파는 악비등 주전파를 배제시키고 금과 강화를 체결하는데, 이로써
회하에서 부터 대산관 까지를 경계로 삼아 유예의 위제를 폐하고 금나라가 정식으로
화북을 통치하게 되어 중원 대륙은 본격적으로 “2차 남북조시대” 의 형세를 이루게 됩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역사는 북송이 멸망하고 남송이 시작되었다고 적는데 80여년후 남송의
권신 한탁주가 이 치욕스러운 사건을 되갚아 주기 위해 개희북벌을 일으켰으나 실패로
돌아갔고 그리고 이 사태는 금애종때 다시 몽골에 의해 훨씬 더 끔찍한 양상으로 반복됩니다.
결국 금 애종 천흥(天興) 2년인 1234년 애종의 머리는 남송 당대 최고의 명장 이자 최후의
명장인 맹공에 의해 댕강 잘려나갔고 금에 대한 복수를 하는데 100년이 걸려서야 성공
을 하였으니 이를 계기로 단평의 입락이 일어났고 남송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됩니다.
금태종은 끌려온 휘종에게 혼덕공(昏德公, 덕을 망친 공작), 흠종에게 중혼후(重昏侯, 덕을 두배로
망친 후작)란 작위를 내려 조롱했는데 이 작위는 일회용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암군에게 종종
내려졌고, 베트남의 즈엉녓레가 예종(베트남 쩐왕조)에게 이 작위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공과 후는 작위로 보자면 왕 보다도 아래니, 제왕의 지위도 강등한 것이니 엄청난 굴욕이었습니다.
또한 휘종과 흠종을 포함하여 붙잡힌 북송의 포로들은 금의 영토에서도 동북쪽으로 멀리
떨어진 오국성, 즉 현재의 하얼빈 이란현 근처에 단체로 모여서 귀양살이를 했는데
이곳이 당시 금나라 영토였던 함경도 회령이라는 설이 있으나.... 이건 한국측 사서
에서만 주장하는 이야기고 중국 학계에서는 오국성이 하얼빈에 있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거리가 거리다보니 구사일생으로 일부 인간을 넘어서는 탈출에 성공한 사람들을
빼면 대부분 금나라 땅에서 생을 마쳤는데, 탈출한 사람 가운데선 남송의 재상에 오른
진회가 악명으로 유명하니... 그 동안은 송나라 황족들이 비인격적인 학대를 받았
다고 알고 있었지만 현재는 그래도 최소한의 대우는 해줬다는 쪽으로 학설이 바뀌었습니다.
한편, 뒷날 남송 고종의 노력으로 고종의 어머니 위씨가 돌아오고 아버지 휘종의 유해
등을 비롯하여 포로로 잡혔던 사람들 대부분은 유해의 일부라도 송환했으며 현재
북한 회령 고령진역 인근 주요 지역에 황제총이 두 곳이나 있는 등 상당수의 무덤
이 남아있는데..... 모두 오국성에서 생을 마감한 황족들의 무덤들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황제총 두 곳은 오국성에서 죽은 휘종과 흠종의 무덤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오국성
의 위치가 만주 하얼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이는 단순히 지역 설화일 가능성이
크고 증거라는 것이 중국 동전 등이 나왔다는 것인데 이런 유물은 만주에서도 출토되고 있습니다.
금나라의 초창기 수도가 오늘날 하얼빈시 아청구에 위치했던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였기 때문
에 금나라 입장에서도 황족급의 중요한 죄수들을 수도와 멀리 떨어진 외딴 곳에 안치시키기
보다는 수도 가까운 곳에 수감시켜서 엄격하게 감시하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추측이라 봅니다.
휘종은 원래 금나라 영토에 묻혔다가 고종에게 유해가 돌아와 남송의 영우릉
에 묻혔는데... 그러나 채 200년도 안 지나 원나라 때 영우릉이 라마승
이자 강남석교총통 양련진가에게 도굴되었으니.... 안식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흠종의 무덤은 정확히는 회령은 아니고, 두만강 건너 만주 지역에 있다는데,
사서에서는 흠종은 오늘날의 허난 성에 매장됐다고 하며 중국 학계는
오국성의 위치를 함경도가 아닌 헤이룽장성의 이란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흠종은 송나라 예법에서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던 적장자 계승원칙으로 정통성 문제가 불거질
염려가 있다는 까닭에 고종이 거부하여 아예 송환조차 못했으니,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에 고종의 아들 영친왕의 귀국을 불허한 것과 같은 이유로 보는데 그럼 흠종
같은 불행한 사례가 대다수였고, 선택받은 소수만 유해의 일부가 귀향에 성공한 것입니다.
