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래터의 여자
김규원
세상에는 여러 가지 아름다운 것이 존재하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것은 여인의 자태가 아닌가 싶다. 여인의 자태 가운데서도 열심히 일하는 젊은 여인의 모습이 더욱 아름답다. 더구나 살결을 어느 정도 드러낸 채 열심히 일하는 여인의 모습은 매력적일 수밖에 없다. 물론 이 말은 내 주관적인 생각일 뿐이지만, 그 옛날에 풍류를 아는 선비들도 나처럼 일하는 여인의 매력에 많이 끌렸던 모양이다. 그래서 이었을까? 옛날 사람들은 전주팔경(全州八景)으로 기린토월(麒麟吐月), 한벽청연(寒碧晴烟), 남고모종(南固暮鐘), 덕진채련(德津採蓮), 다가사후(多佳射侯), 동포귀범(東浦歸帆), 비비낙안(飛飛落雁), 부지박연(府之朴淵)을 꼽았지만, 어떤 기록에는 부지박연 대신 남천표모(南川漂母)를 들었다. 전주천에서 빨래하는 여인의 모습을 전주의 아름다운 경치로 꼽힐 만큼 멋이 있었다는 뜻이다.
지금은 사라진 풍경이지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시절까지도 전주천에 빨랫감을 가지고 나와 빨래를 하는 여인들이 많았다. 무더운 여름이면 함지박을 머리에 인 여인들이 냇가로 나와 널찍한 빨랫돌을 앞에 두고 두 다리를 척 걷어 물에 담근 채 빨래를 했다. 요즘처럼 옷감이 다양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대부분 무명이나, 신식 기계에서 짠 광목에 물감을 들여 만든 옷들이어서 웬만큼 주물러서는 세탁이 되지 않았다. 시커먼 빨랫비누로 박박 문지르고 비벼도 때가 제대로 빠지지 않으니 빨랫방망이로 내리쳐야 때가 어느 정도 빠졌다. 미강유(米糠油)와 쌀겨, 잿물을 섞어 만든 세탁비누는 세척력이 미흡하였고 집에서 빨래를 삶아 냇물에 와서 빨랫방망이로 두드려야 때가 제대로 빠졌다. 더구나 그때만 해도 대부분 가정의 아이들 머리와 옷에 이(虱)가 들끓어 옷을 삶아야 옷 솔기에 *슬은 서캐를 죽일 수 있었다. 가정에서 많은 빨래를 삶는 일이 쉽지 않은 점에 착안하여 전주천 빨래터에는 미군용 드럼통을 잘라 만든 빨래 솥에 빨래를 삶아주고 돈을 받는 사람들도 생겨났었다. 요즘 사람들이라면 세탁기에 넣어 버튼만 누르면 될 일이라고 생각할 터이지만, 세탁기가 우리 가정에 보편적인 물건으로 들어온 때는 1980년대쯤 이라고 생각된다.
함지박 가득 빨래를 머리에 이고 와서 냇물에 불린 빨래를 방망이로 두드리던 여인들에게 빨래터는 잠시나마 해방과 치유(治癒)의 장소였고, 답답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는 장소이며, 이웃과 마음을 열고 화해하는 소통의 장소였다. 빨랫감을 많이 갖고 나오는 여인들은 대개 식구 많은 가정의 주부이거나, 당시만 해도 어려운 농촌 가정에서 도시로 나와 남의집살이를 하며 ‘식모’라고 불리던 사람들이었다. 지금처럼 여자들의 위치가 잡히지 않았던 시절이라, 부인들은 남편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했고 시부모와 시집 식구들의 텃세에 주눅 들어 살았다. ‘식모’들 역시 주인집의 멸시와 횡포를 감내하며 살아야 했다. 그런 불만과 울분을 삭이는 장소가 빨래터였다. 여인들은 빨랫돌에 미운 시어머니나 시누이의 옷, 주인집 미운 사람들의 옷을 얹어 놓고 넓적한 빨랫방망이로 사정없이 때렸다. 팔이 아프도록 때려도 그동안 숱하게 당한 설움을 다 풀 수 없다는 얼굴로.
빨래터의 여인들은 비슷한 나이끼리 모여 빨래를 하며 자식이나 식구들의 자랑도 하고 흉을 보기도 하며 힘든 삶의 응어리들을 풀어냈다. 갇혀 있던 삶의 고된 시름을 말로나마 풀고 위로받으며 여인들은 빨래터에서 자유를 누렸다. 냇물에 발을 담그고 허연 허벅지까지 걷어 올린 채 방망이를 휘두르면, 치맛말기로 동여매었던 뽀얀 젖가슴이 삐져나와 함께 흔들리기도 했지만, 감추려 하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결혼한 젊은 여인들이 공공장소에서 드러내놓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물동이나 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네들의 젖가슴이 드러나 함께 흔들리는 광경도 가끔 눈에 뜨이던 시절이었다. 젊고 건강한 여인들이 *덜퍽진 맨살을 드러낸 채 빨래를 하고 머리를 감거나 몸을 씻기도 하면서 잠시나마 자유를 누리는 정경은 아름다웠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여름, 전주천 남천교 아래 빨래터가 여인들의 목욕장으로 바뀌던 초저녁이었다. 빨래터 위쪽에 남자들이 목욕하는 장소에서 더위를 식히고 있던 나는 같이 목욕하던 친구에게
“물속으로 살살 기어가 빨래터에서 여자들 목욕하는 구경을 해보자”고 꼬드겼다.
