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장 조용하의 자살
"오줌 마려운 얼굴이군 그래. 왜 그리 안절부절이야."
조용하가 말했다. 제문식은 대꾸 없이 앉아 있었다.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것은 조용하 자신이었다. 탄탄하고 네모가 반듯한 그 닫혀진 궤짝과도 같이 육중한 침묵이 방안 가득히 들어차 있었는데 조용하는 그것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제문식을 방에서 내쫓고 싶었다. 소리소리 지르고 악을 쓰며 쫓아내고 싶었다.
"저놈은 지금 내 고통을 즐기고 있는 게야. 내가 죽으면 저자는 무슨 이득을 얻나. 무슨 이득이 생기지?"
그러나 조용하는 제문식을 자석같이 빨아당겨 옆에서 떠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상대하여 끝까지 버티어줄 사람은 제문식말고는 주변에 아무도 없다.
'이놈아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지 실토해! 네놈은 뭘 바라고 내 곁에 붙어 있는 거지? 내 껍데기를 훌렁 벗기고 싶은 게야? 내가 지금 죽어가고 있다는 것을 고백하라는 게야?"
제문식과 마주앉으면 매번 그런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곤 했다. 건강이 조금 나쁘다. 과로한 모양이야. 과음한 탓이겠지. 수면 부족으로, 그런 등의 말로 자신의 병을 엄폐해온 조용하, 잠시 회사에 나가는 일과 사업상 피지 못할 자리에 얼굴을 내미는 정도로 거의 산장에 칩거하다시피, 집안 사람이나 친지들에게까지 명희의 가출로 상심하고 있다는 위장술을 쓰면서 그들과의 내왕까지 차단하고 지내는 조용하, 완전무장한 철옹성 같은 산장에 다만 제문식만의 통로는 있었다. 어쨌거나 제문식은 오랜 친구였으며 그만큼 대소사를 막론하고 조용하에게 밀착돼 있는 사람은 없다. 조용하는 그에게 기대어보고 싶은 마음이 없지는 않았다. 아니 기대어보고 싶었다, 간절하게. 그러나 함께 슬퍼하고 아파해줄 우정이 제문식에게 있으리라는걸 믿지 않았다. 그리고 제문식에게 의지하는 자신의 몰골은 생각만 해도 끔찍스러웠다. 쫓아내버리고 싶은 충동과 옆에 꼭 잡아놓고 싶은 욕망, 그것은 같은 인력으로 조용하 내부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혼란이며 목마름이었다. 순명할 수밖에 없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꿈틀거리는 한 마리의 벌레, 단말마의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한 마리의 벌레, 자신의 마지막 삶의 모습을 조용하는 어느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동정이라는 구둣발로 짓이겨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모골이 서늘해진다. 함에도 불구하고 누구 한 사람 얼씬거리지 않는 산장은 공포, 그것은 공포의 밤이요. 공포의 낮이었다. 일각 일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지켜보는 시간은 가장 잔인한 고문이었다. 조용하는 혼자 이를 갈았다. 눈물을 흘렸고 애소도 해보았다. 정맥이 내비친 자기 팔에 입맞춤도 해 보았다. 신을 저주하고 세상을 저주하고 건강한 사람들을 저주하고, 제문식을 천하에 둘도 없는 악당으로 매도하다가 결국에는 산장지기를 보내어 제문식을 불러오게 했다.
'알고 있다 하자. 그럼 어느 정도 알고 있는가. 의외로 심각한 것까지는 모르고 있는지, 물어볼까? 물어본다? 아, 아니야. 덮어두는 거다. 네놈이 어떻게 생각하든 난 상관없어. 내 꼴을 곁눈질하며 악마같이 즐긴다 해도 내가 입을 열어 너를 더 즐겁게, 만족하게 하지는 않을 테다!'
붕괴되어가는 육체를 두 손으로 꽉 틀어쥐듯, 틀어쥐어 주먹 속에 감추려는 듯, 조용하는 필사적으로 자신이 무너지는 과정을 보지 못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그래서 제문식이 옆에 없으면 불안해진다. 시간과의 싸움도 무서웠지만 어디선가,
"얼마는 살까? 아마 조용하게는 시간 문제만 남았을 게야."
라든가
"온갖 특혜가 땅속으로 들어가다니 아깝다, 아까워."
하며 나불거리고 있을 것만 같아 속이 들끓었다. 증오감은 전신을 활활 불태우는 것 같았고 고독감은 전신을 싸늘한 얼음장으로 만드는 것만 같았다.
"찬하를 불러오게."
제문식의 목소리가 육중한 침묵을 뚫고 나왔다. 조용하는 반문했다.
"뭣 땜에?"
"글쎄,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나온다면 나로선 할말이 없네만, 내 말뜻을 모르고서 되묻는 건 아니지 않은가."
"..."
"천하는, 천하에 관한 자네 처사는 처음부터 억지춘향이었다구. 계속 그런다면 내가 이유를 설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나."
조용하는 비웃을 듯했으나 침묵으로 가라앉는가.
"병이야. 자넨 본시부터 병자야."
제문식 말에 조용하 얼굴이 험악해진다. 그러나 제문식은 개의치 않는다.
"내 자신도 꽤 집요한 편이지만 그래도 목적이나 이유는 있어. 자넨 뭐야? 병 아니라고 달리 설명할 길이 없지 않아. 연산이나 네로 같은 위인이 제왕 아니었더라면 병자가 됐을 리가 없지. 자네도 마찬가지야. 문벌에 재력, 그게 없었다면 정상인이었겠지. 하고 보면 세사이란 공평한지도 몰라. 천하를 불러오지 않는 이유가 뭐야? 이유가 없지 않아. 의처증도 아니면서 의처증 환자가 되고, 싫은 것도 아니면서 의심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랬나. 자네 어부인에 관한 얘길세. 없는 사실, 멋대로 가상해놓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 맞어, 그건 집착할 그 아무것도 없는 데서 집착한 거야. 세상이 재미없고 핏줄에 애착도 없고 원하면 무엇이든 있지만 실상 아무것도 없고."
"잠꼬대하는 겐가?"
"하지만 이젠 집착할 기운 없을 거야. 혼자 씨름해나갈 기운이 있느냐구. 명희부인 얘길 해도 가만있는 걸 보면, 어때? 기운 있어? 고집 피워보아야, 아무리 그래보아야 자넨 외로운 허수아비 아닌가."
"뭣이 어쩌고 어째?"
"내친 길이니 뛰고 있다, 그런 셈인가? 조금만 방향을 꺾어보아. 종이 한 장 차이야. 그러면 찬하를 불러올 수 있을 게야. 이대로 파선할 건가."
"늑대 같은 놈, 누구 속 떠보노라 그러는 겐가?"
"..."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기를 기대하나, 미안하지만 자네 마음을 흡족하게 할 그런 말 따위 없다. 제문식과 내 관계는 한치의 후퇴도 전진도 없어. 하하핫 하하핫..."
갑자기 웃었다.
"오란다고 올 놈도 아니지만 부르고 싶은 생각, 천만에. 의무나 책임 같은 것 내겐 없어. 난 그런 것 몰라! 내가 관련 안 된 일에 내가 왜 관심을 가져야 하나. 자네 같은 작자가, 다른 사람도 아닌 제문식이 시시하게 복고조로 나오긴가? 혈육 따위, 내겐 애당초 그런 것 없어. 찬하 그놈은 물론 난 부모한테도 정 같은 것 없다. 병아리 오줌만큼도 없다! 자네 잘 알 텐데 그래?"
