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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두 얼굴] 시시한 논쟁 -버트런드 러셀(1)
역사상 그 어떤 지식인도 3대 러셀 백작인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 1872-1970)만큼 오랜 기간 동안 인류에게 조언을 하지는 못했다. 율리시스 S. 그랜트 장군이 미국 대통령으로 재선된 해에 태어난 그는 워터게이트 직전에 사망햇다. 그는 마르셀 프루스트와 스티븐 크레인보다 생일이 몇 달 늦고, 캘빈 쿨리지와 맥스 비어봄보다 생일이 몇 주 빠르다. 그런데도 그는 1968년의 운동권 학생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스토파드와 핀터의 작품을 즐길 정도로 장수했다. 이 오랜 기간 동안 그는 놀랄 정도로 다양한 주제에 대해 조언과 훈계, 고발과 경고를 꾸준히 제기했다. (불완전한 것이 확실한) 어느 저서 목록은 그의 저작 68권의 목록을 실었다. 첫저작 <독일의 사회 민주주의>는 빅토리아 여왕의 수명이 5년이나 남아 있을 때인 1896년에 출판됐다. 유작 <분석에 관한 에세이>(1973)는 닉슨이 사임하던 해에 나왔다. 그 사이 그는 기하학, 철학, 수학, 법, 사회 재건, 정치사상, 신비주의, 논리학, 볼셰비키주의, 중국, 두뇌, 산업, 원자에 대한 입문서(1923)년의 저서이다. 36년 후에는 핵전쟁에 대한 저서가 나왔다), 과학, 상대성이론, 교육, 회의론, 결혼, 행복, 도덕, 게으름, 종교, 국제적 사건, 역사, 권력, 진실, 지식, 권위, 시민 의식, 윤리학, 전기, 무신론, 지혜, 미래, 군비 축소, 평화, 전쟁 범죄를 비롯한 많은 주제에 관한 책을 출판햇다. 여기에 립스틱 사용, 여행객의 매너, 시거 고르는 법, 아내 구타 등 상상 가능한 모든 주제에 대해 신문과 잡지에 기고한 엄청난 분량의 글을 덧붙여야만 한다.
러셀이 자신에게 그토록 많은 충고를 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 까닭은 무엇일까? 그리고 사람들은 왜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을까? 첫 질문에 대한 대답은 분명하게 즉각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가 그토록 많은 글을 쓴 가장 큰 이유는 글 쓰는 것이 수월한 일이라는 것, 그리고 짭짤한 돈벌이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의 친구 마일스 맬러슨은 1920년대에 러셀에 대해 이렇게 썼다. “버티는 매일 아침 혼자서 한 시간 동안 산책을 하면서 그날 할 일을 구상하고 고민햇다. 산책에서 돌아와서는 나머지 아침 시간 동안 부드럽고 수월하게, 그리고 단 한 번의 수정도 하지 않고 글을 썼다.” 그는 이런 유쾌한 활동에 따르는 금전적 성과를 작은 공책에 기록했다. 그는 그 공책에 평생 동안 출판하거나 방송했던 모든 것에 대한 수입을 기록했다. 그는 안주머니에 공책을 넣고 다녔는데, 가끔 한가하거나 의기소침해졌을 때 주머니에서 공책을 꺼내 읽었다. 그는 이것을 “가장 보람 있는 소일거리”라고 불렀다.
