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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쟁의 선봉대, 노동자의 5월
증 언 자 : 김현채(남)
생년월일 : 1961. 12. 6(당시나이 19세)
직 업 : 식당종업원(현재: 무직)
조사일시 : 89. 7
개 요
1980년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했던 김현채 씨는 항쟁의 전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21일 광천동 로터리에 바리케이드를 친 후 지원동에서 무장을 했다. 22일 시민군 차에 탑승하여 교도소 부근과 지원동 전투에 참가하고 특수기동대로 활동하다가 26일 기동타격대 6조에 편성되어 열심히 활동했다.
공수들에게 두들겨 맞은 후 복수심이 생겨
나는 1961년 전남 화순에서 가난한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내가 세 살 때 어머니는 유방암을 앓다가 돌아가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곧바로 재혼을 하셔서 나는 의모의 손에서 자랐다.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전가족이 광주로 이사를 왔다. 나는 대성국민학교를 다녔으나 계속 어려워지는 가정형편으로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어 국민학교 4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게 되었다.
곧바로 세탁소에서 쓰는 대나무로 된 솔을 만드는 공장에 다니면서 일을 배우다가 서울로 올라갔다. 서울에서 해보지 않은 일이 없을 정도로 여러 가지 일을 했다. 미싱, 자동차정비, 식당 종업원 등 여러 가지 일을 했으나 한 가지 일을 진득하게 하지는 않았다. 이렇듯 나는 돈없고 힘없는 노동자로 근근히 살아갔다.
1980년 5월에는 서울에서 식당 종업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5월 15일 주민등록증 분실신고를 하기 위해 광주로 내려왔다. 광주에서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보았으나 별관심이 없었다. 서울에서도 학생들이 데모하는 것을 봤기 때문에 그 정도라고만 생각했을 뿐이었다.
5월 18일 오전 중앙국민학교를 거쳐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그곳에는 공수들과 학생, 시민들이 많이 있었다. 나는 학생이 아니라는 안도감과 호기심 때문에 시민 사이를 뚫고 제일 앞으로 갔다. 학생들은 금남로에서 연좌시위를 하면서 '공수는 물러가라', '계엄 해제하라'고 외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금남로를 점거하고 있던 공수들이 학생들을 붙잡아 사정없이 두들겨패기 시작했다. 구경하고 있던 시민들은 놀라 흩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들은 학생들을 붙잡아 두들겨 팬 다음 가톨릭센터 앞에 있는 군용 트럭에 실었다.
트럭 안에는 10여 명의 학생들이 적재함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공수들은 군용 트럭에 사람이 채워지면 어디론가 싣고 갔고 그 후 또 다른 군용 트럭이 왔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데 내 뒤에 있던 사람이 공수들에게 돌을 던지며 욕을 했다. 그러자 대검을 쥔 공수가 우리 쪽으로 달려왔다. 구경하던 시민들은 일제히 몸을 피했으나 나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3, 4명의 공수가 달려와 제일 앞에 서 있던 내 멱살을 잡았다. 나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놀랍기도 하고 겁에 질려 공수에게 사정을 했다.
"나는 학생이 아니라 서울에서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 내려왔습니다."
그 공수는 내 배를 군화발로 차며 꺼지라고 했다. 내가 배를 움켜쥐고 근처의 병원 입구에 앉아 있는데 옆에 있던 아저씨가 "학생 큰일날 뻔했네"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 후 조선대 공대 부근의 친구집에 박찬희 선수의 권투시합 중계를 보러 갔다. 아무래도 박찬희 선수가 질 것 같아 친구와 함께 다시 밖으로 나왔다. 조선대 앞의 철길을 지날 때 그 부근의 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공수 한 명이 우리를 불러세웠다.
"너희들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이냐?"
"백화점에 가는 길입니다."
친구가 대답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공수는 나에게 물었다.
"너는!"
내가 머뭇거리는 사이 친구가 대답을 해주었다.
"일행입니다."
그 공수는 내게 트집을 잡았다.
"이 새끼야, 사람이 물으면 대답을 해야지!"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공수는 주먹과 개머리판을 휘둘렀다. 이것을 본 할아버지 한 분이 말렸으나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신이 난 듯 때렸다. 오전에 이어 두번째로 어이없이 맞은 나는 분노심이 생겼다. 그 분노는 복수심으로 발전했다. 공수는 한참을 두들겨패다가 같이 술을 마시던 중위가 "야 그만 해!"라고 하자 그때서야 때리는 것을 중지했다. 우리는 겨우 그 자리를 빠져나와 공수들과의 거리가 멀어지자 나는 공수들을 향해 큰소리로 욕을 했다.