지리멸렬이었다. 저도 모르게 뭔가를 시인하고 말았다는 것을 깨달았으나 조용하는 당황할 기력도 여유도 없는 것 같았다.
"자네다운 얘기야. 한데 복고조라니? 나보고 복고조라, 제발 그런 말은 말아주게. 천신만고하여 배울 권리나마 얻어낸 나 같은 놈이 설마한들 하정배하고서 네, 나으리마님 하고 싶겠나."
제문식은 말하고서 팔을 들어 시계를 본다.
"왜 그래?"
조용하가 물었다. 제문식은 일어섰다.
"시간 약속이 있었어. 가봐야겠네."
조용하가 제문식을 강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어디 가는데?"
목소리는 약했다.
"누가 좀 보자고 해서."
코트를 걸치며 도어까지 걸어간 제문식은 돌아본다.
"만나보고 다시 오겠네."
조용하는 꼼짝 않고 앉아 있었다. 제문식이 찾아간 곳은 남천택의 하숙이었다. 이미 선객이 있어 한참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 판이었다. 말이 하숙이지 누구 호주머니에서 돈이 나왔는지 알 수 없으나 호화판 양옥의 거실이었다. 하기는 H전문학교의 명색이 교수인지라 그럴 법도 했다. 남천택은 재작년 동경서 나온 뒤 서울에 눌러앉아, 얼마나 갈지 그것은 의문이지만 하여간 현재까지는 학교에 나가고 있었다. 검정 두루마기를 입은 선객은 제문식도 알 만한 얼굴의 김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눈을 자주 깜빡거리는 버릇이 있었다. 두리뭉실한 분위기에 우둔하면서 비굴한 느낌을 주는 사내다. 수박색 엷은 스웨터에 연회색 후란넬 바지를 입은 남천택은 재미없어하는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검정 두루마기의 김모는 제문식의 출현으로 끊어졌던 얘기를 다시 시작했다.
"오늘날, 이 땅에서 중간층을 위시하여 하부층에까지 침투해오고 있는 것은 왜놈의 식민 정책이 몰고 온 계몽의 양상, 즉 낯선 문화를 이 땅에 심고 있는 형편을 보건대, 이런 말을 한다고 해 나를 복고주의자로 공격할지 모르지만,"
김모 입에서 복고주의자라는 말이 나오자 제문식은 저도 모르게 픽 웃었다. 방금 조용하로부터 복고주라는 말을 듣고 왔기 때문이다.
"그 치졸함, 경박함이 과연 재랫것과 견줄 만한지 의문이야."
"낯선 옷도 자주 입어 버릇하면 맵시가 나는 법이지. 일본은 꽤 그 맵시를 내고 있어. 실리적으로 이용도 하고 있지. 우리보다 그들은 템포가 빠르거던."
남천택은 시답잖다는 듯 말했다.
"나도 그것은 인정하지만 조선에선 자네가 말하는 템포가 문제 아니지. 의식의 문제야. 초입인 만큼 신파가 치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나,"
"두루마기처럼 조선의 겉가죽만 걸치고 다니는 자네가 설마 무속을 두둔하여 하시는 말씀은 아니겠지?"
"하여간 내 생각으론 개화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부터 오늘까지 걸작을 들라 한다면 첫째가 동학 봉기요, 둘째는 삼일운동, 셋째가 광주학생사건, 그 밖에 뭐 뾰족한 게 있어? 다 바람의 벙거지 같은 것이라,"
남천택이 웃었다.
"얘기가 엇길로 빠졌지만, 예를 들어 말할 것 같으면 개화파의 박규수, 수구파의 최익현. 그들의 언행이 최선은 아니었을지라도 한 그루의 나무, 한 그릇의 밥은 되더라, 그렇게 말할 수는 있고, 그들에겐 뿌리가 있었거던 그들이 전후하여 가고난 뒤 나무는 잔가지만 무성하여 열매를 아니 맺고 밥그릇 속엔 밥이 없고, 그나마 이제 나무는 찍어내어 아궁이 군블감이 되었네. 밥그릇은 엿장수 엿판 속으로 들어가고... 종교다 철학이다 예술이다, 무슨 사조다, 나발 같은 소리야. 적어도 밑등은 두어서 접복이나 해야지, 뿌리 없는 꽃 시들면 안 되니까 숫제 종이꽃 아닌가 말이야. 그것도 간지러운 왜놈의 먹고 남은 찌꺼기에, 세계 도처에선 침략의 앞잽이로 설치다가 뒤늦게 이곳으로 상특한 기독교, 이래 되겠어? 이게 오늘의 식자들이요 문화의 양상이라, 내 자신을 포함하여 매도하는 거지만."
그럴싸한 것도 있었지만 김 모의 말은 잘지 자였다.
"복고주의든 신파든 낭만주의일 때 뭔가 근사하고 진짜처럼 보이긴 하지. 지금 국내에서 뭐 한다 말 만한 사람들, 바이런이 아니면 하이네다,"
남천택은 또다시 웃었다.
"그나마 그들에겐 밟을 땅이 있지. 보리밥에 긂지 않을 정도의 소시민은 낭만인지 감상인지 알쏭달쏭한 껍질을 핥으면서 신식으로 자위하고, 바야흐로 서구 문물이 계몽을 앞장세우면서 그들 외래인들이 주장하듯 우매한 이 땅에 들어오는데 선봉장은 기독교요 동경 유학생, 후원자는 일본으로서 그들은 깨쳐라! 깨달아라! 눈을 떠라! 해서 낭만주의는 애국주의도 뒤고 감상으로도 변신하며 선동적으로 하부에까지 침투하는 장점을 갖고 있는데, 해서 아주 대중적이기도 하고, 허나 그건 착각일세, 착각. 검과 우애를 각각 한 손에 쥔 그들의 역사, 그것을 환상화하고 교묘히 합리적으로 써먹는 낭만인지 감상인지 알쏭달쏭한 그것, 밟을 땅도 없는 만주벌판 설한풍을 가는 망국인, 임금 노예가 된 일본 땅의 우리 조선인 노동자들, 한이 있을 뿐이야. 짙고 짙은 삶에서, 목숨에서 우러난 그 한 말이세. 자부심 따위, 자네들 그 출중한 대갈통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구. 여름 한철을 사는 나방에 불과한 거야. 오직 불변한 것이 있다면 내가 살아 있다는 자각과 죽을 것이란 그것뿐이지. 하지만 나는 허무주의자는 아니다. 결코 허무주의는 아니다."
"이제다 했어?"
남천택이 모멸하듯 말했다.
"뭘?"
"연설,"
"주눅들게 그러지 말게."
"어디서 동냥했어? 많이 듣던 소린데,"
"동냥을 하다니?"
"여기서 하는 말 다르고 기생방에서 하는 말 다르고 친일파 안방에서 하는 말 다르고 왜놈들 앞에서 하는 말 다르고 왜 그리 사람이 미욱해."
"무슨 소리야, 날 밟는 겐가?"
"타이르는 거다. 밑천이 짧아서 툭툭 터져 실밥이 보여."
"오만불손,"
"아암 오만불손해야지 비굴해선 못쓴다."
불청객을 쫓아내기 위해 한 말인 것 같았으나 말치고는 심했고 별안간 터뜨린 신경질이기도 했다. 그러나 김 모는 꿈쩍하지 않았다. 자리에서 일어설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말없이 담배만 피고 있던 제문식이 물었다. 그 말 대꾸는 없이
"조용하가 다 죽게 됐다며?"
