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이 떠난 자의 몫만이 아니라면 / 송재학
어둔 골짜기마다 눈이 있다
조금씩 녹고 있겠지만
햇빛 비치는 밝은 골짜기에도 눈이 있다
아직 사라지지 못하는 잔설의 봉제縫製에는
어김없이 네 발자국이 있다
우리가 숨쉬었던 횡경막 사이에서도 눈은 금방 녹지 못한다
떠나지 못하는 마음이 있듯
숨쉴 때마다 뿌리까지 아픈 늑골이 있다
앙다문 송곳니 같은 잔설들이 녹아서 없어지는 등燈이라면,
문득 산비알로 흩날리는 눈보라가 네가 말하려는 슬픔이라면,
아롱거리는 햇빛은 네 평화라고 짐작한다
붉은 기와 /송재학
피렌체의 지붕은 붉은 기와, 죄다 붉은색이니까 색감이 흐려져서 흰색의 얼룩이 생긴다 붉은색은 홍채의 북채색이다 석조 건물에 박혀 차츰 희미해지는, 햇빛이 쏘아올린 화살촉 일부는 아직 파르르 떨고 있다 그런 건물은 3층까지 어둡다 햇빛 때문에 길이 더 좁장해진 거와 다르지 않다 가령 바닥도 돌인 골목길을 몇 시간쯤 걸었다면 햇빛을 짓이긴 발바닥은 부르트는데, 그런 싸움의 흔적이다. 햇빛과 싸우지 않으려면 햇빛처럼 강렬해야 한다면서도, 붉은 기와들은 종일 하품한다 게을러지기 위해 눈부신 햇빛 속에 가만히 있어본다 손톱에서부터 차츰 녹아가는 육체가 있고, 그건 내 마음이나 또 무언가 연결되었다는 느낌을 준다 그러니까 붉은 기와란건 햇빛에 바짝 구워진 물상이다
소나무라는 짐승/송재학
나무가 토해내는 모래의 잎들이 까칠까칠하다
전기톱날이 갈당갈당한 목이 아니라
이빨인 옹이에 박히면서
밀도살꾼 형제의 후회가 시작되었다
단단한 수피 속의 짐승은 음전했지만
톱밥이 순교하는 피처럼 허옇게 튀면서
빗줄기마저 우왕좌왕이다
겨우 몸통을 넘기니까 갑자기 조용하다
너무 이쁜 짐승을 잡았네, 아우마저 심상해했다
무덤 주위가 정리되니까
소나무가 제 몽리면적을 포기했는지 앞이 잠깐 밝아졌지만
어딘가 깜깜해진 것도 알겠다
육신을 뺏긴 놈이 여기저기 똥을 눈 듯 송진 냄새가 진하다
사람의 안에만 짐승이 도사린 것은 아니라는 하루!
튤립에게 물어보라 / 송재학
지금도 모짜르트 때문에
튤립을 사는 사람이 있다
튤립, 어린 날 미술시간에 처음 알았던 꽃
두근거림 대신 피어나던 꽃
튤립이 악보를 가진다면 모짜르트이다
리아스식 해안같은
내 사춘기는 그 꽃을 받았다
튤립은 등대처럼 직진하는 불을 켠다
둥근 불빛이 입을 지나 내 안에 들어왔다
몸 안의 긴 해안선에서 병이 시작되었다
사춘기는 그 외래종의 모가지를 꺾기도 했지만
내가 걷던 휘어진 길이
모짜르트와 더불어 구석구석 죄다 환했던 기억
.....튤립에게 물어보라.
버들강아지 / 송재학
버들강아지에는 하늘거리는 영혼이 있다 봄날을 따라다니며 쫑알거리는 강아지의 흰 털도 버들강아지와 같은 종족임을 알겠다
한 영혼을 음양이 나뉘어서 하나는 어둔 땅 아래 뿌리를 가져 식물이게 하고 다른 하나는 어둠을 뇌수 안에 가두어 강아지처럼 돌아다니게 한 것이다
누에 /송재학
아마 내 전생는 축생이었으리 누군가 내 감정을
건드린다면 하루아침에 나는 누에로 되돌아가버릴
지 모른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강변의 야산이 친애
하는 벌레처럼 다가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잠들면
나는 늘상 몸을 뒤척이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게
다가 고기를 멀리하고 나무 그늘의 통통한 물살에
온몸을 자주 맡겼다 잎맥을 거슬러가는 애벌레의
날숨에도 내 생로병사가 느껴진다 실크로드에 병
적으로 집착한 것도 수상하다 아니다 고백하자 5
령이라는 잠을 자고 나면 누에는 이승과 저승의 해
안을 가볍게 날아드는 나비, 더 고백하자 그 나비
의 날개라는 반투명이 내 후생임을
* 기억들
귀 /송재학
달포 전부터 귀에서 들리는 소리, 달가닥달가닥 조심스럽다 새벽에 여는 창문처럼 갑작스럽고 미세하게 시작했다 귀지일 거라는 생각에 도리질을 한 건, 수면에 번지는 파문이 귀를 중심으로 자꾸 넓어지기 때문이다 그냥 두기로 했다 걸으면 꼼지락거린다 달가락거린다 머리를 흔들면 서랍이 쏠리는 것이다 마치 누가 서랍을 들쑤시며 무언가 찾는 느낌이다 암내를 풍기는 서랍이 튀어나오려 한다 속수무책, 내 귓속에서도 살림이 따로 차려지나 보다 나만이 눈치챈 지구축의 기울어짐! 귓바퀴 안쪽 수초가 자라 몸이 헝클어지는 이유에 골몰한 사이 소리는 시나브로 없어졌다 서랍을 뒤흔든 힘이 바늘구멍 너머로 사라졌나 보다 저절로 그렇게 된 건 아니다 무슨 힘이 서랍을 열고 닫았을까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낸다/ 송재학
1
강물이 합수하기 전 큰소리 낸다
철로와 길과 강물이 함께 가면서
먼저 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상류에서 너가 기어이 강폭을 좁히기 때문이다
은결든 너는 폭포와 살여울을 실어보낸다
기우뚱 강이 난간을 놓치고
돌아갈 길 할퀴면서 비가 온다
이미 산그림자를 베어문 물살이 거칠다
너가 거슬러가면 강물은 급하고 높아진다
너와 부딪친 물굽이를 핑계로
강은 범람을 시작한다
팔 없이 떠내려오는 저 뗏목들
울음 없이 떠내려오는 퉁퉁 불은 부음들
2
무릇 사물이란 평정을 잃으면 소리를 내는 법이다. 초목은 본래 소리가 없지만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고 물도 본래 소리가 없으나 바람이 흔들어 소리를 내게 하나니, 물이 뛰어 오르는 것은 무언가가 격랑케 한 것이고 빨리 흘러가는 것은 무언가가 가로막기 때문이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것은 무언가가 뜨겁게 하기 때문이다. 금석도 본디 소리가 없지만 무언가가 때려서 소리나게 한다. 사람의 말도 마찬가지다. 부득이한 경우라야 말을 하게 되므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생각이 있기 때문이요 통곡을 하는 것은 서러움 심정이 있기 때문이다. 입 밖으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불평이 있기 때문이다.*
*이병한 편저, <<중국고전시학의 이해>>(문학과지성사, 1992), 당나라 시인 한유의 글<送孟東野序>에서 大凡物不得其平則鳴……에서 인용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 송재학
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홑치마 같은 풋잠에 기대었는데