확실한 것은 러셀은 대부부느이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폭넓게 경험했거나, 대중의 관점과 감정에 큰 관심을 기울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네 살 무렵에 양친을 모두 읽은 고아였다. 어린 시절에 그는 할아버지 집에서 자랐다. 1대 러셀 백작인 존 러셀 경은 구태의연하고 개혁되지 않은 하원에서 선거법 개정안(1832)을 통과시킨 인물이었다. 러셀의 출신 배경은 급진적 사상에 대한 변덕스런 취향을 가진, 서민이나 심지어는 일부 특권층과도 접촉하지 않고 자신들만의 세계에서만 살아가는 휘그당 귀족이었다. 수상을 역임한 노백작은 빅토리아 여왕이 수여한 리치몬드 파크 안의 펨브로크 별장에서 고상하고 우아한 삶을 누렸고, 러셀도 그곳에서 자랐다. 사람들이 “블룸즈버리” 억양으로 잘못 분류하는 러셀만의 대단히 맑고 고아하며 독특한 억양은 할아버지로부터 바로 물려받은 것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러셀의 어린 시절에 제일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은 두드러진 청교도적 세계관을 가진 대단히 고결하고 지독하 ㄹ정도로 종교적인 여성인 할머니였다. 무신론자이자 초급 진파였던 러셀의 부모는 아들 버드런드가 존 스튜어트 밀의 지도 아래 자랄 수 있도록 해 달라는 유훈을 남겼다. 할머니는 이런 유훈을 받아들이지 않고 러셀을 집에서 키웠다. 성경과 정부 보고서의 분위기 속에서 여자 가정 교사들이 연달아 러셀을 가르쳤다(그런데 그중 한 사람은 무신론자로 밝혀졌다). 러셀은 그렇다고 해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어찌됐든 자기 가고픈 길을 갔다. 열다섯 살 무렵에 그는 일기를 쓰고 있었는데, 감시의 눈에서 자신의 생각을 감추기 위해 그리스 문자를 사용햇다. “나는….내 성장 환경이던 종교의 근원을 들여다봤다.” 이즈음에 신앙을 버린 그는 여생을 그렇게 살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깨닫거나 필요로 하는 궁극적 존재에 대한 필요성은 그에게는 조금도 매력이 없었다. 그는 우주의 모든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은 인간의 지성 속에서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러지 못하다면 그런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러셀은 인간의 지성을 추상적이고 실체가 없는 것으로 간주하긴 햇지만, 동시에 지성의 힘을 확신햇다. 추상적 지성에 대한 애정과 구체적인 운동에 대한 의혹은 러셀을 수학자로 만든 할머니의 청교도적 가르침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무척 크다. 그 무엇보다도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수에 대한 과학은 러셀의 삶에서 최초의, 그리고 으뜸가는 열정의 대상이었다. 러셀은 주입식으로 시험공부를 시키는 교사들의 도움으로 케임브리지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장학금을 받으며 입학했고, 1893년에는 수학 우등생 명부에 일곱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뒤이어 트리니티의 연구원이 되었고, 알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와 같이 쓴 명저 <수학 원리>의 초고가 19세기의 마직막 날에 완성됐다. 러셀은 “나는 인간적이지 않기 때문에 수학을 좋아한다”고 썼다. 에세이 <수학의 연구>에서 그는 기쁘게 밝혔다. “수학은 진리뿐 아니라 최상의 아름다움까지 갖고 있다. 조각의 아름다움처럼 차갑고 엄밀한 아름다움, 우리의 연약한 본성에는 조금도 어필하지 않는, 가장 위대한 예술작품만이 보여 줄 수 있는 최고로 순수하고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러셀은 대중이 지식의 최전방에 침투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전공인 수학 부문은 고도로 전문적인 방법으로 연구를 진행했고, 그 결과 비전문가들의 접근은 조금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는 철학적 사색은 특별한 언어로 행해져야만 하며, 성직자들만의 이런 암호를 보유하고 강화시켜 나가기 위해 투쟁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외부인들이 비결에 침투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지식인 세계의 고위 성직자였다. 그는 “상식은 미개인들의 형이상학을 구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G. E. 무어처럼 일상적이고 평범한 언어로 문제들을 논의하고 싶어 하는 철학계 동료들과 심하게 다투었다. 그런데 그가 보기에, 지식인 세계의 고위 성직자는 엘레우시스[비밀 의식을 했던 그리스의 도시 국가]의 비밀 의식을 특권층 내부에서만 거행되도록 지켜 내야 하는 의무를 갖고 잇는 한편, 그들이 관리하는 지식의 창고를 바탕으로 대중에게 소화하기 쉬운 지혜의 과실을 대접해야 하는 의무도 갖고 잇었다. 따라서 그는 전문적 철학과 대중적 윤리학 사이에 선을 긋고, 양쪽을 모두 행했다. 1895-1917년 사이, 그리고 1919-1921년 사이와 1944년 1949년 사이에 트리니티의 교수였던 그는 미구그이 여러 대학에서도 여러 해 동안 강의하고 가르쳤다. 