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하나 넘는 그 거리가 얼마인가, 얼마를 걸어야 그 다음 산이고 또 얼마를 가야 그 뒤의 산인가.
앞산도 마을이 까마득할 만큼 높은데 뒷산은 더 높다. 산은 점점 높아져 하늘과 경계가 모호해졌다. 보이지 않는 그 너머에는 산이 하늘까지 이어졌을 듯하다.
산과 산이 시간과 공간으로 이어져 영겁(永劫)을 이루었다. 그 사이로 봉우리와 봉우리가 조용한 피아노 야상곡(夜想曲) 선율처럼 부드러운 선으로 이어졌다.
이른 아침에 남아 있는 안개 입자들은 여명을 받아 연보라빛 세상이 만들어진다. 깊은 계곡, 험준한 준령들은 안개속에 숨고 봉우리들만 신비한 섬처럼 아련히 보인다. 우리네도 세상 어려움 감추고 야상곡을 연주하듯 그렇게 살면 연보라빛 인생이 되는 것인가.
우리나라는 산이 너무나 많아 웬만해서는 사람들의 눈길을 받기 어렵다. 시골에 가면 앞뒤가 다 산이다. 하지만 외국에서는 보기 힘든 자연풍광이다. 외국에 나가면 몇 시간을 차로 달려도 지평선이 펼쳐진 확 트인 평야에 한국사람들이 놀란다면, 겹겹으로 둘러서 있는 한국의 산을 외국사람들은 경이로워한다. 물론 크고 화려한 것에 익숙해진 사람들이라 섬세한 우리 산의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지만….
전북 순창 해발 837m의 회문산(回文山)에서 본 연봉(連峯) 광경은 특히 아름답다.
전라도 산은 강원도처럼 높거나 험하지 않고 충청도처럼 나지막하지도 않다. 평범한 듯하지만 하나하나가 다부지고 꽉 찬 느낌을 준다. 그래서 수려하고 뛰어난 경관을 주는 산은 많지 않지만 그 산들이 줄을 이어 만든 연봉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 장관을 연출한다. 산과 산 사이도 적당하고 봉우리들이 완만해 연결선이 부드럽다.
회문산의 주봉인 회문봉을 중심으로 서쪽으로는 원통산과 용골산, 북쪽 산내면으로 왕자산, 동쪽으로는 국사봉과 내장산이 자리하고 있고, 남쪽으로는 여분산, 세자봉, 풍악산 등이 둘러서 산의 파노라마를 이룬다. 회문산에서 본 연봉이 아름다운 것은 그만큼 위치가 좋다는 반증. 회문산은 노령산맥의 중심지로서 풍수지리로도 좋은 곳이다.
예부터 우리나라 10대 명당 중의 하나로 꼽혔다. 순창사람들에게는 회문산이 영산(靈山)으로 인식돼 있다. 세계 운세를 좌우한다는 대혈(大穴)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풍수객들이 많이 드나들고 있다. 어쨌든 순창지역 사람들뿐 아니라 외지인들까지 너도나도 명당 회문산에 묘를 써와 등산로에조차 묘지들이 줄을 잇고 있다. 지금도 봉분을 하지 않고 몰래 시체를 묻고 가는 경우도 수없이 많단다.
산 자체는 그리 수려한 것은 아니다. 계곡도 너무나 평범하고 물도 많지 않다. 숨기에 좋은 깊은 골짜기여서 6.25 당시 전북지역 빨치산의 본거지가 되었고 영화 '남부군'의 촬영장소로 유명해졌다. 지금도 빨치산 사령부를 복원해 두고 있고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위령탑과 비목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놀거리도 충분하다. 지금 회문산은 연두빛 잎(회문산은 침엽수가 거의 없고 대부분 활엽수다)으로 덮여 있다. 가녀린 잎 사이로 비치는 햇빛을 받으며 두릅 취나물 등 산나물을 캐는 재미가 톡톡하다. 회문산 일대 국유림 289㏊에 캠프장, 자연관찰원 등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산림욕을 즐길 수 있다. 또 통나무집으로 된 숙박시설(063-533-8692)도 있어 명당의 기운을 받아 볼 수도 있다.
/순창=황종숙기자 jshwang@segye.com
<여행정보>
■찾아가는 길
수도권에서 갈 때 호남고속도로 전주IC에서 빠져 나와 27번 국도를 타고 임실을 거쳐 간다. 잘 알려지지 않은 길로는 신태인을 통해 정읍 옥정호를 끼고 가는 길이 있다. 호남고속도로로 가다 태인IC로 빠져 나와 30번 도로를 타면 빠르고 드라이브 기분도 느낄 수 있다. 호남고속도로를 탈 때 경부고속도로 대전 회덕분기점을 이용하지 않고 최근에 개통된 천안∼논산간 고속도로를 이용하면 30분 정도 절약할 수 있다. 버스편은 강남터미널에서 하루 12회 운행한다. 4시간 소요. | |
■별미
순창순대를 빼놓을 수 없다. 서울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옛날식 그대로 만든 순대다. 진짜 돼지 창자 속에 돼지피와 양배추 부추 등 12가지의 야채를 넣어 만들었다. '순창2대째토종순대'(063-653-0456).
섬진강과 섬진강 줄기 개천에서 잡아올려 만든 민물매운탕도 별미. 강천호수 앞에 있는 산호가든(063-652-4036)의 민물새우탕이 시원하다.
■특산품
순창 전통고추장은 순창에서 생산된 고추와 콩, 찹쌀만을 사용해서 전통재래식 방법으로 만든다. 방부제가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일단 장독대에서 옮기면 부풀어 오르는 현상이 있다. 서늘한 곳에 보관했다가 뚜껑을 연 뒤에는 냉장고에 넣고 먹어야 한다. 재래식으로 만드는 고추장집들이 모여 있는 민속마을이 형성돼 있다. 장독대가 늘어선 전통가옥은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한다. 민들레 고추장(063-652-0817).
<사진>회문산 중봉에 완만한 산봉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부드럽게 펼쳐진다. 산 하나하나가 특별히 수려한건 아니지만 완만한 봉우리의 산들이 줄을 이은 광경은 장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