雲住寺, 가을비*
UNJUSA, PLUIE D' AUTOMNE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
흩날리는 부드러운 가을비 속에
꿈꾸는 눈 하늘을 관조하는
와불
구전에 따르면, 애초에 세 분이었으나 한 분 시위불이
홀연 절벽 쪽으로 일어나 가셨다
아직도 등을 땅에 대고 누운 두 분 돌부처는
일어날 날을 기다리신다
그날 새로운 세상이 도래할 거란다
서울 거리에
젊은이들, 아가씨들
시간을 다투고 초를 다툰다
무언가를 사고, 팔고
만들고, 창조하고, 찾는다
운주사의
가을 단풍 속에
구름도량을 받치고 계시는
두 분 부처님을
아뜩 잊은 채
찾아달라고
붙잡고 쓸어간다
로아(loas)의 형상을 한 돌부처님
당신堂神을 닮은 부처님
뜬눈으로 새우는 밤
동대문의 네온불이
숲의 잔가지들만큼이나
휘황한 상점의 꿈을 꾸실까?
세상 끝의
바다 끝의
분단국
겁에 질려
분별을 잃은 듯한 나라
무엇인가를 사고 팔고
점을 치고
밤거리를 쏘다닌다
서울이 불 밝힌 편주片舟처럼 떠다닐 때
고요하고 정겨운
인사동의 아침
광주 예술인의 거리
청소부들은 거리의 널린 판지들을 거두고
아직도 문이 열린 카페에는 두 연인들이 손을 놓지 못한다
살며, 행동하며
맛보고 방관하고 오감을 빠져들게 한다
번데기 익는 냄새
김치
우동 미역국
고사리나물
얼얼한 해파리 냉채
심연에서 솟아난 이 땅엔
에테르 맛이 난다
바라고 꿈을 꾸고 살며
글을 쓴다
세상의 한끝에서
사막의 한끝에서
조명탄이 작렬하며 갓 시작한 밤을 사른다
갈망하고
표류하고
앞지른다
간판에 불이 들어온다
숲의 부러진 나뭇가지들처럼
나는 여기서 휘도는 바람에 대해 생각한다
죽음 속으로 회색의 아이들을 눕히는 바람에 대해
매운 사막의 관 위로
기다리고 웃고 희망을 가지고
사랑하고 사랑하다
서울의 고궁에
신들처럼 포동포동한
아이들의 눈매는 붓끝으로 찍은 듯하다
기다리고 나이를 먹고 비가 온다
운주사에 내리는 가랑비는
가을의 단풍잎으로 구르고
길게 바다로 흘러
시원의 원천으로 돌아간다
두 와불의 얼굴은 이 비로 씻겨
눈은 하늘을 응시한다
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은 구름 하나가 지나가는 것
부처님들은 또 다른 시간과 공간을 꿈꾼다
눈을 뜨고 잠을 청한다
세상이 벌써 전율한다
서울__파리 2001년 10월 22일
서울__사당동 2004년 4월 19일
*프랑스의 소설가 르 클레지오는 2001년 한국의 운주사를 방문한 후 받은
감동을 잊지 못해 시를 써서 보내주었다. 여기 실린 시는 최미경(한국 외
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의 번역본이다.
제 19회 소월시문학상 작품집 박정대시인의 [자전적 에세이] 중에서 발췌
르 클레지오 (Jean Marie Gustave Le Clezio) 소설가
출생 1940년 4월 13일 (프랑스)
학력 니스대학교 학사
데뷔 1963년 소설 '조서'
수상 2008년 노벨 문학상
1994년 리르지 선정 살아있는 가장 위대한 프랑스 작가
경력 2007~2008 이화여자대학교통역번역대학원 초빙교수
11년 들어 무슨 인연이 닿아서 인지 모르나 1월 말, 그리고 4월 말 두 번의
발길이 운주사를 다녀왔다 처음 이 시를 대할 때 좀 엉뚱하다 싶어 무려 열
번을 꼼꼼히 숙독했다 그리고 필사를 하며 놀라고 부끄러웠다 전혀 인연이
없을 것만 같은 먼 이국의 소설가가 보고 사유한 글에서 우리가 미처 인지
하지 못한 우리 것을 디테일하고 애정어린 관조로, 넓은 폭으로 싸 안은 시
에 무릎을 꿇고 싶다 버무린 행간의 언어들이 어울리지 않은 것처럼 보여짐
에도 조화롭게 짜여진 문양의 실크직조 같은, 어떤 작은 사물에서 사소한
본질만을 추구했던 개명하지 못한 좁은 시안을 눈 뜨게 해 주는,/한 세기가
지나가는 것은 구름 하나가 지나가는 것/ 이 싯귀에 오래도록 눈 길이 멈췄다
(최정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