"이 개새끼들아! 느그들 죽여."
나는 그렇게 욕을 퍼부은 다음 친구와 함께 시내 쪽으로 신나게 도망을 쳤다. 시내로 들어와 친구와 헤어지고 전일빌딩 앞의 횡단보도를 건넜다. 횡단보도에는 장갑차가 있었다. 내가 그것을 유심히 보니까 그곳에 있던 공수가 악을 썼다.
"이 자식아, 빨리 집에 가!"
나는 삼양백화점을 거쳐 학생회관 쪽으로 갔다. 황금동 콜박스까지 가니 원호청 쪽에서 학생으로 보이는 시위대열 2백-3백명이 '계엄해제, 김대중 석방'을 외치며 충장로로 접어들고 있었다. 주위에 있던 시민들이 박수를 치며 응원해 주었다. 나는 미리 학생회관 앞에 가 있었다. 그때 무등극장 쪽에서 페퍼포그차와 전경들이 탄 군용 트럭이 학생회관 쪽으로 오다가 학생회관 앞을 지나오는 시위대열과 마주치게 되었다. 시위대열은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면서 페퍼포그차를 향해 돌을 던졌다. 그러자 페퍼포그차를 뒤따라오던 군용 트럭은 차를 돌려 다시 무등극장 쪽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페퍼포그차 안에 있던 전경 5, 6명은 차에서 내려 도망가 버렸다. 시위대열은 페퍼포그차를 옆으로 넘어뜨리고 그 차에 있던 무전기를 돌로 찍은 다음 차 안에 던져버렸다. 그런 후 차에 불을 지르려는데 쉽지가 않았다. 나는 옆에 있다가 소리쳤다.
"연료통 깨버려!"
시위대 중 한 사람이 돌로 연료통을 깨자 기름이 새어나왔다. 누군가 불을 붙이자 페퍼포그차는 순식간에 불이 붙었다. 그러자 시위대열과 구경하던 시민들은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좋아했다. 공수들에 당한 것을 복수라도 한 것처럼. 나 역시 통쾌한 기분으로 적십자병원 부근의 친구집에 갔다. 그곳에서 공수들에게 짓밟혀 더러워진 옷을 빨고 잠을 잤다.
19일 정오 가톨릭센터에서의 공수들의 만행
19일 오전에도 시내로 나갔다. 광주에 와서도 줄곧 친구집에서만 있었고 집에는 알리지 않았다. 나는 시위대에 합류해 돌을 던지며 공수들과 맞서 싸웠다. 공수들은 더욱 악랄하게 학생과 시민들을 구타했다. 심지어는 대검까지 사용하면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쑤셔댔다. 이제 공수들은 시위진압이 목적이 아니라 살인하지 못해 신들린 사람 같았다.
정오쯤 가톨릭센터 7층에서 시민의 동정을 살피던 공수가 밖으로 머리를 내밀었다. 그것을 본 시민들이 가톨릭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나도 시민들을 따라 7층까지 올라갔다. 먼저 도착한 청년들이 소방장비인 곡괭이로 잠겨진 문을 부수고 의자로 대형 유리창을 깼다. 사무실 안에는 6명의 공수가 겁에 질린 채 한쪽 구석에 서 있었다. 그 동안에 당하기만 했던 우리 시민들이 공수들을 패기 시작했다. 나 역시 복수라도 하듯 그들을 실컷 두들겨팼다. 청년 한 명은 "내 친구 살려내라"고 소리를 지르며 그곳에 있던 콜라병으로 머리를 후려쳤으며, 시민 한 명은 소화기를 공수들의 안면에 대고 뿜어대기도 했다. 한참을 때리는데 뒤에 있던 시민 한 명이 말렸다. 우리가 때리는 것을 중지하고 주춤하는 사이 공수가 총에 탄알을 장전하여 총구를 우리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청년 한 명이 오히려 큰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아나 쏴봐라."