"어디서 그런 말을 하던가?"
"어디긴 회사 쪽에서 나온 말이겠지."
"조사장 건강 회복해서 나오면 몇 놈 모가지 날리겠군."
"그럼 별탈 없다 그 말인가?"
"사람이 어찌 무병으로 사나. 아플 때도 있지."
제문식의 말투로는 아주 온건하다.
"한데 왜 그리 우울해 뵈나. 원판이 그 모양인데 얼굴판 좀 피라구."
"좋은 일도 없고 누구 말마따나 바람의 벙거지 같은 꼴이지 뭐."
성이 나서 앉아 있던 김모가 실쭉 웃었다.
"자네 학교에 나와볼 생각 없나?"
"그것 땜에 날 보자 했어?"
"응."
"생각이 없는 건 아니지만 일 년 후에나..."
하는데
"선생님!"
하며 누군가가 방문을 열고 황급히 들어왔다.
"선생님 소식 들으셨습니까!"
하숙집 아들이었다.
"무슨 소식?"
"굉장한 테러가 있었답니다, 왜놈의 대장 시라가와, 그리고 시게미츠 공사 등이 폭탄 세례를 받고 십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는군요."
"어디서?"
남천택이 물었다.
"상해에서요. 홍구공원 천장절 축하식전에서 그랬답니다."
"누가?"
"물론 조선이지요"
앉아 있던 김모가 일어서며
"만세다!"
하고 외쳤다.
"큰일했군."
남천택의 목소리도 흥분되어 있었다. 제문식은 코트를 입고 모자를 머리에 올려놓으면서 "나는 가네."
"밤새워 술 마시는 거다. 가기는 어딜 가아."
남천택은 팔을 벌리며 막고 나섰다.
"냄 몫까지 마시고 내 몫까지 축하하게."
붙잡는 것을 뿌리치고 제문식은 거리로 나왔다. 그래 그런지 거리는 술렁대고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되놈들 무색해졌을 게야.'
그러나 제문식은 아무런 감동을 느낄 수 없었다. 다만 혼자 있고 싶었고 혼자서 술을 마시고 싶었다. 큰길로 나간 제문식은 다시 골목길로 되잡아들었다. 그 골목길에 주점이 하나 있었던 것이 기억났던 것이다. 뒷골목 술집에서 제문식은 비로소 일종의 안온감을 느낀다. 대낮부터 술손님이 있을 리 없고 따라서 떠드는 소리도 없고 물속에 가라앉듯 술을 마신다. 조용하를 위해 슬픈 것도 가슴 아픈 것도 아니었다. 암울할 뿐이었다. 조용하 옆에 있으면 침묵한 채 있을 때도 펄펄 끓는 솥바닥에서 생선이 튀어오르는 것을 바라보는 기분이 된다. 어차피 죽음이란 고독한 것이지만 조용하의 고독은 처참했다. 죽음 그 자체보다 처참했다. 시간을 재듯 술을 마시는 제문식의 마음은 산장으로 가야 한다 하고 서둘러지는가 하면 궁둥이가 자리에 눌어붙은 듯 일어서기 싫어지기도 했다. 제문식이 산장으로 간 것은 해질 무렵이었다. 조용하는 방을 나섰을 때 그 모습 그 자세로 앉었는데 흐릿한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오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조용하가 물었다.
"애인 좀 만나고 왔지."
제문식은 조용하가 등지고 앉은 창문에 눈을 던지며 말했다. 석양이 진홍빛으로 타고 있었다. 상해 홍구공원에서 고위 장성, 공사든, 십수 명의 일본인을 조선인이 투탄하여 살상했다네, 그 말을 제문식은 보류했다.
"술이나 마시자."
"그러지."
"자넨 한 번도 말린 일이 없었어."
"술 말인가?"
"내 건강이 나빠질수록 제문식은 기분이 좋을 테니까."
사십을 넘긴 사내가 갑자기 소년으로 변한 듯, 조용하 얼굴에 나타난 분노조차 단순해 보였다.
"그럼 관두자꾸나."
"아니야."
제문식은 웃는다.
"악마같이 웃는군."
"추남이 악마같이 웃어야 제격 아닌가. 달콤하게 웃어보아야 별수 없지."
석양은 꽤 오랫동안 창가에 머물러 있었다.
"밖에서 마셨어?"
술잔을 들었으나 늦추듯하며 조용하는 물었다.
"응."
"무쇠 덩어리군."
"찬하를 불러들여."
아침나절에 한 말을 제문식은 되풀이했다.
"듣기 실어!"
"들어야 해."
"거머리 같은 놈! 저의가 빤하지 빤해!"
"..."
"그놈을 들먹여 날 자극하자는 게야? 그럼 자네가 맡아 하게, 그럴 것 같은가? 그걸 노리는 게야?"
"..."
"아니면 미리부터 그놈의 공신으로 잘릴 펴놓자 그건가?"
제문식이 크게 소리내어 웃었다.
"왜 웃어!"
조용하는 악을 썼다.
"그럴 수도 있겠지."
말하면서 제문식은 손수건을 꺼내어 코를 푼다.
"흥, 솔직해서 좋구나."
"나 돌대가리 아닐세."
"누가 그럴 모르나 . 날고 기지."
"조용하라는 인물을 내가 아닐세. 그런 것도 모른다면 자네가 내 머리통 빌려썼겠나? 공신 운운, 그것도 많이 빗나가 있어. 찬하는 나를 두고 조용하의 충견이라 하지. 찬하는 생리적인 혐오감으로 나를 대한다. 조용하의 심리 분석이랄까 투시력 같은 것은 귀하신, 비단 포대기 출신치고는 상당히 정확하고 날카롭지. 그러나 자넨 나르시스트, 애정 결핍증, 바로 그것 때문에 백발백중이 안 되는 게야. 오산이 있었다 그 말일세. 실은 정확하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맹목적이다 할 수도 있어. 진실보다는 말씀이야. 숫자 놀음으로 해결이 안 되는 것이 인생이거던. 하나 예를 들자면 명희부인의 경운데 그 공작은 졸작이었고 실패했지. 자네 자신이 뼈저리게 느꼈을 게야. 가고 싶어하는 사람 사슬 풀어준 꼴이었다. 안 가겠다고 기둥 잡고 도는 사람 엉덩이 차서 내쫓은 결과는 아니지 않았는가. 세상엔 예외란 것이 있어. 문벌에다 학벌, 재벌, 외보 반듯하고 고루 갖춘 조용하, 천하의 모든 계집들 손만 뻗으면 잡히는 걸로 알았겠지."
조용하는 으르렁 거렸다.
"득의에 찬 자네를 하나님같이 우러러볼 여자들은 물론 많았다. 그러나 인간적으로 경멸하고 역겨워하는 여자도 더러 있을 것이란 사실을 자네는 몰랐던 게야. 이렇게 우리는 마주하여 술을 마시고 있는데, 글쎄... 자넨 달라졌을까? 달라졌겠느냐 하고 생각해보는데. 아니야. 자네 눈에 비치는 것, 판단은 여전히 변하고 있질 않아. 본성은 냉혹한데 자기 자신에게는 어찌 늘 그렇게 달콤하냐. 쇠약해지고 희미해진 자네 눈에 비치는 제문식, 그리고 자신에고 소속된 사람들, 여전히 개새끼처럼 고깃덩이를 보고 침을 흘린다, 물론 그렇지, 그렇고말고, 본능이니까. 그러나 억누르는 자의 힘이 쇠약해지면 자네가 생각하는 대로 한몫을 얻어내기 위하여 고깃덩이 보고 침을 흘리며 꼬리가 부러져라 흔들어대는 개새끼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쌓였던 분노와 증오 때문에 작은 몫이고 큰 몫이고 그건 안중에 없이 덤벼들어 목덜미를 물어뜯는 부류도 있는데 그것 또한 본능 아니겠나."
