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이곳 시골집으로 이사 왔을 때 쥐들이 극성이었다. 질색하는 아내도 그렇지만 나도 들락거리는 쥐가 싫었다. 쥐약을 사러 약방에 갔더니 쥐약보다 더 좋은 것이 있다며 끈끈이를 내주었다. 쥐약을 먹은 쥐가 천정에서 죽어 썩을 염려가 있지만 끈끈이는 그럴 염려가 없다고 했다. 과연 끈끈이는 효과가 좋았다. 쥐가 드나드는 곳에 놓았더니 큰 놈, 작은 놈 할 것 없이 모두 끈끈이로 잡을 수 있었다. 아침에 끈끈이 놓은 곳을 돌아보면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쥐가 끈끈이에서 제 몸을 떼어내려고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런 쥐를 볼 때마다 나는 작대기로 후려쳐서 쥐를 죽여 버렸다. 몸부림치다 지쳐 숨이 끊어지기를 기다리는 쥐를 안락사 시킨 거다. 몸부림치는 쥐가 달아날까 봐 그런 게 아니다. 끈끈이가 얼마나 강력한 지 쥐는 한 번 붙으면 제 힘으로 그 끈끈이를 벗어날 수 없어 숨이 끊어질 때까지 몸부림을 치다 결국 숨질 것이다. 그 고통의 시간이 얼마나 길까. 숨이 끊어질 때까지 아무 것도 먹기 못하고 긴 시간을 몸부림치는 그 쥐의 고통을 생각하면 그 끈끈이는 쥐에게 헤어날 수 없는 지옥일 것이다. 차라리 작대기로 후려쳐서 죽여주는 내게 감사할 지도 모른다. 사실 나는 그런 쥐의 고통을 덜어 줄 너그러운 인간이 아니다. 다만 찍찍 울부짖으며 꿈틀거리는 쥐의 몰골이 보기흉해서 그런 것뿐이다. 끈끈이 덕에 얼마 안 되어 우리 시골집에는 쥐가 사라졌다. 속이 후련했다.
쥐가 사라지고 여름철이 되자 파리가 극성이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파리, 모기 살충제를 부려도 파리는 여전히 사람 주변을 맴돌며 신경을 건드린다. 드디어 파리 끈끈이를 사다가 마당의 야외탁자 주변 나무에 휘감아 붙여놓았다. 역시 효과가 있었다. 셀 수 없이 많은 파리들이 끈끈이에 달라붙어 날개를 파닥인다. 쥐처럼 찍찍거리지는 않지만 파리도 역시 끈끈이에서 벗어나려고 기를 쓰고 몸부림친다. 일부러 보지 않으려고 눈을 돌려도 왠지 자꾸 그 쪽으로 눈이 간다. 마침내 날개마저 끈끈이에 붙어버린 파리는 서서히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나 어쩌면 생명이 붙어있는 한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몸부림을 치고 있을 게 뻔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는 파리의 고통을 느끼며 소름이 돋는다. 저 놈들도 지옥 같은 끈끈이에 붙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인간의 잔인함이라니…. 그렇다고 파리에게 자선을 베풀 형편도 아니다. 파리를 없애야 하니 끈끈이를 떼어버릴 생각도 없다. 다만 애써 모른 채 눈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본다.
문득 인간이 죽을 때 저런 식으로 고통스럽게 죽는다면 얼마나 괴로울까. 아무래도 늙고 병들어 힘들게 살다가 죽느니 차라리 급살을 맞아 저도 모르는 순간 죽어버려야 고통이 없겠지. 그런 죽음이야말로 행복한 죽음이겠구나. 고요히 잠 들 듯이 죽는 방법. 미리 예고 없이 평온히 죽을 수 있다면 얼마나 복 받은 일인가. 고통 없이 죽는 방법을 선택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사람의 능력으로 그리 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가. 파리 끈끈이를 바라보며 새삼 죽음의 과정을 생각한다. 젊은이들은 저 끈끈이를 보고 나처럼 공연한 생각을 하지는 않겠지. 늙었구나. 파리 끈끈이 하나 보고도 이렇게 생각이 많으니 과연 늙었구나. 나이가 들어 죽을 날이 가까워오니 별 생각을 다 하는구나. 2023. 5.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