그 청년이 공수에게 다가가는 사이 다른 청년 한 명이 머뭇거리는 공수의 총을 잽싸게 빼앗았다. 총을 빼앗은 청년과 나는 옆에 있는 강당으로 가서 노리쇠를 당겨보았다. 그러자 장전된 탄알이 노리쇠에 물려 튕겨나왔다. 우리는 빼앗은 총을 밖에 있는 시민들에게 내보이며 흔들었다. 가톨릭센터 밖에 있던 시민들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쳐주었다. 그때 금남로 양쪽에서 공수들이 정렬을 하고 있었다. 공수들은 곧바로 가톨릭센터 건물 안으로 들어섰고 "공수가 온다"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시 계단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일부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갔고, 일부는 1층으로 내려가 후문에 있던 차고의 두꺼운 천막 지붕을 타고 빠져나갔다. 나는 1층까지 내려가 후문으로 피하려 했으나 그때는 이미 공수들이 주차장 지붕 위에서 시민들을 대검과 몽둥이로 두들겨패고 있었다. 공수들은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청년을 몽둥이로 두들겨패다가 대검으로 청년의 옆구리를 푹 찔렀다. 그러다가 나를 발견한 공수가 이번에는 나를 쫓았다. 그때 내 뒤에 있던 청년이 주차장 벽에 있는 상자를 밟고 담을 넘으려 하자 공수는 그 청년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려쳤다.
나는 그사이 몸을 피해 깜깜한 지하실로 들어갔다. 거의 기다시피 하여 지하실 중간쯤에서 옆드려 있는데 공수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제 죽었구나'고 생각하며 새파랗게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러나 공수의 발자욱 소리가 순간 멈추면서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마 어둠 속에서 공수도 어떤 일을 당할지 몰랐으므로 겁이 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숨을 죽이고 지하실 바닥에 있다가 밖이 조용해진 것 같아 조심스럽게 1층으로 올라왔다. 1층 사무실에 있던 아주머니와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구석에 있던 상자 안으로 숨겨줬다. 상자 안에는 이미 청년 한 명이 숨어 있었다. 한참 지난 후 아저씨가 상자 안을 열어주었다. 우리는 곧바로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금남로에는 시민들은 없고 공수들만 맹수처럼 서 있었다. 도로에는 돌이 여기 저기 흩어져 있었고 동아극장 앞에는 도망치거나 공수에게 붙잡힌 사람들의 신발이 두 가마니 정도 쌓여 있었다. 그곳을 황급히 빠져나와 양동 쪽으로 갔다. 그곳에서 시민들이 공수를 돌로 찍어버렸다는 소리를 듣고 적십자병원으로 갔으나 공수를 이미 병원으로 옮긴 뒤였다. 혼자서 실내체육관 뒤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가건물을 지어놓고 양궁을 하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지나면서 나는 화살로 공수들을 쏴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시 금남로로 나가 시위를 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합류했다. 며칠 동안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주민등록증도 만들지 않았는데 아무 걱정이 없었다. 내가 뭔가를 하고 있다는 생각과 광주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만이 있었다.
19일 밤과 20일에도 시위를 했으나 별다른 기억이 없다.
20일 오후 금남로에서 차량시위가 있었다. 공수들의 무자비한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조직적으로 싸움을 한 것이다. 차량대열의 선두가 가톨릭센터 앞에 이르렀을 때 공수들은 무차별적으로 최루탄을 퍼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를 빠져나와 원호청 근처로 몸을 피했다.
MBC 방송국이 불에 탈 때 나는 상업은행 앞에서 공수들에게 돌을 던지며 투석전을 했다. 시위대는 그곳에 휘발유를 뿌려놓고 공수들과 대치했다. 기업은행 건물의 지하식당에서 일하는 청년이 쇠파이프를 가져와 우리는 그것으로 무장을 했다. 그날 저녁은 광주역, 노동청 앞에서 밤을 꼬박 새며 시위를 했다.
계엄군의 만행은 우리에게 결국 총을 들게 했다
21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금남로에서 계엄군들과 대치하고 있었다. 전옥주 씨가 리어커에 시체를 끌고 다니는 것을 보고 가톨릭센터 앞으로 갔다. 그곳에서는 청년들이 복면을 한 채 신문지를 깔아놓고 화염병을 만들고 있었다. 나도 그들 사이에 끼어 화염병을 만들었다. 콜라병에 휘발유를 붓고 신문지로 병 입구를 꼭 막았다. 이렇게 만든 화염병은 모두 70여 개가 넘었다. 나는 화염병을 만들고 계엄군과 대치하는 곳으로 갔다.
