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째서 여우 문근영 양의 외조부 류낙진이 통일운동가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는가? 단지 그가 1950년대에 지리산 빨치산이었기에 통일운동가라는 뜻인가? 아니다. 위에서 류낙진이 1968년에 가담하였던 통일혁명당 영상물을 보는바와 같이, 그가 민중봉기를 일으키려는 세력 중에서는 거목이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적화통일 세력은 오래 전부터 민중봉기, 무장봉기를 적화통일 전략으로 삼아왔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 김대중이 1980년 5월 하순에 전국적 민중봉기를 일으키려 하였으나, 광주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만 국한되어 발발하였던 무장봉기를 일컬는다. 그러면, 도대체 언제부터 김대중은 민중봉기를 일으킬 생각을 하였던 것일까? 김일성을 면담하고 美貨 7만 달러, 韓貨 3,000만 원, 日貨 50만 엔의 공작금을 받고 A-3지령만 167회를 수신했던 통일혁명당의 주동자 김종태는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을 통한 수도권 장악, 북한으로부터 무기수령을 위한 양륙거점 정찰, 특수요원 포섭, 월북 등 14개 항목의 공작임무를 띠고 있었다.
민중봉기! 간첩의 무장! 집단유격투쟁! 김대중이 1980년 5월 전국적 민중봉기 일으키려 하기 12년 전에 이미 민중봉기를 통한 공산화 시도가 있었다. 사실 문근영의 외조부 류낙진이 가담하였던 통혁당 사건과 광주사태는 일란성 쌍둥이였으며, 민중봉기의 목표가 류낙진과 김대중을 엮는 코드였다. 통혁당 사건은 실패로 끝난 민중봉기 시도였으며, 1975년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이 시민군을 동원한 민중봉기로 월남을 패망시키는데 성공한 것을 본 김대중은 그 이후로 월남식 도시 게릴라 방법을 채택하였고, 1980년 3월 김대중의 전국연합 사무국장이 된 윤상원은 쿠바의 공산주의 혁명투사 체 게바라의 도시 게릴라 전법을 일찍부터 연구하고 있었다.
탈북 군인들은 1980년 3월 김일성의 책상 위에는 5월에 광주에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는 정보가 놓여있었다고 증언한다. 그런 증언은 증명될 수 있는가? 물론, 자유 통일이 되어야만 증명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만약 정말로 3월에 그런 음모가 광주에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면, 그리고 김일성이 그때부터 무장봉기 지원을 하려고 시도한 것이 입증될 수만 있다면 탈북 군인들은 증언은 그만큼 신뢰성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래의 두 동영상에 보듯이 이 둘 모두 사실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