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척준경
현재 우리가 배우는 역사서에는 반역자로 기록되어 비중이 크지 않지만,
고려 역사서에서 전하는 그는 초패왕 항우, 온후 여포와 비견되는 한민족 최고의 무장.
비록 권력의 유혹에 놀아나 궁궐을 불태우고 간신을 옹호했으나,
진정한 충심을 깨닫고 간신을 몰아내었으며 토사구팽을 겸허히 받아들인 고려의 맹장.
의리가 있고 충의가 있었으나 너무나 인간적인 장수. 척준경의 파란만장한 역사는 후세에도 길이 남아야 할것이다.
윤관의 기록 -
척준경은 범을 빼어닮은 얼굴에
용력이 출중했고 숙종이 즉위하기 전인 계림공 시절 휘하에 있었다.
인물됨이 호방하고 호탕하여 친구 사귀기를 꺼리지 않았으며
술자리에서는 누구나 그와 가까이 하고 싶어했다.
1.
국경선까지 남진한 여진족들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서 임간을 파견했다가
임간이 대패하여 군진이 무너졌을 때 당시 중추원별가였던
척준경이 홀로 말을 타고 돌격하여 여진 선봉장을 참살하고 포로로 잡힌 고려군 200명을 빼앗아 왔다.
2.
윤관의 여진 정벌 당시, 여진족이 석성에 웅거하여 별무반의 앞길을 가로막자
윤관이 전전긍긍하였다. 이에 부관이었던 척준경이 이르기를
' 신에게 보졸의 갑옷과 방패하나만 주시면 성문을 열어 보겠나이다 ' 라고 호언하였다.
척준경이 석성 아래로 가서 갑옷을 입고 방패를 들고 성벽으로 올라가 추장과 장군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성문을 열어 고려군이 성을 함락하였다
3.
윤관과 오연총이 8천의 군사를 이끌고 협곡을 지나다가 5만에 달하는 여진족의 기습에
고려군이 다 무너져 겨우 1000여 명만 남았고, 오연총도 화살에 맞아 포위된 위급한 상황에
척준경이 즉시 100여기의 병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이에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이 이르기를
"적진이 견고하여 좀처럼 돌파하지 못할 것 같으데 공연히 쓸데없는 죽음을 당하는 것이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척준경이 말하기를
"너는 돌아가서 늙은 아버님을 봉양하라! 나는 이 한 몸을 국가에 바쳤으니
사내의 의리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
라고 소리치며 우뢰와같은 기합과 함께 100여기의 기병과 여진족의 후미를 돌파하기 시작하였다.
척준경은 단숨에 여진족 부관 10여명을 참살하고 적장을 활로 쏘아 거꾸러 뜨렸다.
척준경과 10명의 용사들이 분투하여 최홍정과 이관진이 구원하고 윤관은 목숨을 건졌다.
4.
여진족 보병과 기병 2만이 영주성 남쪽에 나타나 고려군을 공격할 준비를 했다.
윤관과 임언이 방어만 하려고 하자, 척준경은 단호히 반대하고 나섰다.
"만일 출전하지 않고 있다가 적병은 날로 증가하고 성안의 양식은 다하여 원군도
오지 않을 경우에는 어찌합니까. 공들은 지난 날의 승첩을 보지 않았습니까?
오늘도 또 죽음을 힘을 다하여 싸울터이니 청컨데 공들은 성 위에서 보고 계십시오."
척준경이 결사대 100기를 이끌고 성을 나가 분전하여 적의 선봉장을 참살하고 적들을
패주시켰다.
5.
척준경이 방어하고 있던 성이 포위되고 군량이 다해가자 지휘를 부관에게 맞기고
척준경은 원군을 부르기 위하여 사졸의 옷으로 갈아입고 홀로 적진을 돌파하여
원군을 부르고 당도하여 원군과 함께 성을 포위하던 여진족들을 격파하였다.
6.
1126년 5월, 이자겸이 인종을 시해하려 수백의 사병을 동원하여
궁궐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에 한편으로는 인종이 달아날것을 우려하여
자객 다섯명을 어전(왕의 거처)으로 미리 보내었다.
ㅡ
어전 내부는 유혈이 낭자하여 내시와 궁녀들이 살해당하였다.
