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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란 무엇인가』 요약 ․ 정리
1장 ~ 9장
국문과 김민영
- 예술이란 무엇인가?
요즘 신문을 보면 어떤 것에서든 연극난이나 음악난이 눈에 띈다. 큰 도시에서는 언제나 새로운 미술 전람회가 하나쯤은 열리고 있고, 비평가가 전문가들의 평가가 뒤따른다. 새로운 문학 작품은 매일 발표되고 있고 신문은 그러한 창작에 대해 보도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또 대도시라면 어디든지 박물관이나 예술학교가 세워져 있고 사람들은 예술의 요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가혹한 노동 속에서 인생을 보낸다. 전쟁을 제외하고 이만한 노력이 들어가는 인간의 활동은 없다. 예술은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과 희생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도 예술을 위한 활동이라고 하며 예술이란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과연 이것이 예술이고, 예술이란 그만한 희생을 강요해도 될 만큼 중요한 것인가? 중요한 문제는 예술이란 미명하에 수백만 인간의 노력과 생명이 희생되는데도, 예술 그 자체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점점 더 불투명하고 불확실한 것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정작 본질이 정확하게 규정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예술 활동에는 노동자의 조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예술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부분 예술가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서이다. 더욱이 그 자금은 부자나 국가에서 받는 국민의 세금인데, 국민은 예술이 제공하는 미의 열락에 참여하는 일이 절대 없다. 만약 이처럼 사람들의 노력, 생명을 희생시키고 윤리, 도덕을 파괴하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예술이라면 그것은 해가 될 뿐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술이라 불리는 모든 것이 과연 진정한 예술인가 생각해보아야 한다. 예술을 위해 희생을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예술이 그만큼 좋은 것인가? 인류에게 그토록 중요하고 없어서는 안 될 예술, 그것을 위해서는 사람들의 노력과 생명을 희생해야 할 뿐만 아니라, 윤리, 도덕까지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할 만큼 값어치 있는 예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예술품으로 인정될 수 있는 특징이란 대체 무엇일까?
예술의 개념이 미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대단한 것이 아니다. 특히 최근이 미학들이 미의 개념 속에 촉각, 미각, 후각 등의 모든 감각까지 포함시키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그렇다. 르낭은 미용사, 의상사, 이발사, 재봉사, 요리사 들이 하는 일도 예술로 인정할 수 있다고 하고, “그것이야말로 대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의상예술, 미각예술, 촉각예술이 에술로써 인정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예술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미란 과연 무엇인가? 그 정의는 무엇이며 또 그 실체는 무엇인가? 미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까지 해결되지 않은 채, 새로운 미학이 나올때마다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고 있다. 150년이라는 세월을 가지고도 정확한 정의를 얻지 못한 미란 무엇일까?
- 미란 무엇인가?
‘미’라는 말은 러시아어로 눈을 즐겁게 하는 것만을 의미했다. ‘아름답다’는 말은 눈을 즐겁게 하는 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좋다’는 말과 그 개념 속에는 ‘아름답다’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성립되지 않는다. ‘미’의 개념에는 ‘선’의 개념이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유럽 각국의 말에서는 미에 ‘선’ 또는 ‘친절’이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좋다’는 말의 대용으로 쓰이고 있다. 러시아인이 유럽식 예술관을 차츰 받아들이면서 러시아어도 유럽 여러 나라의 언어처럼 변화, 발전되어 아름다운 음악이라든지 아름답지 못한 행위라든지 말한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어떠한 것일까? 유럽 여러 나라의 국민들이 이해하고 있는 미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서 미에 관한 정의를 몇 가지 소개하겠다.
- 미에 관한 정의들
미학의 창시자인 바움가르텐은 ‘미는 감성에 의해 인식되는 완전한(절대적인) 것’이라고 했다. 미 그 자체는 사람에게 쾌감을 주어 욕구를 야기시키는 데 있다. 오직 자연 속에서만 미를 완전하게 실현할 수 있고, 따라서 바움가르텐의 견에에 의하면 자연의 모방이 예술의 최고 목적이 된다.
