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 아침이었다. 주수명 형에게서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으니 의외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부인이었다.
“제 남편이 죽었습니다.”
나는 깜짝 놀라서 물었다.
“죽다니요?”
불과 이틀 전에도 통화했었는데 믿기지 않았다.
“아니? 무슨 일인가요?”
“자다가 죽었어요. 주무시는 걸 보려고 방에 들어갔는데 입을 벌리고 누워 있어서 딸을 불렀는데 딸이 코 아래에 손을 대보더니 숨이 없다는 거예요. 119를 불러 인공호흡을 20여 분했으나 숨이 돌아오지 않았어요.”
나는 말문이 막혀 잠시 침묵했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갑자기 돌아가시다니요….”
“장례는 인천장례식장에서 하기로 했어요.”
그분의 아내는 우리 일이 끝나고 그분이 사시는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면, 오후의 어린이집에 일하러 가시려고 차의 조수석에 타시는 모습을 여러 번 보았으나, 스치듯 본 까닭에 안면이 그리 익숙하지는 않았다.
나보다 다섯 살 위인 주수명 형과는 시니어클럽에서 같은 팀이 되어 소비자 피해 예방 분야에서 일 년 넘게 함께 일한 사이였다. 처음 만났을 때는 컴퓨터로 한글 사용 방법을 여러 번 가르쳐 드렸지만, 그분은 나이보다는 젊은 생각을 가진 분이어서 얼마 가지 않아 결국 업무에 필요한 정도의 문서작성을 할 수 있었다. 경로당에 홍보차 찾아갈 때는 언제나 그분의 차를 타고 다녔다. 아내가 차를 써서 나는 차를 쓸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수명 형은 장수천 둘레길 금호아파트에 사셨다. 내가 사철 내내 자전거를 타고 그분 아파트에 가서 함께 차를 타고 일하는 곳으로 가곤 했다. 월요일에서 금요일까지 닷새를 만나게 되는 사이였다.
장수천의 사계는 아름답다. 봄이면 산책길을 온통 덮어버리는 벚꽃 잔치가 벌어지고, 여름이면 아파트 옆 장수천 건너편에는 메타세쿼이아가 바람에 흔들리는 정경이 싱싱하고 멋있었다. 장수천에는 백로와 오리들이 살았다. 작년에는 원앙 한 쌍이 여러 달 사람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장수천 가에는 산책길 옆의 화단에는 듈립도 피고, 철쭉도 피었다. 봄이면 나이가 지긋한 여인들이 그리 높지 않은 둑에서 장수천을 따라가며 나물을 뜯었다.
내가 자전거를 타고 금호아파트에 가면 주수명 형은 가끔 미리 나와서 장수천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물에서 한 떼를 지어 유영하는 오리들을 보며, 물이 깊은 곳에 모여 있는 잉어 떼, 미동도 하지 않고 한동안 서 있다가 파문을 일으키지 않고 발을 옮기는 백로, 흰 날개를 펼치고 장수천을 따라 오르내리는 백로를 바라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여름에 일이 끝나면 그분의 아파트로 돌아와 장수천 목책 가에서나 벤치에 앉아 아이스케이크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저 잉어들은 장수천이 꽝꽝 어는 겨울 어디에 있다가 봄이면 살아나서 저렇게 떼를 지어 다니지?”
주수명 형이 가끔 신기하다는 듯이 하는 말이었다.
우리는 일을 마치면 일주일에 한두 번은 내가 사는 장수동의 무인 커피숍이나 메가커피, 남촌동 언덕의 분재가 가득한 커피숍이나 산 아래 호젓한 커피숍에서 비싼 커피를 나누기도 했다.
그분은 인품이 좋아 나에게는 형 같은 분이셨다. 막내라서 형을 병원에 모셔가느라고 서울로 가서 가끔 일을 빠지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도 함께 쉬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분이 돌아가시기 하루 전 금요일 밤에 나는 시를 읽다가 오랜만에 장수천을 주제로 하여 시를 쓰고 싶어졌다. 10시 반에 시작한 시를 아내가 금요 철야 기도회에서 돌아온 11시에 마무리 지었다. 장수천의 사계(四季)를 불과 30분 만에 쓴 즉흥시였다.
그런데 장수천을 쓰려니 자연스럽게 함께 장수천을 바라보며 그분과 대화를 나눈 일이 생각났다. 나도 모르게 시에 그분의 이름을 썼다. 그리고 잠시 망설인 부분은 ‘흘러가는 물을 하염없이 바라본다.’라는 표현이 밋밋해 ‘하염없이 흘러간다“라고 바꾼 것이었다. 결국 이렇게 표현하므로 ’그분의 마음이 물과 함께 흘러간다‘ 라고 표현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문맥대로 보자면 주수명 형이 주어가 되어 하염없이 흘러가는 듯이 표현된 것이다.