"그렇다면 자네 가능할지도 모르는 큰 몫을 포기하고 내 목덜미를 물어뜯겠다, 설마 그런 부류는 아니겠지? 꼬리를 흔드는 축인데 그것도 좀 기발하게 말이야, 하하핫핫핫..."
"내가 억눌림을 당했던 처지였다면 물론 자네 말대로 배같이 사악하고 여우같이 교활하게 먹이 쪽을 택했을 것이 분명해. 그러나 제문식은 조용하의 분신이었지. 안 그런가?"
"뭐라구?"
"내가 만일 자네에게 빌붙어서 비위나 맞추고 지냈으면 제법 긴 세월인데 쫓겨나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 점에서 조용하가 여느 귀하신 서방님과는 딴판이었지. 냉철하고 계산 빠른 사업가였거던. 자타가 공인하는 내 이 머리통, 두둑하게 생겨먹은 배짱, 필요했지. 필요로 한 건 이쪽보다 그쪽, 지금 이 자리도 마찬가지야. 자네가 어찌 생각하든 우리는 나란히 서 있었지 종속은 아니었다."
너털웃음을 웃는다.
"사실은 나 기분이 나쁘다. 계속해서 우울하고, 잠자코 있자니 숨이 막힐 것 같고... 내가 한숨이나 쉬고 있다면 자넨 더 못 견딜 게야."
"우리 명월관에 갈까?"
느닷없이 조용하가 말했다. 제문식은 빤히 쳐다보다가
"요즘 듣자니까, 자네 말을 빌리자면 되잖은 계집들이데, 그것들을 채신머리없이 불러다놓고 넋두리를 한다는 소문이던데 왜 그러나."
"흥."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나, 호색가도 아니요, 풍류남아도 아닌 자네, 화류계 계집이라면 먼지 털 듯 탈탈 털든 결벽증인 자네는 취향이 신여성 인테리 여성인데 누구 하나 꼬셔다놓고 넋두리를 하는 신세타령을 하든, 마땅찮아."
술잔을 놓고 담배를 붙여문다. 반사적으로 조용하도 담배에 손이 가다가 그만둔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 계집들, 세상 보는 눈 무시 못하지. 비록 귀부인에 신사는 아닐지라도 기생과, 내로라 거들먹거리는 득세층이 들고나는 그곳을 이른바 사교계라 해도 무방한데, 해서 장안에 이름난 사내들, 그 사내들 사람됨의 칫수를 재는 데 있어서 그곳이 본산임을 명심하게. 자네가 아무리 업신여겨도 그들의 복장은 두 개야. 수모를 감수하는 복장하고 비웃는 복장, 그것들 매눈이야. 하필이면 그곳 계집들 불러다놓고 발가벗어?"
"발가벗다니!"
"그들이 자네 말이면 무조건 희희낙락할 줄 생각하니까 추태가 나온 게야. 소위 죽음의 문답 같은 얘기도 나온 모양인체 자네가 냉혹했다면 상대도 냉혹한 게야. 자네의 인생 관리가 설사 달랐다 하더라도 불행한 사람은 냉혹한 거야. 조씨 문중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임씨네 집에서도 촛병마개같이 입들을 틀어막고 있으니 마누라 달아난 소문은 그리 넓게 나지는 않았겠지만 설사 소문이 넓게 퍼졌다 하더라도 달아난 어부인 때문에 노심초사, 자네가 여위고 초췌해졌다, 생각할 그 바닥의 여자들은 아니야. 냉혈한이 자기 자신을 위해 흘리는 눈물,"
"누가 눈물을 흘렸어! 듣자 듣자니까, 나가아!"
"눈물이야 아니 흘렸겠지만, 뭐 그런 꼴이었겠지. 그 양반 파김치가 됐더군, 그래가지곤 멀잖은 것 같던데? 허깨비를 본 것 같애, 넋이 반쯤 나갔더구나, 강산이 내 것이면 뭘 해, 그런 뒷공론,"
"이 돼지 같은 놈아!"
술잔을 냅다 던진다.
"이렇게 나와야 제격이지. 하하핫핫."
술잔을 피했으나 술에 젖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제문식은 크게 소리내어 웃는다. 딸꾹질을 하면서 연신 웃는다. 조용하가 이상한 것은 당연하지만 제문식의 숨막힐 것 같은 웃음 소리는 납득이 안 되는 일이다. 신경이 굵어 그랬지 제문식도 조용하 성미에 넌더리친 일이 있었고 경멸을 하고 미워도 했으며 다만 정확한 판단과 일 처리에 죽이 맞아온 두 사람의 관계다. 현재 심정도 그를 위해 슬퍼하고 아파하는 제문식은 아닌 것이다. 그럼에도 답답하고 우울했고 뭔가 들어올려 와장창 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곤 하는데 제문식 자신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손수건을 호주머니 속에 찔러넣고 제문식은
"자네 나보고 나가라 했나?"
조용하는 노려보기만 한다.
"내심으론 갈까봐 겁나지? 안 그래?"
"갈려거든 가아!"
"나야 해방되는 게 좋지. 저놈이 내 고통을 즐기고 있다, 저놈을 어떻게 잡아먹으면 속이 시원할까 하면서 자신의 무력함에 이를 갈겠지만 자네 의식 속에는 내게 대한 신뢰 같은 것 있을 게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말씀이야."
"차라리 미쳐버리는 편이 낫겠다. 제문식을 믿느니 독사를 믿지."
"인간이란,"
담배를 눌러끄고 새 것으로 피워문 제문식은
"인간이란 묘한 거야. 참말 묘하고도 신비스러워."
늦추듯, 삼가듯 하던 술을 조용하는 퍼마시기 시작했다.
