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35~ P167
교육에 더 필요한 무엇
사람은 20세 무렵해서 좁은 의미에서의 공부를 끝내고 나머지 지식은 시민으로서의 실제적인 삶속에서 얻도록 하고, 그리고 국가 당국은 개인의 발달 과정을 눈여겨보고 그에게 적합한 직종을 부여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플라톤은 생각했던 듯하다.
영혼의 능력 중에서 더욱 개발되어야 할 것들
‘음악’교육은 ‘철학적’본성으로 하여금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도록 가르치기는 하지만, 진(眞)인 것을 이해하도록 가르치지는 못한다.
‘음악’교육은 철학적 본성이 교육을 받는 동안에 접촉하게 되는 특정한 인격과 행위들에 대해 애착을 갖도록 하고, 이를 통해 확고 부동한 신념과 확신들을 주입하기는 하지만, 이 신념들이 의거하고 있는 법칙들에 대한 지적 욕망까지 충족시켜 주지는 못한다.
지적발달은 계속되는 교육에 의해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의 죄악은 무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만약 사람들이 자신이 참된 이익을 위해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 일을 할 것이다.
더 이상의 훈련이 결여되었을 때, 오는 ‘철학적’본성의 타락 위험
‘철학적’본성이 성장하여 꽃을 피우느냐 않느냐 하는 것은 다른 씨앗들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달려 있다.
‘철학적’본성이 몸을 담고 숨쉬는 곳은 의견을 가진 대중의 광장으로서, 대중은 자신들이 고용한 대변인들의 입을 통해서 의견을 말한다. 이 대변인들이란 시끄럽게 과장된 말을 떠들며, 원칙에 대한 인내가 결여되어 있고, 사실들에 관한 한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현존하는 사회체제 중에서 철학적 본성에 합당한 체제는 찾아볼 수 없다. 철학적 본성은 변질되고 왜곡되어 있다.
철학적 본성이 자신에게 합당한 유형의 사회를 만나게 되면, 그때 사람들은 참으로 철학적 본성이란 항상 신적(神的)인 것임을 알게 되고, 자신들의 본성과 삶의 방식은 단지 인간의 것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지식과 진리의미
철학적 본성이 가진 주된 충동은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충동이며, 사물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사물의 이치를 아는 것이고, 사물의 이치를 완전하게 안다는 것은 사물을 단일한 목적에 의해 지배되는 하나의 전체 속으로 수렴되는 부분으로 본다는 것이다.
세상의 진리를 안다는 것은 세상의 선 또는 세상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을 말하고, 인간의 삶을 전체로서 이해한다는 것은 삶을 지배하는 목적을 보되, 보다 상위의 큰 목적이나 의도에 비추어서 본다는 뜻이다.
지식의 토대이자 인간 행위와 국가 법률의 지표가 되는 진리의 존재
‘지식의 주춧돌이자 행위의 지표인 저 진리에로 인간의 마음을 보다 가까이 가게 해주는 교육은 어떤 교육인가’
지적발달이란 무엇인가? 인간의 무지의 본질과 원인은 무엇인가? 무지를 제거하고 마음속에 본래적 역량을 개발하며 통제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이들 물음 중에 교육에 직접 관계되는 질문은 오직 마지막 질문 하나뿐인 것 같지만, 우리는 플라톤을 이해하기 위해, 이성을 기르기 위한 후기 교육에서 그를 이해하는 데는 이성의 활동과 그 영역, 다시 말해서 지식과 진리에 대한 그의 생각이 어떤 것이었는가를 일반적인 방식으로나마 고찰하는 것이 필요하다.
지적 발달의 특징
플라톤은 네 부분으로 분할된 선분(線分)의 비유를 통해서 일련의 지적 이해의 대상들을 제시하고 또 그 대상들에 상응하는 일련의 지적 활동들을 그 명료성과 진리성이 증대하는 순서대로 배열하여 제시하고 있다.
모든 예술 작품들을 가리켜 ‘영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느 정도 적절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모든 예술 작품은 공통적으로 겉으로 나타나는 모습을 표현하기 때문으로, 이 표현이 아무리 그 실제 사물에 직접 연결되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사물과 동일시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상’의 지각으로부터
명료성과 진리성이라는 기준에 비추어 볼 때 최하위에 있는 지각 유형은, 그 영상을 전달하는 매체가 무엇이든지간에, 사물의 그림자나 그 반사물 또는 그 사물과 유사하게 생긴 영상들에 대한 지각을 말한다.