그렇지만 러셀은 그의 인생의 상당 기간을 사람들이 어떤 생각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치는 데 썼고, 이런 지적인 복음주의는 그의 오랜 삶의 후반부를 완전히 지배햇다. 1920년대와 1930년대의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와 비슷하게, 러셀은 세계 각지의 수많은 사람들을 위한 추상적 철학자의 전형이자 원형, 진리를 설명해 주는 해설자의 화신이 됐다. 철학이란 무엇인가? 글쎄, 철학은 버트란드 러셀이 말했던 종류의 것이다. 러셀은 타고난 해설자였다. 그의 초기 저작은 그가 늘 존경했던 라이프니츠의 연구를 설명했다. <서양철학사>(1946)는 그 분야 최고의 개론서로, 당연히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동료 학자들은 러셀을 비판하거나 개탄하는 척했지만, 그들이 러셀의 대중적 저작을 시샘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러설의 저서 <행복의 정복>을 “굉장히 참기 어려운 책”으로 평가했다. 러셀의 최후의 중요 철학 저서인 <인간의 지식>이 1949년에 출판됐을 때, 학계의 비평가들은 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중 한 사람은 이 책을 “마술사의 주문”이라고 불렀다. 그렇지만 대중은 속세로 나온 철학자를 좋아했다. 게다가 러셀은, 맞건 틀리건 자신의 신념에 대한 용기가 있고, 그 신념을 위해 고초를 겪을 준비가 돼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나치의 학정을 피해 망명을 간 것처럼, 다양한 정권과 계속 불화를 일으킨 러셀은 그에게 가해진 형벌을 당당하게 받아들였다.
1916년에 러셀은 연구원의 징병을 반대하는 유인물을 익명으로 썼다. 징병법에 들어 있는 “양심 조항”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간 양심적인 반대자들에 관해 항의하는 내용이었다. 유인물 배포자는 체포돼서 판결을 받은 후 감옥으로 보내졌다. 러셀은 <더 타임스> 앞으로 자신이 글쓴이임을 밝히는 편지를 보냈다. 그는 런던 시장 관저에서 시장의 참석하에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과 함께 100파운드 벌금형을 받았다. 그가 벌금 납부를 거부햇기 때문에 트리니티에 있는 그의 가구들은 압류돼 판매됐다. 선임 연구원들을 관리하는 정예 조직인 트리니티 평의회는 러셀의 연구원 자격을 박탈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다뤘고, 대부분은 가장 중요한 원칙을 염두에 두고 심사숙고한 끝에 이런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대중이 보기에 이것은 동일한 행위에 대한 이중 처벌이었다.
1918년 2월 11일에 러셀은 두 번째로 재판을 받고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번에는 급진적 신문 <트리뷰널>에 “독일의 평화 제언”이라는 기사를 썼기 때문이다. 기사에서 그는 “독일군에 효율적으로 맞설 능력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미군이 영국과 프랑스를 점령하고 공격자들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것은 미군이 아주 종통한 일이다.” 그는 이런 무모하고 거짓되며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인해 “국왕 폐하와 미합중국 사이의 관계에 대한 편견을 조장할 가능성이 있는 성명서를 인쇄, 출판 했다.”는 죄목으로 국토수호법 위반으로 고소를 당해서 6개월 형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가 석방됐을 때, 외무부는 그에게 여권을 발급하는 것을 (최소한 한 번은) 거부했고, 사무차관 아서 니컬슨 경은 서류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해로운 괴짜 중 한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러셀은 뉴욕시립대학의 학과장으로 임명된 1939-1940년에 다시 한 번 법적인 문제로 곤란을 겪었다. 그는 이즈음에는 반종교적인 태도와 부도덕한 가치관의 소유자라는 세간의 추측으로 인해 악명이 높았다. 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반기독교적인 글을 썼고, <무신론자의 신경(信經)>이라는 실내 공연도 펼쳤다. 그는 성직자들이 찬송을 할 때내는 콧소리로 이렇게 낭송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인류의 지고함을 믿습니다. 우리는 내세의 삶을 믿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선행을 통한 불멸을 믿습니다.” 그는 진보주의자 친구들의 아이들에게 이것을 낭송해 주는 것을 즐겼다. 그의 뉴욕대학 임명이 발표되자 지역의 성공회와 가톨릭 성직자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시청이 관할하는 대학이라서 시민들은 임명 문제를 법정으로 가져갈 수 있었는데, 어떤 부인이 실제로 그런 식으로 일을 진행했다. 그녀는 뉴욕시를 고소했다. 이즈음 시는 그녀가 승소할까 봐 걱정이었다. 