"묘해, 인간이라는 것 말씀이야. 어디까지 측은하고 어디까지 악독한 건지 측량할 수가 없어. 제아무리 크다 한들 기껏 팔척 장신, 이 괴물이 전후좌우 어찌 그리도 방자한지, 복잡한지, 그런 생각 해본 일 있어? 없을 게야. 소위 그 민중이라는 것, 시체말로 민중인데 그들은 특수층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과소평가가 되는데, 이것이 역사가 시작되면서 오늘까지 속성이라, 그러나 그들 양켠 다 가까이 가보면 일정한 공약수가 나오긴 나오지. 그게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이 대체로 중간층에 속하는 족속들이 아닌가 싶어. 물론 상·중·하 어느 곳이든 개성에 따라 그런 부류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으흠흠 내가 왜 이러지? 아프기는 조용하 쪽인데 내 대가리가 왜 이 지경으로 터질 것 같나. 으흠, 그래서 말인데, 그들 나름대로 신산을 맛보았다 할 수 있으니 심리 구조가 이중으로 삼중으로 될밖에 없지. 그러나 말씀이야, 권력 근처에 가질 못했거나 혹은 참여의 기회가 없었던 패거리, 문벌·재벌·학벌을 두루 뭉쳐서, 벌족 부호들 말씀이야, 그것도 한가하게 의식을 즐기는 계층, 이를테면 자네 같은 부류인데 비교적 그들에게선 공약수가 나오는 것 같애. 그러니까 양지에만 있었기 때문에 그늘이 없었다 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인생의 신산을 맛본 일이 없거던. 대체로 신분이란 그 높이에 따라 신비감이 조성된다고들 하지. 그러나 그건 틀린 것이야. 잘 보이지 않고 먼 곳에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 요란한 가문, 요란한 인물을 상상 속에 가두어버린단 말씀이야. 그 속에서 메치고 바로 치고 반죽하거던, 상상엔 제한이 없는 게야. 얼마든지 색칠이 가능하고 모양새도 뜯어고치고 해서 신비스럽게 부각도 되고 황당무계하게 만들기도 하고 그로테스크하게 색칠도 하고, 그건 관점이 아니라 망상이야. 소문이야. 그러나 거리가 좁혀져서 실재를 인식했을 때 떡장수·엿장수·처세가·예술가 할 것 없이 그 파악이 거의반 일치한단 말씀이야. 조용하를 냉혈·독선·오만불손, 숫자에 능하고 편집광에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완상하는 이외 다른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인간, 마찬가지로 운상거인에 속하는 조찬하는 어떤가? 내성적이며 방관자 같고 순수한 열정파, 하면서도 만만찮은 고집, 숫자에는 무관심한 듯하면서 사물을 보는 눈은 정확하고, 물론 모두가 다 나같이 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집어내는 것은 비슷할 게야. 나 같은 인간은 엿장수 눈에 비친 것 다르고 기생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양반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식자 눈에 비친 것 다르고, 의식하건 아니 하건 끊임없이 변신한다고나 할까. 왜 그럴까? 왜, 아마 강력한 상부층과 대다수인 하부층 사이에 끼여든 박쥐같은 존재라서 그럴까? 아무튼 자네들 계층의 속성, 아 아니야, 그 말이 아니고 아무튼 자네들 계층은 창자 속가지 들여다뵈는데, 그런데 말씀이야 하부층, 소위 그 대다수인 민중 말일세. 이건 보는 사람에 따라 관점이 달라진다는 것과는 달라, 솔직히 말해서 민중이라는 큰 무리 그 자체, 난 모르겠어. 모르겠거던. 도무지 알 수가 없어. 대다수인 그들 민중 그 큰 무리를 통하여 나는 인간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인간이란 무엇인가, 역시 그들을 알 수 없듯이 인간 역시 오리무중이야. 그건 크나큰 절망, 절망이지. 어쩌면 그 절망은 역사의 본질 같은 거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구. 완전한 지배, 완전한 복종, 한다면 역사란 존재할 수 없는 거 아니겠나? 그런 뜻에선 절망의 본질이란, 억지 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명멸의 이 끝없는 되풀이 그 자체인 것 같은 얘긴지 모르지만 명멸의 이 끝없는 되풀이 그 자체인 것 같은 생각도 들어. 복종의 존재인 저 거대한 무리는 그러나 결코 복종 아니 하면서 목적에 이르지도 못한 채 사라져가며 또 사라져가고, 결코 그들은 그 아무에게도 지배된 적이 없고, 어떤 힘도 그들을 완벽하게 지배한 적은 없었다. 물질의 결핍이란 순간 순간 혹은 어느 기간에 있어서의 고통이며 굶주림과 헐벗음이 생명을 파괴하는 만큼 의식주야말로 가장 초미한 문제임엔 틀림이 없겠으나 그러나 존재만으로 인간은 설명이 되지 않아. 도시 인간을 모르겠다 한 것은 그 때문일까? 노예나 노비들의 끊임없는 탈출에의 정열, 그 치열함이 헐벗음과 굶주림과 더불어 역사의 본질일까. 그리고 그네들은 본능적으로 진리를 진실을 희구하며 종교나 예술, 사랑을 혹은 일을 통하여 끊임없이 소망하고 갈망하며 이것들이 상극하고 상승하고 상쇄하며 엄청나게 준동하는데 상층과 중간층이 역사를 지배해왔다는 것은 과연 옳은 말일까? 상층과 중간층은 중심에서 퉁겨나간 한낱 비말에 불과한 거 아닐까. 대다수 민중이야말로 거대한 여울이다, 여울. 내가 또 그들을 모르겠다 한다면 중언부언이겠으나 거대한 그 집단, 꿈틀거리는 그 집단은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내게 있어서 그 행방은 늘 불가사의하면서도 불길해."
"행방? 다 죽었겠지. 하하핫핫..."
다음 순간 조용하의 웃음은 갑자기 멎었다. 얼굴이 새파래졌다. 의자 모서리를 누른 손이 덜고 있었다. 그 모습을 제문식은 미동도하지 않고 쳐다본다. 너무나 기묘한 광경이다. 조용하는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제문식은 우울증 환자의 눈빛이었다.
"엄지손가락 하나로 문질러 죽일 수 있는 개미가 무리를 지어 아프리카의 정글을 메우며 진군할 때 그것들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다고들 하는데 그럼 그 거대한 무리는 어디로 갔나. 그것을 생각할 때 나는 동학의 김개남을 연상한다. 김개남은 무엇을 했고 어디로 갔으며 그 무리 또한 어디로 갔는가. 죽었다 하겠지. 물론 죽었지. 자네도 죽었다 하지 않았나. 그러나 나는 죽은 게 아니라 좌절했다 하고 싶어. 밀려오고 밀려가는 파도였을까?"
제문식의 목소리는 늪으로 가라앉는, 깊이 모를 곳으로 한없이 가라앉는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는 자신을 추스리듯 갑자기 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그런데 말일세, [독일농민전쟁]에서 엥겔스는 말하기를 각 주방의 농민들은 단독 행위를 고집하여 반란을 일으킨 이웃 농민의 구원을 거부함으로써 그 결과 개개의 투쟁 결과는 반란의 대중의 십분지 일에도 못 미치는 군대에 의해 차례차례 섬멸되고 말았다... 진주의 농청과 백정과의 싸움은 어떠한가. 그게 이해 상관의 충돌이었나?"
제문식은 머리를 흔들었다. 창자 속에 흘러들어간 술의 양도 엄청나게 많았지만 조용하의 함께 자신도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의식했다. 지껄이고 지껄이고 또 지껄이고 왜 지껄여야 하는지 그 자신 알 수 없었다. 그것은 물에 빠지지 않으려고 허우적거리는 것과도 같은 것이었다. 조용하는 제문식의 얘기 따위는 이미 듣고 있지도 않았다. 미친 여자 물 마시듯 술만 퍼마시고 있었다.