빙켈만은 예술의 사명과 선의 목적을 단호하게 구별하여 예술의 목적은 외형미, 즉 조형미에만 있다고 했다. 새프츠베리의 이론은 미와 선을 별개의 것으로 구분하면서도 미를 선과 융합시켜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한다. 홈에 의하면 미란 유쾌한 것이다. 그러므로 미를 규정짓는 것은 취미 뿐이다.
칸트는 인간에게 있는 판단 능력이 미적 감정의 기초가 된다고 하였다. 칸트에 의하면 미란 주관적 의미에서는 그 개념이나 실천적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일반적이고 필연적인 쾌감을 주는 것이며, 객관적 의미에서는 어떠한 공리적 목적을 생각하지 않고 다만 인식되는 것만으로 그 목적에 조화될 수 있는 사물의 형식이다. 칸트의 후계자 쉴러는 예술의 목적은 칸트가 말한대로 미에 있으며, 미의 원천은 실제의 이익과는 무관한 쾌락이라고 하였다.
헤겔이 주장한 미학 이론에서는 예술이란 감성의 형식을 빌어서 관념의 가상을 실현하는 것이며, 종교와 철학과 마찬가지로 인간의 가장 깊은 문제와 정신의 가장 높은 진리를 의식에 올려놓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다. 헤겔의 미학을 부정하면서 나온 미학론은 쇼펜하우어의 미학론이다. 쇼펜하우어에 의하면, 모든 인간은 이러한 관념을 여러 단계에서 객관화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천재적 예술가는 그 능력을 보다 많이 갖추고 있기 때문에 더 높은 미를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다.
- 타당하지 않은 현재의 미학 이론
미학에 관해서 논술한 이들 모든 정의로부터 어떤 결론을 얻을 수 있을까? 미에 관한 미학정 정의는 결국 두 개의 근본적인 개념으로 귀착된다. ① 미란 독립적으로 그 자체 내에 존재하는 어떤 것, 즉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의 표현 중 하나라고 보는 견해와 ② 미란 우리가 그 대상에 대해 개인적 이익을 갖지 않고 쾌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보는 견해다.
오늘날 교양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들이 내린 객관적, 신비적 미에 관한 정의를 받아들이고 있다. 이는 매우 광범위한 것으로 특히 전대 사람들 사이에 유포된 미에 관한 개념이다. 두 번째 정의는 영국 미학자들 사이에서 대두되어 젊은 층의 지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현대 사회나 현대인들이 이토록 집요하게 예술을 정의하기 위해 주장하고 있는 미의 개념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주관적 의미에서 우리가 미라고 부르는 것은 일종의 쾌락을 주는 것을 말한다. 객관적 의미에서 쾌락은 일종의 절대적 완전함인데, 우리가 그것을 미라고 인정하는 것은 거기에서 쾌락을 느끼기 때문이다. 주관적 정의와 객관적 정의는 다를 것이 없으므로, 어느 정의에 따르더라도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쾌락을 느끼는 것이 곧 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미에 관한 객관적 정의는 있을 수 없다. 이제까지 미는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은 단순한 쾌감을 주는 것으로 정의되어 왔다. 그러나 그렇다면 우리가 어떤 사물을 보고 쾌감을 느끼는 것을 설명할 수 없다. 따라서 현재의 미학은 진정한 미학이 아니다. 왜냐하면 현행 미학은 참다운 예술의 정의를 내린 다음에 작품이 그 정의에 들어맞느냐에 따라 예술이냐 아니냐를 결정하지 않고, 이유는 어떻든지 일부 패거리의 마음에 들면 예술로 인정하고 나서야 이러한 작품을 두루 포괄할 수 있을만한 예술의 정의가 고안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미학서에 서술되고 있는 미를 근본으로 한 예술이론이란, 결국 어떤 사람들의 마음에 들게 된 것이나 현재 마음에 들어 하는 것을 좋다고 인정하는 일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우리 마음에 드는 것이 결코 예술을 정의하는 기초가 될 수 없으며, 또 우리에게 만족을 주는 여러 가지 대상이 예술다운 것의 전형이 될 수도 없다.
