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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와이어 | 입력 2009.09.30 11:29
조선초기 가장 청렴한 정승
- 柳寬 -
『地方行政』1988년 10월호
하정 류 관(夏亭 柳 寬), 방촌 황 희(厖
村 黃 喜), 고불 맹사성(古佛 孟思誠) 세
사람을 가리켜서「선초삼청(鮮初三淸)」이
라고 부른다. 조선 초기에 활약한 세 사람
의 청백리(淸白吏)란 뜻이다. 물론 이 세
사람 말고도 태종(太宗), 세종(世宗) 대에
이르러 수많은 청백리들이 배출됨으로써
국기(國基)를 튼튼히 다녔다.
그러나 그 숱한 어진 신하들 중에서도
유독 황 희, 맹사성과 함께 류 관을 손꼽는
이유는 저절로 명백하다. 류 관이 남긴 행
적 하나하나가 만대를 두고 본받아 마땅할
일이기도 하려니와, 그가 보여준 애민보국
(愛民輔國)의 투철한 정신은 실로 감동적이
기 까지 하기 때문이다.
그의 일생도 황 희, 맹사성처럼 고려 말에
서 시작하여 조선조 초기에 끝나고 있다. 고
려 충목왕(忠穆王) 2년인 1346년에 태어났
으니, 공민왕(恭愍王) 12년에 태어난 황 희
보다 17세가 많고, 역시 공민왕 9년에 태어
난 맹사성보다는 14세가 더 많은 편이다. 선
초삼청 중에서도 가장 연장자인 셈이다.
류 관의 관계(官界) 진출은 매우 빠르다.
이것은 그가 26살이란 젊은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데서 기인한다. 공민왕 재위 20년이
되던 1371년의 일이다.
그가 고려조에서 맡은 가장 두드러진 직
책은 봉산군수(鳳山郡守)를 지냈다는 것이
다. 봉산군수 시절의 류 관은 이미 청백리로
서의 타고난 성품을 보여주고 있어서 그가
임기를 마치고 중앙으로 올라올 때는 모든
백성의 칭송을 받으며 아쉬움 속에서 임지를
떠나야 할 정도였다.
목민(牧民)한다는 자의 본분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 귀중한 예증(例證)을 남
기고 봉산군수를 이임한 것이다.
그의 어렸을 때 본명은 관(觀)이었다. 세
종(世宗) 8년(1426) 4월13일에 셋째 아들
계문(季聞)이 충청도관찰사에 임명 되었는데
사직을 청하여 아뢰기를「신의 부친 이름이
관(觀)이니 신은 가히 이 직책을 맡지 못하
겠나이다」하므로 주상(主上)께서 특령으로
관(寬)자로 고쳐 부임할 것을 명하셨다. 이
것은 그의 성품과 어울리는 개명(改名)이라
고 볼 수 있고, 그의 이름자인「寬」이 보여
준 실로 놀라울 만큼의 너그러움에서 류 관
이란 인물의 넓이와 두께를 가늠할 수 있다
는 것이다.
류 관은 동대문 밖에서 살았다. 벼슬이 의
정부 우의정(右議政)에 이르렀는데도 어찌나
가난했던지 비만 오면 방에서도 우산을 쓰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그는 너무 지나치다 할
정도로 재물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어서 그의
평생을 두고 단 한 번도 재물에 탐심을 둔
바가 없었다. 그런 류 관이었으니 만큼 집하
나 변변한 것을 갖고 있을 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그 집은 울타리도 담장도 없는
두 칸 초옥이어서, 이 집이 당대의 명상(名
相)이 살고 있는 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도 딱하게 여긴 태종(太
宗)이 밤새 몰래 선공감(繕工監)을 보내서
류 관의 집 주위에 울타리를 설치해 주기까
지 했으니 알만한 일이다.
비가 새서 우산을 받쳐 들고 이리 저리 자
리를 옮겨 다니는 모습을 어이없게 바라보고
서있는 부인에게「이런 우산도 없는 집은
비를 어떻게 피하겠소. 참 안타까운 일이
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부인은「우산이 없는 집이라도 우
리처럼 비는 새지 않을 테니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하자, 류 관은 허
허 웃으며「그것 참 그렇기도 하군.」하면
서 웃고 말았다.
이 이야기가 시사해주는 바의 의미를 우
리는 구태여 따지고들 필요는 없다. 그것이
그냥 구전(口傳)되어 온 상식 밖의 일이라
해도 새삼스레 그 진위(眞僞)를 규명하려들
필요도 없다.
류 관은 그런 사람이었고, 그렇게 받아들
여주어야 할 당위성도 있게 마련이다. 왜냐
하면 이러한 청백정신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의 역사가 끊이지 않고 그 명맥을 이어왔기
때문이다.
우의정 자리에 앉아서 만조백관(滿朝百官)
을 거느리는 그가 신분이 천한 일반 백성과
조금도 다름없이 행동했다는 그 자체를 높이
사면 되는 것이다. 아무리 추운 겨울에라도
그의 누추한 거소(居所)에 손님이 찾아 들면
버선발로 뛰어 나와 맞아들인 정신이 중요한
것이다.