많은 사람들이 각 동의 이름을 써서 붙인 리어커에 빵과 음료수, 김밥 등을 싣고 왔다. 또 트럭이 오더니 거북선 담배 한 박스를 가져왔다. 나는 먹을 것과 15-16보루의 담배를 시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내 나름대로 판단을 해서 옷이 깨끗한 사람보다는 옷이 더러운 사람에게 주로 담배를 주었다. 옷이 더러운 사람은 데모를 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시민들에게 음식과 담배를 나누어 준 후 상업은행 앞의 화단에서 빵을 먹고 있었다. 그때 장갑차 한 대가 공수들을 향해 진격했다. 장갑차에 탄 사람은 웃옷을 벗은 채 머리에 띠를 두르고 태극기를 흔들었다. 총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것을 보고 멋있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에 탄 청년이 쓰러졌다. 장갑차는 노동청 쪽으로 빠지고 사람들은 물 빠지듯 순식간에 도망갔다.
나는 금남로를 벗어나 충장로 파출소 앞에서 지프차를 탔다. 그 차를 타고 광천동 공단입구를 거쳐 외곽도로를 타고 백운동 로터리로 갔다. 백운동 철도 부근에 원목을 가득 실은 8톤 트럭이 있었다. 우리는 그것으로 상무대에서 광주로 들어오는 길목인 광천동 로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기로 하고 차 주인을 찾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일행 중의 한 사람이 시동을 걸어 광천동으로 향했다. 우리도 지프차를 타고 바로 뒤를 따랐다. 원목이 넘어지지 않게 삼각형 모양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바리케이드를 치고 나자 시민들이 "계엄군이 총을 쏘아 난리가 났다"고 하면서 총을 가지러 가자고 했다. 우리는 지원동으로 향했다.
지원동에서 무장을 한 차량을 만났다. 그들이 남광주시장 부근의 술집에서 총을 나눠준다고 해 남광주로 갔다. 남광주 부근의 술집을 모두 뒤졌으나 총을 나눠주는 곳은 없었다. 어떤 술집에서는 "지금 총이 문제가 아니라 원자폭탄이라도 있으면 주겠다"고 했다. 그때 무장한 지프차가 지나가면서 빨리 숭의실고 앞으로 가라고 했다. 오후 3-4시경이었을 것이다. 숭의실고 건너편 도로에서 차 머리를 지원동 쪽으로 돌려놓고 3, 4명의 청년들이 무기를 분배하고 있었다. 무기를 받기 위해 여러 명이 줄을 서고 있는데 빨리 무기를 주지 않았다. 성미가 급한 나는 차 위로 올라갔다. 군용트럭 안에는 총 1백여 정과 50발들이 실탄 박스가 8박스가 있었고 수류탄 3박스가 있었다. 나는 카빈 한 정과 실탄 1백발, 클립 3개, 수류탄 2개를 가져왔다.
우리 차에 탄 사람들은 그곳에서 무장을 하고 한국은행 앞으로 갔다. 금남로 상공에는 6대의 군용 헬기가 지나갔다. 누군가 카빈은 쏘지 말고 M1 소총을 든 사람만 헬기를 향해 사격을 하라고 했다. M1 소총을 든 사람은 헬기를 향해 일제히 사격을 가했다. 그러나 군용헬기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유유히 사라졌다. 이때 지프차에 탄 일행은 모두 헤어졌다. 나는 그날 저녁 쉬기 위해 황금동에 있는 건물 옥상에 있다가 아는 사람을 만나 근처 사무실에서 잠을 잤다.
두번씩이나 죽을 고비를 넘기고
22일 아침 일찍 일어나 도청 앞으로 갔다. 아침 해가 뜰 무렵 시민들이 도청 앞 광장을 비로 쓸며 청소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계엄군이 모두 퇴각했다는 것을 알았다. 계엄군이 없다는 생각을 하니 웬지 마음이 편해졌다. 도청 안에 있는 차에 들어가 한숨을 잤다.
주위가 떠들썩해 일어나보니 동신고 건너편에 있는 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며 총을 든 사람은 모두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때가 오전 10-11시 정도 되었을 것이다. 나는 이제 본격적인 싸움을 한다고 생각하니 조금 긴장이 되었다. 군용 트럭을 타고 동신고를 지나 벽돌공장 옆에 멈췄다. 25-30명의 시민군이 야산(현재 말바우시장 자리)으로 올라가 산기슭에 섰다. 건너편 산에 큰 철탑이 있었는데 철탑 앞에서 공수의 모자가 보였다. 그쪽에 매복해 있던 공수들은 우리 쪽으로 사격을 했다. 우리를 지휘하는 사람이 카빈 소총을 가진 사람은 총을 쏘지 말고 M1을 가진 사람만 총을 쏘라고 했다. 우리는 약간 총격전을 벌였다.