사람들은 미 즉 쾌락이 예술의 목적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난 뒤에 비로소 예술의 의의를 알기 시작한다. 예술의 목적으로서 미나 쾌락을 인정하는 것은 예술을 정의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문제를 전혀 예술과 관련이 없는 방법으로 옮겨서 정의 내리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예술이란 무엇인가? 이 질문에 현재의 미학에서 얻은 질문은, 예술의 목적은 미이고 그 미는 우리가 거기에서 얻는 쾌락으로써 인정하게 되는 것이며, 예술에 의한 쾌락은 훌륭하고 중대한 것이라는 주장으로 귀착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쾌락은 그것은 쾌락이니까 좋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동안 예술에 관해 정의한 것은 참다운 정의가 아니고, 현재 있는 예술을 그럴듯하게 보이기 위한 트릭에 지나지 않는다.
- 현재 미학 이론의 배경
예술을 정확하기 정의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쾌락의 수단으로 보는 방식을 버리고, 인간 생활의 한 조건으로서 예술을 검토해봐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예술이 인간 상호간의 교류 수단의 하나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예술작품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 사이에 일종의 교류를 갖게 한다. 예술 활동의 기초는 인간이 남의 마음에 감염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이다. 예술은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감정을 타인에게 옮길 목적으로 재차 이를 자기 속에 불러일으켜, 일정한 외면적인 부호로 이를 표현할 때 비롯된다. 관중이나 청중이 작자가 경험한 것과 같은 느낌에 감염되기만 하면 그것으로 예술이 되는 것이다.
일단 경험한 느낌을 자기 속에 불러일으킬 것, 그리고 이를 자기 속에 불러일으킨 다음에 동작, 선, 색, 음, 말의 형태로써 이 느낌을 타인도 경험할 수 있도록 표현할 것, 이것이 예술의 작업이다. 즉 예술이란 어떤 사람이 자기가 경험한 느낌을 의식적으로 일정한 외면인 부호로서 타인에게 전하고, 타인은 이 느낌에 감염되어 이를 경험한다는 것으로써 성립되는 인간의 작업이다. 따라서 예술은 넓은 의미로는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 스며들어가 있는데, 우리는 그 가운데 몇 가지 표현만을 좁은 의미로 한정해서 예술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옛날에는 가까스로 인정받든지, 아니면 완전히 배척되어 오던 예술이 현대에 와서 만족만 주면 다 좋은 것이라고 여겨지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원인이 있다. 어떤 시대 어떤 인간 사회에 무엇이 좋고 나쁜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그 사회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종교적 자각이 있다. 그리고 이 종교적 자각이 예술에 의해서 전달되는 감정의 가치를 판단한다. 따라서 어떤 민족에 있어서도 그 민족 전체에게 공통된 종교적 자각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전달한 예술은 좋은 것으로 인정되어 장려되고, 종교적 자각에 어울리지 않는 예술은 배척된다. 그러나 예술을 사람들 간의 상호 교류 수단으로 사용한 나머지 커다란 부분은 전혀 평가되지 않고, 단순히 종교적 자각에 거역했을 경우에만 배척되게 되었다.
초기의 기독교는 개인적 쾌락의 감정을 전달한 작품은 모두 나쁜 것으로 간주하고 모든 이교적인 조형예술은 반대했다. 그러나 새로운 교리가 나타나 가톨릭 교리에 대한 경건한 숭배의 마음, 교회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 가책에 대한 공포, 무덤 건너에 있는 행복한 생활을 그리는 예술을 좋은 것으로 보게 되었고, 이에 거슬리는 예술은 모두 나쁜 것으로 보게 되었다.
중세기의 예술가들은 민중과 같은 종교의 기초에 의해서 살고, 따라서 이들의 예술은 비록 현대의 관점에서는 저급할지라도, 민중 전체에 통하는 참다운 예술이었다. 그러나 부유한 계급 사람들은 점차 교회의 가르침을 믿는 예전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즉 교회의 가르침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이었으므로 상류 계급 사람들은 자신들의 특권을 부정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류 계급 사람들은 표면상으로는 여전히 가톨릭을 믿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 사이에서 생겨난 예술은, 인간의 종교적 의식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을 어느 정도로 나타냈느냐에 따라서 평가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아름다운가, 즉 얼마나 쾌락을 주는가로 평가하게 되었다. 이제 종교적 세계관을 가지지 않은 그들에게는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평가하는 척도로서 개인적 쾌락밖에는 남지 않았다.