자객들이 인종에게 다가가려 하자
왕을 모시는 상선(내시 우두머리)이 두 팔을 벌려 자객들을 가로막고 버티었다.
이에 자객 우두머리 주충이 일시에 상선의 목을 잘라버리니
이제 어전에는 인종과 사관밖에 남지않았다.
자객들이 인종을 시해하려 에워싸려 하자 인종은 대경실색하여 문밖으로 달아나려 하였다.
그 순간 어전문이 통째로 박살나며
한 거구가 손에 피묻은 거대한 태도를 든 채로 숨을 가쁘게 쉬며 들어섰다.
거구는 문 앞에서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인종을 향해 우뢰와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 폐하! 신 척준경이 왔사옵니다! "
척준경의 갑옷은 이미 한차례 전투를 벌였는지 넝마가 되어있었고,
투구는 고사하고상투가 잘려 봉두난발이 되어있었다. 그러나
마치 그 모습이 조조의 장수 악래 전위가 현신한 듯 하여 자객들과 주충은 감히 먼저 공격하지 못했다.
척준경은 즉시 인종을 등 뒤로 숨기고 자객들에게 달려들어
두명을 베어넘기고 삽시간에 나머지 세명 모두 죽이고 인종을 구하였다.
이 공으로 인종은 척준경을 <추충 정국 협모 동덕 위사공신(推忠靖國協謀同德衛社功臣)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랑 동중서문하 평장사 판호부사 겸 서경유수사 상주국>에 임명하였다.
출처-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2. 정기룡
3. 이성계
조선의 태조이기 이전에 고려의 장수였던 이성계는 1361년 홍건적에 의해 개경이 함락되었을때 사병 2000명을 이끌고 개경 탈환전에 참가하여 최초입성 하였습니다. 또한 원에서 파견한 나하추, 덕흥군, 최유의 침입을 모두 격퇴하여 90년간 이어온 원의 고려지배에 종지부를 찍었으며, 함주,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했습니다. 특히 황산전투에서는 왜장 아지발도의 투구의 끈을 맞춰 투구를 떨어뜨린 후 활로 쏘아 죽이는 거의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를 보여주었습니다.
이성계는 쌍성총관부의 전투 이후 위화도 회군까지 30년동안 단 한번도 패주하지 않은 장수입니다.
4. 연개소문
송나라 신종 황제가 왕안석에게 물었다.
"당태종은 성군이었으면서 왜 고구려를 무너뜨리지 못했는가?"
왕안석은 대답했다.
"연개소문(淵蓋蘇文)이 비상인(非常人)이었기 때문입니다."
당태종이 출병하기 전에 이정(李靖)을 행군대총관으로 삼으려고 하자 이정은 “제가 일찍이 태원(太原)에 있을 때 연개소문을 만나 병법을 배워 그 뒤로 폐하를 도와 천하를 평정함이 다 그 병법의 힘을 입었음인즉, 오늘날 신이 어찌 감히 전날에 사사하던 개소문을 치리까”하고 사양했다. 스승에 대한 기본 예법을 어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정은 돌궐, 토욕혼(吐谷渾)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유능한 사령관이었다. 중국 능연각(凌煙閣)에 걸린 초상화의 24공신의 한사람이며, 이적(李勣)과 함께 2대 명장이다.
그가 저술한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당대 최고의 병법서로 알려져 있다. 단재는 이 병법서와 관련해 노상운(盧象雲) 선생이라는 한 노인의 구전(口傳)을 『조선상고사』에 소개하고 있다.
“연개소문은 자(字)가 금해(金海)이니 병법이 고금에 뛰어난 바 그가 저술한 ‘금해병서’(金海兵書)가 있는데 고려 때도 임금께서 늘 각 방면의 병마절도사에게 그 부임 시에 한 벌씩을 하사했다. 지금은 그 병서가 전해지지 않거니와 연개소문이 그 병법으로 당나라 이정을 가르쳐 이정이 당의 최고 명장이 되었다. 그 이정이 저술한 ‘ <이위공병법(李衛公兵法)>’은 ‘무경칠서’(武經七書)의 하나로 치는 바, 연개소문에게 병법을 배운 이야기를 자세히 썼다. 그 뿐 아니라 연개소문을 숭앙(崇仰)한 어구가 많으므로 당나라 사람들이 연개소문과 같은 외국인에게 병법을 사사해 명장이 됨은 실로 중국의 큰 수치라고 하여 드디어 그 병법서를 모두 없애 버렸다. 오늘날 유행하는 <이위공병서>는 후인의 위작인 고로, 이는 원본이 아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당 최고의 명장을 키워낸 인물이 바로 연개소문이었다는 것이다.