부인의 변호사는 러셀의 저작들이 “음란적이고 선정적이고 호색적이고 성적이고 색정광적이고 최음적이고 불손하고 편협하고 거짓되고 비도덕적”이라고 단언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판사는 질책을 가하면서 “이질적인 무신론자이며 자유연애의 옹호자”인 러셀은 직위를 맡는 데 적합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피오렐로라 구아디아 시장은 평결에 대한 항소를 포기했고, 뉴욕 카운티 학적계원은 러셀이 “타르와 깃털 세례를 받은 후에 국외로 추방돼야 한다”고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러셀이 정권과 마지막으로 충돌한 것은 88세 때인 1961년이었다. 그는 핵무기를 반대하는 저항의 일환으로 시민 불복종 운동을 주도했고 일부러 체포당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 2월 18일에 그는 런던의 국방성 밖에서 불법 “연좌”를 하면서 몇 시간 동안 도로 위에 앉아 있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귀가해야만 했다. 그러나 8월 6일에는 대중을 선동했다는 이유로 9월 12일에 재판정에 출두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그는 유죄 판결을 받고 징역 1개월 형을 선고받았다가 1주일 형으로 감형받았다(그가 감옥의 병동에서 지낸 기간이었다). 형량이 발표됐을 때 어떤 남자가 “창피하고 부끄러운 일이오. 여든여덟 먹은 노인네를!”하고 고함을 쳤지만, 판사는 “선생은 세상물정을 충분히 알 수 있을 만큼 나이를 드셨소”라고 말했다.
이런 에피소드들이 대중에게 러셀의 평판을 실제로 끌어올렸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렇지만 이 에피소드들은 철학을 상아탑에서 끌어내 저잣거리로 가져가겠다는 러셀의 성실성과 의욕은 입증했다. 사람들은 모호하고 부정확하게나마 러셀을 독을 들이키는 현대의 소크라테스, 또는 통 속에서 나온 디오게네스로 여겼다. 사실 러셀이 철학을 세상으로 끌고 나왔다는 생각은 굉장히 그릇된 것이다. 대신, 그는 세상을 철학속으로 압착해 넣는 성공적이지 못한 작업을 통해 그것이 적절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인슈타인의 경우는 사뭇 달랐다. 아인슈타인은 우주의 움직임을 있는 그대로 관찰했고, 이런 움직임에 대한 묘사에 경험적 증거라는 가장 정확한 잣대를 적용하기로 결심한 물리학자였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 뉴턴 물리학을 바로잡으면서 우주를 바라보는 인간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놓았고, 그의 연구는 이후로 계속해서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응용되었다. 아인슈타인의 원자론은 인간이 만든 핵에너지로 향한 길에 놓인 최초의 위대한 이정표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러셀은 누구보다도 물질적 실체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는 가장 간단한 기계 장치도 작동시킬 수 없었고, 응석받이로 자란 사람조차 별다른 고민 없이 할 수 있는 일상적인 일을 해낼 수 없었다. 그는 차 애호가였지만, 차를 끊이지는 못했다. 외출을 해야 햇던 그의 셋째 아내 피터는 주방 메모판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에세(조리 도구 상표) 받침대를 들어 올리세요. 주전자를 전열기 위로 옮기세요. 끓을 때까지 기다리세요. 주전자의 물을 찻주전자에 따르세요.” 비참하게도 그는 이런 지시를 실행하는데 실패했다. 나이가 든 그는 귀가 멀기 시작했다. 그래서 보청기를 착용했지만, 도움을 받지 않고는 전혀 작동시키지 못했다. 인간들도 물질적인 세상만큼이나 꾸준히 그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의 도래로 인해 “인간 본성에 대한 내 관점을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고 썼다.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지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나는 그런 것이 드문 예외에 해당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이 돈을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좋아한다고 생각 했지만, 파괴행위를 더 좋아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지식인의 대부분은 진실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기보다 진실을 좋아하는 지식인이 전체의 10%도 안된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이 분노의 문장은 보통 사람의 감정이 전시에, 아니 평상시에도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너무나 모르는 말이었으므로 별다른 논평을 할 여지가 없다. 그의 자서전에는 평범한 독자라면 그처럼 영리한 사람이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그토록 무지할 수 있다는 사실에 의아해지는 견해가 많이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