"짐승이나 초목도 제 영역을 침범하면, 초목도... 초목 그, 그건, 아무튼 격렬하게 싸우는 것 그거 다 생존의 본능 아니겠어? 백정과 농청의 싸움도 본능인가? 그건 인간의 싸움이야. 인간 말이지? 소위 계급 투쟁이다 이거야. 농청은 상하를 그어놓자! 백정은 아니다 상하를 지워버리자! 그게 먹는 것하고 무슨 상관이야! 뿌리 깊은 인습, 그것도 있지. 하지만 그건 민중에게 내포되어 있는 분파 작용인 게야. 그래서 그 거대한 무리의 행방이 묘연해지는 게야. 모이고 흩어지는 것, 운동은 운동이지. 만물이 모두 모이고 흩어지고 그게 운동인 게야. 조용하 알겠느냐고. 죽는 것도 운동이고 사는 것도 운동 아니겠어? 홍수전의 막하에서 가장 뛰어났던 사내, 숯굽던 사내, 나 그 사내를 참 좋아하는데 말씀이야, 양수청 있지 않아? 태평천국의 그 양수청 말일세. 그 양수청이가 전당포 아들인 동료 위창휘에게 암살당하면서 태평천국은 일시에 무너지는데 아까 내가 운동이라 했던가? 계급 투쟁이라 했던가? 아니야 아니야 에고이즘, 이게 환상이거든. 측은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수오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사양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시비의 마음이 없음은 사람이 아니요, 그 사단설, 아암 훌륭하지, 군대의 사열만큼이나 반듯하지. 난세 시달리는 백성에게선 실효가 없어도 패왕들의 구실도 둔갑하고 보면 지팡이 지휘봉이 되기도 하고 몽둥이가 되어 부러지기도 하고,"
"그, 그만 그만,"
조용하가 손을 내저었다. 비실비실 일어나다 말고 픽 쓰러진다.
거의 소파에 등은 묻고 조용하는 앉아 있었다. 바둑판 무늬의 헐거운 회색 가운을 입고 있었다. 커튼은 드리워진 채로, 그러나 커튼을 통하여 산장에는 아침이 활짝 열려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방금 어멈이 끓여온 녹차가 탁자 위에 놓여 있었다. 흑단 탁자에 백자 찻잔은 눈이 시리게 대조적이다. 조용하는 등을 세우며 녹차 한모금을 마신 뒤 궐련을 뽑으려다 말고 한숨을 쉰다.
"늑대 같은 놈."
팔을 들어 깍지낀 손에 뒤통수를 받친다.
"야수 같은 놈."
해질 무렵부터 시작하여 밤늦게까지 악몽과 같이 술을 마셨다. 제문식의 번들거리던 눈빛이 다가오고 너털웃음이 귓가에서 울린다. 누구 사형 선고 받았느냐고 악을 쓴 자신의 목소리도 되살아났다. 어제 온종일 죽은 듯 누워 있었고 밤에는 악몽에 시달렸다. 깍지낀 손을 풀고 시선을 찻잔에 떨어뜨린다. 녹차는 투명했지만 액체가 아닌 고체로 느껴진다. 흐물흐물한 푸딩을 조용하는 연상한다. 일본에 있을 때 가끔 먹었던 꼬냑이 생각나기도 했다.
'해파리, 낙지, 해삼, 문어 또, 또오 으음 홍성희 같은 계집? 명희는 홍차 같은 계집인가... 유인실은 냉수, 냉수.'
조용하는 저도 모르게 피전 갑에서 궐련을 한 개비 뽑는다. 그러나 불은 붙이지 않고 담뱃개비를 손가락 사이에서 굴리면서 골똘히 그것을 쳐다본다.
'그자의 말이 옳기는 옳아. 내 앞에서 한숨이나 푹푹 쉬었다면 그 입을 찢어주고 싶었을 거야. 힐끔힐끔 눈치를 보았다면 눈알을 뽑아내고 싶었을 거야.'
천천히 담뱃불을 붙인다. 연기를 뿜어내다가 심한 기침을 한다. 기침을 하면서 창가로 걸어간다. 커튼을 걷는다. 산장의 뜰에는 눈부신 햇살이 가득 차 있었고 새들이 지저귀고 있었다. 신록은 미친 것처럼 연둣빛 진초록이 서로 얽히고설켜 일렁이고 있었다. 타고 있었다. 녹색도 탄다. 진홍의 단풍만 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생명이 타고 있는 것이다. 생명의 환희, 인고의 겨울은 이 환희를 예비하고 있었기에 설원은 그렇게 청정하였는가. 햇빛은 황금가루같이 부서지고 흩어지고, 산장에서 바라다뵈는 앞산에는 철쭉이 한창이다. 짙고 옅은 빛깔, 분홍 같은 연보라 같은 빛깔들이 얼룩처럼 구름처럼 흐드러지게도 피어 있다.
'여자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아무것도 없는데 지금 내 곁에는 햇빛과 신록과 꽃빛만이 있구나'
가면 같았던 손의사의 얼굴이 지나간다. 소독 냄새 하얀 시트.
'나는 다시 저 신록을, 꽃을 볼 수 있을까? 명년에...'
조용하는 유인실을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다. 냉담해도 상관 없었다. 비난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았다. 경멸을 당하더라도, 하여간 그를 한번 만나보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였다. 이 세상 누구에겐가 한 사람에게만은 자신의 죽음을 고백하고 싶을 것이다. 제문식이 알든 모르든, 알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지만 이제 그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제문식이 안다는 것은 이제 아무런 의미가 없다. 집요하게 그토록 자기 신병을 감추기 위해 벽을 쌓고 또 쌓았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으로 제문식에 대하여 조용하는 아무렇지 않은 것이다. 시원하다거나 해방감 같은 것이 있을 리는 없지만 제문식과의 관계에서 결박을 풀어버린 듯한 느낌은 드는 것이다. 다만 쫓기는 기분, 갈길이 바쁘다는 생각, 서둘러지는 마음이 유인실을 절실하게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유인실의 행방은 묘연했다. 사방에 수소문해봤으나 찾을 길은 없었다. 찾지 못한다는 초조함 때문에 기생을 불러들였는지 모른다. 고백한 것은 아니었으나 제문식의 말대로 추태를 부린 결과가 됐는지 모른다. 그런데 고백의 대상이 유인실이라야 한다. 그것도 상식 밖의 집요한 생각이지만 한편 여자라야 한다는 무의식적인 희망도 설명이 되지 않는 부분이다. 여자라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희를 찾을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다.
조용하가 유인실을 마지막 본 것은 작년 봄, 그러니까 새 학년, 아니 봄방학을 며칠 앞둔 어느 날이었다. 마지막이라 했으나 두 번째라 해야 옳다. 그날 요정에서 제문식과 함께 술을 마시던 조용하는 별안간 쏜살같이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소리소리 지르며 운전수를 불렀다. 밤도 어지간히 깊어 있었는데 빨리 가자고 운전수를 내몰아 찾아간 곳이 야간부 기예학교였던 것이다. 그는 곧장 교무실로 들어갔고, 술에 잔뜩 취해 있었기 때문에 염려한 운전수는 그를 뒤따른 것이다. 교직원들은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불시에 방문한 취객의 신분을 몰랐던 교직원들은 어리둥절했고 운전수가,
"조용하 사장님이십니다."
낮은 목소리로 주의를 환기시켜주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실감할 수 없는 듯 직원들은 입만 벌리고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용수철 같이 화다닥 일어났고 나머지도 덩달아 일어섰다. 그러고 나서 그들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유인실만은 약간 놀란 표정이기는 했으나 침착하게 일어섰다. 조용하가 야학교에 술냄새를 풍기며 찾아오다니, 술냄새를 풍기며 왔다는 사실이 그의 체면을 말이 아니게 했지만 명목상 교주이긴 해도, 기예학교 야간부의 존재 따위는 조용하에게는 호주머니 속에 든 영국제 담배 케이스만큼의 가치도 없는 것이다. 팔을 부러뜨린 이곳 학생이자 방직 공장 여공의 건으로 유인실이 서한을 보내지 않았더라면 조씨 가문의 학교 재단속에 기예학교, 그것도 야간부가 있으리란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교무실 함석 지붕에서 모래 구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발가숭이 전등이 댕그랗게 매달린 교무실은 을씨년스럽기만 했다.