치자향이 水路를 따라 왔네
그는 돌아올 수 있는 사람이 아니지만
무덤가 술패랭이 분홍색처럼
저녁의 입구를 휘파람으로 막아 주네
결코 눈뜨지 말라
지금 한 쪽마저 봉인되어 밝음과 어둠이 뒤섞이는 이 숲은
나비떼 가득 찬 옛날이 틀림없으니
나비날개의 무늬 따라간다네
햇빛이 세운 기둥의 숫자만큼 미리 등불이 걸리네
그는 소리내지 않고도 운다네
그가 내 얼굴 만질 때
나는 새순과 닮아서 그에게 발돋움하네
때로 뾰루지처럼 때로 갯버들처럼
순수/ 송재학
오후 1시의 골목을 디딘 순간 내 등 뒤에서 먼저 문 닫는 소리, 그늘이 골목의 입구를 잠근 것이다 나른하다 보자기만한 햇빛도 간결해서 내 몸은 명암으로 뚜렷이 나뉜다 창문 아래 순한 송사리 떼처럼 몰려 있는 햇빛이기에 맨드라미는 황금빛 꽃잎을 가졌다 흑백의 고요가 담 넝쿨을 감아가는 골목은 유쾌해서 몇 번이나 같은 대문을 지나쳤다 달콤하고 씁쓰레하고 매콤하고 쓰디쓴 것들의 맛은 다시 나른하다 매번 향유고래의 회색 등을 디디는 순례자의 발자국을 따라가야만 했다 오후 1시의 긴 시계팔이 삶을 부축해 나올 때 골목을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흥, 나는 너무 복잡했구나
뻐꾹채라는 음악 / 송재학
엉겅퀴과의 수많은 종류 중 어떤 것은 붉은 꽃이 주먹만하여 뻑꾹채라
는 색다른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 풀은 기린초 으아리 까치수염 금불초 따
위 여름 식물들과 섞이면 졸막졸막한 엉겅퀴 식구일 뿐이지만, 그 꽃을 냉
큼 밑둥치에서부터 잘라 꽃병에 세 송이만 꽂으면 음악이란 이름을 얻는다
꽃의 높낮이는 음표와 얼마나 같거나 다를까 정든 곳과 멀어질수록 자신도
모를 진액을 흘리는 뻐꾹채 앞에서 이 음악이란 것도 자꾸 어두워진다 |
명자나무 우체국 / 송재학
올해도 어김없이 편지를 받았다 봉투 속에 고요히 접힌 다섯 장의 붉은 태지(苔紙)도 여전하다 화두(花頭) 문자로 씌어진 편지를 읽으려면 예의 붉은별무늬병의 가시를 조심해야 하지만 장미과의 꽃나무를 그냥 지나칠 순 없다. 느리고 쉼 없이 편지를 전해주는 건 역시 키 작은 명자나무 우체국, 그 우체국장 아가씨의 단내 나는 입냄새와 함께 명자나무 꽃을 석삼년째 기다리노라면, 피돌기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아가미로 숨쉬니까 떨림과 수줍음이란 이렇듯 불그스레한 투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명자나무 앞 웅덩이에 낮달이 머물면 붉은머리오목눈이의 종종걸음은 우표를 찍어낸다 우체통이 반듯한 붉은색이듯 단층 우체국의 적벽돌에서 피어나는 건 아지랑이, 연금술을 믿으니까 명자나무 우체국의 장기 저축 상품을 사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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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의 식구 /송재학
슬플 때 나를 위로하는 건 내 몸이 먼저다
미열이 그 식구이다
섭씨 39도의 편두통은 지금 염료를 섞고 있다
내 발열은 치자꽃대궁 같은 것
치자꽃 노란색 열매는 종일 위염을 생각하고 있다
햇빛의 양철 지붕에 세운 내 미열 학교에서
아픈 위도 명치에서 질문한다
붉은 색이 얼머나 필요하냐고
쓰라린 위를 향한 몸의 집착은
슬픔의 입성을 꿰차는 것이다
시구 없는 슬픔도 참조하도록!
자꾸 속삭이는 적나라한 열꽃
자꾸 넘치는 치자꽃물의 강우량에 물드는 쪽으로
미열은 운동한다
어깨도 등도 치자꽃 가득핀
슬픔驛의 악보여
혀 / 송재학
입술 안쪽 유일한 짐승인 혀는
눈도 손발도 없이
온몸으로 꼼지락거리는데
그 몸 어딘가 꿈틀꿈틀 천 개의 활주로가 있다는데
그 많은 공지 위로 수생의 버짐꽃이 피고 진다는데
혓바닥 빌려 한 켠에서 쟁기질 한다는 이야기는 또 무어냐
들숨과 날숨 죄다 무미건조하게 들락날락하기는 마찬가지
단순해지자
내 입 속에 혀가 있는 게 아니라
혀 아래 내가 기대어 쉰다는 느낌처럼
절벽 / 송재학
절벽은 제 아랫도리를 본 적 없다
직벽이다
진달래 피어 몸이 가렵기는 했지만
한 번도 누군가를 안아본 적 없다
움켜쥘 수 없다
손 문드러진 天刑 직벽이기 때문이다
솔기 흔적만 본다면
한때 절벽도 반듯한 이목구비가 있었겠다
옆구리 흉터에 꽈리 튼 직립 폭포는
직벽을 프린트해서 빙폭을 세웠다
구름의 風警을 달았던 휴식은 잠깐,
움직일 수도 없다
건너편 절벽 때문이다
더 가파른 직벽과의 싸움이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늪의 內簡體를 얻다 / 송재학
너가 인편으로 붓틴 褓子에는 늪의 새녘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믈 우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웅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곡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잇다 수면의 믈거울을 걷어낸 褓子 솝은 흰 낟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눈엽처럼 하늘거렸네 褓子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머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內簡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대되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한 소솜에 遊禽이 적신 믈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만한 고요의 눈씨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褓子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을 늪을 褓子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어름이 너무 차겠지 向念
주)
1. 언니가 여동생에게 보내는 내간체의 느낌을 위해 본문에 남광우의 『교학고어사전』(교학사, 1997)을 참고로 고어 및 순우리말과 한자말 등을 취했다.
2. 현대어 본문은 다음과 같다.