사조영웅전에서 구처기는 곽정과 양강의 이름을 이 치욕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지었다고 하며, 전호편
에서 전호의 부하 범권이 병주 옆에 있는 금나라에 군사를 요청하자고 말하자 농민 출신 변상이
우린 반란군이지만 금나라에게 투항해서 힘을 얻는 것은 큰 파멸을 일으킬 겁니다! 라고 말했으니
저런 농민도 알고 있고 반란군도 이런 짓을 안하는데, 그러고 보면 북송 조정은 답이 없는 인물들이라....
휘종과 흠종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는 내용이 적힌 남신기문록(南燼紀聞錄)이라는 책이 있지만 이
책이 위작이자 야사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책의 내용대로 금나라에게 학대를 받았다는 기존 주장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으며 대송선화유사에 수록된 이야기 역시 그렇게 신빙성이 높은 편은 아닙니다.
오히려 두 황제를 따라 금나라로 간 채경의 아들 채조가 기록한 북수행록(北狩行錄) 과
신음어(呻吟語) 등 다른 서적에 기록된 내용을 보면 기존에 알려진 내용과
달리 휘종과 흠종은 심각하게 비인간적인 대접을 받진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복수의 기록에 따르면 그동안 첫번째 학대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완안아골타의 차남 완안
종망(알리불)은 오히려 휘종에게 연회를 베풀며 대접했고 정충악비에서도 다른
여진인들이 포로가 된 송나라 사람들을 학대하고 능욕할때 알리불만이 동참하지
않고 심란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며 그 옆에 올출은 쓴 웃음을 짓고 있습니다.
휘종이 금나라에 도착할 때 금나라로부터 비단과 생견을 하사받았으며 금 태종의 명령으로
휘종 부자가 견양례등 굴욕적인 의식에 참가하고 폐서인 되어 평민 계급으로 떨어진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의 베이징 근처인 연산부에서 머무를 때 상당히 편하게 머물렀다고 합니다.
후에 남송에서 북진 움직임을 보이자 휘종 일가를 후방으로 이동시켰으며 이때부터 휘종 자신이
직접 초가집 지붕을 잇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등 이전보다 힘들고 궁핍하게 산 건 사실이나
역시 학대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으며 오히려 지붕 위에 올라가 자신에게 편지를 전해주러
온 하인에게 "요순도 초가집에 살며 검소한 생활을 했다." 라고 덤덤하게 말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황제시절 보다는 빈궁한 생활이었지만 송나라 사람들이 받았다는 논밭이
45경이라고 하는데 1경이 3000평 정도 되는 것을 보면 빈궁하고 고되기는
했어도 야사에서 말한 것처럼 억지로 썩은 음식을 먹고 지냈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휘종의 딸과 며느리들이 금나라 종실의 처가 되면서 금태종이 휘종에게 '''말년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제공해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칙조를 내리니, 예전에
너의 여자 여섯명을 종실의 부인으로 취했으니 말년에 필요한 것을 제공해 주고, 인척
에게는 장사를 시켜 돈을 벌어 말년에 의식이 풍족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해 주겠다는?
그대의 딸과 며느리가 궁궐 침소에서 시봉을 든 지 이미 2년이 지났는데 조심하고 경계
하여 잘못됨이 없어 은혜를 베풀어 돌보아 주고 있다. 이렇게 정숙한 자세는 본래
그대가 키워 준 것이므로 비단 10단을 내려 천자의 은총을 보여 주겠다. - 신음어(呻吟語) -
한편 금사에 따르면 비단옷을 하사하는 정도였던 것 같으며 거기에다 휘종은 금나라
에 가서도 아들과 딸을 또 낳으니..... 청나라 때 '만주 8성' 으로 불렸던
이르건기오로(伊爾根覺羅) 씨는 자신들을 휘종과 흠종의 자손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만 저 칙조를 받은 그 해에 휘종의 아들 중 한 명인 조악(趙㮙)이 아버지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금태종에게 무고했다가 휘종의 부마와 함께 맞아 죽었으며 역시 금나라에 의해
해빈왕(海濱王) 으로 봉해진 천조제의 노비들이 천조제를 무고했다가 똑같은 꼴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휘종, 흠종 등이 남송과의 관계를 감안한 금 태종의 지시로 전직 황제 취급은 받아서 대접을
받으며 지낼수 있었던 것과는 달리 나머지 황족들은 그야말로 지옥행 그 자체였으니, 휘종의 딸이
첩이나 기생이 되는 마당에 후비들이나 왕족과 귀족의 젊은 부인과 딸들은 비참한 대우를 받았으니
운이 좋은 경우에는 그나마 도망이라도 치거나 뒤늦게 유해라도 돌려받을 수 있었지만소수에 그칩니다.
