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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구문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동민
사실(事實)보다는 진실(眞實)을 말하자.
이동민
수필론에서 내용이 허구가 아닌 사실이라는 것은 수필 특성에서 기본 중의 기본이다. 다시 한번 짚어보기로 하자. 수필은 문학의 한 장르이다. 장르로 나눌 때는 다른 장르와 차이가 있어야 하고, 또 자신만이 갖고 있는 속성(특성)이 있어야 한다. 수필을 문학의 다른 장르와 차이로 분류해보면 첫째가 운문이냐, 산문이냐 이다. 수필과 소설이 산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다시 수필과 소설은 어떤 차이가 있기에 장르 구분을 하는걸까. 몇 가지의 차이점이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차이는 수필은 직접 경험한 사실을 쓰는 것이고, 소설은 허구적으로 꾸며낸 이야기이다.
이런 이유로 수필을 말할 때는 사실성을 아주 많이 강조한다. 사실이 아니고 허구의 글이라면 소설과 장르 구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필을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여러 문헌 자료에서 사실에 대한 해석을 이렇게 하고 있다. 사실(事實)은 실제로 존재하는 무언가, 또는 확정된 평가의 표준에 관련하여 유효한 무언가를 가리킨다.
일상적인 의미에서 사실(fact)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두 종류가 있다.
1. 실제로 일어났거나 현재 진행 중인 사건을 가리키는 의미의 사실이다.
예1) 지구는 여전히 태양을 돌고 있다.
예2)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이다.
이는 실제로 일어났던 세상의 일을 진술한 것이다. 존재했던(과거) 혹은 존재하는(현재) 혹은 존재할(미래) 사태 자체로 참과 거짓이 결정된다. 우리가 그 사태에 대해 어떤 믿음을 가지든, 그 믿음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갈릴레이가 재판에서 자신의 주장을 번복했지만, 지구는 갈릴레이의 번복과는 아무런 관계없이 태양을 돌고 있다. 갈릴레이가 어떤 생각을 하던, 재판관이 태양이 지구를 돈다고 믿든, 지구가 태양을 돌고 있는 실재의 일은 자체가 사실이다.
말하자면 내가, 즉 글을 쓰는 작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던 실재로 일어나고 있고, 또 존재하고 있다면 그것을 사실이라고 보았다. 사실은 어느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실재로 존재하는 것이지만, 우리가 사실을 사실 그대로 인지할 수 있느냐고 하면 문제는 달라진다. 만약에 우리가 사실을 그대로 인지하지 못할 때는 내가 아무리 사실이라고 믿더라도 사실이랄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카톨릭에서는 사실 여부와는 관계없이 자신의 믿음을 사실이라고 했다. 그렇다며 수필에서 사실이라고 할 때도 우리의 믿음과 실제의 사실과의 관계를 어떻게 정립하여야 하는가의 문제가 생긴다.
2. 관찰이나 경험 등을 통해 참이라고 믿을 수 있을 만큼 확립된 내용이라는 의미의 사실이다.
예) 재판과정에서 특정 피고인의 무죄를 법률적 사실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 다.
이것은 현재는 사실이지만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 판명될 수도 있다. 갈릴레이의 재판에서 보듯이 사실과 달리 오류의 가능성이 있다. 형사재판에서 범인으로 인정되어 형이 확정된 후에 범인이 잡히는 경우도 많다.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꼼꼼이 따지는 재판이라는 과정을 거치고 나서 결정한 일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글쓰기를 하는 우리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실재의 사실과 사실이라고 믿음으로 오는 사실은 개념적으로는 구별이 가능하지만, 실제 상황에서는 구별하기가 어렵다. 또한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사실을 오류가 없이 확실하게 알 방법은 없다. 여기서 우리가 사실의 오류를 줄이기 위해서 관찰이나 경험 등을 통해 얻은 사실성을 가지고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추론하여 사실 여부를 결정한다. 사실이라고 믿었던 일이 새로운 증거가 나타나서 사실이 수정되면 그때까지 받아들여지던 사실을 거짓으로 하고 새로운 사실을 진짜 사실이라고 바꾸기도 한다.