너의 강산이 아무리 넓다 해도 400개주에 불과하다. 내가 단지 일개부대로도 너의 땅을 피바다로 만들 수 있다” 명나라 장편희곡“설인귀해정동백포기”에서 연개소문이 당나라 황제에게 호령하는 장면입니다. 사수 대첩은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당을 상대로 한 제2차 고당전에서 나온 전투. 당나라는 백제를 멸망(660년)여세를 몰아 평양성으로 쳐들어갑니다. 662년 1월23일 연개소문은 방심하고 있는 사수에서 당시 당나라 좌효위장군 백주자사 옥저도총관 방효태와 그 아들 13명을 포함 전군 10만을 몰살시킵니다. 당시 소정방이 평양을 포위하고 있었으나 폭설과 사수에서의 대패로 황급히 물러가게 됩니다. 당고종도 아버지 당태종의 말을 듣지 않고 고구려를 침입한 것을 침입한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그 이전 645년 당태종의 침입에서도 연개소문의 고구려군은 안시성의 혈전으로 당군을 격퇴시키고 당태종을 뒤쫒아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지역 깊숙이 쳐 들어갔습니다. 북경시 순의현의 고려영 유적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연개소문이 얼마나 중국인들을 공포에 떨게 했는가는 아직도 남아 있는 중국의 경극과 희곡을 통해 알수 있습니다.
중국의 경극에서 그는 포악함과 카리스마를 동시에 지닌 영웅으로 묘사된다. 경극 속에서 그는 신기에 가까운 무공을 지니고서 중국 당태종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는다.우선 그는 커다란 칼을 포함해, 등에 4개의 칼을 더 차고 있다. 이것은 옛날 연개소문이 온몸에 다섯 자루의 칼을 차고 다녔다는 기록에서 온 것 같은데, 다섯 자루의 칼이 그저 단순히 위엄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전투용이었다면, '비도(飛刀)' 즉 '날아다니는 칼'이라는 그 이름을 본다면, 틀림없이 고구려에는 다섯 자루의 칼을 '던져 날려서' 적을 공격하는 독특한 검술이 존재했던 것은 아닐까?그의 등에는 4자루의 칼과 함께, 깃발을 메고 있다. 이것은 중국 경극에서 한족이 아닌 다른 민족의 인물을 나타낼 때 쓰는 상징이다. 그가 한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 즉 고구려인임을 암시한다.그는 희한하게 청룡이 장식된 옷을 입고 있다. 중국의 전설에는 사람들이 동굴에 갇혀있던 커다란 청룡을 풀어주었더니 그 청룡이 동쪽으로 날아가 연개소문의 몸에 들어갔다고 한다. 단순히 방위를 표시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인들은 그를 '청룡'이란 신비한 짐승에 빗대어 말할 정도로 그를 영웅으로 추앙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그의 얼굴과 수염을 보면, 우선 수염이 붉다. 붉은 수염은 피[血], 즉 살기(殺氣)를 나타낸다. 경극에서 붉은 수염은 성격이 잔혹하고 사람 죽이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성격을 암시한다.
그의 얼굴화장이다. 얼굴화장에 쓰인 푸른색은 위엄과 함께 사나움을 나타낸다.
1. 고구려 최후의 맹장 연개소문
얼마 전 드라마로도 방영되었던 연개소문, 역적과 충신이라는 두 극단적인 평가 사이에서
오로지 단 하나의 공통된 평가는 그가 뼛속 깊은 무골이었다는 점이다.
고당전쟁 당시, 중국에서 가장 강한 장수들이었다던 방효태와 그의 열 셋 아들들이 고구려로 쳐들어왔을 때,
쉰이 넘은 고령의 나이로 날려나가 열 셋의 아들들 중 세 명을 담숨에 베어버렸다.
비술과 창술은 그야말로 신기라 불렸고 당대의 사학자들은 한결 같이
'연개소문의 무위는 중원에서도 따를 자가 없다'라 극찬했다.