"안녕하십니까? 유선생."
조용하는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곧장 유인실 앞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인실은 짤막하게 말했다.
"얼굴이 안 좋으시군요. 어디 몸이라도 불편하십니까?"
아닌게아니라 인실은 몹시 초췌해 보였다. 실은 인실은 처음에는 조용하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삼사 개월인가, 겨울방학이 시작되기 바로 전에 한 번 만났으나 그때는 대단히 단정해 뵈던 신사였었다. 몸가짐이 흐트러져서도 그랬지만 조용하 역시 건강이 좋아 보였던 것이다. 얼른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인실은 삼사 개월 동안 꽤 많이 조용하를 생각한 셈이다. 여공 아이에 대하여 감감 소식이 괘씸하여 그의 생각을 했고 낯선 항구로 명희를 찾아갔기 때문에 그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 일본서 오가다와 함께 나온 조찬하가 그의 동생이었고 그의 동생과 함께 여행을 했기 때문에 조용하를 자주 떠올렸을 것이다.
'그새 사람이 왜 이렇게 변했을까?'
"여행하셨다지요? 겨울방학 동안,"
"..."
"왜 놀라시지요?"
'어떻게 알았을까? 어째서 이 사람은 내 행적에 대하여 알아야만 했나?'
인실은 불쾌감을 나타냈다.
"명희여사를 만났다지요?"
'아하 그랬었구나.'
"어떻게 알았느냐고 묻지 않는군요. 다 아는 수가 있지요."
조용하는 비로소 교무실 안을 둘러본다.
"이 기예학교 교장을 하라 해도 마다 할 사람이 벽촌 코흘리개한테 자수를 가르치는 처지로 전학했다 하니 사람의 일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오."
사정없이 조용하는 자신의 치부를 펼쳐놓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안하무인의 처사이기도 했다. 조용하가 돌진해간 목표물은 유인실이기 때문에 명희를 거론한 것은 말을 잇는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렇고 지나가는 길에, 언제였지요? 유선생께서 부탁한 일이 생각났습니다. 해서 들렀소이다."
"직접 안 오셔도 될 일인데요."
"그렇습니까?"
"..."
"어쨌거나 여기 생도이자 우리 공장 여공 아이에 관한 얘기였지요?"
"그렇습니다."
하고는 인실이 의자를 내밀었다.
"앉으시지요."
"아니 괜찮소."
조용하는 스프링이 망가져서 푹 꺼진 의자를 내려다보고 눈살을 찌푸린다. 다시 고개를 들고 인실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교직원들은 발가숭이 전등 밑에 실루엣 처럼 서 있었다.
"생활이 복잡하다보니, 유선생과의 약속을 이행 못했습니다."
"심려를 드려 죄송합니다."
"아, 아니오. 갑자기 생각나서, 학교 실태도 볼 겸."
"유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보시다시피 경영주의 무관심이 역력하지요."
실루엣같이 서 있는 교직원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아도 내가 적지에 들어왔구나 생각했습니다.
"..."
"그보다 유선생은 몹시 수척해졌군요. 나처럼 건강이 나빠진 것 아닙니까?"
아까 한 말을 잊었는가 조용하는 되풀이했다. 인실은 건강에 대하여 두 번이나 묻는 조용하의 의도를 잠시 생각해보는 듯한 표정이었는데 그것은 또 고통스러움을 참는 표정이기도 했다.
"아아 참 비좁고 답답하군. 이래가지고 학교 구실을 할까? 으음, 내가 이곳의 임자라니 민망하고 창피스럽군."
이때 조선어를 가르치는 남자 선생이 용기를 내어 말했다.
"그, 그렇습니다만, 그, 그렇겠습니다만 불우한 아이들을 위해서는 이층 큰 교사보다 소중하고 보람도 있는 일 아니겠습니까?"
선생의 말을 묵살한 채
"어떤 얼빠진 놈이 진언을 했는지, 사회주의자? 독립투사? 부친의 콤플렉스를 이용한 모양인체 기왕이면,"
또다시 조용하는 인실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기왕이면 유선생이 다니던 그런 여자대학이나 설립하실 일이지, 했으면 춥고 배고픈 밤에 이런 수고는 아니 했을 것을, 하하하핫... 유선생을 이런 곳에 썩게 하다니 하하하핫..."
인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무례하십니다."
"제가 유선생 심기를 건드렸습니까? 솔직하게 말해서 사회주의 하는 것도 좋지요. 식자들 사이의 유행병이니까. 하지만 이곳이 무슨 근거가 되겠소? 안 그렇습니까?"
방약무인이야 그의 본령이지만 이런 경우는 추태다. 그들의 영역에서 그들의 사고 방식에서 본다면 양반이 백정과 다투는 꼴이요, 술을 마시고 나타났다는 것부터 추태였던 것이다. 왜 이래야 했을까? 머리칼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유인실, 그 여자의 영혼 때문이었을까? 머지않아 붕괴될 자기 자신 때문이었을까? 방범은 없다. 아무런 방범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소망은 치열하고 여유가 없는 것이다. 인실은 몇 개월 전의 조용하와 지금 눈앞에 있는 조용하, 엄청난 변화에 의문과 인간적인 연민 같은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의 말은 다만 언어일 뿐 심정이 아닌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아까 말을 꺼내었다가 묵살당한 조선어 선생의 얼굴은 벌개져 있었다.
"춥고 배고파서 독립투수가 됐다, 춥고 배고파서 사회주의자가 됐다, 뭐 그런 겁니까? 등 따습고 배부르면 친일파요, 민족반역자라, 사고 방식이 좀 완곡해도 될 텐데 왜 그럴까요? 너무 성급하다 생각지 않습니까? 인실씨. 식자들, 예나 지금이나 그놈의 식자들 식자 자랑이 문제는 문제요. 선생들 콧대 높은 것도 따지고 보면 식자 자랑,"
횡성수설하다가 트림을 한다.
"하루 열두 끼 먹는 사람 있습니까? 식자 자랑하려고 교단에 섰다면 그거 때리치워야지요."
별안간 조선어 선생이 발악하듯 말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가방을 나꿔챘다.
"내일부터 나 안 나올 거요. 여러 선생들 잘해보시오!"
문을 쾅! 닫고 그는 나가버렸다. 교무실 안이 술렁거렸다.
'성격 파탄이다. 이 사람은 왜 이렇게, 사람이 이렇게 갑자기 변할 수도 있는 걸까? 아니면 술버릇이 고약해서 이러는 걸까?'
그러나 인실은 쏘아붙인다.
"조사장께서는 이곳이 마땅찮은 모양이지요? 모멸스러운 곳에 오실 필요가 있었을까요?"
"아무리 취중이나 목적 없이 왔겠소?"
조용하는 고개를 푹 속이고 끼들끼들 웃었다.
"자부심이 도도하신데 그런 객담, 자존심이 용납하나요?"