우리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므로 사실이 어떠한지를 오류 없이 알아낼 방법이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우리가 사실을 판단하여 확정할 때마다 그때그때에 이용이 가능한 모든 증거들을 가지고 균형 잡힌 시각을 최대한 활용하고, 고려하여 실재로 일어난 사실이라는 것을 추론해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이 방법은 일반적으로 과학에서 사용하는 방법이다. 과학에서도 막스 플랑크와 아인슈타인 등의 물리학자가 만들어 낸 양자역학이 등장하면서 우리가 사실로 믿었던 뉴턴역학이 사실이 아니게 되었다.
수필에서도 사실을 확정하기 위해서 이런 방법을 사용해야 할까? 그러나 수필쓰기는 과학과는 다르다. 수필쓰기를 하면서 과학처럼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사실을 추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필에는 사실이 아닐 수도 많을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에 걸쳐서 세계가 존재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사실은 세계의 본질을 오류 없이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지 못한 우리에게는 항상 사실이기보다는 사실의 가능성으로만 보일 것이다. 앞에서의 "대한민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국이다."라는 명제는 지금은 사실로 받아들여지지만, 베게너의 판 구조론에 의하여 오랜 시간 후에 대한민국이 대륙국가 또는 섬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앞의 명제도 사실의 후보로만 보일 것이다.
수필과 소설을 구분하는 잣대로 삼는 ‘사실’이 무엇이냐에 대해서는 위에서 사례를 보았듯이 정의를 내리기가 어렵다, 그런데도 사실 여부는 수필과 소설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되어 있다. 어쩌면 우리는 무엇이 사실인지도 모르면서 사실이라는 잣대를 마구 휘두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수필에서 사실을 말할 때는 사실(事實)보다는 사실(寫實)로 표현하는 것이 더 맞는 말일지 모른다. 왜냐면 사실(寫實)은 실제로 있었던 일을 솔직하게 그려낸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문예이론에 생각을 언어로 바꿀 때는 이미 왜곡이 일어난다고 하였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뜻을 언어로서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수필쓰기를 하면서 사실(事實)에 편집광적으로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사실이라고 해도 사실이 아닐 수 있다는 맹점을 지닌다. 뿐만 아니고 사실이란 우리가 사실이라고 믿는 것일 뿐이지 사실은 허구일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사실보다는 엄격성에서 조금 느슨한 진실이라는 것을 살펴보자.
1980년대의 미국에서 ‘명백한 진실’이라는 월간지가 820만부가 팔렸다. 이 잡지는 뉴욕 타임즈지 보다 230만 부나 더 팔린 부수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처럼 ‘진실’을 말해주겠다는 약속이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런데 진실 앞에 왜 ‘명백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였을까.
우리는 이 세상에 진실이 존재한다고 모두가 믿는다. 그러나 진실의 내용은 모른다는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수학의 셈법처럼 단순하게 정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다. 따라서 ‘분명한’이라는 뜻으로 말해질 수 없다. 심지어는 우리 세상에 진실이란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처럼 진실에 대하여 다양한 의견들이 있다는 것은 명백하다. 이런 뜻에서 명백하다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진실은 태양을 도는 지구처럼 객관적인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당신이 생각하는 진실 또는 내가 생각하는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이 있을 뿐이다. 이제 다시 진실에 대해서 질문을 하면 ‘진실은 무엇이다.’라고 답을 내리는 것이 아니고 진실이 어떤 것이라는 것은 누구에 의하여 만들어진다.
그러나 우리가 진실의 내용을 모르기는 하지만 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큼은 알고 있다. 사실을 다루면서 우리가 사실을 잘못 알고 있더라도, 사실은 존재하는 것과 같다.
진실을 발견하고, 파악하고, 설명하고, 입증하는 일은 매우 어렵다.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라고 주장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1980년 대에 미국 독자에게 그처럼 인기가 높았던 잡지인 ‘명백한 진실’은 명백한 진실을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다. 이 책은 기독교 복음주의자인 허버트 암스트롱이 창설한 교단인 기독교의 한 종파의 대변지였다. 암스트롱은 자신이 만든 교단에서 전횡을 일삼았다. ‘명백한 진실’이 말하는 진실은 기독교 복음주의자인 암스트롱의 편견이었다. 그런데도 미국인은 환호했다. 김어준의 뉴스광장이라는 방송에서 진실이라면서 내보내는 소리에 문빠들이 환호하는 거나 같다.