계속해서 우리 편의 증원군 2진, 3진이 도착했다. 3진이 들어오면서 공수들의 저지선인 무등도서관 앞 큰 도로를 넘어버리고 말았다. 그러자 공수들은 계속 총탄을 퍼부었고 이에 놀란 시민군의 차가 급히 방향을 돌렸다. 이 와중에서 시민군 한 명이 다쳐 병원으로 옮겨졌다.
증원군 중에 친구 박인수(80년 기동타격대)가 올라오는 것을 봤다. 나는 인수를 보고 "머리 숙여"라고 외쳤다. 계속되는 총탄에 어떻게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인수는 옷을 깨끗하게 입고 있었다. 어디에서 오냐고 물었더니 송정리에서 오는 길이라고 했다. 나는 인수가 가지고 있던 총에 실탄을 가득 장전해주었다.
우리가 있던 야산에 보리밭이 있었다. 몇 명의 시민군이 그쪽으로 넘어가는데 자동소총 소리가 '우두둑 우두둑' 들렸다. 공수들이 그곳에도 숨어 있었던 것이다. 시민군들은 "개새끼들 보리밭에도 숨어 있다"며 역정을 냈다. 내 생각에 그 곳에서도 3, 4명이 다치지 않았나 생각된다.
대치된 상태에서 별진전이 없어 우리는 그곳을 철수하여 도청으로 돌아왔다. 도청에 갔다가 광주고 근처에 사람이 죽었다 하여 나와 인수는 시민군과 함께 그곳으로 갔다. 광주고 건너편의 길바닥에 청년이 머리에 총을 맞아 쓰러져 있었는데 머리 속이 모두 쏟아져 있었다. 함께 간 시민군이 그 근방을 모두 수색했으나 어떻게 해서 그가 죽었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인수와 함께 학교 주변을 살펴보기 위해 광주고 건너편의 가정집 옥상에 올라갔다. 잠깐 주위를 둘러보고 있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가깝게 들렸다.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 총알은 내가 있는 옥상의 용마루 기왓장을 깨고 스쳐갔다. 광주고 쪽에서 총알이 날아왔는데 누가 쏘는지 모를 일이었다. 학교 뒤의 야산에서 날아온 총탄이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멍하게 있는데 앰뷸런스가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길바닥에 있던 시체를 싣고 가는 것 같았다. '어휴! 하마터면 나도 저 차에 실려갈 뻔했다'고 생각하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도청으로 들어가 지원동에 사건이 발생했다는 소리를 듣고 지원동으로 나갔다.
10여 명의 시민군이 지원동으로 갔는데 버스 종점 부근의 산에서 총소리만 들릴 뿐 별다른 것은 없었다. 그 지역을 방위하는 청년들이 지원동다리 밑의 하천에서 경비를 서고 있었다. 그때 나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아 배가 몹시 고팠다. 근처에 있는 시민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어제 만든 것이라며 김밥을 주었다. 나는 인수와 함께 김밥을 받아들고 숭의실고 공작실 옥상으로 올라갔다. 그때는 건물이 완성되지 않아 뼈다귀만 앙상한 건물이었다. 건물 옥상에서 김밥을 먹고 있는데 총알이 날아와 김밥을 뚫고 지나갔다. 김밥은 총알에 맞아 잘려 떨어졌다. 나는 그 와중에도 남은 김밥을 계속먹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것이다. 옆에 있던 인수가 나에게 "너는 하루에 용꿈을 몇 번이나 꾸냐"고 했다.
특수기동대로 활동
나는 인수와 함께 어떤 경위인지는 모르지만 광주공원으로 갔다. 광주공원에는 '특수기동대'라고 씌어진 24인승 마이크로버스가 있었다. 나와 인수가 그 차에 올라타려고 하는데 지휘자로 보이는 사람이 죽기 싫으면 차에 타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목숨을 던질 각오를 하고 차에 탔다. 특수기동대차 안에는 12명 정도의 청년들이 있었고 석이라는 친구도 있었다. 특수기동대 대원 중 26일 조직된 기동 타격대로 활동했던 대원은 나, 인수, 여수, 그리고 별명이 사무라이라는 친구였다.
우리는 석이를 보자 전쟁터에서 동지를 만난것처럼 기뻤다. 석이는 자기가 버스에 고무장갑을 끼고 페인트로 특수기동대라고 썼다고 했다. 그 당시 TV에서 테러진압대의 활동을 그린 외국영화 제목이 특수기동대였는데 그 이름을 딴 것 같았다. 차안에는 TNT 두 박스와 LMG 기관총, 그리고 많은 실탄과 수류탄이 실려 있었다.