운이 좋아야 황제 금태종, 금희종, 황족, 장군의 첩이 되었으며, 송나라 종실들과 수행원들도 개봉에서
금나라로 이동하면서 많은 수가 풍토병과 추위, 굶주림으로 3천명 중 2천명이 죽었다고 하는데...
휘종이 금나라에서 하사받은 옷감과 재산을 팔아 이들을 치료받게 하려 했다는 기록이 전해져 옵니다.
한편 송태종의 자손들은 원래 귀해서 수가 적었는데 개봉에 머물던 대부분의
황족들이 금나라로 끌려갔고 훗날 남송을 세운 송고종 마저 자손 없이
사망하면서 남송은 이후 송 태조의 자손들이 이후 대대로 황제가 되었습니다.
태종의 후손들 중에서도 살아남은 이들이 있으니 대표적인 인물이 남송의 재상을 지냈던
조여우로 태종의 8대손이었지만 조여우도 이 때문에 고종의 적지 않은 견제를 받다가
결국 실각했으며.... 조여우 이후 태종의 자손들 중에서 유명한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정강의 변 이후 흠종 역시 금태종의 뒤를 이은 금희종이 태종때 흠종에게 내린 중혼후
라는 모멸적 칭호 대신 천수군공(天水郡公)으로 봉해 주었으며 희종은 흠종에게
녹봉도 줬고 일부에서는 아예 희종이 흠종을 귀양지인 오국성에서 금나라의 수도인
상경회녕부로 불러와 살게 해줬으며 흠종을 너그럽게 대해 줬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당시 떠돌던 황제 일가의 비참한 말로는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한 한족 지식인들의 과장으로 보는데 후한의
헌제 유협이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고 조위 정권에 의해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촉한에 퍼졌으니, 익주민
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고 유비의 황제 즉위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인지 몇년이 지나도 소문이 정정되지
않았는데 헌제가 산양공으로 격하돼 살고 있었다는건 알수 있었을텐데도 촉에서는 계속 모른척 했습니다.
송 휘종에게는 21명의 딸(공주)이 있었는데 전원이 금나라 황족, 귀족들의 첩이 되거나 심지어
내기 상품으로 걸리기도 하고 금나라에서 운용하던 위안소인 세의원(洗衣院, 금나라 관기의
기방)에 들어가 성노예가 되버리며 심하게는 살해되기까지 했으니 그야말로 비참함의 극치
이며 황녀들이 이럴 정도이니 다른 후궁이나 궁녀들의 운명은 일일히 따져볼 것 조차 없습니다.
장녀 가덕제희(嘉德帝姬) 조옥반(趙玉盤, 1100~1140): 정강의변 당시 28세, 좌위장군 증인(曾夤)에게 출가
하여 1녀를 두고 있었는데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금나라 송왕 완안종반의 첩이 되었으며
완안종반이 반역죄로 주살된후에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고 딸은 훗날 완안올실의 3남의 첩이 되었습니다.
차녀 영덕제희(榮德帝姬) 조금노(趙金奴, 1103~?): 정강의 변 당시 25세. 좌위
장군 조성(曹晟)에게 출가하였으며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되어
완안창의 첩이 되었으며 완안창이 주살된 후에는 금나라 희종의 첩이 되었습니다.
3녀 안덕제희(安德帝姬) 조금라(趙金羅, 1106~1127): 정강의 변 당시 22세. 좌위장군 송방광(宋邦光)
에개 출가하여 1녀를 두고 있었는데 1127년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금나라 도통 완안도모의 첩이
되었으나 얼마후 살해되었고 딸은 포로가 되지 않았으니 훗날 남송의 수왕 조백규에게 출가했습니다.
4녀 무덕제희(茂德帝姬) 조복금(趙福金, 1106~1128): 정강의 변 당시 22세. 선화
전시제 채조(蔡絛)에게 출가하였으며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금나라 2황자
완안종망의 첩이되었으며 완안종망이 죽은 후에는 완안희윤의 첩이 되었습니다.
5녀 조호아(趙瑚兒)는 당시 18세로 향자방(向子房)에게 출가하였었는데 금나라의 포로
가 된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6녀 조부금(趙富金)은 18세로 전비(田丕)
에게 출가하였었는데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진주대왕 완안설야마의 첩이 되었습니다.
