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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내에서 유대민족은 로마가 제일 통치하기 어려운 민족이었고, 그래서 율리우스 시저,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등은 유일신에 대한 특수성을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요구사항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신을 자처한 칼리쿨라는 유대민족의 하나님에게 대항하다가 파멸당했고, 네로는 황후 포페아의 요청으로 플로루스 케스티우스를 유대총독으로 보내고,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를 죄도 밝히지 않고 죽인 후에, 유약한 케스티우스를 후임 총독으로 보냈다가 유대전쟁을 자초했다.
서기54년에 16세의 네로는 그의 어머니 아그리피나의 음모에 의해서 황제가 되었으나, 아그리피나는 섭정의 형식으로 황제처럼 군림하였다. 그런데 네로는 아크테라는 여자 노예를 사랑해서 세네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래서 네로는 해방노예가 된 아크테와 밀회를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가 알게 되었고, 그녀는 그 둘의 관계를 가만히 두고 볼 성격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 일로 해서 네로는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반항했다. 두번째 반항은 어머니의 측근인 팔라스(Pallas)를 해임한 것이다.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비서관 정치를 적폐청산의 대상으로 공약했던 네로가 이것을 실행한 것이었으나, 아그리피나는 노발대발하며 브리타니쿠스를 황제로 앉히겠다고 네로를 협박했다. 그래서 네로는 브리타니쿠스를 제거하였다. 그 결과 모자간의 대립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아그리피나는 며느리인 옥타비아를 돌보기 시작했고, 네로는 어머니를 황궁에서 안토니아의 저택으로 쫓아냈다. 17세의 네로는 민간인 차림을 하고, 자기 또래의 수행원들과 함께 밤마다 로마시내로 나가서 즐겼다.
네로는 아크테에게 금방 싫증이 났다. 황후인 옥타비아는 얌전하고 조용한 성격이어서 네로에게 간섭하지 않았다. 20세를 맞이할 무렵 네로는 자기의 놀이 친구인 오토의 약혼녀인 포페아 사비나를 사랑했다. 그녀의 첫 남편은 기사계급에 속하는 유복한 남자였다. 아이를 둘이나 낳고도 첫 남편과 이혼한 것은 원로원 계급에 속하는 명문가 출신의 젊은이 오토와 재혼하기 위해서였다. 네로는 오토를 오늘날 포르투갈에 해당하는 루시타니아 속주 총독에 임명하여 로마에서 내보냈으나, 포페아는 네로의 애인이 아니라 황후를 원했다. 그렇지만 황후 옥타비아와 이혼하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서기 59년, 22세의 네로는 미네르바(or 아테나) 여신의 축제일인 3월20일, 나폴리 서쪽의 미세노 곶 근처에 있는 바코리 별장에서 잔치를 베풀고 어머니를 초대하였다. 한밤중이 지나서 네로는 가까운 바닷가 별장으로 돌아가는 어머니를 선착장까지 배웅했다. 배는 잔잔한 바다에서 계획대로 침몰했다. 그러나 아그리피나는 익사하지 않았다. 그녀는 칼리쿨라 황제 시절에 1년 동안 벤토테네 섬에 유배되어 있을때 수영을 배웠고, 고기잡이 어선에 의해서 구조되었다. 어머니가 살아 있음을 알게 된 네로는 세네카와 부루스를 불러 상의했다. 그리고 군사를 그녀의 별장으로 보내서 끝을 보았다. 세네카는 고심 끝에 아그리피나가 국가반역죄로 죽었다고 공표했다. 칼리쿨라 황제의 여동생이었고, 클라우디우스 황후였고, 네로 황제의 어머니였던 아그리피나의 죽음에 대해서 원로원과 시민들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네로가 로마로 돌아오자 따뜻하게 그를 맞아주었다. 하지만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포페아와 재혼하는 것은 지체되었다. 옥타비아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것은 이혼 사유가 되지 못했고, 로마시민들이 황후를 동정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네로는 어머니를 죽인 죄책감으로 한동안 밤마다 망령에 시달려 잠을 이루지 못했다.
서기 62년이 되자 근위대장 부루스가 병사했는데, 그러자 세네카는 정계은퇴를 했다. 네로는 아내 옥타비아와 이혼하고 애인인 포페아와 결혼했다. 그러자 옥타비아를 동정하고 있던 일반 시민들이 이혼에 분개하여 시위를 벌였고, 지레 겁을 먹은 네로는 분쟁의 싹을 잘라버리려고 이혼한 옥타비아를 섬으로 유배하여 죽여 버렸다.