동대문(東大門) 밖 그의 두 칸 초가집은
그래서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귀하고 천하
고 간에, 벼슬이 있거나 없거나 간에, 그리
고 부자이거나 가난한 자이거나 간에 류 관
의 집을 찾아간 손님들은 거기에서 따뜻하고
훈훈한 인정의 선물을 한 아름 안고 돌아오
기가 일쑤였다.
거기에는 허물도 가식(假飾)도 없고 위선
(僞善)도 없었다. 우의정 높은 벼슬이 풍기
는 거만함이나 위압감 같은 것은 더구나 없
어서 일단 류 관의 집을 찾는 객들에게는 그
에게서 인간미의 관후함과 온화함을 깨우치
고 돌아오기 마련이었다.
그는 가끔 호미를 들고 채소밭을 돌아다
니며 직접 찬거리를 준비해오는 일도 있었
다. 그렇게 해서 찾아오는 손님을 위하여 탁
주 항아리 하나와 술 주발 몇 개만을 소반
위에 올려놓고 직접 채취해 온 야채를 안주
로 삼아 인간사 갖가지 일들을 말로 주고받
았다 하니 그 소박함은 참으로 아름답기조차
하다.
류 관은 벼슬이 정승(政丞)에 이르렀어도
제자를 두고 글 가르치는 일을 게을리 하
지 않았다.
사람이 옳게 깨우치는 것은 곧 그 마음속
에 어떠한 학문이 자리 잡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신념을 굳게 가진 그였다.
때문에 사람됨의 척도(尺度)를 얼마나 높게
되고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에 따라 그 기준
을 두는 게 아니라 그 마음속에 가꾸어진 학
문의 질과 양이 얼마만큼의 수준에 다다랐느
냐 에 따라서 판단했다.
이러한 신념은 그를 한평생 따라다닌 철두
철미한 기본신념이기도 해서 그가 어느 자
리 어느 벼슬에 있든지 간에 제자를 모아 글
가르치는 일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글을 가르친다는 단순한 행위에서 한걸
음 앞서 사람이 사람 되기 위한 올바른 글
을 가르침에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던
관계로, 일단 류 관에게서 글을 배워 나간
서생(書生)들은 틀림없는 인재(人材)로 성
장해 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입신양명(立身揚名) 위주로 몰아
부치는 교육의 현실을 생각할 때, 류 관이
정립한 철저한 인간교육은 참으로 귀중한 전
범(典範)이기도 하다. 이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두드러진 청렴정신과 무관하다고 할 수
가 없다.
류 관은 그 총명함이 남달리 뛰어났다고
한다. 이것은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에 등과
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는 일이다. 확실히
그는 보통 사람에 비하여 지나칠 정도로 총
명한 게 사실이었다.
그래서 그는 한번 배운 글은 평생을 두고
잊어버리지 않았다. 그런데 더욱 높이 사야
할 것은 이 총명한 머리로 학문을 익혀나가
면서도 그의 머리 속에서는 항상 민생(民生)
의 문제가 떠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밤중에 글을 외우면서도 그 글 속에 담긴
뜻을 민생과 연관 지워 생각하기를 잊지 않
았다. 가히 타고난 선정관(善政官)이요, 하
늘이 내려준 청백리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을
그였다.
그는 천성이 남에게 주기를 좋아한 사람
이었다. 워낙이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하찮은
물건 하나라도 남에게서 그냥 얻어오는 법이
없었다. 오히려 가진 것 나누어서 주기를 좋
아하며 그 집안에는 남아돌아가는 것이 없을
지경이었으니, 부인의 고생이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조카 사눌(思訥 : 강원도관찰사, 예문관대
제학)이 세 살 적에 부친을 여의고 나이 열
세 살에 이르러 자모 권씨(慈母 權氏) 마저
또 돌아가시니, 친히 집으로 데려다가 친자
(親子)와 같이 어루만져 기르며 글 읽고 학
문에 힘쓰는 방도를 가르쳤다. 한편 과거에
급제하여 그 성혼(成婚)의 날에 당하기에 이
르러 의관(衣冠)과 안마(鞍馬) 등 제반 혼수
(婚需)를 모두 갖추지 않음이 없었으며, 그
노비(奴婢)를 나눠 줄 때에 조카를 형과 같
이 보아 그 건장하고 진실한 자를 가리어 수
를 더 많이 분급(分給)하니 당시에 듣는 사
람마다 그 공평하고 청렴함에 감복하였다.
류 관은 재물관리에 있어서는 극단적이
라 할 만큼 청빈(淸貧)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가깝고 허물없는 사이
라 해도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분명한 주
관을 개입해서 처신했기 때문에 그의 일생
을 통하여 단 한 번도 남과 얼굴 붉히는 일
이 없었다. 하나를 탐하기 전에 둘 셋을 주
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미였으니 어느 사이
에 얼굴 붉힐 틈새도 없겠지만 류 관에게
있어서의 재물관(財物觀)은 가히 초인적이
라 할 만큼 깨끗하고 시원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성품이 그대로 반영되어 나타난
것이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자질이었다.