어떤 대상물이나 사건을 그림이나 언어적 기술을 통해서 아는 것보다는 그 대상물을 직접 보거나 그 사건을 현장에서 겪음으로써 아는 것이 훨씬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확실성에 있어서도 더 강력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신념’으로
‘신념’의 대상물이란 첫째 단계의 영상이 모방하는 사물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보통 ‘실물’이라고 부르는 것들이다.
자신의 직접 체험으로 이루어진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의 마음 상태 사이에 놓여 있는 차이는 하나 둘이 아니겠지만, 플라톤 자신이 현재의 관심사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후자가 보다 더 명료하고 참될 뿐만 아니라 보다 더 확실하다는 점이다.
의견; 지식과의 차이
플라톤은 ‘의견’이라는 단일 명칭으로 두 가지를 포괄하고 있다. 주체 쪽에서 볼때, ‘의견’이란 진리성이나 불변성 가운데 어느 것도 보장받지 못하는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객체 쪽에서 보면, 의견이란 감각의 형식으로 주어지는 물질과 관계된 것으로서, 이 물질은 일정하지 않고 복잡하며, 특수하기도 하고 또 상대적이기도 한 것이다.
‘의견’이라는 것은 일정하지 않은 복잡한 것으로서 감각 가능한 또는 상상 가능한 복수의 대상물들로 구성되며, 그 구성 요인들의 특징은 특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지며 그 상대적 입장이 바뀜에 따라 그 특성 또한 달라진다.
우리가 보통 우리의 지식이 라고 부르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인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우연히 접촉하게 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제한된 관찰의 결과일 뿐이다.
사물의 참된 본성을 알기 위한 노력
동일한 한 사물이 가볍기도 하고 무겁기도 하며, 또 정의롭기도 하고 정의롭지 않기도 하다. 이 딜레마가 마음으로 하여금 앞으로 더 나아가도록, 이 당혹스러운 감각의 대상들을 더 분석해 보도록 강요하고 있다.
이 혼돈 속에서 구분을 찾아내는 일, 질문들을 제기하는 일, 감각의 대상을 사유의 대상으로부터 구별하는 일들이 반성에 필요한 일들이며 우리로 하여금 ‘의견’의 영역을 떠나 과학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하는 일들이다.
우리가 정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구체적 사물이 관계들의 변화에 따라 불의한 것으로 바뀌어 버린다면, 우리는 정의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지식’의 참된 대상
우리가 ‘아는’것은 그 특수한 표현 형식과 무관하며 어떤 외양상의 변화에도 함께 변하지 않고 참으로만 남아있다. 이렇게 ‘의견’과 구분되는 것으로서의 마음의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보통 ‘과학적’이라 부르며, 플라톤 당시에 존재했던 유일한 과학은 수학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수학을 자신의 지식의 위계에서 셋째 단계의 지식의 전형으로 삼았었다.
기하학자가 사고할 때는 눈에 보이는 도형들을 가지고 사고 하지만, 그가 정말 이 도형들을 생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 그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은 그가 종이 위에 그려 놓은 특정의 삼각형이 아니라 삼각형 그 자체 이며, 종이위에 그려진 삼각형은 이것을 닮은 것 또는 이것에서 나온 ‘한 가지 영상’ 일 뿐이다.
셋째 단계 : ‘이해’ 즉 감각 대상을 통한 실재의 파악
세계의 본질과 인간의 삶이 설명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불가변의 원리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플라톤은 일상적 경험들 속에서 영속적이라고 단정되는 많은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변성을 생생하게 인식한 듯하다. 그는 어디에서나 감각 작용이 보여주는 겉모양과 변화의 이면에 들어 있는 실재의 요소를 찾아낼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요소를 그는 ‘형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형식 또는 이데아
‘형식’이란 한 사물이 가지고 있는 우연적 특질 또는 그 사물로부터 분리 가능한 특징들과 대비되는 것으로서, 한 사물 속에 들어 있으면서 그 사물을 그 사물이게 해주는 가장 주된 성질이나 특징을 말한다.
보거나 들을 수 없는 실재
‘형식’이란 참으로 ‘있는’ 것(實在)으로서 ‘보이는’ 것과 대조되며, ‘하나’인 것으로서 ‘여럿’인 것과 대조되고, 자기 동일성과 영원성을 갖는 것으로서 자기 아닌 다른 무엇으로 언제나 변화하고 있는 것과 대조된다.