2. 고려의 소드마스터 척준경
고려 말의 장수, 역사서에는 반역자로 이름이 올라있는데, 이 사람이 세운 공은 가히 기적이라 할 만 하다.
5만의 여진족 대군사이로 종횡무진 뛰어다니면서 포로가 된 장군이나 인질들을 구한 것이 수차례,
한 번은 성벽을 타고 넘어가 홀로 성을 점령한 적도 있었다. 이후 이자겸의 난에 동참했다가
고려 임금이 자신의 편이 되면, 모든 지위를 넘기겠다는 말에 혹해서 이자겸을 귀향보내고,
권력쟁탈에 휘말려 귀향가 죽었다. 수 만의 군대를 말 한 필과 칼 한자루로 뛰어드는 것은
그야말로 비장. 삼국지에서 여포를 이르러 인중여포마중적토라 한 것이 무색할 만하다.
3. 조선의 태조, 이성계
역사서에 금칠을 할 만큼 조선대에 이성계에 대한 평가는 극호평이다.
고려 말, 명문 귀족 출신에 활솜씨가 귀신을 잡을 만하다라는 평을 받았으며,
사냥터에서 활을 쏘는 것 만으로도 임금과 신하들을 겁에 질리게 만들었다.
그의 활은 사슴 허벅다리 힘줄을 엮은 국궁인데, 당시 그 활을 당기기만 하는 것도 극소수 였다고,
왜구와 북방족은 이 이름만 들어도 도망칠 정도로 무예와 지략이 뛰어났다.
조선 초 태조와 이후 임금들의 입김이 닿았던 것을 감안하더라도 연개소문에 뒤지지 않는다.
4. 근육 없는 헐크, 김덕령
조선 초, 임진왜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났다. 곽재우, 사명대사 등 이름 높은 의병들 중에서도
가장 큰 전공을 떨친 것이 바로 김덕령. 조선의 무관이었으나, 외모는 학자를 연상시킬 정도로
빈약해 보였으나, 호랑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 괴력을 소유했다고 한다.
이 모습을 본 많은 이들이 자진해서 김덕령의 아래로 모여들었다.
5. 가상? 실재? 김형언 오도류
조선 중기, 숙종 임금이 일본 정벌을 기획하였으나 청나라에 의해 무산되었다는 기록 '일본여도'에 등장하는 위인,
일본에 상륙하여 승전보를 기록하던 중 500여 명의 조선군이 왜군에게 포위당했다.
이 때 다섯 자루 검을 이어 붙인 김형언이 김형언 오도류라는 검술로 날이 저물도록
5만 여명의 왜군 사이에서 분투, 천 오백 명을 죽였다.
이 위인에 대해서는 사실무근이라는 주장도 있으나,
그가 일본열도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무사 유키오를 죽였으며,
이 때문에 일본에서 김형언이라는 이름은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는 만큼
그가 실존인물인지 가상의 인물인지는 추측하기 어렵다.
위 5인은 그야말로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위인들이다. 판타지나 무협에서 날아다니며,
무공을 쓰는 주인공들과 동급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다. 게다가 현존했던 인물들이니 더 말할 것도 없다.
그 중에서는 일부 네티즌들 사이에서는 척미네이터라 불리는 척준경은 그야말로 소드마스터.
드세기로 유명한 5만의 여진족 사이에서 인질을 구출해오려면 얼마나 많은 이들을 베어넘겨야 가능할까.
아마 인중여포가 아니라 인중준경 이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다.
물론 이 외에도 홍의장군이라 불렸던 곽재우나, 조자룡에 버금가는 창술의 대가라 불렸던 김시민,
천하장사라 불렸던 대한제국 말의 신돌석, 고려의 대들보였던 최영, 열 네살에 멧돼지를 때려잡은 이징옥,
여진을 복속시킨 고려의 명장 유금필, 소금팔이에서 고려 최고의 장수로 성장한 장사 이의민,
이의민의 라이벌이자 고려의 용장 두경승, 이성계를 능가하는 궁수 주몽, 문무지략에 뛰어났던 백제왕 견훤,
호랑이 꼬리를 잡고 빙빙 돌렸다던 김알천, 해신이라 추앙받는 충무공 이순신 등 수 많은 용장, 전략가 등이 우리나라에 있었으나,
위의 5인이 무예로써는 그야말로 먼치킨이라 보이므로 위 5인만 소개해 올렸다.
