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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장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다
15장은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1) 한, 마지막 재앙에 대한 서곡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이 엄숙한 순간에 서곡은 무엇을 증언하고 있는가? 중심점은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행사와, 곧 시행될 일곱 재앙의 심판은 모두가 “의롭고 참되시도다” 라고 증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15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첫 부분에서는 “하시는 일이 크고 놀랍도다”(3)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구원행사(救援行事)를 가리키는 말인데, 이를 찬양하는 것이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입니다. 둘째 부분에서는,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4) 하는데, 이는 앞으로 시행이 될 심판행사(審判行事)가 의롭다는 뜻입니다. 구원행사의 의로우심이 “어린 양”의 대속으로 나타났고,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게 “일곱 대접”을 쏟으심으로 심판의 의로우심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를 두 단원으로 나누어 상고하겠습니다.
첫째 단원(1-4)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둘째 단원(5-8)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
첫째 단원(1-4)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
① “또 하늘에 크고 이상한 다른 이적을 보매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나님의 진노가 이것으로 마치리로다”(1) 합니다. 이는 11:14절에서 “셋째 화가 속히 이르는도다” 한 것과 연결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 마지막 재앙이 16:1절에서 쏟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속되던 심판을 잠시 잠정하시고 교회들에게 보여주시고 말씀하시는 11:15-15:8절의 중요한 문단을 상고하는 중, 마지막 부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 문단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두 가지인데 첫째는, 우리의 대적이 누구인가 하는 문제인데, “용(12:9), 두 짐승(13:1, 11)임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는, “인내 하고 믿음을 지키라”(13:10, 14:12)는 권면인데 과연 성도들은 바다 짐승의 박해와, 땅의 짐승의 미혹을 이기었는가? 그리고 우리는 이기고 있는가?
②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또 내가 보니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고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이르되”(2-3) 합니다.
“유리 바다”라는 묘사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전달해주는데, “불이 섞였다” 하는 것은 심판을 암시하는 표현입니다. 무엇을 이겼다고 말씀하는가?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를”(2) 이겼다 합니다. 이는 13:17절에서, “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 한 이를 이겼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매매를 못하게” 하므로 양식을 구할 수 없었겠지만, “굶어죽을지언정” 정절을 더럽히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벗어난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벗어났다는 것은 이겼다는 또 다른 표현인데, 이는 출애굽 당시 광야교회가 바로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것을 염두에 두고 한 말씀입니다. 벗어난 그들은 “유리 바다 가에 서서”, 달리 표현하면 홍해를 건넌 후에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2)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은 “짐승, 우상,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긴 삼중(三重)적인 승리를 한 자들입니다.
③ 이점에서 구조를 생각하게 되는데 1절에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졌으니 곧 마지막 재앙이라” 하고는 2절에서는 재앙보다 먼저 승리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찬양하는 것이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을 찬양하고 있는가? 두 가지인데 먼저 하나님의 구원행사가 의롭고 참되심을 찬양하고, 둘째는 심판의 정당성과, 심판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의롭고 참되시다”(3하)는 점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심판을 시행하기 전에,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변증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구원도 심판도 중요합니다만 어떤 경우에도 훼손되어서는 아니 되고,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우심”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이 이를 얼마나 중요시하고 있는가를 보십시오.
㉠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15:3).
㉡ “이렇게 심판하시니 의로우시도다(16:5).
㉢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16:7).
㉣ “그의 심판은 참되고 의로운지라”(19:2) 하고 거듭 거듭 변증합니다. 이점을 시편에서는,
그의 손이 하는 일은 진실과 정의이며 그의 법도는 다 확실하니
영원무궁토록 정하신 바요 진실과 정의로 행하신 바로다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속량하시며 그의 언약을 영원히 세우셨으니
그의 이름이 거룩하고 지존하시도다 (시 111:7-9)고 찬양합니다.
④ 우리의 구원도, 최후의 심판도 하나님의 의롭고 참되심에 손상을 입히면서 행해지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점을 명심한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입니다. “이기고 벗어난 자들”은 이를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구원하심이 의로우시고 참되심을 찬양합니다. 이점이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3상)라는 표현에 나타나는데, 이는 모세의 노래가 있고, 또 어린 양의 노래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구속사의 맥락에서 보면 출애굽과 영적 출애굽은 둘이 아니라 결국 하나라는 것입니다.
출애굽 당시 홍해를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행하심으로 건넌 후에 홍해 바다 가에 서서 부른 노래(출 15장)가 “모세의 노래”입니다. 이때 모세는 “주의 인자하심으로 주께서 구속하신 백성을 인도하시되 주의 힘으로 그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출 15:13)라고 찬양했습니다.