너가 인편으로 부친 보자기에는 늪의 동쪽만 챙긴 것이 아니다 새털 매듭을 풀자 물 위에 누웠던 亢羅 하늘도 한 움큼, 되새 떼들이 방금 밟고간 발자국도 구석에 꼭두서니로 염색되어 있다 수면의 물거울을 걷어낸 보자기 속은 흰 낮달이 아니라도 문자향이더라 바람을 떠내자 수생의 초록이 새순처럼 하늘거렸네 보자기와 매듭은 초록동색이라지만 초록은 순순히 결을 허락해 개구리밥 사이 너 과두체 내간을 챙겼지 도근도근 매듭도 안감도 모두 雲紋褓라 몇 점 구름에 마음 적었구나 삽시간에 游禽이 적신 물방울들 내 손등에 미끄러지길래 부르르 소름 돋았다 그 많은 고요의 눈맵시를 보니 너 담담한 줄 짐작하겠다 빈 보자기는 다시 보낸다 아아 겨울 늪을 보자기로 싸서 인편으로 받기엔 얼음이 너무 차겠지 向念
홍단풍/ 송재학
모두가 그렇게 붉을 따름이어서 더 붉지 않아도 탓할 사람이 없는데 유독 선연하여 눈길 끄는
단풍 일가 아래 걸음이 절로 멈췄다 붉은 색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 빛의 산란 때문에 내 속에서
먼저 울며 켜졌던 등불의 숫자가 몇인지 헤아려 보려고, 그 등불을 매달고 달리던 기차의 창이
얼마나 많은지 고개 끄떡이려는데, 만산홍엽이 무엇이 그리 급한지 내 멱살부터 잡고 한없이 높
은 음으로만 소리지르기 시작한다, 살여울이 내 몸의 휘모리 부분만 훑고 지나간다
입김 같은 절 /송재학
느티나무 잎 안에 들어가본 내 생각
나는 잠시 엎드려 죽었다가 다시 일어난다
느티나무 잎새가 만지는
절터와 별똥별은 나의 앞인가 뒤인가
불타고 헐어버리고 사라지는 것들 떠받치며
나무들 자라서 죽고
구절초 산부추가 새살처럼 돋는다
눈알 빠개지도록 부릅뜬 시선에 들어온
너른 땅 모두, 내 몸 합쳐 절이라 부르자
그 절간의 주춧돌은 새벽서리 앞세워
입김 같은 절을 짓는다
가을 갈색을 이기지 못하면
내 입김 안에 빈터가 있으니 어서 기둥부터 세워라
안 보이는 사랑 /송재학
강물이 하구에서 잠시 머물듯
어떤 눈물은 내 그리움에 얹히는데
너의 눈물을 어디서 찾을까
정향나무와 이마 맞대면
너 웃는데까지 피돌기가 뛸까
앞이 안 보이는 청맹과니처럼
너의 길은 내가 다시 걸어야 할 길
내 눈동자에 벌써 정향나무 잎이 돋았네
감을 수 없는 눈을 가진 잎새들이
못박이듯 움직이지 않는 나를 점자처럼 만지고
또다를 잎새들 깨우면서 자꾸만 뒤척인다네
나도 너에게 매달린 잎새였는데
나뭇잎만큼 많은 너는
나뭇잎의 不滅을 약속했었지
너가 오는 걸 안 보이는 사람이 먼저 알고
점점 물소리 높아지네 |
라마승 / 송재학
길가 슈퍼에서 우유를 마시는데, 할개눈을 한 사내가 문을 열고 들어온다 어디선가 한 번 본 얼굴이다 하지만 그 탈을 따라가려면 천 개의 산과 강을 건너야 하고 몇천 날의 낮과 밤이 필요하다 그도 수많은 틈새를 헤아리는 눈치이다 아마도 우리는 한방에서 뒹굴었거나 한 달쯤 가래톳의 수행을 같이 견디었을 것이다 너는 어디까지 갔니?라는 의문을 얼버무린 채 라마승인 양 우리는 허공에서 눈수작하고 그가 챙긴 한 꾸러미의 달걀 껍질처럼 금방 부서질 인연을 간유리처럼 짐짓 감추었다
만어산/ 송재학
가분재기 소리소리 지르고 싶을 때가 있지만 지금은 나를 그냥 두어야 할 때! 내 안으로부터 그 소리의 덩어리를 제발 밖으로 끄집어내달라고 애원한다 한껏 입 벌려도 소리가 너무 크고 넓어서 허공에 걸쳐야 제격이다 싶을 때, 그 소리가 이명과 비슷하고, 그 소리가 비에 젖어 있으며 거무틱틱하고 각이 졌고 깊이 울리고 그 소리의 수가 하염없이 많아서 내 목청으로 도저히 감당하지 못할 때, 한때 만어산 부처 그림자이라던 커다란 편마암 바위처럼 편경의 형편이 돼보려 한다 내가 소리 높여도 잘 돼먹지 않는 세상이므로 편마암 바위를 깡깡 때려서 황종에서 청협종까지 내 안의 음계를 천천히 끄집어내어 햇빛에 말리는 게 고래고래 목청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낫지
눈의 무게 / 송재학
느티나무 가지에 앉은 눈의 무게는 나무가 가진 갓맑음이 잠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느티나무가 입은 저 흰 옷이야말로 나무의 영혼이다
밤새 느티나무에 앉은 눈은 저음부를 담당한 악기이다 그때 잠깐 햇빛이 따뜻하다면 도레미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도 보일 게다
복사꽃에 떠밀려 / 송재학
사람이 닿을 수 있는 곳에
복사꽃이 핀다 나무보다 먼저
햇빛에 이르러 마음은
희고 붉은 꽃잎 속 타는 혓바닥처럼
복사꽃에 떠밀리면
허리 굽혀 어머니를 껴안는 산길
봄비를 오게 하는 무덤
누란에의 기억 / 송재학
땅의 이름은 누란이다. 사막 가운데 세월을 거쳐온
강물 흐르고 검은 부리 새들이 종일 탑을 쪼으며 호수
는 꿈 같은 푸른 비단을 펼쳤다 사람들은 양을 몰거나
모래소금을 찾고 은고기를 잡았다 아이는 서쪽의 파미
르 고원에 널린 노을 바라보며, 이윽고 늙은이는 굽은
등 펴고 모래에 묻힌다 오랜 바람 짧은 노래는 그 땅의
물이나 소금이다 지는 노을 검은 거울 품으며 여인은
죽어도 지아비의 머리칼에 드러눕는다 죽음은 전쟁과
일식으로도 오지만 누란에서 죽음은 노래가 되는 것,
혹은 독풀을 머금고 사치한 비단을 두를 때 자신은 누
란의 운명에 보태진다는 가열함이 있다 지금 모래무덤
파면 누란은 호박瑚珀이나 옛 노래 몇 절로 고여 있다 사
람들이 선선?善 땅으로 옮긴 뒤 언젠가는 돌아가야 할
땅이란 뜻에 누란의 슬픔이 있다. 그 땅의 이름은 누란
이다
소나무 /송재학
한 발만 더 디디면 벼랑인데 바로 거기서 뿌리를
내리는 소나무가 있다 자세히 보면 소나무는
늘 바르르 떨고 있는데, 에멜무지 금방 새로 변해
날아가도 아무도 탓하지 않을 아슬함으로 잔뜩
발돋움한 채 바르르 떨고 있는데, 아직도 훌쩍
날아가지 않고 서 있는 저 나무가 기다린 것은 무어냐
애인 / 송재학
너는 악을 통해 다가 왔다
석류꽃 향기를 밀어내는 밤이
흰손가락으로 타이프 라이트처럼 찍는 너의 발자국은
내 체온을 따라와 흑백으로 인화되어 있다
섭씨 39도쯤에서
너의 고백이 나를 불심검문 하리라
너는 곧 알게되겠지
왜 내두손이 붕대를 감고 있는지
내가 만졌던 너는 벌건 숯덩이 이전에
악의 두께였다
심장에서 손바닥까지 흐르는 피를 보듯
사랑을 시작할때가 있다
너는 나의 애인이니
너안에서 불탄몸을 안고가는 나를 보았겠지
참담하여라
그러고도 너는 출렁이는 호수이다.