7녀 조교운(趙巧雲)은 17세로 유문언(劉文彦) 에게 출가하였었는데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세의원
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8녀 조영락(趙纓絡)은 17세로 향자의(向子扆)에게 출가하였었는데
금나라의 포로가 된후 완안종한의 첩이 되었다가 훗날 금동로도통 습고국왕의 첩이 되었습니다.
9녀 조원주(趙圓珠)는 17세로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가 훗날 완안종필(금울출) 첩이 되었으며
10녀 조현현(趙嬛嬛)은 16세로 완안종망(完顔宗望)의 첩이 되었다 주살된후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개천대왕 완안종현(蓋天大王)과 부하장수 서환의 내기 상품이 되었는데 이긴 서환(徐還)에게
내려져 부인이 되었고 유해는 남송으로 돌아와 화국장공주(和國長公主) 시호를 받고 장사지내졌습니다.
11녀 조선랑(趙仙郞)과 12녀 조향운(趙香雲)은 모두 16세로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했으며 13녀
조주주는 16세로 후보산대왕 완안사보의 첩이 되었고 14녀 조불보(趙佛保)는 16세로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으며 15녀 조금아(趙金兒)는 나이 16세로 금나라로 끌려가던 중 사망했습니다.
16녀 조관주(趙串珠)는 14세로 연왕 완안종준의 첩이 되었고 완안종준이 주살된 후 입궁하여 금나라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으며 17녀 조금주(趙金珠)는 12세.로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고
18녀 조금인(趙金印)은 10세로 세의원 기생이 되었다가 훗날 입궁하여 희종(熙宗)의 첩이 되었습니다.
19녀 조새월(趙賽月)은 9세, 20녀 조금고(趙金姑)는 7세로 모두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가 훗날 입궁하여 희종의 첩이 되었는데 조새월은 훗날 비(妃)에 봉해졌고
21녀 조금령(趙金鈴) 은 5세로 세의원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가 훗날 완안
설야마의 첩이 되었으며 이후 통역관 왕성체(王成棣) 에게 하사되어 부인이 되었습니다.
21명 공주를 장황하게 다 적은 것은 눈여겨 볼 대목이 있기 때문이니... 고려나 조선이 여진족
을 사람의 탈 을 쓴 짐승이자 미개한 오랑캐라고 폄하했지만 저들은 줏대가 있고 자존심이
강하니, 천하를 다스린 송나라 황제의 딸 금지옥엽인 공주라 하더라도 첩으로만 들인 것은
나를 뒤이를 자식은 여진족 여인 정실의 소생이어야 하고 너희는 노리개 첩에 불과 하다는?
조선은 첩이 다른 집에서 따로 살림을 하지만.... 중국은 첩이 본댁으로 들어와 함깨 사니 남편
이 출근하면 하루종일 정실에게 부대끼야 하며, 남편이 전쟁에 나가거니 멀리 지방으로 부임
을 하기라도 하면 몇년간 정실의 감시 속에 외간 남자와 불륜했다는 누명을 쓰고 죽기까지
하니 본부인을 진심으로 하늘 처럼 받들어 모셔야 하니 그 신세가 조선 보다 훨씬 처량합니다.
휘종은 자기 부인들과 딸에 궁녀들이 오랑캐의 노리개가 되었지만 태연한 모습을 보였는데... 그가
눈물을 흘리며 슬퍼할 때가 있었으니 자신이 모은 서화 컬렉션이 금나라 병사에 의해 훼손되고
약탈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때 였다는데.... 세월호 선장이 수백명 어린 목숨을 나몰라라 하고
자기들만 빠져나와 임시 수용소에서 물에 젖은 지폐를 정성스레 말리고 있던 모습이 오버랩 됩니다.
금 태종은 송나라 휘종의 딸들에게서 아들 둘을 낳은후 너의 딸이 내 아이를 낳았으니 라는 서신
과 함께 송 휘종에게 옷 두 벌을 보냈으니 말이 좋아 선물이지 휘종을 모욕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한 송 휘종의 답변이 걸작이었으니“저같이 쓸모없는 놈과는 달리 제 딸들이 폐하에게
도움이 되니 정말 다행입니다. 앞으로도 아이들을 많이 생산하시길 기원합니다” 라고 했다네요?
“역사를 잊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 라는 말은 단재 신채호 선생이 한 말로 잘못 전해졌지만 그건
아니고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 한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가 원문
이라는고 하는데... 이는 쓰라린 역사를 기억하지 않으면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뜻으로 보입니다.