갑작스러운 부음을 듣자마자 생각난 것이 하필 하루 전에 쓴 이 시였다. 왜 그분이 심정지로 돌아가신 말 밤에 이 시를 쓰게 된 걸까? 그분의 영혼과 나의 영혼이 교감한 것은 아닐까…. 나는 곰곰이 되뇌어 보았다.
장수천 오리 가족 / 안정희
1.
벚꽃들이 춤추며 잔치를 벌이던
장수천 둘레길
사람들 모여들어 꿈길 가듯 어깨를 비비며
곱디고운 분홍이 되어가고
둑 아래 장수천엔 오리 가족이 모여
다정하게 배밀이를 하고 있다
가끔
벚꽃 화관을 몰래 쓰기도 하면서
2.
인천대공원의 호수는
여름이면 그 많은 물을 토해낸다.
야트막한 관모산 심곡천은
가냘픈 골짜긴데
어디서 그 많은 누렁이가 떼를 지어
소래포구로 거품을 물고
앞다투어 내리 달리는지
사람이 그러하듯
오리들도 폭우가 쏟아지는 날이면
풀숲으로 기어올라
서로 날개를 포개어 둥글게 모인다.
폭우도 그치기 마련이니
서로 따스히 품어 안고
기다리자는 듯이
3.
플라타너스 넓은 잎새
가을을 품고
메타세쿼이아 장수천에 빛바랜
청춘을 뿌리고 있다
금호아파트에 사는 주수명 형은
가끔 장수천길 공원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흘러간다
오리가 머리를 물에 처박는 때를
기다리며
4.
장수천에 겨울이 오면
신기하다
그 많던 잉어들은 어디에 둥지를 틀었는지
얼음 속 그리 깊지 않은 물속에서
어찌 죽지 않고 살아, 봄이면
무리 지어 다니며
입을 뻥긋대며 인사하는지
욕심 가득한 세상을 덮으려는 듯
눈이 펑펑 내리는데
오리들은 저 따스한 나라로 날아가지 않고
올해도 제집에서 연탄 한 장 없이
겨울을 나려나 보다
後記:
크리스마스이브에 그분의 장례식장에 문상하러 갔다. 나보다 덜 시간을 함께한 정재규 씨(前 교장)가 오히려 울음을 참지 못하고 울먹였다. 나는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며 죽는 사람을 많이 본 탓인지 이미 죽음이란 부지불식간에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음을 확실히 아는 탓인지 아니면 정이 덜 깊어서인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둘이 차를 타고 다니며 수시로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났다.
”죽을 때 고통 없이 죽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분은 심장 근처 혈관에 스테트를 낀 지 10년이 넘었다고 했다. 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면 ’아마 형님은 고통 없이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하나님을 믿으니 천국에 가실 거고요‘ 혼자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입에로는 나의 당면문제가 될 죽음의 고통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병원에서 죽는 사람은 거의 다 중환자실에 실려 가서 죽지요. 가족과 이별의 말도 나누지 못하고 혼자 고통스럽게 죽은 거지요. 죽는 게 마음대로 되면 얼마나 좋겠어요. 저도 죽을 때가 되면 고통 없이 평안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고 싶어요.“
나는 내심으로 나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썼으니 급사하지 않으면 호스피스병동에서 죽게 되겠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문상하면서 부인과 이야기를 나눴다. 유산상속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다행히 내가 유언과 상속 강사라서 다소 도움이 될 말을 해줄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김에 봉안당에 모신다는 말을 듣고, 인천 승화원(화장장)의 봉안당과 잔디장, 수목장에 관하여도 이야기해드렸다. 내가 싸나톨로지 협회에서 장례 부분을 맡아 중고교 교사를 대상으로 한 인터넷 강좌 교재를 만든 적이 있어서 인천 승화원을 찾아가 사진도 찍고 알아본 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조금은 걱정이 되어서 애도(哀悼)의 방법에 관해서도 설명을 해드렸다. 막상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게 되면 애도의 방법을 몰라 더 심한 정신적 상처를 받는 경우가 있음을 애도 상담 강사 교육에서 배웠기 때문이다.
주수명 형이 천국에서 평안하시기를 그리고 두 딸과 남은 부인에게 위로하심이 함께 하시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