눈물이라는 영혼 / 송재학
어떤 눈물에도
영혼이 드나든 흔적은 없다
하지만,
슬픔에서 낙하하는 바로 그 순간이
눈물이 물방울에서 영혼으로 바뀐 때!
그 단순한 순결에
무슨 3.4조의 음보나
손발이나 필요하랴
천둥 같은 꽃잎 /송재학
절 마당의 산벚나무를 보러 왔는데 이미 산벚나무 죄다 진 회두리판, 다만 법당에 매달린 필부필부(匹夫匹夫)의 연등 불빛이 꽃살문 틈새로 화살처럼 쏟아져 나와 산벚나 무 온전히 감싸니 그 나무, 뜻밖에 또 한번 꽃피우느라 분 신(焚身)을 준비하는데 어찌해 천둥소리는 나무보다 내 안에서 먼저북채를 잡았을까
회색과 노란색 / 송재학
눈알이 아프더니 눈물이 말라가는 안구건조증이란다 눈 속의 샘물이 텅 빈 건 더 이상 울음 밖으로 띄울 부표 가 없는 탓이다 내 시선이 자주 머무는 도심의 건천(乾川) 은 늘 낡은 외투색 콘크리트 욕조. 눈이 많이 아픈지 저 외투색만 익숙하다 생각나듯 고지랑물이 고이는 욕조에 몸집 큰 트럭이 짐승처럼 으깨져 널브러진 풍경만 반복된 다 망가진 해드라이트가 내 눈동자 속에서 불켜려는 안 간힘이 불편하다 용두머리 야산의 아랫도리를 적실 때마다 다 봄비의 전립선은 아프다 외투색 욕조도 깊이를 회복한 다면 관능이라 할 수 중 식물들은 마다 않을 게다 어쩔 수 없이 봄이 와서, 봄비가 채근해서 즙을 짜내듯 피는 개나 리의 노란색으로 으으, 얼마나 어렵게 짜낸 진액인지 몰라도 내 눈알이 빠개질 듯 아프다 올해 단 한 번 폭발하듯 피어 난 개나리의 진노랑이 결국 내 눈동자를 후벼파리라
양이두로 상상하기 /송재학
8현 가야금의 머리 부분인 양이두 사진을 보면 먼 백제 사람의 저녁이 수많은 귀와 입을 가진 채 내 저 녁과 겹치고, 몇 번이고 울리는 우레마저 나와 다시 겹치 는데, 짐작하자면 공기와 빗방울과 달빛이 뒤죽박죽된 왕 배야덕배야 낮고 길게 투어기는 음색으로, 천천히 구르는 수레바퀴의 살처럼 되풀이된다 햇빛이 하품을 하며 더 어 두워진 저물 무렵, 빗물 고인 웅덩이에 오래 머무는 구름 처럼 어떤 음은 내 몸에 쉽게 스며들어 그걸 손금이라고 도 하고 어떤 음은 잡히지도 않고 빠져나가 금방 잔상만 남는데 그건 전생이라 불리기도 한다
흰뺨검둥오리 /송재학
그 새들은 흰 뺨이란 영혼을 가졌네 거미줄에 매달린 물방울에서 흰색까지 모두 이 늪지에선 흔하디 흔한 맑음의 비유지만 또 흰색은 지느러미 달고 어디나 갸웃거리지 흰뺭검둥오리가 퍼들껑 물을 박차고 비상할 때 날개 소리는 내 몸 속에서 먼저 들리네 검은 부리의 새떼로 늪은 지금 부화중, 열 마리 스무 마리 흰뺨검둥오리가 날아오르면 날개의 눈부신 흰색만으로 늪은 홀가분해져서 장자를 읽지 않아도 새들은 십만 리쯤 치솟는다네 흰뺨검둥오리가 떠메고 가는 것이 이 늪을 포함해서 반쯤은 내 영혼이리라 지금 늪은 산산조각 나기 위해 팽팽한 거울, 수면은 그 모든 것에 일일이 구겨지다가 반듯해지네
가시연꽃 /송재학
당신은 가시처럼 아픔의 방향으로만 간다 몸과 꽃에 돋은 가시연꽃의 가시를 당신이란 말로 바꾸면 연꽃이나 당신은 생략되고 알몸에 꽂힌 가시만 남는다 그리움만 남는다
기다린다는 생각 /송재학
오래 벗어논 신발을 다시 신을 때 너가 나 대신 떠났다는 느낌 머문 시간 동안 좀씀바귀 노란 색 기다림이 신발 밑창을 뚫고 한 쪽 눈에 진물이 날 때까지 꽃피곤 했다 흔하디 흔한 노랑이긴 하지만 저 꽃 아래 무엇과 다를 바 없는 무엇과 비교 못할 숨쉬기가 있다 기다림이란 너가 나 대신 떠난다는 것이다 텅 빈 허공이 생겨서 좀씀바귀마다 꽃 피우게 하고 내 우울만큼 흔들리는 불빛 남겨두고 떠난다는 것이다 점점 작아지지만 더욱 분명해지는 불빛 두고
내소사 韻 /송재학
꺼칠한 입술로 핥아보는 내소사 눈이라면 몸 안의 것을 차례차례 버리고 대웅전까지 무르팍으로 기어가려 한다 모든 입이 먼저 눈에 파묻히리라 내소사를 찬양하는 목판본 읽는 새청 입만 남고 눈과 함께 꽁꽁 얼어 붙으리라 열 개의 죄악, 열 개의 손가락이 끊 내가 못하면 나한이 와서 잘라 버리리라 전나무 숲은 그동안 눈을 자꾸 쌓아간다 뱉어야할 것마저 마구 삼켰던 위장과 동굴에 가까운 소리의 입구, 내 시선에 들어와서 비로소 악이었던 것들의 배후인 검은 눈알을 꺼내어 눈 위에 쏟으면 뼈만 남아 내소사 설경과 다름없이 고요해질 몸!