우리 특수기동대는 시내와 외곽지역의 순찰을 맡기로 하고 언제 죽을지 모른다며 호주머니에 각자의 주소와 이름을 적어 넣어두기로 했다. 특수기동대를 지휘하는 사람은 두 명이었는데, 한 명은 해병 출신이었고, 한 명은 몇 달 전에 무전병으로 제대한 사람이었다.
우리 차는 시내를 순찰하다가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 수위실 옆의 쓰레기더미에서 공수들이 버리고 간 무전기를 찾았다. 우리 대장이 무전병이었으므로 망가진 것이나마 잘 고칠 수가 있었다. 무전기 3대는 상황실에 주고 우리 차에는 2대를 실었다. 도청에 있다가 지원동에 전투가 벌어졌다고 해 우리는 그곳으로 향했다. 지원동에 도착하자 전투를 벌이다가 공수들의 총에 맞아 부상을 당한 시민군 한 명이 병원에 후송되고 있었다.
우리는 숭의실고 앞에 차를 주차해 놓고 지원동다리 건너에 있는 남국민학교와 무등중학교 일대를 수색했다. 그러나 공수들은 없고 학교 안에는 관리인만 있었다. 그는 공수들이 무등중학교 뒷산으로 올라갔다고 했다. 우리는 대원들을 모아 대책을 세우기 위해 무등중학교 정문을 나오는데 갑자기 총알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우리는 잽싸게 몸을 움직여 총알을 피했다. 어디에서 날아온 총탄인지도 몰랐다. 그쪽에서 총성을 멈추자 우리는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다시 시내로 나가 순찰을 했다. 아주머니들이 정성스럽게 만들어준 김밥을 먹고 도청으로 들어갔다. 도청에서 약간의 구급약과 간호원 한 명을 태우고 다시 시내로 나가 부상자를 후송하고 순찰을 돌았다. 우리 특수기동대는 도청 상황실과 무전기로 연락을 했다. 밤늦게서야 현대극장 부근의 여관에서 교대로 잠을 잤다.
23일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아세아자동차 공장으로 향했다. 공장에 들어가 하수구를 덮어놓은 5밀리미터 두께 정도의 철판을 들어내 차창을 막았다. 우리는 차창을 막고 아침밥을 먹기 위해 광주공원으로 갔다.
공원에는 할아버지들이 모여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할아버지들 속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얼른 몸을 숨겼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에 있는 줄만 알고 광주에 있다는 것은 생각도 못하고 계실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광주공원 부근의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올 때까지 아버지는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다른 분들과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아버지에게 인사라도 하고 싶었지만 아버지를 보면 마음이 약해질 것 같았고 또 그대로 집에 끌려갈 것이 뻔했기 때문에 마음은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날은 궐기대회장 주변의 경계근무와 상무관의 빈소에서 안내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외곽지역 순찰을 위해 광천동 공단입구로 갔다. 광천동에 원목으로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는 곳에서 20-30미터 떨어진 곳에 풀과 쓰레기더미를 덮어놓고 차안에 있던 TNT를 대여섯 군데에 설치했다. 거기에 거울까지 부착시켜 계엄군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24일은 박충훈 국무총리가 광주에 온다는 날이었다. 기자들의 요청을 받은 도청 항쟁지도부의 부탁으로 특수기동대는 전신전화국으로 파견되었다. 광주는 시외통화가 불통인 관계로 기자들이 서울로 연락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신전화국의 문이 잠겨 있었다. 특수기동대장이 총을 쏘아 문을 열었다. 2층에 들어가자 아가씨가 있었다. 그는 시외로 통하는 전화선을 중간에서 끊어버려 시외통화가 불가능하다고 했다. 우리는 시외통화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내려왔다. 박충훈은 헬기를 타고 도청 상공에서 맴돌다가 그대로 돌아가버렸다.
며칠인지는 모르겠는데 특수기동대차를 타고 순찰을 도는데 양동다리에서 승용차에 탄 사람들이 무기를 회수한다고 했다. 우리는 그들의 머리에 총을 쏴버리고 싶었다. 어떻게 되든 광주를 지키고 싸워야 할 판에 무기를 회수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폭하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찌 됐는지 특수기동대는 해체되어 버렸다. 나는 도청에 돌아와 가지고 있던 총과 실탄, 그리고 수류탄 2개를 반납했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체실에서 일해
무기를 반납하고 상무관과 도청에서 시체를 담당했다. 상무관에는 가족이 나타난 시체들이 있었다. 상무관의 안쪽에는 함평경찰서 소속 경찰관의 관이 있었고, 어느 여고생의 관 앞에서는 유족들이 통곡을 하고 있었다. 상무관 앞에는 추모를 하러 온 사람들의 행렬이 전일빌딩 앞까지 길게 섰다. 그들은 애국가를 부르고 묵념을 하고 돌아갔다.