우리는 진실이란 것을 입증하지 못 하였는데도 진실이란 말에 환호하는 것은 진실에 대한 갈망이 아주 높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이다.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진실이 무엇인가가 아니고 진실이 ‘어떻게’ 그리고 ‘누구에’ 의하여 확립되었는가 이다.
(진실사회. 줄리언 바지니. 오수원 역. 서론. 예문아카이브. 2018)
오늘에 진실은 훨씬 더 복잡하게 되었다. 안개가 자욱하게 둘러싸고 있어 실체가 모호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하여 폐기된 것은 아니다. 아직 진실은 살아있다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졌을 뿐이다. 진실은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진실과 거짓을 구분하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이 우주에서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는 모든 것이 변한다는 것이다’라는 것이 진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실을 진리 쪽으로 설명하려 하지 말고 ‘솔직’으로 해석하면 작가에 의하여 확립된 솔직함이 된다.
나는 수필쓰기에서 우리가 사실이라는 틀 속에 갇히어 부자유스러워하는 대신에 진실을 주장하려고 한다. 수필쓰기에서 명백한 진실을 제시하는 일은 불가능할지라도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을 솔직하게 보여주자는 것을 주장한다. 진실을 갈망하는 독자는 대단히 많다. 우리 수필은 독자의 갈망을 해소해주는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진실은 여전히 중요하다. 그러나 진실이라고 믿는 내용은 다양함으로 독자와 작가 사이에는 공감대도 형성하지만, 서로 다른 힘이 마찰을 일으킬 수도 있다. 지금까지의 수필이론에서는 독자의 공감을 불러올 때를 잘 쓴 수필이라고 평해 왔다. 서로 다른 힘이 부딪힐 때 나타나는 충돌음도 공감에 못하지 않는 의미가 있다. 충돌은 공감이나 다름없는 관심이기 때문이다.
위의 예시에서 보았듯이 진실은 정답이 없으므로 수필가가 글을 쓰기에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이 사실성에 사로잡히는 것보다는 훨신 더 자유롭다. 왜냐면 진실이라고 할 때는 작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에 중점을 두는 것이지, 그 생각이 정답이라는 것에 중점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는 수필가는 사실(事實)보다는 사실(寫實) 그리고 진실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글쓰기를 하자는 주장을 하겠다.
오래 전에 내가 쓴 수필의 한 부분이다.
“거동이 불편하여 휠체어에 앉은 채 막내딸의 도움으로 찾아오는 팔십 할머니가 계신다. 말이라고는 도무지 없다. 진료가 끝나도 막내딸은 돌아갈 생각도 않고 긴 하소연을 늘어놓는다.‘ 남의 집에 셋방살이 하는데’로부터 ‘선생님, 저도 공장에 일하러 다니거든요, 그런데 엄마는 한사코 우리집에만 있으려고 해요.’------ 침묵 뒤에 ‘언니는 자기집도 있고------.’ 다시 말을 끊는다. ‘오빠는 시골에서 잘 살고 있어요.’ 하소연을 듣다보면 끝이 없다. 나는 그냥 ‘그렇습니까.’만 반복할 뿐이다.
할머니는 아무런 표정없이 맞은 편 벽만 바라본다.‘오빠 집에 모셔다 드리려고 하면 할망구가 아침부터 밥도 먹지 않아요. 그런 날은 집밖으로 나가려고도 하지 않고, 오늘도------. 너무 불쌍해서,’ 막내딸은 목이 메여 말을 잇지 못한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나는 웬지 막내딸의 하소연보다도 할머니의 말 없음에 가슴 아팠다. 나는 ‘그렇습니까’라는 말도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할머니의 말없음 속에는 세월에 묻혀 용해된 숱한 소리가 가라앉아 있을 것이다.