악기가 필요할 때 /송재학
겨울숲에 가면 무슨 음계라도 필요하다 어금니가 턱에 박히듯 내 혀에 맞춤한 악기가 있었으면 곧 지상 3000 미터에서 편서풍이 黃沙를 몰고온다, 성숙해의 별보다 더 많은 호수가 내 안에 새겨지는 꿈을 꾼다 나는 편서풍처럼 높은 악기를 얻을 생각은 없다 앙상한 활엽수림과 내가 원한 것은 눈내리는 열명길로 데불고 가는 침묵인 악기 그 안에는 어둡지만 현악기의 활처럼 굽은 오솔길이 열리고 저녁에는 들끓는 분화구를 틀어막고 잠드는 生인 악기가 날 기다리지 않는냐 숲에 가면 침묵이거나 우우 울부짖는 악기란 이름의 공기는 늘 불꺼진 채 우는지 모른다 그 악기의 공명통에서 날개죽지가 상한 새를 끄집어 내었느냐 남지나해까지의 항로를 보았느냐 숲이, 겨울이 악기가 필요하지 않을 때가 있다 내가 잠시 그곳을 떠났다가 돌아왔을 때 연두빛 새순이 검은 색을 밀어내면 이제야 알겠다, 내 얼굴이 밖에서 새겨진 것이 아니라 안에서 천천히 이루어졌음을, 그리하여 눈은 내 안쪽의 어둠을 먼저 들여다보고 외부를 보았음을
감은사에 가다 /송재학 - 김달진문학상 수상작-
감은사는 없다 감포 바다가 눈높이까지 밀려와도 감은사 스님들은 보이지 않는다 무너진 돌들을 쌓아놓은 두개 석탑이 감은사를 변명한다 지도에도 감은사로 적혀 있고 길을 물어보면 모두 아 감은사 말이지요, 감탄한다 시 커먼 찰주까지 남아 있는 감은사 탑과 탑의 균열은 감은사의 不在와 더불어 꽃핀 현호색을 에워싼다 저 연보랏빛 현호색을 가로질러 감은사를 볼 수 있으리라 절은 늘 가파르다 계단과 회랑과 높은 천장의 가파름은 삶과 절의 경계인 것 현호색은 감은사가 무너지고 다시 세워지는 동안 보랏빛인 양 내 속에서 번진다 그곳에 감은사가 있어야 하는지 저녁 예불소리를 듣거나 석등의 불빛을 바 라보아야 하는 것일까 몇백 년 동안 감은사는 없었다 그리고 누군가 감은사 에서 바다까지 수로의 기록과 석탑을 찾았다 내가 감은사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곧 밀어닥칠 해일의 기미와 내 마음을 본뜬 수줍은 현호색 무더기
개 /송재학
죽은 개는 아직 따뜻하다 경직은 대가리에서 시작된다 대가리에서도 아가리의 이빨 부근, 어떤 죽음은 단호하고 어떤 죽음은 연약하다 아이가 저 입 좀 봐, 소리친다 푸른 산처럼 부풀었다가 흰 사기 그릇 위에서 컹컹! 산산히 번지던 獸性만이 가진 씽씽한 목청 대신 아이는 죽음이 갖는 딱딱함을 만져본다 물과 어둠의 난폭함이 뜯어먹은 갯바위처럼 성욕을 베낀 두꺼운 책의 아가리, 쩍 벌린 저 개의 입구까지 죽음은 벌써 단순해졌다 알 수 없는 비애에 마음이 할퀴운 채 어제나 오늘 아침 누렇던 산등성이를 제비꽃이나 매발톱의 섬세한 초록으로 덮어버리는 죽음이 만지는 어느 하루!
개구리밥 / 송재학
초록이 밀사를 보냈다네 그 왕국은 아직 선포되지 않았지 며칠 전 이 늪은 고요하기만 했었네 지금 초록은 물에 비치는 푸르름만으로 한껏 울지 못하겠다고 마침내 밀사를 보내 수면에 제 왕국의 흥망을 빽빽하게 펼쳤네 수많은 초록이 물 위에 누워 한껏 게을러졌다네 이것을 개구리밥이라고만 부르지 말라 수줍음처럼, 또렷하게 작은 꽃이 핀다네 그들이 초여름의 날랜 병정들이라네
격렬함을 감추다 / 송재학
1
나는 바다를 달래려 합니다 어리석은 줄은 알면서 해뜨는 바다를 급히 보 러 왔습니다 연산홍이 꽃 피어 며칠을 대신 버텨주기도 했습니다 그 붉은 꽃이 시들기 전 도망치듯 이곳에 오고야 말았습니다 연산홍 밖에 나오면 무 엇도 감추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마음의 온갖 것들과 저 아래 시퍼런 바 다는 같은 수평선에서 시작된 아우성임을 깨닫습니다 내 격렬함을 통과하 던 영산홍의 만개도 그와 다르지 않습니다
2
영산홍 가득 핀 세상이란 얼마나 답답합니까 가장 붉은 꽃 한 송이 꺾어 화 병에 꽂았습니다, 아닙니다 이 꽃은 역시 제 붉음이란 운명 사이에 휩싸여 야 합니다 그것은 영산홍의 오랜 비밀입니다
격포 /송재학
격포에 간다는 것은 사소한 나만의 일몰을 가진다는 것! 머리통만한 물거품과 폭설이 서쪽 바다를 죄다 세로로 앞장세웠다가 가로로 눕히곤 한다 나에 속한 죄를 끄집어내어 바다에 헹구어본다 아귀가 맞지 앉는 날의 오물이 자주 막히는 몸이 싫다 구석바닥에 쪼그려 울어보기도 한다 갈라터진 마음마저 염전으로 맡기고픈 격포에선 무엇이든 다 눈동자가 있어 그리 많은 눈이 내리는가 보다 무엇도 용서할 수 없었던 내가 아무에게도 용서받지 못한다는 시선을 받아들였던 격포 아직 날은 어둡지 않은데 벌써 눈뜨는 불빛은 무어냐 거기 옹이처럼 박히자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기억하는 것, 그것이 가시이다 / 송재학
그 저수지에서 무슨 소리를 들었다면 울음입니다 하지만 지금 가시연꽃은 없고 심지어 작년에 본 것이 꽃이 아니라 사람이나 음악의 그늘이었다고, 말간 수면은 내 얼굴만 되돌려줍니다 바닥치기를 한 뒤 십 년 만에 피었다 는 가시연꽃은 올해 다시 해거리를 합니다 굳이 씨앗을 틔워 세상에 가시연 꽃의 운명이 있다고 노래하고 싶지 않다는 겁니까 시황제의 진흙병사처럼 잠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물아래는 혼탁하고 들끊는 페이지, 기억하고 싶지 않을 것을 기억하는 가시연꽃의 먼길을 예감하겠습니다 좁장하여 금방 터 져버릴 창자 같은 길이거나 달의 뒤쪽인 양 영원히 보이지 않는 길이 그들 의 싸움터입니다 소리꾼 권삼득이 죽음 앞에서 불렀던 <천길 높은 벼랑을 솟아 만길 폭포수로 내리쳐 출렁거리는> 높낮이로 삶을 얻어 20세의 나이 로 노래공부를 시작했다는 아름다움과 가혹한 가시는 같은 사내의 이야기 입니다 이슬같이 맺힌 것, 만질 수 없는 슬픔, 아프다와 견디다라는 동사(動 詞)가 동류로 뒤엉킨 ... 어느 해 가시연꽃 무리는 물결에 머리를 얹었지만 물 밖이 자기들의 살림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걸까요 며칠 이 저수지를 들락 거렸지만 가시연꽃은 물보다 내 목 위에서 먼저 솟아오를 듯합니다 허지만 이곳에서 십여 리 떨어진 다른 저수지에서 올해 처음 피었다는 가시연꽃은 또 누구의 머리와 바꿔치기한 건가요
노래 / 송재학
세월은 괴로움 속에 오래 머문다 세월은 희망을 잠시 붙든다 녹슨 못이 자주 구부러지던 지난 날은 음악처럼, 어떤 기억이라도 썰물을 만든다 현악의 높은 음은 이곳에서 흐리다 맑은 날이 떠미는 저녁이 어둠의 입구에서 멈칫거릴 때 길은 너무 미세하고 빠르므로 혹은 길은 우연인 듯 삶을 뒤쫓아가므로 희미한 소리에 귀기울이는 이에게 공기는 이미 팽팽한 불덩이로 바뀌고 있다 보아라, 괴로움은 노을을 삼키고 붉다
누에 /송재학