백제가 망하자 사비성과 웅진성 왕족과 귀족 1만 3천명이 당나라에 잡혀갔고 고구려가 망하자 평양성등
보장왕과 수십만명이 역시 당나라로 잡혀갔으니 그 중에 왕족과 귀족의 젊은 여인들도 송나라 여인들
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고 보는데, 병자호란때 잡혀간 50만은 대개는 젊은 여자들이니 심양의 고려보
(高麗堡), 연못 투신, 속환(贖還) 되어 돌아오다가 세음령과 홍제원 물에 씯기등 아픈 역사로 남았습니다.
산동성 곡부의 공묘를 지키던 연성공(공자의 적통에게 내려진 작위) 공단우는 남송 조정
을 따라 남하해서 절강성 구주(衢州 취저우)에 새로운 공묘를 세웠으니 곡부에는
공단우의 동생 공단조가 남았는데, 이후 금나라는 공단조를 새 연성공으로 임명
하였고...... 그래서 공단우의 가문을 남종, 공단조의 가문을 북종으로 부르게 됩니다.
이후 원나라때 쿠빌라이 칸이 남종의 종손인 공수(孔洙)에게 곡부로 돌아가서 가문을 이으라고
명하면서 어느 쪽을 정통으로 인정해야 하는지 논란이 불거질 뻔하였는데, 공수가 북종
의 종손인 공치에게 연성공 자리를 양도하는 용단을 내려 집안의 분열은 일어나지 않게
되었으니 이를 공수가 연성공 작위를 양보했다고 해서 '공수양작(孔洙讓爵)' 이라고 부릅니다.
당나라 시절까지의 북중국의 왕족과 장군등 지배자인 한족(漢族)은 중국인이 아닌 그들이 오랑캐라고
말하는 한화(漢化)된 선비족(鮮卑族) 계열이었으며, 문화가 가까운 요나라 및 금나라에 편입되었
지만 북송의 황제는 선비족 계열 지배층에서 벗어난 한(漢)나라의 직통이자 전통적인 혈연의
한족 귀족으로 한자에 능숙했고, 옛날 한나라와 조, 위로 이너진 전통의 한족 문화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한나라 직통이라 부르던 북송 황제의 혈연인 고귀한 여인들이 여진족의 기방에 보내
지는 것은 한족들에게는 매우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는데 이는 북송 스스로 자초한 것이니
북송은 거란족의 요나라를 제압하고 잃어버린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만주지방
여진족의 금나라와 결탁했는데.... 단른 편으로는 요나라의 암군 천조제와 비밀리에
관계를 맺는등.... 신의없는 외교를 단행하여 금 태종의 침공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 입니다.
중국의 국보 1호는 북송시대인 1120년경 장택단(張擇端)이 중국인들의 명절인 청명절(淸明節)
을 맞아 수도 개봉을 그린 “청명상하도(清明上河圖)” 인데 폭이 25cm x 길이 528cm 의
웅장한 그림이니, 청명은 24절기 중에 하나로 춘분 다음 절기니 보통 4월 5, 6일경으로
중국인들은 이때 야외로 나가 조상의 묘에 성묘하고 축제를 즐기는 인파가 붐비는 날이었습니다.
장택단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 하남성 개봉(開封)을 흐르는 변하(汴河)를 중심으로 청명절
을 맞아 도성의 인파가 북적이고, 야외로 나가는 풍경을 두루마리 형식으로 현대 화법에
가까운 원근법을 이용하여 매우 사실적으로 그렸으니 사람 814명, 가축 83필, 교량 17개,
점포 30여채, 선박 29척, 마차 48대, 수레 13량, 인력거 8대, 수목 180수가 그려져 있습니다.
등장 인물들에는 사(仕), 농(農), 상(商), 의(醫), 승(僧), 도(道)인이나 관리, 여성, 뱃사공
등이 있으니 왕래하는 사람들의 의복이 각각 다르고, 나귀, 말, 소, 낙타 등의
가축도 세밀하게 그려져 있어, 회화적인 가치와 함께 당시의 시대상과 풍속
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북경 고궁박물관의 국보 1호로 불리워지고 있습니다.
청나라의 학자 조익(趙翼)이 송나라 관리에 대해 송나라가 사대부를 대우하기를 두텁게 하였고 재물
의 하사가 풍족했기에, 관직에 오른 자들은 일신에 매달릴 필요없이 직무에만 몰두하면 되었으니
어진 신하들이 대대로 나왔고 관리들의 품행과 치적이 뛰어났으나, 재물을 베푸는 것이 너무 지나
쳤기에 나라 곳간이 흔들리게 되어 망했으니 송나라의 제도는 법으로 삼을 것이 못 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