도청 안에는 가족이 나타나지 않은 10구 이상의 시체가 있었다. 거의 몽둥이로 맞아죽은 시체가 많았고 그중에는 여자의 시체도 있었다. 조대 뒷산에서 파낸 고교생의 시체와 공수들의 대검으로 목이 잘린 시체도 있었다. 시체가 들어오면 입관을 시키고 얼굴 부위만 내놓았다. 시체의 옷 색깔을 확인하고 소지품을 관 위에 올려놓았다. 시체를 전남대병원과 조선대병원 영안실에서 운반하기도 했다. 또 광주공원 근처의 관집에서 관 두 개를 가져오기도 했는데 돈이 없어 도청 시체담당이라는 사인을 했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목이 잘려나간 시체의 관 옆에 모자간으로 보이는 아주머니와 청년이 서성대다가 우리에게 바지를 벗겨봐달라고 했다. 청년은 며칠 전 동생이 자기 바지를 입고 나갔는데 그 시체가 입은 옷과 같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자기 아들의 왼쪽 허벅지에 15센티미터 정도의 흉터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바지를 벗겨 보니 아닌 게 아니라 왼쪽 허벅지에 그 정도 길이의 흉터가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아주머니와 청년은 피투성이가 된 시체를 부여잡고 오열을 했다. 그 시체는 가족이 확인되어 상무관에 안치되었다.
시체실에서 일하다가 친구의 여동생을 만나 그로 인해 내가 광주에 있다는 것이 누나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누나가 도청으로 나를 찾으러 왔다. 나는 아버지에게 절대 비밀로 해달라고 한 후 곧 집에 들어간다며 누나를 돌려보냈다.
24일 밤 시체실에서 일하면서 피곤하여 수습대책위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친구와 도청 부지사실에서 잠을 잤다. 얼마나 잤을까. 누군가 옆에서 내 옆구리를 찔렀다. 나는 얼떨결에 일어났다. 청년 2명이 나와 내 친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머리 위로 손을 올리라고 했다. 자세히 보니 친구는 벌써 일어나 머리를 손에 얹고 서 있었다. 우리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른 채 조사실로 끌려갔다. 알아본즉 25일 아침에 독침사건이 발생해서 우리를 잡으러왔다고 했다. 그러나 다행히 조사실에 친구를 아는 사람이 있어 그냥 나올 수 있었다.
기동타격대 6조로 활동하고
26일 계엄군이 진입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도청 안은 더욱 긴장되기 시작했다. 나는 도청에서 친구 갑철이의 집으로 갔다. 친구집에서 라면을 먹고 몸을 대강 씻은 후 옷을 갈아입고 그 집을 나왔다. 친구는 담배 한갑을 사주면서 못내 아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도청 안으로 들어가자 민원실 지하 무기고에서 무기를 분배하고 있었다. 나는 카빈 소총 한 정과 15발들이 실탄 클립 2개를 지급받았다. 수류탄이라고 준 것이 최루탄이어서 바꿔달라고 했으나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총을 지급받고 있는데 지프차에 타고 있던 인수가 나를 불렀다. 그는 그날 오후에 편성된 기동타격대 6조 조장이라고 했다. 나는 인수가 타고 있던 지프차에 올라탔다. 그 차에는 특수기동대로 활동했던 김여수, 또 사무라이라 불린 친구와 특수기동대는 아니었지만 도청 안에서 일했던 나일성 등 아는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특수기동대로 활동한 대원들은 무장해제당한 후 각자 활동하다가 다시 기동타격대로 편성된 것이다. 그때 기동타격대 부대장 이재호 씨가 도청안의 광장에서 기동타격대원을 집결시켜 놓고 일장연설을 하고 있었다.
기동타격대에 편성되어 활동한 것은 별로 없다. 주로 시외곽지역의 순찰을 돌았다. 광천동을 지나 아세아자동차를 돌아서 무등중학교 앞으로 갔다. 무등중 앞을 지날 때는 집이 그 근처에 있었기 때문에 아버지에게 마지막 인사라도 하고 싶었으나 그대로 도청으로 들어왔다. 그때는 이미 계엄군들이 전남여고 앞까지 진격해 들어와 있었다.