창고자료. 일본여도, 네이버 사전, 카페 삼국지 도원결의 게시물, 일부 지식in
1. 연개소문(고구려) - 당나라에 방효태와 그의 13 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중국 전체에서 가장 센 장수들이였다고 한다.
당나라가 방효태와 그의 13 아들을 내세워 쳐들어 올 때, 연개소문은 나이가 50에 가까운 백전 노장이었는데
창질 몇번으로 그의 13 아들 중 3명을 단숨에 베어버렸다고 함. 단검 던지기와 창술은 신기에 가깝다고 했을 정도.
당시 중국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연개소문의 무력과 평판에 대해서 그를 이길자는 중원에는 없을 정도라고 했음.
2. 금강야차 이의민(고려) - 평민 소금장수 아들로 태어나 젊은 시절 하도 그의 힘이 대단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여 당시 지역의 수비대장 정도로 되는 사람이 이의민의 힘을 시험했다 함.
어찌나 그의 힘이 대단하던지 모든 주변의 장수가 덜덜...
결국 평민의 출신으론 드물게(평민도 평민 나름이지 소금장수면 일자무식 상평민에 해당) 무관으로 선출된 인물.
3. 두경승(고려) - 고려시대 금강야차이자 라이벌인 이의민과 함께 최고의 힘과 무술을 지닌 인물.
한 일화로 두경승의 개인방(수련과 책을 보는 곳이겠죠)에 있는 사방의 벽에는
구멍이 뚫린 주먹자국이 있었다고 한다.
4. 척준경(고려) - 고려의 용맹한 장수.
여진족이 쳐들어왔을 때 매우 많은 수의 적군이 몰려오자 전부 gg치고 도망가려 할 때
홀로 결사대(최고 잘싸운놈들만 추린 부대) 10명을 이끌고 대군이 있는 여진족 진영에 뛰어들어
적군 수백명을 배자 여진족이 감히 성앞에 오지 못하였다고 한다.
말타고 칼로 싸움을 하는 것에선 당시대에 당할자가 없었다고 한다.
5. 태조 이성계(고려 말) - 명문 귀족 출신치곤 엄청난 용력을 자랑했던 이성계
한 예로 그가 8도의 각 귀족들과 왕들이 모여있던 사냥터에서 활을 쏘자 주변에 있던 신하,
심지어 그의 아들까지도 덜덜 떨었다고 함.
이성계가 사용했던 활은 몽고 친위대가 사용했던 활과 같은 형태로써 사슴의 허벅다리 힘줄로 엮은 국궁이라 함.
당시 그 활을 당길 수 있는 장수는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이성계가 그 중 한명이었음.
연개소문과 비교해도 결코 손색이 없는 장수라고 본다.
6. 무등산 사나이 의병 김덕령(조선) - 임진왜란 당시 조선 무관이였던 김덕령은
일본의 임진왜란으로 인해 의병모집의 필요성을 느기고 병의 사기를 높히고자
직접 산에서 호랑이를 맨손으로 잡아왔다고 한다.
당시 조선시대에 그의 힘을 따를 사람은 없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의병장 신돌석 힘 또한 대단했다고 함.
7. 오도류 검객 김형언(조선) - 처음에는 승전했으나 차차 수적 불리로 500여명남짓한 군사로
5만의 군사에게 포위당해 싸운다. 여기서 김형언 오도류라는 검술을 보인다.
오도류...다섯 자루의 검을 두자루씩 손잡이 부분 끝마디로 이어 그 중 오른쪽 2개의 검을 이은
마디 중간에 1개의 검을 붙어서 잡아서 쓰는 검술이다.
여기서 김형언은 화려한 검술을 보이며 혼자서 날이 저물때까지 5만의 군사중 1500명을 혼자서 죽였다고 한다.
그의 검술은 당시 일본 최고의 무사라고 불리는 유키오라는 무사를 죽일만큼 일본에서
그의 이름만 들어도 웬만한 무사들은 벌벌 떨었다고 한다.
출처:http://blog.paran.com/meisternieun/380920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