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31 정대택회장 고향땅 청하 석한마을 자전거 기행
자유인 인생 나그네 조동화는 자전거로 송학사거리를 출발, 만경강 자전거길을 따라 새챙이다리를 거쳐 김제 청하 월현리 석한마을까지 20km를 하이킹하다.
석한마을까지 자전거하이킹한 것은 윤석열검찰총장 장모 최은순과 처 김건희일당과 18년간 법정투쟁을 하고 있는 친구 정대택회장에 용기를 주고자 정대택회장의 증조부묘역을 참배하기 위함이었다.
정대택회장은 정여립의 후예로 동래정씨이다.
자유인 인생나그네 오늘의 자전거 하이킹은 월현리 석한마을에 도착후 나의 친구 정대택 고향 석한마을을 둘러보고 뒷산의 정대택증조부 묘역을 탐사하였으며, 정대택 증조부님 묘역에는 상석과 비문이 있어 자세히 살펴보니 증손명단에 정대택이 나와 있었다.
석한마을은 고려시대 정석홍씨가 처음 터를 닦았고, 동래정씨의 집성촌이며 마을이름을 돌챙이라고도 부른다.
바닥을 파보면 전지역이 돌바닥으로 구성되여 마을지명이 유래되였다.
석한마을은 동래정씨 집성촌으로 부촌으로 보였으며, 마을 입구에는 동래정씨 세효각이 있고 바로 옆에는 석한마을회관 건립되여 있으며 코로나로 페쇄되여 있었다.
흘러가는 시간이 아쉬운 나그네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은 심정으로 변화무쌍하게 흐르는 세월의 여정속에 정대택 증조부묘역을 탐사후 귀로길에 오르다.
두눈이 있어 정대택증조부 묘역을 참배할수 있어 감사하고,
두발이 쓸만해 자전거하이킹을 할수 있어 감사하고, 집에 까지 무사히 귀로 할수 있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오늘하루가 흘러가다.
감사한 마음으로 세월을 낚으니 행복하였다.
그누가 속세를 가리켜 잠깐의 꿈속세상이라 했던가?
인생은 한조각 뜬구름 같은것이며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자.
☛정대택회장 고향마을 세 번째 방문 : 정대택회장은 나보다 한 살 위로서, 정대택회장의 천인공로할 억울한 사연을 듣고 다소나마 위로가 하고, 윤석열 장모 최은순과 법정사움에서 성공을 격려코자 정대택회장의 고향마을 김제 청하 석한마을을 세 번째 방문하며, 정대택 증조부묘역을 참배하였다.
당무의 말→정대택회장님 지치지 마시라.
☛hiking시간 및 거리 : 13:00-18:00(5시간) 20.0km
왕복 40km
☛hiking코스 : 익산서부역송학사거리-목천포-만경강변-옴석감서정낚시터-새챙이다리-청하면사무소-대청마을회관-월현리-석한부락-귀로
☛자유인 조동화 오늘의 행복이야기
인생의 삶의 행복이 무엇인가?
자유인의 신조는 “평범한 일상속에서 행복을 느끼자”입니다.
오늘 해야 할일이 있다면 바로 시행하고, 평범한 일상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행복의 자원임을 꼭 기억하며 사리라.
과거는 지나갔고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삶이 도대체 무엇인가, 사실 인생의 삶이란 생노병사의 주기를 반복하는 허무한 존재라고,,,,,,,,,,,,,,표현하면 틀린말은 아닐걸,,,,,,,,,한세상 착하게 살려고 노력하자.
쉼없이 흘러가는 세월속에 지나온날들이 아쉬움만 가득하지만 흘러보낸 세월은 다시오지 않기에 지나간 시간들은 아름다운 추억으로 간직하고, 무상한 삶의 여정을 자연에 순응하며, 오직 한번의 인생 소중한 시간을 즐겁게 살기 위하여 나날이 최선을 다하자.
걷는것과 맛있는 음식과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는것들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라는 것을 기억하며 살자.
오늘하루의 소중함, 헛되이 지나간 시간들, 오늘을 아끼고 사랑하자. 어제에 집착하지 말고, 내일을 걱정하지 말며, 오늘의 삶이 가장 소중하다는 진리를 믿으며 살자.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인생일까?
최선을 다해 사는 것 이라고 말하겠다. 무수히 많은 인생의 정답중에 최선을 다하는 것보다 더 좋고 명쾌한 정답은 없다.
최선을 다하며 살자.
☞정여립의 모반 사건 (1589)
정여립(1546∼1589)은 본관(本貫)은 동래(東來), 자(字)는 인백. 전주(全州) 출생이다.
1570년(선조 3년) 식년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 이이·성혼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1583년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수찬(修撰)으로 退官하였다. 본래 庶人이었으나 집권한 동인에 아부,죽은 스승 이이를 배반하고 박순·성혼 등을 비판하여 왕이 이를 불쾌히 여기자 다시 벼슬을 버리고 落鄕하였다.
고향에서 점차 이름이 알려지자 政權을 넘보기 위하여 진안 죽도에 서실을 지어놓고 대동계를 조직하여 신분에 제한 없이 불평객들을 모아 무술을 단련시켰다. 1587년 全州府尹 남언경의 요청으로, 침입한 왜구를 격퇴한 뒤 대동계의 조직을 전국에 확대, 황해도 안악의 변숭복, 해주의 지함두,운봉의 승려 의연 등의 기인모사를 거느리고 정감록의 참설을 이용하는 한편 망이흥정설 을 퍼뜨려 민심을 선동하였다.
1589년 거사를 모의, 반군을 서울에 투입하고 일거에 병권을 잡을 것을 계획하였으나 이때 안악郡守 이축이 이 사실을 고변하여 관련자들이 차례로 잡히자 아들 옥남과 함께 죽도로 도망하였다가 관군에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이 사건으로 동인에 대한 박해가 시작, 기축옥사(己丑獄死)가 일어났으며,
이 때부터 전라도(全羅道)를 反逆鄕이라 하여 湖南人들의 登庸이 제한되었다.
☞기축옥사(己丑獄事)
조선 선조 22년(1589)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 권력의 핵심에서 쫓겨난 정여립이 전주, 진안 등지에서 대동계(大同契)를 조직하여 매월 활쏘기를 익혔는데, 이것이 역모로 고발되어, 기축옥사가 3년간 지속되는 동안 전라도 선비 1천여명이 체포‧처형된 사건으로, 이로써 동인(東人)이 몰락하고 서인(西人)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으며 호남(湖南) 출신의 관직 등용에 제한을 가한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