“수건을 머리에 쓰고 우린 젖가슴이 없으니 물 위에 목만 내놓고 있으면 남자인 줄 모른다.”는 꾀도 내놓았다. *이내, 알몸에 수건만 머리에 쓴 두 악동이 살금살금 기어가 빨래터 위쪽에 도착하여 여자들이 바글바글한 가운데로 어떻게 접근할 것인지 *염두를 굴리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여자들 두 명이 우리가 있는 쪽으로 오면서
“여기 다른 여자들도 있네. 우리도 여기서 씻자.”하고는 우리가 있는 저만치에서 옷을 척척 벗기 시작했다. 밤이라고는 하지만 남천교 주변의 인가와 상가가 있어 반사하는 불빛이 있어 또렷하지는 않지만, 웬만큼 보일 것은 다 보였다. 어딘지 아는 사람인 듯한 여자들이 자갈 위에서 옷을 다 벗고 우리 앞으로 걸어와 물속에 들어서는 찰나에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밝게 비추는 게 아닌가, 아뿔싸! 밝은 빛으로 본 그녀들은 우리가 잘 아는 당시 J 여고에 다니던 동네 여학생들 아닌가? 코앞에서 잘 아는 여학생들의 알몸을 제대로 본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피해야 한다는 생각만 날 뿐, 정신을 차릴 겨를도 없는데, 같이 갔던 친구가 그만 웃음을 못 참고 “킥!”하더니만 그대로 튀어 일어나 내달렸다. 나도 순간을 놓치지 않고 튀어 달아났다. 그리고 옷을 찾아 입고 반대편 서학동쪽 제방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갔다. 여학생들은 “엄마야!”하고 놀라 고함을 치고 뭐라고 욕설을 하는 듯하더니 이내 잠잠했다. 아마도 *괴란쩍은 일을 떠벌여 좋을 일이 없다는 판단을 했을 것이다. 그 일은 그해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우리도 발설하지 않아 무사히 넘어갔다. 다만 그 멋진 몸매가 가끔 눈앞에 어른거려 어지러웠을 뿐.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1806)가 그린 풍속화 ‘빨래터’를 보면, 세 명의 여인들이 개천에서 빨래하며 시시덕거리고 있고, 아이가 딸린 여인은 넓적한 바위에 앉아 머리를 땋고 있는데, 모두 허벅지를 드러낸 채 열중하고 있다. 그리고 그림 속의 바위 뒤에 갓을 쓰고 부채로 얼굴을 가려 눈만 내놓은 사내가 숨어 엿보고 있다. 또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 )이 그린 빨래터의 그림에도 활을 든 사내가 서서, 빨래터에서 머리를 감은 뒤 머리를 감아올리고 있는 젊은 여인의 드러난 젖가슴을 빤히 바라보고 있다. 빨래터는 여인들의 해방공간인 동시에 남자들의 시선을 끄는 성적인 공간이기도 했을 것이다. 빨래터의 대화는 은밀하고도 노골적인 것이었고 남자들이 은근히 다가설 수 있고 여인들은 모른 척 손을 잡혀주는 교류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아마도 남천표모(南川漂母)를 전주 팔경의 하나로 꼽은 옛 선비들도 빨래터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낭만과 풍류를 아름답게 보고 있었기에 전주의 멋으로 삼았지 않았나 싶다. 여인들이 힘들여 일하는 모습은 애처롭고 안쓰러워 보이지만, 빨래터에서 빨랫방망이를 휘두르던 여인에게는 그 시간이 요즘 유행어로 ‘힐링(Healing. 治癒)’의 시간이었고 스트레스를 푸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멋진 왕자님의 시선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내 기억 속에는 빨랫방망이 소리, 깔깔거리는 웃음, 맑게 흐르던 전주천의 물소리, 그리고 내 앞으로 다가서던 *동실한 가슴과 거뭇한 그늘이 또렷하게 남아 전주천의 추억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시간이이라는 불가항력의 힘이 그 아름답던 것들을 모두 데리고 흘러가 버렸지만, 내 머릿속의 알갱이들은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와 그 시절로 나를 데리고 간다. 지나간 것들은 추억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살아 꿈틀대며 아직도 내 가슴을 콩닥거리게 한다.
*슬다 : [물고기나 벌레가] 알을 깔기다.
*덜퍽지다 : 푸지고 탐스럽다.
*이내 : 그때 바로. 지체 없이.
*염두(念頭) : 마음. 생각.
*괴란(愧赧)쩍다 : 보고 듣기에 창피하여 얼굴이 뜨끈한 느낌이 있다.
*동실하다 : 동그스름하고 토실하다.
첫댓글 조선시대 빨래터 입니다.
신윤복의 빨래터는 이렇고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