찬양 중에 중요한 세 가지 요소가 등장하는데, “인자, 구속, 들어감”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자손에게 “인자” 곧 은혜를 베푸셔서 유월절 양의 피로 <구속>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구속하신 백성들을 “주의 거룩한 처소에 <들어가게> 하시나이다”, 즉 그들을 가나안 복지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지금 계시록에서도 하나님의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신 백성들을, 은혜로 인도하셔서, “주의 거룩한 처소”로 들어가게 하시려는 이점을 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라 하는 것입니다.
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놀라우시도다”(3상) 합니다. 창세기 1장의 천지 창조의 행사로부터 마지막 책 계시록 마지막 부분에서 “이루었도다”(21:6) 하시기까지의 하나님의 모든 행사는 크고 놀라운 행사입니다. 그런 중에서도 구속사의 맥락으로 보면 구약시대에 행해주신 두 가지 “크고 놀라운” 행사와, 신약시대에 행해주신 두 가지 “크고 놀라운” 행사가 대칭을 이루고 있는 것을 대하고 놀라게 됩니다.
㉠ 구약시대에 행해주신 크고 놀라운 첫째 행사는 바로에게 사로잡혀 있던 자들을 유월절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하여 내신 “출애굽의 행사”인데 이는,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고전 5:7)에서 실체로 성취가 되었습니다.
㉡ 둘째로 크고 놀라운 행사는, “출 바벨론” 포로귀환 행사인데 이점을 시편에서는,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으니
우리는 기쁘도다(시 126:1-3) 라고 찬양합니다.
바벨론 포로귀환은 사탄의 포로에서 귀환하게 될 것에 대한 예표인데 주님께서,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이 말씀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8, 21) 하심으로 성취가 되었던 것입니다.
⑥ 이런 맥락에서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행사 중 최고 최대로 “크고 놀라운” 행사는,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롬 5:10) 하신 행사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여”(롬 5:7-8)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놀라운 일(기이한 일)”이라고 밖에는 달리는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3상) 하나님께서 “죄인을 위하여, 원수를 위하여”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내어주셨다니, 이 사건은 무엇에 비할 수 없는 기이한 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여주시고,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신 하나님의 구속사역은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하신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우리)를 의롭다 하려 하사”(롬 3:26), 자기 아들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시고야 구원하여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 길은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는 것입니다.
⑦ 이처럼 구속사역이란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사역보다도 큰일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첫 창조는 말씀만으로 가능하였으나 구원계획은 자기 아들의 대속을 통해서만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여 주께서 대사(大事)를 행하셨사오니 누가 주와 같으리이까”(시 71:19) 하고 감격해 하고, 마리아는, “능하신 이가 큰일을 내게 행하셨으니 그 이름이 거룩하시며”(눅 1:49) 라고 찬양하고, 사도행전 2:11절에서는,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라고 고백했던 것입니다.
⑧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이까”(4상)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묻고 있는 것은 짐승을 추종하는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인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처럼 “크고 놀라운 일을, 의롭고 참된” 방도로 행해주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거부하고 짐승을 경배하며 추종한다면 그들 위에 진노의 대접을 쏟으신다 해도 하나님은 의로우시다는 뜻입니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남
① 다음으로 주의 심판이 “의로우시고 참되심”을 찬양합니다. 이점이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4하) 한 진술입니다.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는 “의”가 무엇을 일컫는 말인가? 하나님의 공의, 즉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점을 로마서에서는,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롬 3:25하)라고 말씀합니다. “전에 지은 죄”란 구약시대에 지은 죄를 가리키는데, 구약시대에는 “죄를 간과”, 즉 보고도 못 보신 척하신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지 못한 시대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합니다. 의로우심을 어떻게 나타내셨는가? 구약시대에 지은 죄에 대한 모든 진노를 “화목제물로 세우신” 자기 아들에게 쏟으심으로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하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롬 3:25상, 26) 합니다. 이것이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의 뜻입니다. 좀 더 말씀을 드리면 자기 아들에게 공의(公義)를 나타내심으로 죄인을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칭의(稱義)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4하) 하는 것입니다.
