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차씨 종친회 중앙본부 문헌 위원회 글
「 영남대 이수건 교수는 조선시대 신분사 관련 자료들을 비판하면서 차원부의 《설원기》에 대해 언급하였다. “《설원기》는 남극관과 황윤석의 기록을 근거로 남극관, 황윤석 등에 의해 저자들로 추정되는 차식(車軾) ,차천로(車天輅), 차운로(車雲輅) 3부자의 활동시기가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기까지라는 점에서 볼 때 이 책은 16세기 후반 차씨 3부자에 의해 위작되었다고 짐작된다“고 하였다. .
차문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조선후기부터 《설원기》위작설을 제기한 사람들은 단지 남극관의 몽예집의 내용에 의하여 <설원기>의 위작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구체적 위작자로 지명한 차식 3부자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이를 검증하고자 한다.
박은정의 논문 “<《차원부설원기》이본의 유통과 그 배경>에 의하면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잡저 편에서 <설원기> 내용이 확인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설원기>는 적어도 1586년 이전에 필사본 형태로 유통되고 있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작자로 지목되는 차식 3부자는 과연 그때 무엇을 하였는가를 조사해 보자. 우선 차식(1517~1579)은 화담 서경덕 선생에게 글을 배워 1537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고, 1543년 문과 갑과에 급제하여 내섬시직장에 임명되었다. 그 후 성균관, 호조, 봉상시, 교서관 승문원등 여러 부서의 좌랑, 주부, 교리, 교감의 벼슬에 오르고 외직으로는 통진, 황주. 해주. 평해 .고성 등 여러 고을의 현감. 군수의 벼슬을 하셨다. 그의 저서로는 차식의 <봉래록>이 있다. 특히 고성에 계실 때에는 해산정이란 정자를 짓고 전우치, 양사언 등 당대의 유명 인사들과 교류하였으나 <설원기>에 대한 글은 전혀 찾을 길 없다.
또한 차천로(1556~1615)는 1577년 알성문과 병과로 합격하여 개성 교수를 지내다 1583년 문과 중시에 을과로 급제하여 정자로서 근무하던 중 1586년경 고향 친구 여계선의 과거를 볼 때 표문을 지어주어 장원 급제 시킨 일로 함경도 명천에 유배를 간 적이 있었는데, 문조가 있어 1588년 귀향에서 풀려난다. 그 후 1589년 황윤길, 김성일(1538~1593)이 일본에 갈 때 문사로서 1590년까지 일본의 사신 행열로 갔다 왔다. 그 후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남으로 선조를 원종하였고, 명나라의 원군을 불러오는데 모든 문서는 오산 차천로가 담당하여 임진란을 겪는데 많은 공헌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가 과연 어느 기간에 설원기와 같은 불멸의 서적을 위작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과거를 급제하기 전에는 과거 시험을 급제하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였을 것이고 과거 급제 후에는 자신의 공적을 쌓기 위하여 진력을 다하였을 것이다. 전혀 <설원기>를 구상하여 쓸 수 있는 기간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오산의 아우인 창주공 운로(1559~1637)는 1579년에야 생원시에 급제하였고, 1583년 알성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다.
1586년에 이미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에 보급되어 있었다면 오산 차천로와 창주공 운로가 과거 급제(1583)후 불과 3년 만에 완성하였다는 결론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모함이다.
오산 차천로는 <오산집>, <오산설림초고>등의 저서가 있는데 <차원부 설원기>의 내용에 대한 기술은 전혀 보이지 않으며 그와 교류가 잦았던 한석봉(1543~1605), 김성일(1538~1593), 이수광(1562~1628), 윤두수(1533~1601) 등 여러 인사들과 시를 주고 받았는데도 그가 <차원부 설원기>에 대한 언급은 없다.
창주공 운로도 마찬가지다. 그의 창주집 저서에도 <차원부설원기>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반박
1. 차원부 설원기는 1456년 왕명에 의하여 쓰여졌다고 하는데 고(故) 이수건 교수님은 차원부 설원기가 위작이라고 근대의 학자로서는 최초로 주장하신 분으로 그 위작자로 차식,차천로,차운로 3부자로 보고 있는 듯 하다.