아마 내 전생은 축생이었으리 누군가 내 감정을 건드린다면 하루아침에 나 는 누에로 되돌아가버릴지 모른다 출퇴근길에 만나는 강변의 야산이 친애 하는 벌레처럼 다가오곤 했다 그러고 보니 잠들면 나는 늘상 몸을 뒤척이며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게다가 고기를 멀리하고 나무 그늘의 통통한 물살에 온몸을 자주 맡겼다 잎맥을 거슬러가는 애벌레의 날숨에도 내 생로병사가 느껴진다 실크로드에 병적으로 집착한 것도 수상하다 아니다 고백하자 5령 이라는 잠을 자고 나면 누에는 이승과 저승의 해안을 가볍게 날아드는 나 비, 더 고백하자 그 나비의 날개라는 반투명이 내 후생임을
닭, 극채색 볏 /송재학
볏을 육체로 보지 마라 좁아터진 뇌수에 담지 못할 정신이 극채색과 맞물려 톱니바퀴 모양으로 바깥에 맺힌 것 계관이란 떨림에 매달은 鍾이다 빠져나가고 싶지 않은 감옥이다 극지에서 억지로 끄집어내는 낙타의 혹처럼, 숨표처럼 볏이 더 붉어지면 이윽고 가뭄이다
동백나무는 흉터를 남기지 않는다 /송재학
백련사 동백숲 근처는 인가가 보이지 않는다 이월이면 사람의 병이 옮겨 가는 동백나무에는 매듭이 없다 그 나무의 여 성성은 잘려진 분지를 둥글게 감싼다 어떤 흉터라도 희고 부드러운 껍질로 감싸 버리는 동백의 잎은 범종의 공명으로 두터워졌다 번개도 그 나무의 속을 엿볼 수 없다 혹한만이 그 나무를 서서히 열어 보인다. 동백이 피운 꽃이란 동백이 스스로 불 켠 창의 넓이 붉은색의 극점까지 가서 꽃잎으로 흰 눈의 숨은 핏빛을 비교하는 붉은색이란 그때 떠도는 넋에 가깝다 엎드린 꼽추처럼 병을 집어삼킨 둥근 혹을 달고 동백은 다시 움츠린 몸으 로 제 신열의 암자를 세운다
먼길 2 /송재학 - 어머니 울음
이제 비름꽃 소낙비에도 가슴 서늘해지고 물소리 울음 소리 고이 들을 수 있네 쉬이 부르던 노래 검은 머리, 돌아보면 흩어지니 한 잎 명아주 싹에도 눈물 마주쳐 어찌 길 떠나지 않으랴 옷 태우고 책 사르고 정든 사람, 한세상 보냈듯 눈물 굴헝 좇아 할미꽃 이승꽃 아롱거리겠지 굽이굽이 붉은 땅 늙은 소나무, 잠들 곳 있으리 물길 따라 누우면 팔다리 여위고 천리길 왼통 꽃비 흐드러지니 시월 맨드라미 참하게 울겠네 지는 해 뜨는 달 먼 곳을 보면 낭랑한 목청 맑은 손톱조차 희미하리라 산역꾼들 노랫자락 분명 들 에움길 돌아 들려오는데 앞은 점점 보이질 않네 못물마다 개구리밥 가득하고 여름꽃 마르고, 길은 생시인가 꿈인가 아득아득 널려 있으니 어찌 먼 길 떠나지 않으랴 물소리 따라 누우면 한줌 기쁨이고 슬픔이고 죄다 살여울로 흘러버리니 몇십 년의 땅에서도 갈 길 더욱 멀고나 돌아보면 미루나무 머리 풀어 울고 떠나온 길 깜깜한데 홀로 먹는 저녁밥술 목이 잠기네
모슬포 가는 까닭 /송재학
나 할 말조차 앗기면 모슬포에 누우리라 뭍으로 가지 않고 물길 따라 모슬포 고요가 되리 슬픔이 손 벋어 가리킨 곳 모슬포 길들은 비명을 숨긴 커브여서 집들은 파도 뒤에서 글썽인다네 햇빛마저 희고 캄캄하여 해안은 늙은 말의 등뼈보다 더 휘어졌네 내 지루한 하루들은 저 먼 뭍에서 진행되고 나만 홀로 빠져나와 모슬포처럼 격해지는 것 두 눈은 등대 불빛에 빌려 주고 가끔 포구에 밀려드는 눈설레 앞세워 격렬비도의 상처까지 생각하리라
민물고기 주둥이 /송재학
여름 내내 비워 두웠던 방의 창문은 막 산산조각나고 있는 초록거울이 버겁다 방충망 전체에 번진 담쟁이넝쿨은 거울 파편의 섬광을 빌려 단숨에 나에게 왔다 눈부터 찔렀다 햇빛이 담쟁이 잎새들을 손도장처럼 누르면서 다물지 못하는 상처인 양 아프게 했다 이방에서 멀긴 했지만 내 육체에도 담쟁이가 기어 들어온 흔적은 있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 속을 휘젖다가 결국 반죽도 하지 못하고 사라졌다 담쟁이 초록 잎새들은 죄다 담수어의 주둥이를 가졌기에 내 울대를 피해 빈 방으로 건너 갔던 것이다 어둔 곳에서 오래 헤엄치다 고요의 지느러미가 생겼던 것이다 나는 지금 막 부서지고 흩어지려는 초록 거울 앞이다 물고기 주둥이를 만지고픈 늦여름 앞이다
버들강아지/ 송재학
버들강아지에는 하늘거리는 영혼이 있다 봄날을 따라다니며 쫑알거리는 강아지의 흰 털도 버들강아지와 같은 종족임을 알겠다 한 영혼을 음양이 나뉘어서 하나는 어둔 땅 아래 뿌리를 가져 식물이게 하 고 다른 하나는 어둠을 뇌수 안에 가두어 강아지처럼 돌아다니게 한 것이다
봄밤 / 송재학
봄밤은 비애를 만진다 며칠 내내 빗소리 그 집은 지붕이 낮다 다리 저는 늙은 남자는 이불을 펴고 나이 찬 딸을 기다린다 딸이 엊그제 들여논 약장의 서랍은 스무 개도 넘는 약장의 옻칠이 군데군데 벗져진 약장의 서랍마다 빗물을 채우고도 비는 오래도록 그치지 않는다 도둑괭이가 암컷을 쫓아가버린 밤 연탄냄새가 비에 막혀 고인다 마당 구석의 꽃들이 피우는 젖은 봄
빈집 / 송재학
나는 오래 폭설을 기다렸다 해평 마을의 빈집은 해면처럼 나를 빨아들인다 받아들일 수 없던 사랑, 낙동강의 결빙음, 매지 구름은 내 육체가 붙들던 난간이었다 간유리문을 지날 때 어딘가 지독하게 아프다가 물바람처럼 사금파리 빛 띄우면 히말라야시다는 가지 꺾고 귀로를 가로막는다 입술이 닿은 성에꽃에 매달린 내 청춘이 온기 한 점 구하지 못할 때 빈집은 폭설에 무너진다 그 사랑에는 육체를 피한 흔적이 있다
섬 1 / 송재학 - 편지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고등 2년 때 가출한 그를 찾으러 갈꽃 피는 여수 남쪽 섬을 간 적이 있었다. 흙바람 가득한 섬은 아우의 행방보다 더 나를 사로잡았고, 지금도 그를 보면 흙바람같다. 아우는 밤에 홀로 사고한다고 썼다, 그리고 편지 끝에 원서비용으로 6만원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시골 관청의 8급 주사보이고 점심은 사무실에서 시켜먹고 화투를 쳤고 가끔 여자들이 도시에서 찾아왔다, 밤에는 그러나 혼자 잠들고팠다. 안개는 무시로 깔려와 기관지를 자주자주 다치더니 나는 몇칠의 병가를 내고 버스를 탔다. 아우는 지방대학의 철학과와 신축도서관에 묻혀지냈다. 그의 흙바람내 나는 서랍을 뒤져보았다. 스스로 고독한 짜르라 칭한 아우의 비망록 악필이었던 글씨는 여전했고 끝없는 단상과 부호같은 일기, 반 년 전부터 복용하는 아이나와 에탐부톨이 칼로 자른 넋처럼 하얗게 빛났다. 결재화일과 대차대조표를 뒤적이다가 봉화, 영양, 안동, 예천으로 출장을 떠나며, 나는 혼자일 때는 머나먼 섬까지의 뱃시간을 베끼고. 문득문득 아우가 보낸 편지가 왔다, 아우는 회의주의학파의 색인을 정리하고 나는 시를 쓰다 관두다 했다, 사흘마다 숙직실에서 밤을 새웠다, 유리창은 늘 두텁게 서리끼고 연탄가스는 조금조금 스몄다, 아침이면 퉁퉁 부은 얼굴로 출근 도장을 찍고 1,300원의 숙직비로 점심을 때우거나 겨울 문예지를 샀다. 아우는 19세기 러시아지성사를 번역해갔다, 나는 섬이 외로움으로 깊어진 밤에 이윽고 술을 마실 뿐. 아우는 읽던 책을 건넸다, 나는 사람과 싸우며 며칠을 끙끙거리고 아우는 아침마다 스타디그룹에 나갔다. 아우로부터 편지가 왔다, 밤에 스피노자를 읽으면 집 근처 신기료 사내는 마치 우리들 보행의 자유를 위해 신발을 고치는 도시의 스피노자처럼 보인다고 적었다. 편지 끝에 비트겐슈타인의 논리를 위해 돈이 필요하다고 부기했다, 나는 싸늘한 숙직실 유리창에 서리 흔적으로 섬이라고 써보았다.