막내딸은 ‘엄마, 제발 좀 아프지 마라.’라며 짜증스럽게 말하였지만 내 귀로는 엄마에 대한 사랑과 연민을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나가자 진료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창너머로 고개를 돌렸다. 이층인 진료실의 창 밖에는 은행나무의 잎이 노랗게 물든 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창문에 막혀서 소리는 없지만 한 잎씩 떨어진다. ‘오직 선한 당신에게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오페라 음악소리가 마음에서 들려온다. 그리고 할머니와 딸이 겹친다.“
(이동민의 수필 ‘소리없음에’의 부분)
이 수필은 작가가 진료실에서 겪었던 일을 그림 그리듯이 묘사했다. 작가의 눈에 비친 모습을 그대로 표현하였음으로 사실(寫實)이다. 그러나 작가의 표현이, 또 작품 속에 등장하는 딸의 말이 사실(事實)인지 아닌지는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이야기의 전개는 사실(事實)이라고 믿고 서술되었다. 사실(事實)이라는 전제가 있어야 독자에게 감동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작가가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듯이 거짓말을 한 것도 분명 아니다. 작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소설과 구분이 된다. 독자도 작가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 수필작품으로 인식하고 읽는다.
이 수필이 독자에게 감동을 준다면, 작가의 행위가 이유가 아니다. 3인칭 인물인 딸의 진술 때문이다. 딸은 작가도, 독자도 아닌 제 3자이지만 이 수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작가는 딸의 말을 독자에게 전달하는 역할을 작가 자신의 언어표현 기법으로 한다. 딸이 ‘할망구 어쩌구 저쩌구’라는 말은 사실이지만, 엄마를 사랑한다는 ‘진실’을 읽을 수 있다. 딸의 말이 진실 또는 진정성을 담고 있다. 작가는 그렇게 생각하였다는 또는 판단하였다는 것이다. 진(眞)이라고 하면 사유를 통한 인식에서 얻어진다. 인식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으로 얻어졌다면 철학적이 된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명제적 진실을 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진실이 담겨있을 수는 있지만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에 의한 것이 아니고 감성적으로 접근하였으므로 명제적 진실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감성적 인식에 의한 미(美)의 추구이다. 감성적 인식이 미의 개념이다. 수필은 감성적 인식을 전제로 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라쇼몽의 내용을 옮겨 온다.
2) 라쇼몽(羅生門)
라쇼몽은 쿠로사와의 가장 유명한 작품중 하나다. 소설보다도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유명해졌다. 그래서 라쇼몽을 이야기할 때는 소설보다 영화를 예로 드는 경우가 많다.
작가는 도쿄 출생으로 도쿄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서른다섯이라는 짧은 삶을 살다 갔지만, 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할 만큼 큰 영향력과 명작을 남긴 일본의 소설가이다. 그는 소세키의 제자가 됨으로 본격적으로 소설을 썼다. 우리에게는 일본의 신진 작가에게 수여하는 ‘아쿠타가와 상’의 실제 인물이며 ‘라쇼몽(나생문)’의 작가로 잘 알려져 있다.
영화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두 단편인 '숲 속'과 '라쇼몽'을 빌려서, 이 소설을 그대로 따라간 것은 아니고 각색을 했다. 그 결과는 원작에 못하지 않은 걸작이다. '라쇼몽'에서 액자를 빌리고 '숲 속'에서 내용을 빌렸다.
소설이나 영화가 말해주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은 모두 자기의 관점에서 말을 한다는 것이다. 단순한 일이라도 말하는 사람의 배경이 다르다면 말은 달라진다. 이익이 걸리면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어서 말하기도 한다. 따라서 진실을 알기란 어렵다고 했다.