2. 그런데 수많은 시, 글등을 남긴 당대의 대문장가 차천로(1556-1615), 차운로(1559-1637)의 여러 시, 글에는 본인의 선조 차원부에 대한 언급 없다는 점은 필자로서도 이를 이상하게 생각해 왔다. 다만 차운로의 시문에 “선조 간의공 慘憺松原路辭歸漢國初故山 入目寃血己霑 亂略人誰問精忠史 不書徒將七代淚來灑此丘墟 ” 이라는 시가 있는데 이 시가 진짜로 차운로가 지은 것인지 아니면 차운로 후손이 후대에 시문을 모아 시집을 만들면서 첨삭했는지 모르겠지만 차운로만 본인의 선조인 차원부에 대한 시문을 단 한편을 남기였다.
3. 만약 차원부 설원기가 1580년경 필사본 형태로 읽혀 졌다면 차천로(1556-1615), 차운로(1559-1637)등도 주변 사람등(박은정 교수님 논문에 의하면 1580년대 후반경에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이 영남지역으로 중심으로 광범위하게 유포되었다고 한다)을 통해 차원부 설원기 필사본을 구해서 읽었을 것이고 본인의 선조인 차원부에 대한 소회등을 여러 글을 남겨야 하는 것이 후손의 도리인데 차식등 3부자 문과에 급제하였고 차원부가 왕명에 의하여 신원되고 문절공 시호를 받은 사실등 차원부 설원기를 통해 확연히 드러났다면 연안차씨 문중의 경사인데 본인의 선조를 찬양하고 연안차씨 가문에 통문을 보내 비석도 하나 세울 법 한데 차천로(1556-1615), 차운로(1559-1637)는 왜 애써 본인의 선조인 차원부에 대하여 무관심하였을까?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이다.
4. 그러면 차천로(1556-1615), 차운로(1559-1637)는 1580년경 필사본 형태로 유통된 차원부 설원기를 읽지 않고 주변 사람들로부터도 그 소식도 듣지 못했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차운로(1559-1637)의 부탁으로 류몽인(1556-1615)이 쓴 차식(1517-1575)의 묘지명를 보면 꼭 그렇지가 않다. 일반적으로 묘지명은 후손이 묘비에 쓸 대강의 글을 정리하여 부탁을 하면 이를 참고하여 쓰는 것이 관례인데 차식(1517-1575)의 묘지명에는 차원부 설원기의 핵심 내용이 그대로 기록되어져 있다. 그렇다라면 최소한 차운로(1559-1637)는 차원부설원기를 읽었거나 아니면 류몽인(1559-1623)도 차원부설원기를 보았다는 말인데 왜 차운로의 문집, 차천로(1556-1615)와 친했던 류몽인(1559-1623)의 문집에는 차원부에 대한 글이 전혀 없는 것일까? 이 또한 상식으로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으로 혹씨 차식의 묘지명을 류몽인이 안쓴 것 아닐까? 의심도 가는데 류몽인의 문집인 어우집에 차식의 묘지명이 있는데.... 도대체 상식적으로 여러 가지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차운로의 부탁으로 류몽인이 지은 차식의 묘지명에도 분명하게 차원부 설원기 및 차원부에 대한 기술이 명확히 되었음에도 왜 차운로는 본인의 아버지인 차식의 묘갈만 부탁하고 어찌보면 아버지 차식보다 더 위대한 직계선조인 차원부에 대한 묘갈명을 부탁하지는 않은 걸까?
5. 차원부설원기가 적어도 1580년경부터 필사본 형태로 알려졌고 구봉령(1526-1586)의 백담선생문집, 권문해(1534-1591)의 대동운부군옥, 선조실록 1601년 경상도 생원 문경호(?-1620)등이 올린 상소등에 차원부, 차원부설원기등이 언급되고 있는 정황을 보면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차원부 설원기가 회자되었을 것이고 또한 이런 사실을 동시대의 사람인 차천로(1556-1615), 차운로(1559-1623)도 알았을 것인데 차천로,차운로등은 본인의 선조인 차원부에 대한 기록을 하나도 남기지 않았을까? 이에 걸 맞은 옛속담이 있지만 필자는 이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고자 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차원부 설원기의 위작자가 누구인가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차원부 설원기가 역사적 팩트와 사실관계를 담아내고 있는 문헌인지? 아니면 위서인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