"역겨웠을 게요. 이곳 사람들은 저어 만주벌판, 설한풍을 뚫고 말달리는 투사들은 숭배하고 동경하고, 투사들 몸에 들끓는 이조차 거룩하게 여기는 사람들 아니오? 왜 청사에 폭탄을 투탄하고 역두에서 원수의 원흉을 저격하고, 여기 사람들 그것을 꿈꾸며, 그런데 친일파 앞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반대로 나의 부친께서는 정치적 정열을 획득했다 하여, 무산 계급이 여름날 메뚜기 모양으로 날뛴다 하여, 상대가 유인석도 아니겠고 안중근도 아니겠고 베풀면서 허리 꺾이는 짓을 왜 하느냐, 그야 뭐 원죄지요, 원죄, 진실, 좋지요. 사랑? 숭고한 겁니까? 아아 참 내가 이런 말 하려고 여기 온 건 아니었는데, 주정 아닙니다. 인실씨, 뒤죽박죽이오. 아아 참 장광설은 조용하 스타일이 아닌데 말씀이오. 나 주정하는 거 아닙니다. 하하핫핫..."
교직원들은, 교직원들이라 해야 몇몇 되지도 않았지만 뭐가 어찌 돌아가는지 넋이 빠져 있었다. 술에 취해 발음이 정확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용하는 친일파 앞에서 부동 자세로 서 있을 필요가 있을까요? 분명히 그 말을 했는데 직원들은 그냥 서 있는 상태였다.
'나는 왜 이 사람을 동정하나. 등이 휘도록 일하여도 늘 굶주려야 하는 사람들, 길을 헤매며 행인에게 손을 벌리는 어린것들, 만주로 팔려가는 젊은 여자들, 그들이 이 배부른,'
하다가 인실은 뭣에 놀랐는지 소스라친다. 다시 생각을 잇는다.
'돼지같이 미친 지랄하는 것을 증오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나는 무엇이냐, 나는 어느편이며 무엇을 하려는 거지? 나는, 이제 아무 일도 못하게 될까?'
인실은 암울한 눈을 들었다.
"그는 그렇고 유선생 마침 퇴근길인 모양인데 내 차로 댁까지 모셔다드리지요. 춥고 배고픈 이 장소에서 한시 바삐 탈출하시지 않겠소?"
"술 취한 남자하고 동행할 어리석은 여자도 그리 흔치는 않을 것입니다. 가십시오. 아까 그 선생님처럼 조사장께서도 용감하게 나가 보십시오."
조용하는 물끄러미 인실을 바라보았다. 인실은 그 눈을 강하게 받는다.
"그러지요. 용감하게 하하핫핫..."
웃다가 순순히 물러갔다.
조용하는 야학에 가서 추태를 부린 후에도 인실을 단념하지는 않았다. 단념하지 않았다 하여 인실을 소유하겠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후 인실은 학교를 그만두었고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확실치 않은 얘기를 들었을 뿐 그를 만나지 못하였다. 급전직하, 조용하는 계속 급전직하 나락으로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고 있었다. 명희의 가출에서 시작하여, 유인실과의 만남, 그리고 불치의 병 암의 선고, 모든 것은 갑자기 예기치 않게 달려들었다. 명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린 것은 유인실 때문이지 후퇴는 아니었다. 유인실, 조용하는 가장 귀한 보석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후퇴하고 또 후퇴하고 백기를 천번 만번 흔들어도 유인실은 너무나 멀리 있는 여자였다. 자신의 병을 알았을 때 한가닥 희미한 희망까지 그는 놓아버릴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새까맣게 조용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그 새까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자신의 죽음을 인실에게 고백해야겠다는 이상한 집념을 그는 아직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도 마지막의 빛, 생애에서 가장 진실된 빛을 잡아 보고자 하는 시도였는지 모른다.
'남자를 지배한다는 것은 무어일까? 지배한다는 말은 적절하지가 않아. 서러움 서러움... 모르겠다, 모르겠다. 아아, 모르겠다. 왜 그 여자는 보석인가.'
뜻도 없는 말을 중얼거리다가 조용하는 창가에서 떠난다. 휘청거리며 소파 곁에까지 와서 소파를 붙잡고 바닥에 쓰러지며 오열한다.
'내 주먹에서 피가 흐른다. 두드려도 내리쳐도 아무것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미쳐서 거리를 헤매면서 이 고통을 잊을까. 그 여자만... 나는 평화스럽게 체념할 수 있을텐데.. 이렇게 이렇게 나는 남몰래 죽어가고 있다! 나는 무엇을 위해 나를 태워왔는가! 과연 내 생애에 불꽃은 있었던가? 캄캄한 밤...'
울음을 끊고 조용하는 술을 찾았다. 술병은 아무리 찾아도 없었다.
"돼지 같은 놈! 악마 같은 놈!"
제문식이 술병을 치워버린 게 분명했다.
"술을 치울 성의가 있었다면, 음 그런 성의가 있었다면 날 혼자 내버려두어? 돼지, 거머리, 박쥐! 이러고 있어선 안 되겠다. 나가야지, 나가 술을 마시든 회사 내 방에 가서 웅크리고 있든 나가야지 나가."
갑자기 생각이 난 듯 그는 급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면도를 해야지, 면도를 하고 나가야지. 나는 병자 아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난 병자일 수 없어. 젤 마음에 드는 옷 입고, 젤 마음에 드는 넥타이를 매고 음 음,"
서둘러 얼굴에 비눗물을 칠한다. 면도를 들었다. 날을 이리저리 살피다가 얼굴을 밀기 시작한다. 사각사각 털이 밀려나는 소리가 들린다.
"젤 좋은 옷을 입고 호주머니 가득히 지폐를 넣고... 바닷가로 나가볼까? 제문식이 끌고서 바다로 나가볼까? 기생 몇 데리고 말이야."
수건으로 얼굴을 닦아낸다. 거울 속에 나타난 자신의 얼굴을 조용하는 바라본다. 부승부승 부어오른 얼굴, 눈꺼풀이 아래로 쳐져있다. 눈은 빛을 잃고 있었다. 손을 들어올려 자세히 들여다본다. 뼈마디뿐이었고, 정맥이 나돋았던 손이 여자 손같이 도톰하다. 역시 손도 부어 있었다.
"제문식이 말이 옳아."
중얼거렸다.
"제문식이 말이 옳아."
한 손엔 면도칼을 들고 한 손으로 얼굴을 문질러본다.
"나 생긴 대로, 조용하로서 죽어라! 그 말이렷다아? 조용하는 달콤한 사내가 아니지 않는가. 허허 헛헛 허허, 맞는 얘기야."
조용하가 화장실에 들어간 지 두 시간쯤 지났을 때 제문식은 산장에 왔다.
"이 사람 잠 좀 잤나?"
도어를 밀고 들어왔다.
"어어 없네?"
침실을 들여다본다. 제문식은 산장지기를 불렀다.
"사장님 나가셨소?"
"안 나가셨는데요."
"없는데?"
"아침에 차를 끓여다드리고, 조반 내오라는 말씀이 없어서 기다리고 있는 참입니다."
"이상하군. 그럼 어딜 갔지? 창 밖으로 날아갔나?"
하다가 제문식의 안색이 싹 변한다. 허둥지둥 화장실로 달려가 문을 열고 들여다본다. 다음 순간 제문식은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도하 신문에 조용하의 자살은 일제히 보도되었다. 남 몰래 불치의 병을 비관해오다가 스스로 목을 찔러 자살했다는 대개 그런 내용이었다. 어떤 신문에는 그 불치의 병은 폐암이었다고 씌어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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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 토지(4부/3권/4편) 10장 조용하의 자살
黎明 김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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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8.11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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