서기 63년, 남부 이탈리아의 도시인 폼페이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 16년 후에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여 폼페이와 그 주변이 매몰된 대재난의 전조현상이었다. 황후 폼페아가 딸을 낳았고, 네로는 기뻐 날뛰며 갓 태어난 딸에게 '아우구스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태어난지 석 달도 지나기 전에 죽었고, 네로는 진심으로 탄식했다.
한편 네로는 소년 시절부터 시를 좋아했다. '키타라'라는 일종의 리라를 연주하면서 자작시를 노래하는 것을 그리스 문화의 정수라며 무척 즐겼다. 그는 황궁안에서 궁정인이나 측근들을 모아놓고 자작시를 낭송했다. 서기 64년, 27세의 네로 황제는 나폴리의 야외극장에서 가수로 데뷔하였다. '노래하는 황제'를 보기 위해 관중들이 가득 몰려들었다. 그러나 네로는 진정 예술가로 데뷔하고 싶었기 때문에 수수한 투니카 차림으로 무대 위에 섰다. 관중은 무척 즐거워하며 박수갈채를 보내주었기 때문에 일단은 성공이었다. 그래서 본격적으로 가수의 행보를 내딛을 참이었는데, 그해 여름에 로마의 대화재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로마시의 재건사업에 집중하였다. 이때 네로 황제는 화재의 방화범으로 기독교도들을 지목하여 대박해가 있었고, 베드로도 함께 순교하였다.
서기 65년, 제2회 로마올림픽이 5년 만에 열렸다. 네로는 자작시를 음악에 맞춰 노래하는 경연대회에 자기도 출전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당황한 원로원은 '탤런트 황제 등장'이라는 추문을 막기 위해, 경연대회가 열리기도 전에 네로를 우승자로 결의해 버렸다. 그러나 네로는 이를 거부하고, 폼페이우스 노천극장에서 벌어진 경연대회에 참가하였다. 동시대인은 "제멋에 겨운 풋내기", "목소리는 나쁘지 않았으나 성량이 부족함"정도의 평가를 내렸다. 네로는 가장 성대한 박수갈채와 환호성을 받았으나, 지정석에 앉아 있던 원로원 의원이나 기사계급의 남자들은 씁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해 말에 '피소(Piso)의 음모'가 일단락되었다. 네로를 암살하려는 그들의 계획은 밀리쿠스라는 해방노예에 의해서 네로에게 밀고 되었는데, 이때 세네카도 연루되어 자결하였다. 네로는 모든 심문 과정을 공개하고 출판했다. 네로 암살의 실행자로 예정되어 있던 근위대 대대장 플라우스는, 충성을 맹세한 황제를 왜 죽이려 했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폐하를 증오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폐하가 황제답고 존경할 만한 분이었을 무렵에는 저만큼 폐하에게 충성스런 부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폐하가 어머니와 아내를 죽이고, 운동경기에 열광하고, 가수 노릇에 열중하고, 심지어 방화까지 저지르게 된 뒤에는 폐하에게 증오밖에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백인대장 아스플루스도 당당하게 네로를 비난한 뒤 죽음을 맞았다. 왜 내가 죽기를 원했느냐는 네로의 질문에 그는, "폐하가 저지른 숱한 잘못을 바로잡으려면 폐하를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답변했다. 황후 포페아가 죽었다.
파르티아의 왕제 티리다테스가 로마에서 대관식을 거행하기 위해 나폴리에 도착했다. 네로는 나폴리까지 마중을 나가서 로마의 숙적인 파르티아인을 국빈으로 대우했고, 로마에서 거행된 성대한 대관식도 무사히 마쳤다. 무릎을 꿇고 있는 티리다테스의 머리에 네로가 아르메니아 왕권을 씌워주었을때, 식장인 포로 로마노를 가득 메운 일반 시민들은 네로를 "황제(임페라토르)"라고 부르며 환호했다. 진짜 공로자는 코르불로 장군이었지만 말이다. 네로 황제는 평화를 기뻐하는 일반 시민들의 환호에 따라 야누스 신전의 문을 닫게 했다. 이것은 아르메니아의 왕위를 둘러싼 로마와 파르티아의 분쟁을 해결했을 뿐 아니라, 로마의 가상적국인 파르티아와도 평화를 재확립했다는 의미를 갖는다. 이처럼 로마가 전쟁 상태에 있는 동안에는 전쟁의 신 야누스의 신전 문을 열어두고, 평화로워지면 문을 닫는 것이 로마의 관례였다.