소래 바다는 / 송재학
돌아가신 아버지를 소래 포구의 난전에서 본다, 벌써 귀밑이 희끗한 늙은 사람과 젊은 새댁이 지나간다 아버지는 서른 여덟에 위암으로 돌아가셨다 지난날 장사를 하느라 흥해와 일광을 돌아다니며 얻은 병이라 하지만 아버지는 언제부턴가 소래에 오고 싶어하셨다 아니 소래의 두꺼운 시간과 마주한 뻘과 협궤 쪽에 기대어 산 새치 많던 아버지, 바닷물이 밀려나가는 일몰 끝에서 그이는 젊은 여자가 따르는 소주를 마신다, 그이의 손이 은밀히 보듬는 그 여자의 배추 살결이 소래 바다에 떠밀린다 내 낡은 구두 뒤축을 떠받치는 협궤 너머 아버지는 젊은 여자와 산다
속꽃 / 송재학
눈이 바닷가 자드락 밭을 덮는다 무화과나무, 어린 열매는 겨울눈[芽]으로 일월과 이월 안팎에 있다 열매 속에서 가만히 속꽃이 핀다, 결코 보이지 않을 암꽃과 수꽃이 연분홍 어린 형태로 여름을 향하고 햇빛과 싸우는 바다의 얼음 어는 소리 들린다 늙은 사람이 와서 무화과 산밭을 돌아다닌다 이십 년이라니, 역마살이 끼었어 아니 이십 년간 감옥살이 했다더군, 사람들이 수군거린다 바람 사이사이 눈발이 흩어진다 파도 소리가 속꽃을 잠재우면 마른번개와 수십 번의 밀물이 속꽃을 깨운다 소나기와 여름 더위로 무화과는 황홀하다 갈색 열매 노란 살갗 그리고 음악, 늙은 사람이 더욱 늙어 속꽃을 본다 그가 죽었다. 그 나무의 꿈은 아무도 보지 못할 분홍 속꽃인가
어머니는 무엇이던 잠재우신다 /송재학
식구들을 잠재우고 어머니는 화초마다 물을 뿌린다 서늘한 기분으로 나무 들은 편안하고 어머니는 쓸데없는 텔레비전과 카세트의 전원을 뽑는다 자 주 헐거워지는 수도꼭지를 잠그고 바깥의 어수선한 어둠을 커튼으로 가린 다 그리고 자리에 누우면 어머니 몸 안팎으로 밀려오는 것들, 비가 몸을 적시고 늘 축축한 머리맡엔 장마가 이어진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마 다 향을 피운다 죽은 사람과 향냄새를 피해 뱀은 어머니 아랫도리를 파고든 다 구더기는 허벅지 살 속에 알을 슨다 거미들은 잇몸을 물어뜯고 새는 흰 머리를 쪼아댄다 누군가 피를 토하고 노래를 부르고 미쳐 날뛰는 밤은 아, 하고 입을 벌린다 날마다 파헤져지는 절개지는 넓거나 붉고 감당하지 못할 밤은 길고긴 소맷자락을 갖추고 아버지는 어머니를 잊어버렸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천리향이나 침묵으로 떠올린다 어머니는 아버지 이야기 대신 아이들 옷을 빨거나 새삼스레 흰고 무신을 한 켤레 산다 아이들이 제 할아버지를 궁금해하면 스님 이마 씻은 물맛 같은 사람이야, 둘러대고 햇빛 끝에 혹 벌초를 핑계삼아 버스를 탄다 어머니는 향을 다시 피우고 뱀에게 살을 베어주고 구더기 새끼들을 키운다 거미들은 어머니 잠그늘마다 거미줄을 친다 새는 그 위에 둥지를 튼다 짐승 의 마음들이 고이 잠들고 나면 밤은 천수경처럼 환하다
얼음시 3 / 송재학 - 다산생각
한밤중에 깨어났다 꿈을 꾸다가, 기침을 하면 늑골까지 얼음이 깔리고 이 명(耳鳴)의 귀에 흩어진다 결빙음(結氷音)은 내가 읽는 요즘의 책에도 있는 데 밤의 내륙 땅에서 강진의 앞바다를 떠올린다 백일홍은 봄날이라도 어둡 고 초(艸)의 구절은 마른번개처럼 울린다 돌아보면 그의 땅에는 버린 노래 들만 가득한데 청솔가지 유배지(流配地)의 꿈을 되풀이 꾼다 이월 봄밤, 자 전을 펴들고 짚어가는 기민시(飢民詩)는 먼 곳으로 띄우는 편지*처럼 적막 하다 강진의 땅은 누군가 기다리는 것으로도 쓸쓸하고 물소리 울리며 강은 늘 그곳까지 흐른다 내 방의 고요도 내 그리움의 이름들도 차가운 노래로 남녘말까지 흐른다 지금 내 몸은 새벽 추위에 있고 찬(撰)의 말들은 이 땅의 역참마다 아침이슬이나 풀씨로 머물러 있음을 본다 먼 바다 이월 해일은 그 믐이면 해변 다복솔을 덮칠 것이고 흰 파도 검은 바위는 뒤엉켜 있으리라
주전 /송재학
검은빛은 죽음이 아니다, 비애가 아니다 검은빛은 환하다 때로 파도와 맞 물리면서 新生의 거품을 떠밀거나 버려진 돌들을 이끌고 바다 깊이 담금질 하며 주전의 검은 돌들은 더욱 맑아져 사람의 삶을 부추기고, 그때 검은빛 은 심연의 입구이다 검은빛을 세계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빛이 그로부터 비롯된다면 검 은빛을 관념이라고 적지는 말자 어떤 애벌레들은 마흔날이 되면 다시 제 몸 에서 애벌레를 게워낸다 해안의 검은 돌들은 물을 통해 소리친다 파도가 적 신 돌과 햇빛에 마른 돌의 경계를 걸어보라 이쪽은 저쪽과 전혀 다른 정신 이고 그 사이에 완강한 문이 있다 늘 새벽이었던 해안은 금빛 호른의 포물선과 저음에 그늘을 지운다 그러고도 검은 빛은 남아서 하루나 이틀 내 삶을 간섭하다가 문득 사라진 다
진눈깨비 /송재학