상류 계급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신앙을 상실하고, 미가 좋은 예술과 나쁜 예술을 구분하는 척도가 되고, 이 예술관에 옹호해서 예술의 목적은 미의 표현에 있다는 미학 이론이 마련되었다. 이것을 확증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동의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독선적인 것으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기독교에 비해 그 도덕적 이상이 낮았기 때문에 아직 선과 미의 관념이 구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학의 이론은 이전까지는 없었으며, 이 학문의 명칭이 생긴 것도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 이야기이다. 학문의 명칭은 기독교를 신봉하는 유럽사회에서 상류 계급 사이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를 학문적, 이론적으로 발전시킨 것은 바움가르텐이었다. 이 이론은 정확하지 않음에도 단지 상류 계급 사람들의 취향에 맞았으므로, 오늘날까지 저명한 이론으로 되풀이 되고 있다.
- 현재의 예술(상류 예술)에 대한 비판
사람들이 교회의 가르침을 믿지 않게 된 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쾌락만을 주는 예술의 하찮은 작업에 만족한 까닭은 무엇인가? 사람들은 종종 자신의 위치에서 유일한 것만이 최고의 가치라고 믿는다. 예술도 마찬가지로, 우리는 현대 예술이야말로 참된 예술일 뿐만 아니라 최상의 유일한 예술이라고 믿는다. 그렇지만 현대 예술은 유일한 예술도 아니고, 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상류 계급 사회에서 누리던 타락한 예술이야 말로 이러한 그릇된 확신에서 나온다.
현대 예술이 진정한 예술이라면 만인에게 향유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 예술적 향유가 고르지 못한 사회적 잘못이라는 대답은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현대 예술의 생산 자체가 사회 밑바닥 계층의 노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류 계급 예술은 처음부터 만인에게 향유될 수 없다. 또한 향유된다 하더라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반박이 있을 수 있는데, 현대 예술은 아예 노동 대중의 대다수가 처한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의 근로 대중은 현대 예술에 어떠한 공감의 감정도 느낄 수 없다.
존중할만한 가치도 없는 예술, 즉 쾌락을 주는 것만이 예술이라고 불리게 된 것은 예술 자체를 악화시켜 거의 파멸에 이르게 했다. 그 결과는 ① 예술이 그 고유의 무한히 복잡하고 깊은 종교적 내용을 상실한 일이다. ② 예술이 좁은 범위의 사람들만이 염두에 두어 형식미를 잃고 조작해낸 듯한 불명료한 것이 되어 버린 일이다. ③ 예술이 그 순진한 면을 잃어버리고 꾸며 낸 까다로운 것이 된 것이다.
이러한 폐해가 생긴 이유는 참다운 예술작품이란 아직 경험하지 않은 새로운 감정을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것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류 계급의 예술은, 종교적인 지각에 의하지 않고 얻어지는 쾌락의 정도에 의해 감정을 평가했기 때문에, 그러한 새로운 가정의 원천을 잃어버렸다. 또 상류 계급 예술은 종교성을 상실한데다가 민중적인 요소도 버렸기 때문에 그 내용이 더욱 빈곤해지고 예술이 전달하는 감정의 범위도 점점 더 좁아졌다. 권력 있고 유복하고 생활고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경험되는 감정의 폭이란 근로 대중 고유의 감정에 비해서 훨씬 좁고 빈약하고 하찮기 때문이다.
상류 계급의 배타적 예술이 민간 예술에서 분리되어 나가던 최초에 예술의 주요한 내용을 이룬 것은 오만의 감정이다. 그 뒤로 삶의 애수는 상류 계급의 예술을 이루는 제 3의 감정이 되었다. 즉 부유 계급의 무신앙과 터무니없이 난잡한 생활로 인해 이들 계급의 예술은 그 내용이 빈약해지고 오직 허영과 삶의 애수 그리고 특히 색욕의 감정을 전달하는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