평화의 수호신처럼 찬양을 받은 직후에 네로는 평소에 동경하던 그리스를 여행하기로 결정했다. 그것도 황제의 순행이 아니라 가수로서 역량을 시험해보기 위한 여행이었다. 그런데, 서기 66년, 네로의 나이 29세때 '베네벤토의 음모'가 발생했다. 로마군단의 청년장교들이 모의한 네로 암살 계획이다. 네로는 같은 세대의 젊은이들한테도 황제에 어울리지 않는 자로 평가받은 것이다. 그들의 지도자는 아르메니아-파르티아 문제 해결의 공로자인 코르불로의 사위 비니키아누스였다. 베네벤토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있는 일당을 검거하고 보니 모두 10명도 채 안 되는 장교들이었다. 그래서 심문기록은 공표되지 않았고, 재판 없이 처형되었다. 그리고 네로는 '아우구스티니아'라고 불리는 응원단을 데리고 그리스 여행을 떠났다.
서기 66년은 4년마다 한 번씩 열리는 올림피아 제전이나 코린트 제전이 있는 해가 아닌데도 황제의 명령으로 개최되었다. 네로는 음악경연을 경기종목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그리스 각지에서 제전을 열게 하여, 그 대회에 모두 출전했다. 네로는 출전할 때마다 우승하여 황금 월계관의 수를 늘려갔다. 원래 우승자에게는 월계수 가지로 만든 월계관을 씌워주지만, 네로 황제를 위해서 특별히 황금 월계관을 준비해야했다. 그 답례로 네로는 그리스 전역을 '자유도시'로 선언하였다. 자유도시가 되면 내정의 자치를 인정받고, 수입의 10%인 속주세를 면제받는 특전이 주어진다. 그 이전에는 아테네와 스파르타만 이 특전을 누렸으나, 네로 황제에 의해서 그리스 전역으로 확대된 것이다. 하지만 네로가 죽고 2년이 지나기 전에 이것은 백지화되었다. 베스파니아누스 황제는 속주들을 차별대우하는 것은 제국 전역을 통치하는데 적절치 않다고 말하며 아테네와 스파르타에 대한 특별대우만 그대로 유지했다. 따라서 실제 이유는 세금을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네로는 '청년장교들이 꾸민 '베네벤토의 음모'에 대한 사후책으로 일선 군단사령관 세 명을 노고를 칭찬하는 편지로 그리스로 초대하여 다짜고짜 자결을 강요하였다. 라인강 방위를 담당하는 고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과 저지 게르마니아군 사령관인 스크리보니우스 집안의 두 형제와 유프라테스강 방위를 담당하는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 사령관 이었다. 이로써 로마군의 주력이고 로마시민이기도 한 군단병들의 네로 황제를 보는 시각이 달라졌다.
네로 황제는 코르불로 시리아 총독을 죽인 후, 케스티우스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그러나 케스티우스는 시리아 총독에 취임하자마자 병에 걸려서 부총독인 무키아누스에게 실무를 맡겨놓은 상태였다. 서기 66년 여름,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플로루스 유대총독의 보고에 케스티우스는 제12군단과 아그리파 2세 등의 우군을 이끌고 반란자 편에 선 도시들을 차례로 공략하면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했다. 유대쪽의 반항은 격렬했고, 케스티우스의 지휘는 적극성이 부족했다. 그래서 예루살렘 최대의 요새라 할 수 있는 성전을 공략하는데 실패했다. 어느새 11월로 접어들었다. 케스티우스는 지금의 군세로는 무리라고 생각하여 철수를 결정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철수하는 로마군을 공격한 벧호른(Bethoron) 전투에서 보병 5,300명과 기병 380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고, 케스티우스는 시리아의 안디옥에 있는 총독 관저로 돌아간 직후에 병사했다. 로마군의 참패 소식은 그 무렵 그리스에 있던 네로 황제에게 전해졌다. 네로는 케스티우스의 후임에 무키아누스를 임명하고, 유대전쟁을 전담할 책임자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임명했다. 베스파시아누스에게는 3개 군단이 주어졌고, 서기 67년5월,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이 점령한 갈릴리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다.