미간을 더 자주 찡그려야만 했다 진눈깨비 탓이다 전봇대가 아무것도 모르 겠다는 듯 광고지를 더덕더덕 붙인 채 팔 벌리고 있다 전봇대 같은 변명을 하자는건 아니다 진눈깨비를 헤아린다는 건 탄식을 듣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하염없이 斜視로 떨어지는 진눈깨비를 징검다리 삼아 위로위로 시선 을 올리자 그 성층권의 시렁 위엔 결국 전봇대처럼 가지가 다 부러진 나무 들이 줄지어 서있다는 생각, 그냥 물끄러미 서서 진눈깨비가 하자는대로 떠 밀리면 나마저 전봇대처럼 안이 텅텅 비워진다 내가 속삭이는건 나도 한때 저렇게 많은 팔다리로 어떤 운명을 향해 미친 듯이 달라 붙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겹벚꽃을 피우는 벚나무의 이유도 미리 내 눈썹을 때렸던거다
창이 있었네 / 송재학
마음의 서쪽에 창이 열렸던 때가 있었네 담장 옆 수수꽃다리를 밟고 올라가면 이층 단칸방 모두 한 방울 눈물인 유리창 주인집 피아노 건반을 하나하나 꺽어 세운 계단은 늘 등꽃에서 끝나곤 했네 이층 그 아래가 깍아지른 벼랑이던 날 풀먹인 호청 누빈 금빛 이부자락이 서쪽의 끝까지 닿았네 금방 불타오르던 이층의 앞날은 그 유리창처럼 산산이 부서졌네 피묻은 유리파편이 등꽃의 향기임을 너에게 말해줄까
청량산 / 송재학
봄 山色이 숨겨논 문짝을 보지 못했는가 층층나무 흐드러진 꽃잎이 경칩소리 울리며 내 발꿈치 바로 뒤, 경계를 닫아버리는 그곳 침묵은 외딴 인간의 눈썹 같은 울타리를 거느린다 푸른 띠살문 삐걱이는 소리를 들었는가 뿌리째 뽑혀 무너지는 생나무냄새를 맡았는가 건더기보다 국물만 씹히는 밥집을 나서면 指紋투성이 문이 나를 통과시키고 깊은 내 등뒤에서 등불을 끈다 붕대를 푼 나무 사이 정자살문 빗살문 꽃살문 따위를 헤아리면 빗장 걸어주던 꽃냄새는 살붙이처럼 속에말 걸어온다 돌을 뒤엎던 맑은 물살은 금방 내 실핏줄까지 범람한다 아픈 내 머릿속 절개지에도 경칩 달린 외짝 문이 닫히며 몸 일부는 낮달의 봉분을 끌어당기는데 두 발바닥에 구멍 뚫려서 잔기침까지 새어나가는 느낌 그 문을 지키는 看守의 목은 흰 꽃가지로 바뀌어 있다
청춘 /송재학
어떤 옥탑방에는 밤 사이 신발이 가지런하다 집나간 아들이 몰래 들어와 잠만 자는 것이다 물론 그 집 식구들도 다 아는 사실이다 청년이 화가지망생이란 것도 놀랍지 않다 그 집 옥상에서 열린 전람회는 얼마나 많은 색깔을 구워냈던가 양치식물과 빗방울은 그에겐 푸른색에 가까운 내재율이다 비밀이 시작하는 것이다 간혹 내 중년도 청년에 의해 푸른 추상화가 되곤 했다 그곳이 머위잎 녹음처럼 부드럽기에 셀로판지를 통과하는 햇빛은 다시 햇빛의 바늘귀를 지나간다 그건 생의 주름을 잡는다 옥탑방의 목록에 새털구름이 떠나닐 무렵 청년은 보이지 않았다 그 자리에 물탱크가 들어선 것도 그쯤이다 나도 한때 청춘을 어딘가 구겨 넣었지만 노란색 물탱크는 비가 오지 않아도 안간힘으로 새 것이다
푸른빛과 싸우다 1 / 송재학 - 등대가 있는 바다
등대가 보이는 커브를 돌아설 때 사람이나 길을 따라왔던 욕망들은 세계가 하나의 거울인 곳에 붙들렸다 왜 푸른빛인지 의문이나 수사마저 햇빛에 섞 이고 마는 그곳이 금방 낯선 것은 어쩔 수 없다 밝음과 어둠이 같은 느낌인 바다 바다 근처 해송과 배롱나무는 내 하루를 기억한다 나무들은 밤이면 괴로 움과 비슷해진다 나무들은 잠언에 가까운 살갗을 가지고 있다 아마 모든 사람의 정신은 저 숲의 불탄 폐허를 거쳤을 것이다 내가 만졌던 고기의 푸 른 등지느러미, 그리고 등대는 어린 날부터 내 어두운 바다의 수평선까지 비추어왔다 돛이 넓은 배를 찾으려고 등대에 올라가면 그 어둔 곳의 바다가 갑자기 검은 비단처럼 고즈넉해지고 누군가가 불빛을 보내고 그의 항로와 내 부끄 러움을 빗대거나...... 죽은 사람이 바다 기슭에 묻힐 때 붉은 구덩이와 흰 모래를 거쳐 마침내 둥근 지붕 생기고 그 아래 파도와 이어지는 것들...... 혼자 낡은 차의 전조등 켜고 텅 빈 국도를 따라가면 고요를 이끌고 가는 어 둠의 집의 굴뚝이 보인다, 낯선 이가 살았던 어둠, 왜 그는 등대를 혹은 푸 른빛을 떠나지 못하는가 바다를 휩쓸고 지나가는 햇빛은 폭풍처럼 기록된다, 그리고 등대
풀 잎 / 송재학
풀잎앞에 쓰러져 울어준 것들만의 힘으로 풀잎은 초록은 아니다 풀잎이 가진 초록이란 일생을 달리고도 벗어날수 없는 오랑캐 들판 그 넓이 만큼 죽음이나 여름을 만난다 풀잎은 지는 해를 위해 수평선의 고요을 아꼈던 것 초록이 운명에 휩쓸릴 때
초록은 그곳가지 한달음에 도착하기도 한다 풀잎속이라면 초록은 일제히 일어나야 할 때를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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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재 학 :
경북 영천 생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시 입선 계간《세계의 문학》에 시 발표 시집『얼음시집』,『살레시오네 집』, 『푸른빛과 싸우다』,『그가 내 얼굴을 만지네』 제5회 김달진문학상 수상 치과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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