라쇼몽은 하나의 살인사건을 네명이 다른 관점에서 얘기하는 것이 주 내용이다. 그런데 이 내용들이 모두 다르다. 모두 자기의 입장을 담아서 사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관객은 끝까지 어떤 내용이 사실인지 알 수 없다. 무엇이 사실일 것인가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 억수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라생문'의 처마 밑에서 나뭇꾼과 스님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한 남자가 그 소리를 듣고 궁금해 한다. 이들은 이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그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와 함께 오전의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조마루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타조마루는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뭇꾼은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타조마루는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마사코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문제는 겉보기에는 명백한 듯한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점점 더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살인사건을 다루는 관청에서 사건에 관여한 증언자의 말은 모두 다르다. 보기로서 사무라이와 산적의 싸움만 해도 그렇다. 먼저 산적 타조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그의 것과 다르다.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또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조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훔쳐 본 나무꾼의 진술은 달랐다. 도적은 무사인 사무라이와 칼 싸움을 한다는 것이 영예로운 일이었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아니었다. 무사가 산도둑과 싸운다는 것은 명예에 관계되는 일이었다. 싸웠다는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처럼 엇갈리는 진술 속에는 각자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담겨있다. 좀처럼 실체적 진실에 접근할 수 없는 이때, 실은 그 현장을 목격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뭇꾼이다. 그는 마사코가 싸우기 싫어하는 두 남자를 부추겨서 결투를 붙여놓고 도망쳤고, 남은 두 남자는 비겁하고 용렬하기 짝이 없는 개싸움을 벌였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소설의 이야기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증인들의 말이 얽히고 설킨다. 각자가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말을 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나무꾼의 말을 믿는 독자가 많다. 그러나 나무꾼도 물건을 훔쳐간 자신의 이력 때문에 진실만을 말한 것이 아니다. 산적이 남편을 묶어놓고 여인을 겁탈을 했고, 산적과 남편이 여인의 농간으로 결투를 한 것도 사실인 듯하다. 산적과 남편은 개싸움에 가까웠고, 결국 산적이 남편을 죽였다. 나무꾼은 그 현장을 보다가 값나가는 것을 훔쳐서 팔아먹었다. 살인사건이 일어나기까지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런 듯하다. 그런데, 이 사건에 관여된 사람들이 모두 다르게 진술한다.
그러면 각자가 왜 거짓말을 한 것일까. 산적과 남편은 입장이 비슷하다. 자기들은 멋있게 결투를 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특히 남편의 경우는 자신을 죽인 산적이 멋진 녀석이었음을 말해서 사무라이인 자신이 비천한 산적에게 죽었다고는 말하기가 싫을 것이다. 여인의 경우 자신의 뻔뻔함을 감추고 싶었다. 자진하지 않고 살아남은 것과 두 남자를 왔다 갔다 한 간사함을 감추고 싶었을 것이다. 값진 물건을 가지고 도망갔다는 나무꾼의 경우는 명백하다.
여기서 누가 어떻게 죽였는가를 밝히는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세상에는 각자 자신의 입장이 있다. 세상을 자신의 입장으로 바라보고자 함으로 진실을 알기는 무척 어렵다. 어쩌면 그 진실은 알지 않는 것이 더 좋은 일일지 모른다. 진실을 알고 나면 우리의 환상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내 나름으로 아름답게 상상했던 일들이 무너져버린다.
라쇼몽의 밑에서 스님과 나무꾼에게 이야기를 듣는 거렁뱅이는 살기위해 남을 죽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삼라만상의 모든 존재에게 주어진 단 하나의 명제이며 극한 상황에 처해서는 인간도 예외는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으로 사회에서 함께 살아가려면 측은지심을 가져야하지 않겠는가라고 얘기하고 있다.
소설이니까 스님을 등장시켜 ‘측은지심’을 이야기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소설보다 더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세상을 살고, 자기를 보호하기 위해서 아예 타인을 제거해버리려고 한다. 자기의 입맛에 맞는 온갖 이유를 대고, 온갖 이유로 사실을 거짓으로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오히려 진실일 것이다. 스님이 측은지심을 말하는 것은 진실을 담고 있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이제 수필쓰기로 되돌아 가자. 수필에서 과연 사실을 기록할 수 있을까. 없다는 것이 답이다. 그렇다면 사실을 폐기하고, 소설처럼 허구로 쓸까? 이것은 더더욱 답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진실을 말하자’고 주장한다. 진실은 사실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이기 때문에 독자도 공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