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5:39]
들어가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어찌하여 훤화하며 우느냐. - 예수께서는 절망적인 초상집 분위기를 극적으로 전환시키고 있다. 즉 장례 풍습에 따라 통곡하며 소란스럽게 떠드는 행위를 급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 말씀을 달리 표현하면 "어찌하여 이처럼 야단들이냐 이제 그만 치우라"는 뜻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아이가 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혹자는 이를 축어적으로 해석하여 아이가 정말 죽지 않고 단지 기절한 상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누가의 기록 중 "그 영이 돌아와"라는 표현에서 보듯이 그 아이는 분명 영과 육(肉)이 분리된 죽은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죽은사람을 잠자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은 헬레니즘과 유대 문화권에서 나타나는 완곡 어법이다. 특별히 생명과 부활의 주이신 예수께서 인간의 죽음을 바라보실 때 그것은 영원한 허무나 절망이 아니라 잠시 잠간의 잠에 불과한 상태였음이 분명하다. 특별히 이 말씀은 그 소녀의 소생을 전제한 말씀이라는 점에서 볼 때 비록 죽음의 실재성은 명확한 사실이나
그것은 단지 한시적인 수면 상태와 같은 것에 불과했던 것이다). 진정 죽음과 삶의 지배권을 가지신 이 예수의 말씀은 모든 죽은 자와 죽어가는 우리 인생들에게 부활의 아름다운 희망을 갖게 하는 복음이 아닐 수 없다.....[막 5:40]"저희가 비웃더라 예수께서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아이의 부모와 또 자기와 함께 한 자들을 데리시고 아이 있는 곳에 들어가사.." 저희가 비웃더라. - 예수께서 선언한 희망의 믿음이 다시 한 번 절망의 벽에 부딪힌다.
인간의 죽음을 영구한 종말로 보았던 주변의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무지한 자신들의 실상은 파악하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의 무지를 비웃었던 것이다. 여기서 "비웃더라"는 단어는 미완료 시제로서 그들의 조롱섞인 비웃음이 계속되었음을 보여 준다. 어쨌든 이 비웃음은 결과적으로 그 소녀의 죽음이 현상적으로 명확한 사실이었다는 점과 또 이후에 그 소녀를 살리신 예수의 능력은 참으로 신비하고 초월한 이적이었음을 반증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저희를 다 내어 보내신 후에. - 여기 "내어 보내셨다"(에크발론)는 말은 강압적으로 몰아내셨다는 뜻으로 위엄에 찬 예수의 권위를 엿보게 한다. 실로 예수는 당신의 능력과 존재를 부인하고 의심하는 자들은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는 특권에서 제외시키고자 비난과 조소로 일관하는 무리들을 매몰차게 쫓아내셨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의 이적의 세 증인(제자들)과 그 아이의 부모만을 동참케 하셨다. 이 장면은 한 방문객에 불과한 예수가 그 집의 참 주인으로 행사하시는 기이한 모습을 보여 준다.
예수가 주인으로 있는 가정은 곧 생명의 기적을 맛볼 수 있는 특권이 주어질 것이다....[막 5:41]"그 아이의 손을 잡고 가라사대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소녀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심이라..." 아이의 손을 잡고. - 예수의 치유 행위는 다양하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아이의 손을 잡는다. 이는 죽음을 향해 뻗는 생명의 손길로서 처음 야이로가 바닷가에 찾아와 예수께 간청할 때 아이에게 손을 얹어 달라고 한 사실을 기억나게 하는 장면이다.
어린아이의 손을 잡는 예수의 모습은 참으로 진지하고 애정어린 인자한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절망에 처한 사람을 주님이 손잡아 주리라는 표현은 여러 군대 나타난다. 진정 주님은 절망 속에 헤메이는 영혼들의 손을 부드럽게 잡으시고 참생명에로 인도하시는 친절한 안내자요 신실한 보호자가 되신다.. 달리다굼 - 이 말은 예수 당시 팔레스틴에서 통용되던 아람어 탈리타 쿰에서 유래한 말로서 "탈리다"와 "쿰"의 합성어이다. 이를 번역하면 "소녀야 일어나라"는 말이다.
그런데 본문에서 해석할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라는 말을 첨가시키고 있다. 이것은 "달리다굼"이라는 말이 어머니가 아침에 아이를 깨울 때 사용하는 평범한 일상어라고 보았을 때, 그 말의 신적 권위를 높이기 위해 마가가 추가시켜 해석한 첨가어로 보인다. "달리다굼"이라는 말은 여기서만 나오고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이 말이 없다. 여기서도 사실성과 생동감을 특히 강조하는 마가의 문장 기법이 돋보인다.