한편 네로는 그가 로마를 비운 사이에 내정을 맡고 있던 해방노예 헬리우스가 성가시게 재촉하여 1년 반 만에 로마로 귀환했다. 네로가 남부 이탈리아의 항구 브린디시에 상륙한 것은 서기 68년1월이었다. 네로는 로마시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그리스 여행에 동행했던 응원단이 각자 플랭카드를 하나씩 들고 앞장섰고, 그 플랭카드에는 전투장면 대신 경연대회에서 우승한 장면이 그려져 있었다. 그 다음에는 우승으로 얻은 황금월계관을 받쳐 든 사람들이 플랭카드 대열을 뒤따른다. 월계관의 수는 무려 1,808개였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네 필의 백마가 끄는 전차를 타고 개선장군 네로가 등장한다. 개선행렬이 포로 로마노를 빠져나간 다음 카피톨리노 언덕으로 올라가서 최고신 유피테르의 신전에 들어가 신에게 감사를 드리는 대신에, 팔라티노 언덕으로 올라가 예술의 수호신 아폴로 신전에 들어가 감사를 드렸다.
그러나 로마 시민들의 열광은 급속히 식어버렸다. 그들에게 전리품(or 돈)을 나눠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네로는 로마인은 너무나 비문화적인 민족이라고 개탄하며, 언제나 그리스 문화에 젖어 지낼 수 있는 곳인 나폴리로 가버렸다. 하지만 네로는 나폴리에서 갈리아지역의 리옹 속주 총독 빈덱스의 반란소식을 들었다. 빈덱스는 에스파냐 동북부 속주 총독인 갈바에게도 궐기를 호소했다. 하지만 궐기를 호소하는 친서가 피레네 산맥을 넘기도 전에, 고지 게르마니아 군단의 사령관 베르기니우스 루푸스는 군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렸고, 반란을 쉽게 진압되었다. 그리고 병사들은 사령관 루푸스에게 황제가 될 마음이 있으면 자신들이 지원을 하겠다고 제안했으나 루푸스는 거절했다. 반면에 히스파니아의 갈바 총독은 반란에 동참하였다. 갈리아인의 반란이 간단히 진압되고 빈덱스가 자결했다는 소식도 갈바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서기 68년4월2일에는 루시타니아(지금의 포르투갈 지역) 속주 총독인 오토가 갈바를 지지하고 나섰다. 베티카(이베리아 반도 남부지역) 속주에 주재하는 회계감사관이자 총독 대리인 카이키나도 지지의 뜻을 전해왔다. 이베리아반도 전체가 네로에 반기를 든 셈이다.
당황한 네로는 나폴리를 떠나 수도로 돌아왔다. 갈바가 에스파냐에서 1개 군단을 새로 편성했다는 보고를 받은 원로원은 그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로마시민들이 들고일어났다. 주곡인 밀을 실어와야 할 수송선이 네로의 명령으로 경기장에서 쓰이는 모래만 잔뜩 싣고 온 사건이 네로에 대한 그들의 불만에 불을 지폈다. 그러자 원로원은 '국가의 적'으로 선언한 갈바와 은밀히 연락을 취하기 시작했고, 갈바가 에스파냐에서 군단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해온다는 소문만 듣고도 원로원과 시민들은 태도를 결정해버렸다.
네로는 자기가 믿고 있던 근위대장 티켈리누스가 사라지고, 또 한 사람의 근위대장인 니피디우스는 재빨리 갈바 쪽으로 돌아서자, 자신의 신변이 위험해졌음을 알았다. 황제 호위병은 물론 심부름하는 노예들까지도 네로의 주위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이집트로 도망치려고 준비해둔 배의 선원들도 모두 도망쳐버렸다. 이런 상태인데, 원로원은 네로를 '국가의 적'으로 선언했다. 그러자 근위대장 니피디우스는 갈바를 황제로 추대하기로 결의했다. 네로는 해방노예가 교외에 소유하고 있는 집으로 피신하였으나, 서기68년6월9일, 30세의 나이로 자살했다. 네로의 유해도 칼리쿨라와 마찬가지로 '황제묘'가 아닌 다른 곳에 매장할 수밖에 없었다. 칼리쿨라가 암살되었을 때는 판세가 하루 만에 결말이 났지만, 네로가 죽은 뒤에는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로 등극할 때까지 1년 반 동안 내전을 겪어야 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