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아무개 목사님(이현주)이 쓰신 [지금도 쓸쓸하냐]를 읽고있다보면
닉 도널드 월쉬의 [신과 나눈 이야기] 생각이 납니다.
참 좋으네요.
가끔씩 책이 없는 분들을 위하여 베껴올려보겠습니다.
* * *
지금도 쓸쓸하냐?
지금도 쓸쓸하냐?
사흘만에 날씨가 개어서인지 많이 덜해졌습니다.
덜해졌으면 덜해진 것이다. 날씨 때문인지 아닌지, 거기까지 생각할 것 없다.
예.
그 생각 밑바닥에 숨어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너에게 일어나는 일의 원인을 누군가에게로 돌리는 버릇이 바로 그 생각을 먹고 산다. 내가 이러저러한 것은 누가 또는 무엇이 저러이러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 잘되면 내 탓이요 못되면 조상 탓이라는 속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지만 선생님꼐서 발견하신 다르마가 바로 그것 아니었습니까? 이것이 있음은 저것이 있어서요, 저것이 있음은 이것이 없어서라고 하셨잖습니까?
그것은 이 상대계에서 만고불변으로 통하는 원리다. 그러나 그 원리를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따라서 결과는 부처의 길과 범부의 길로 크게 갈라진다.
잘되면 내 탓, 못되면 네 탓이 범부의 길이요, 잘되면 네 탓, 못되면 내 탓이 부처의 길인가요?
아니다, 그 두 가지가 모두 범부의 길이다.
그럼, 무엇이 부처의 길입니까?
부처에게는 잘됨도 없고 못됨도 없고 따라서 네 탓도 내 탓도 없다. 너와 내가 따로 없거늘 어찌 네 탓 내 탓이 있겠느냐?
그러면 거기는 연기緣起의 원리가 통하지 않는 경지 아닙니까?
왜 아니냐? 상대계를 벗어나지 않고서 어찌 부처의 길을 들어설 수 있겠느냐? 생사의 경계를 넘어서지 않고서 어찌 그리스도로 살아날 수 있겠느냐?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도 이 땅에 사시는 동안 저희와 똑같이 상대계의 다르마를 따라서 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범부의 버릇대로 활용하지는 않았다. 내가 무슨 일로 누구를 또는 무엇을 탓하거나 원망하는 것을 보았느냐?
생각나지 않습니다
없는 것을 어찌 생각해 낼 수 있겠느냐?
하기는 공자께서도, 군자는 상불원천 上不怨天이요 하불우인下不尤人이라고 하셨지요.
이 세상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다. 하나는 부처를 등지고 범부로 살아가는 길이요, 다른 하나는 부처를 향하여 범부로 살아가는 길이다. 너는 어느 쪽이냐?
감히, 부처를 향하여 범부로 살아가는 길을 걷고 싶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날씨 때문인지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잡혀 있기에 네 탓 내 탓을 따지는 범부의 습관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보되 판단없이 보기를 연습하라고 하지 않았느냐?
네 기분을 살펴보되 판단 없이 보아라. 쓸쓸함이 덜해졌으면 덜해졌다고, 그렇게 보면 된다. 왜 그런지를 살피기 시작하는 데서 곁길로 빠져 들게 되는 것이다.
역시, 판단없이 보는 연습으로 돌아가는군요?
네가 지금 학습중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라. 너에게는 모든 것이 커리큘럼이요 과정이다.
판단없이 무엇을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 아닙니까?
대답하지 않겠다.
아까 저에게 지금도 쓸쓸하냐고 물으셨는데요. 제가 저를 정말로 판단 없이 보았다면 '많이 덜해졌다'고 말씀 드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덜하다, 더하다는 것 자체가 벌써 판단이니까요."
........
아하, 혹시 '마하가섭의 웃음'이 그것이었습니까?
........
선생님께서 들어 보이신 연꽃 한 송이의 뜻을 알아차리긴 했으나 입을 벌려 그것을 말하면 벌써 어긋났으니 그냥 웃어보인 것 아닙니까?
........
알겠습니다, 선생님. 오늘도 보되 판단 없이 보는 연습이나 성실히 해보겠습니다.
네 시선이 네 판단으로 어떻게 뒤틀리고 있는지, 그것을 보는 게 이 연습의 요체임을 유념하거라.
첫댓글지금도 쓸쓸하냐? 이 질문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 생각나는 군요.."니 손에 묻은 똥이 더렵냐?" "똥이 더럽다는걸 어떻게 느끼느냐?" "똥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더럽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학습되어진 것이 아니냐?" "꽃이 아름답냐?" "꽃이 아름다운 것 또한 학습되어진 것은 아니냐?"
"진짜 똥이 더럽다고 말하더냐? 꽃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더냐" "그 자체가 그런지 안그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러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실체와는 다를 수가 있다" "손에 똥이 묻었을 때 똥은 더러운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더럽다. 애이~씻어야지 하지 않느냐"
"외로운 거냐?" "쓸쓸한거냐?" "대화하고 있는 지금도 쓸쓸하냐?" " 아니요~" "그래 쓸쓸함과 외로움도 그 실체를 알았을 때, 비로소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똥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씻어 내는 것처럼" 제 의미대로 적어 봅니다..크리슈나무리티와의 만남(책으로)이 오랜 기억속에 남아있네요^^
첫댓글 지금도 쓸쓸하냐? 이 질문은 크리슈나무르티의 말이 생각나는 군요.."니 손에 묻은 똥이 더렵냐?" "똥이 더럽다는걸 어떻게 느끼느냐?" "똥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더럽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학습되어진 것이 아니냐?" "꽃이 아름답냐?" "꽃이 아름다운 것 또한 학습되어진 것은 아니냐?"
"진짜 똥이 더럽다고 말하더냐? 꽃이 아름답다라고 말하더냐" "그 자체가 그런지 안그런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더러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실체와는 다를 수가 있다" "손에 똥이 묻었을 때 똥은 더러운 것이다라는 것을 깨달았을 때 비로소 더럽다. 애이~씻어야지 하지 않느냐"
"외로운 거냐?" "쓸쓸한거냐?" "대화하고 있는 지금도 쓸쓸하냐?" " 아니요~" "그래 쓸쓸함과 외로움도 그 실체를 알았을 때, 비로소 치유할 수 있는 것이다." "똥이 더럽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씻어 내는 것처럼" 제 의미대로 적어 봅니다..크리슈나무리티와의 만남(책으로)이 오랜 기억속에 남아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