우리가 보고 듣는 사물들은 ‘영상’일 뿐으로서, 우리가 보고 들을 수 없는 다른 무엇의 존재를 ‘모방’하고 암시할 뿐이다.
수학의 예
기하학자나 대수학자 같은 사람들은 자신이 다루고 있는 학문의 특성에 따라 홀수, 짝수, 도형등 이와 유사한 다른 많은 것들을 가정한다. 이런 가설들을 출발점으로 잡고, 일단 출발하고 나면 이후의 단계들을 계속 밟아 나가 마침내는 그들의 탐구가 원래 목표로 삼았던 결과에 도달한다.
이런 절차가 완전한 의미에서의 지식이나 학문의 개념을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논의의 출발점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엇을 가정한 것일 때, 그리고 그 도착점이나 중간의 단계들도 이 미지의 출발점에 의존하는 것일 때, 그 얻어진 결론이 지식을 구성한다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보편적 지식, 곧 진리의 체계적 통합체에 대한 인식
과학에서의 진보란 고립된 사고로부터 연결된 사고로의 진보를 말한다. 이런 진보가 그 절정에 달한 상태를 상상해 보려고 애쓸 때, 우리는 하나의 보편 과학이라는 개념을 얻는다. 부분 하나하나가 나머지 모든 부분과의 관계 속에서 보이며, 전체는 그 시작과 끝을 그 자신 곳에 둔 하나의 완전무결한 진리의 우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보편과학의 개념이다.
최종단계 : ‘지식’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불렀던 단계, 가설이나 감각의 혼합이 없는 순수한 존재의 ‘형식’들이 그 대상을 이루고 있는 단계가 그것이다.
가설의 영역에서 벗어나도록, 그래서 부분들이 합쳐진 전체로서의 진리를 보도록 끊임없이 노력하게 해주는 힘 또는 능력을 가리켜 플라톤은 ‘변증법적 능력’이라 불렀다.
변증법학
‘변증법’이라는 용어는 원래 질문과 응답이 오가는 토론의 과정을 뜻하는 것이었다.
플라톤은 실제로 언어적인 토론을 통해서든지 아니면 영혼 내부에서 일어나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통해서든지 간에 마음이 참된 관념에 도달하려고 노력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이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진리의 발견으로 가장 잘 이끌어 주는 언어와 사고를 다루는 특별한 방식을 가리켜 자연스럽게 ‘변증법’이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다.
동굴의 비유
진리를 향한 마음의 행진은 희끄무레하게 비치는 사물들을 봄으로써 시작된다. 이것은 직접적인 감각 경험이 가져다주는 확실성의 단계로 이어지고, 이 대상들이 상징적, 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본질적 형식이나 원리들의 파악에로 그 행진을 계속한다. 인간의 마음은 이 발달의 원리에 얼마나 복종을 하는가?
플라톤은 동굴의 비유에서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인간은 동굴 밑바닥에 결박당한 채 벽만 바라보는 죄수의 모습과 유사하다. 오직 어쩌다 한 죄수가 그 사슬을 끊고 자유롭게 된다. 만약 그가 인류의 무지에 대한 동정 때문에 자신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려 한다면, 그를 기다리는 것은 모멸과 적대감뿐이다.
‘그림자와 메아리’
연극을 보되 그것이 마치 현실의 삶인 듯이 착각하는 사람은 순간적인 격정으로 감동을 느낄지는 모르나, 결국에는 너무 흥분하든지 너무 지나치게 된다. 예술 작품의 효과를 만끽하기 위해서는 행동에의 충동을 정지시키고, 정신의 이론적 기능이 최대로 가동되도록 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예술과 문학 작품 속의 ‘그림자와 메아리’
자기 통제와 자기 포기, 작품 속에 몰입되면서도 작품 바깥에 머무는 힘, 이 두 가지 상반되는 힘을 그토록 강하게 유지함으로써 듣거나 보거나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은 상대적으로 매우 드물다. 대다수 우리 인간들에게 예술 작품의 메시지는 우리들 자아의 내면을 가로질러 메아리를 일으키고 우리는 자기중심적인 공상등의 느낌을 가지고 공연장 문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예술가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대중을 상대로 어릿광대 노릇을 하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