② 이는 14:19-20절에서, “천사가 낫을 땅에 휘둘러 땅의 포도를 거두어 하나님의 진노의 큰 포도주 틀에 던지매 성 밖에서 그 틀이 밟히니 틀에서 피가 나서 말굴레에까지 닿았고 천육백 스다디온에 퍼졌더라” 한 것과 결부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혹자는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가 있단 말이냐 하고 의혹을 제기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15장은 “마지막 재앙”(1)을 앞두고 하나님의 심판행사가 어찌하여 정당한가를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쏟으셔야 할 진노를 대신 자기 아들에게 쏟으셨습니다. 복음이 무엇인가?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아들이 대속하여주셨다는 소식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끝내 거절한다면 죄에 대한 진노를 자신이 받을 수밖에는 다른 방도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심판을 단 번에 내리시지 않고 오래 참으시는 중에 ¼의 재앙에서, ⅓의 재앙을 점차적으로 가중시켜 가시면서 회개를 촉구하시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드디어 마지막 재앙에 앞서서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고 변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그러므로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는 증언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과연 “계시는가” 하는 신정론(神正論)의 의미가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성도들을 박해하면서,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시 42:3, 10, 79:10, 115:2) 라고 조롱했던 것입니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시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의로우심이 나타나게 되면, “그 때에 사람의 말이 진실로 의인에게 갚음이 있고 진실로 땅에서 판단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시 58:11)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4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말은 다 회개하리라는 그런 뜻이라기보다는 항복하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에 대한 회의(懷疑)는 불신자에 국한 된 것만은 아닙니다. 시편 기자도,
“하나님이 참으로 이스라엘 중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선을 행하시나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였음이로다”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은 것”(시 73:2-5)을 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심판이 있어야만 하는가? 때는 늦었지만 교만한 자들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는 마지막 방편인 하나님의 자기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우심(심판)은 필연적으로 나타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둘째 단원(5-8) 하나님의 진노의 대접
① “또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증거 장막의 성전이 열리며 일곱 재앙을 가진 일곱 천사가 성전으로부터 나와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5-6) 등장합니다.
일곱 재앙이 담긴 대접을 쏟을 일곱 천사들이, “하늘의 증거 장막의 성전”에서부터 나온다 한 것은 11:19절에서 성전이 열리면서 “성전 안에 하나님의 언약궤가 보였다” 한 것과 결부되는 말씀입니다. 왜 “언약궤, 증거 장막”을 거론하는가? 이는 앞으로 전개될 심판이 “율법의 요구”(롬 8:4)대로, 다시 말하면 법(法)대로 시행될 것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② 또한 일곱 천사의 복장이 특이하게 묘사되어 있음을 주목하게 됩니다. “맑고 빛난 세마포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런 모습의 천사를 보셨습니까? 이런 복장은 대제사장의 모습이면서, 1:13절에서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한 주님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어찌하여 재앙을 집행하는 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복장을 하고 있을까요? 이는 “의롭고 참되신(3), 거룩하시고 의로우신”(4) 하나님의 심판을 집행하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즉 이런 뜻입니다.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거룩 성과 의로우심이 심판을 집행하는 자들의 모습을 통해서도 나타내고 있다는 말입니다.
③ “네 생물 중에 하나가 영영토록 살아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7) 합니다. 여기서도 하나님의 심판의 거룩 성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금 대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에서 금은 거룩을 상징하고, 심판은 “놋”으로 상징하는 것이 상예(常例)입니다. 그래서 번제단은 놋으로 만들었으며, 원수를 밟으실 주님의 발을,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같다”(1:15)고 묘사한 것입니다. 그런데 금 대접에 하나님께 드려질 향이 아니라 진노가 가득히 담겼다니,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4하) 하고 찬양할 것밖에는 없는 것입니다.
④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으로 말미암아 성전에 연기가 차매 일곱 천사의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8) 하고 15장은 마칩니다.
“성전에 연기가 차매, 재앙이 마치기까지는” 성전에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의 거룩함, 의로움, 엄위를 나타내는 표현인 것입니다. 한마디로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4상)를 형상화한 것입니다. 이점을 히브리서에서는,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 하시고 또 다시 주께서 그의 백성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것을 우리가 아노니 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이 무서울진저”(히 10:30-31) 합니다.
한 말씀 부언할 점은, “증거 장막의 성전”이란 표현은 하나님의 심판대를 의미하는데, “은혜의 보좌와, 심판의 보좌”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에게는 은혜의 보좌가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보좌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노의 대접을 쏟으시는 순간만은 “심판의 보좌”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능히 들어갈 자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이 날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 아니라, 보라 지금은 심판의 날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곱 재앙이 마치기까지” 뿐입니다.
⑤ 전선에서 행진하고 있는 병사의 멘 총구(銃口)에 야생화가 꽂혀있는 그림을 본 적이 있습니다. 계시록 하면 무시무시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됩니다만, 그런데 마지막 화를 쏟기 직전에,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 이름의 수를 이기고 벗어난 자들이 유리 바다 가에 서서 하나님의 거문고를 가지고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는 15장의 장면은 계시록에 있어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중 하나입니다.
형제여, 영적 싸움을 싸우다가 피곤함을 느끼게 되거든 잠시 유리 바다 가에 서서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십시다. 우리 당대에 주님이 오시지 않는다면 우리들이 주님께 가게 될 터인데, 요단강을 건너가 시온 성 언덕 위에서 수많은 천사들과 함께 어린 양의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