우리는 광주경찰서를 바라보고 상무관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상무관 앞에는 계엄군이 없었다. 도청 뒤쪽에서는 계엄군들의 M16 자동소총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우리는 전투를 하기 위해 상무관 앞에 차를 세워둔 채 충장로 1가와 도청을 잇는 신호등 있는 곳으로 갔다.
사무라이가 제일 앞에 가고 그 뒤에 여수, 세번째로 인수가 갔다. 인수가 신호등 중간쯤 건너는데 도심 슈퍼 건물 옆에서 총구의 불빛이 보였다. 총소리가 남과 동시에 인수가 길바닥에 쓰러졌다. 인수 뒤를 바짝 따라가던 나는 계엄군의 총임을 알고 총소리가 나는 쪽을 향해 최루탄 한 방과 총 몇 방을 쐈다. 앞에 가던 여수와 사무라이가 인수를 들추어업고 도청 후문 쪽으로 가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일성이와 함께 도청 담을 뛰어넘어 도청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는 사이 일성이와는 헤어지게 되었다. 나는 수위실 옆의 차량 밑에 몸을 숨겼다. 내 옆에는 교련복을 입은 고등학생도 있었다. 계속되는 계엄군의 총소리에 질려 우리는 자수를 했다.
이제는 직업적인 활동가가 되어
나는 상무대로 끌려가 조사를 받으면서 25일부터 항쟁에 참여했다고 했다. 그러자 수사관이 엄청나게 두들겨팼다. 나는 고문에 못 이겨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의 활동내용에 대해 모두 적어줬다. 그 수사관은 나에게 징그러운 놈이라며 그 조서를 찢어버렸다. 나는 조사받는 과정에서 총을 3방 쐈다고 했다. 그것 때문에 1심에서 살인미수죄가 적용되려 했으나 재판과정에서 바보 흉내를 내 교묘하게 빠져나왔다. 1심에서 5년, 7년을 받고 상고심에서 2년, 3년을 받고 형집행정지로 그해 10월 31일 석방되었다.
석방 후 취직도 되지 않는 데다가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5·18에 대해 얘기하면 잡아간다고 하고 유언비어라 하면서 폭도라는 누명을 씌었다. 나는 내가 정당하게 했던 일이 그렇게 평가받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불의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는 신념과 5·18에 대한 의무감이 생겼다. 두 번씩이나 자살을 기도하고 또 아파 누워 있었다. 그러면서 나는 사회의식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내가 결정적으로 운동에 눈을 뜨게 된 것은 1985년 홍기일 열사의 죽음이었다. 홍기일 열사의 죽음은 안일하게 살던 나에게 엄청난 채찍질이었다. 그때부터 운동단체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때는 탄압기여서 학생들이 얘기를 할 때도 약어, 은어 등을 사용하여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운동을 하려면 이런 것도 배워야 한다는 생각 아래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학력이라곤 국민학교 4학년 중퇴이지만 피터지게 공부를 했다. 사회과학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이 잡힌 후부터는 직접 글을 쓰는 등 나름대로 이론적인 체계를 잡기 위해 다각도로 열심히 하고 있다.
아무 정치의식도 없던 내가 지금에 와서 5·18을 바라볼 때 5·18의 주체가 노동자들이었고 내가 노동자였다는데 자부심을 느낀다. 택시기사들의 조직적인 차량시위나 통계적인 자료만 보더라도 노동자들이 가장 선봉에서서 헌신적으로 싸웠다고 볼 수 있다. 기동타격대 역시 마찬가지 시각에서 볼 수 있다. 광주민중항쟁 기간에 무장력, 기동력, 조직력이 뛰어난 기동타격대원 중 대부분이 노동자들이었다. 이렇듯 노동자는 5·18에 있어서 투쟁의 선봉대였다.
지금 80년 기동타격대원들이 다시 모여 그 모임을 정식화하기 위해 단체를 띄우려고 한다. 80년에 싸웠던 사람들이 죽지 않고 뭉쳐 있고 그 사람들이 우리 곁에 남아 작은 힘이나마 민주화투쟁에 협력을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의미에서다. 이론적인 체계면에서나, 싸울 수 있는 실천력 부분에서 미흡하지만 친목형식을 빌린 소규모 민주화투쟁에 일조한다는 것이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 감사합니다.
사랑과 행복이 함께하는 활기찬 주말 보네시고
의미 가득한 휴일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