마가는 주님께서 친히 사용하신 아람어의 이 단문을 마치 현장을 재현하듯 분명히 기록하여 독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키고 있는 것이다. 마가는 이 아람어와 함께 번역문을 병기함으로써 아람어에 생소한 이방 독자들을 향해 성실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소녀야........일어나라(토 코라시온.....에게이레).- 여기서 "일어나라"는 뜻의 "에게이레"는 2인칭 단수 현재 명령형으로서 단호하고도 권위에 찬 예수의 명령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사실 이 말은 앞에도 언급했듯이 해가 뜨는 아침에 부모가 아이를 사랑스러운 어조로 깨울 때 흔히 쓰던 말이었다는 점에서 본 장면은 새 아침의 환희와 정겨움을 더해 준다. 실로 생명과 부활의 새 지평을 여신 예수께서는 친히 그 아침을 마련하셨을 뿐 아니라 모든 죽어 있는 영혼들에게 그 아침을 맞이하도록 "달리다굼"으로 친히 깨우고 계신 것이다...[막 5:42]"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나이 열 두살이라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소녀가 곧 일어나서 걸으니. - 여기서는 치유의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난다. 즉 예수의 말씀대로 일어났을 뿐만 아니라 걸었다고 묘사한다. 더욱이 마가는 "일어난" 동작을 단순 과거 시제로 처리하고 곧이어 "걸어다닌" 동작을 미완료 시제로 묘사하여, 즉각적으 로깨어나 계속 방안을 이리저리 걸어다닌 사실을 생생히 기록하고 있다. 특히 그녀의 나이가 12세였다는 사실은 그녀의 동작이 얼마나 가볍고 발랄했을까 하는 상상을 불러일으키게 한다.
그녀는 생명은 물론 원기까지 회복하였던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걸었다는 이야기가 없다. 그 이유는 소녀가 다시 살아난 사실에 모든 관심을 집중시켜 기술하고자 했던 기록적 특징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소녀의 나이가 12살이라는 사실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이야기의 첫 부문에서 밝혔지만 마가는 이야기의 마지막에서 밝히고 있다. 실로 이 12살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있어서 이제 막 꽃이 피려는 시기(유대법상으로는 만 12년 6새월 이후에는 겨혼 가능 연령이 됨)이다.
특이한 점은 소녀의 나이와 이야기의 중간에 일어났던 혈루증에 걸린 여인의 투병 기간이 같은 12년으로 일치하고 있는 점이다. 성경에서 이 "12"라는 숫자가 완전수인 동시에 하나님의 경륜과 계획의 성취를 나타내는 수라는 사실과 연결하여 생각해 봄직하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 - 소녀의 소생과 원기 회복은 주위 사람들에게 정신을 잃게 할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갔다. 여기서 놀라는 사람들은 40절에서 언급한 사실로 미루어 소녀의 부모와 요한, 베드로, 야고보이었을 것이다.
그 중 누가의 기록에 의하면 그 부모가 가장 큰 충격을 맏은 것으로 나타난다. 특히 마가는 그들이 놀란 것을 "크게"라는 말과 "놀라거늘"이라는 반복법을 통하여 그들이 마치 황홀지경에라도 빠진 듯이 완전히 넋이 나간 상태에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기적은 군중 속에서 공개적으로 일어난 혈루증 치유 기적과는 전혀 달리 실내에서 그리고 몇 명 안되는 목격자만 있는 은밀한 곳에서 조용하게 일어난 점이 특징적이다.
[막 5:43]"예수께서 이 일을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고 저희를 많이 경계하시고 이에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라..."
아무도 알지 못하게 하라. - 여기서 예수는 또 다시 기적적인 사건에 대해 목격자들에게 비밀로 할 것을 명령한다. 이것은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고 그 사실을 알리라고 한 점과 혈루증 환자의 치유를 공개적으로 선언한 사실과는 대조적이다. 예수의 이 같은 행위는 메시야의 자기 공개 시기가 이를 때까지 언제나
놀라운 이적과 가사에 관한 소문이 대중들에 의해 문제화 되지 않게 되기를 바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아이가 살아난 것을 비밀로 하기에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마가는 메시야 은닉의 주제를 인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에 대해 혹자는, 예수께서 그러한 말씀을 한 것은 그 일을 절대적으로 비밀에 붙이라는 의미로 한 것이 아니라 단지 가능한 한 그 일이 널리 알려지지 않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즉 알 필요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그 기적에 대해 알게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실로 메시야로서 예수의 신성은 그것을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는 공개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감춰진다. 어쨌든 마태는 그 소문이 온 땅에 퍼진 사실을 보고하고 있다). 소녀에게 먹을 것을 주라. - 이 명령은 소녀가 완벽하게 다시 살아났음을 확인하게 한다. 즉 모든 몸의 기능이 정상적인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느 즉각적이면서도 완전한 인간 회복이요, 부분적 구원이 아니라 전체적인 구원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예수의 치유 기적을 소개한 본장에서 치유 받은 모든 사람들의 완전한 회복이 강조되었다. 귀신들린 자는 가족과 사회 공동체로 복귀함으로써 구원을 받았고 혈루증 환자 역시 근본적 치료로써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 문제가 모두 해결되었다. 아야로의 딸도 죽은 것이 아니라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심으로써 소녀에게 전혀 이상이 없음을 알리면서
정상적으로 잠에서 막 깨어난 아이처럼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 것이다. 한편 예수의 이 같은 명령은 전인적인 생명을 다시 제공하신 크나큰 사랑과 더불어 그 아이가 몹시 아파있을 동안 매우 굶주려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시고 그 아이에게 자상하게 먹을것까지 제공하게 하시는 당신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사랑을 보여 준다. 진정 예수는 영혼의 문제뿐 아니라 육신의 문제까지도 해결하시는 궁극적인 해결자이셨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