그는 벼슬이라는 자리를 <나>라는 주체를
떠나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벼슬을 한다
는 것이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 주어진 것
이 아니라 만백성의 길잡이로서 오직 봉사
해야 한다는 공복(公僕)정신이 투철했기 때
문에, 류 관은 어느 벼슬자리에 있을 때,
한번은 세종(世宗) 임금에게 글을 올렸다.
그 글에서 류 관은 송 태조(宋 太祖)가 모든
국민에게 술과 음식을 고루 나누어 주고 마
음껏 놀게 하였던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3
월3일과 9월9일을 택해 그렇게 시행하도록
주청했던 것이다.
세종임금도 이 건의를 받아들여서 즉시
류 관을 불러 그렇게 하도록 어명(御命)을
내리셨다. 이에 조정에서는 대소 관료들을
각 지방으로 내려 보내 그곳 백성들과 함께
어울려 하사주(下賜酒)와 음식을 골고루 나
누어 주고 경치 좋은 곳을 택해 관민(官民)
이 일심동체가 되어 태평성대를 노래하고 어
진 임금을 위해 축수하기도 했다.
관민이 이쯤 되면 사이가 멀어지려해도
멀어질 수가 없다. 서로가 서로를 믿는다는
것은 그 사이에 놓인 거리감을 없애고 불신
감을 없애야 가능한 일인데 류 관의 주청으
로 이루어진 이 거국적인 행사야말로 관민일
체의 훌륭한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는다.
무릇 다스린다함은 하향(下向) 일변도적인
외곬 행정(行政) 만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
한 일이다.
따라서「다스린다.」는 말의 진정한 뜻은
다스림을 받는 자의 삶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편안하게 해주는 데 있다. 민생이 편안하지
못하고 항상 불편한 상태에서 좌충우돌 할
때 다스림의 권위는 사실상 잃고 마는 것
이다.
어떻게 하면 백성의 삶을 즐겁고 신나게
해줄 것인가에 대한 해결책의 모색이 바로
다스린다는 말의 참뜻임을 류 관은 알고 있
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베푼 하나하나의
시정(施政)이 모두 선정(善政)으로 칭송받을
수 있었고 훗날 우상(右相)의 높은 벼슬에
이르러서도 방만(放漫)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겸허하고 청렴한 가운데 인간의 소박함과
진실함을 깨우쳤고, 그런 가운데 이도(吏道)
의 올바른 길을 몸소 실천해 나간 류 관과
같은 인물을, 그래서 우리 역사는 자랑스럽
게 기록해 놓고 있다.
류 관은 공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그 꿋꿋
한 청백정신을 끝까지 견지하면서 결코 자세
를 흩트리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방정(方正)한 행실, 누구에게나 따
뜻하고 훈훈한 인간애(人間愛) 넘치는 마음
씨로 상대방을 교화시키던 인품, 이러한 것
들이 바탕을 이루어 류 관이라는 한 인간을
형성해 놓았기 때문에 그의 노후(老朽)도 결
단코 정도(正道)에서 이탈됨이 없이 바로 걸
어갈 수가 있었다.
우의정에서 물러나 동대문 밖의 비새는
집에 기거(起居)할 때도 언제나 그에게 글
을 배우려는 문하생들이 가득 가득 몰려
들었다하니 사람으로 태어나서 류 관처럼
행복스럽고 보람찬 삶을 살다간 사람도 그
리 많지 않으리라 싶다.
왕씨(王氏) 고려가 점차 패망의 길을 걸
어가던 말기에 태어나, 26세의 젊은 나이
로 등과하여 이씨조선(李氏朝鮮)에서 그
열매를 맺기까지 류 관은 실로 88년의 긴
생애를 살면서 위민봉사(爲民奉仕)의 한평
생을 살았다.
그가 88세의 고령으로 돌아간 것은 세종
재위 15년째 되던 1433년이었다.
류 관이 세상을 뜨자 세종대왕은 어진 신
하의 죽음을 몹시 애통해 하면서 문무백관
(文武百官)을 거느리고 슬피 울었다.
신하는 임금을 위해 어진 정사를 펴도록
힘껏 보필을 다 했고, 임금은 어진 신하를
위해 인군이 할 수 있는 선정의 모든 것을
다 베풀었으니 그들의 귀한 아름다움은 청사
(靑史)에 길이 남을 깨끗함 바로 그것이다.
류 관의 죽음에 잇따라서 맹사성·황 희
도 졸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 시대 청백리들
의 죽음과 함께 태평성대(太平聖代)는 종말
을 고하고 왕조(王朝)는 서서히 피의 역사로
점철되 혼란의 시대를 열어가게 된다.
그러나 피할 수 없는 것이 역사의 진행이
어서, 이들 고귀한 청백리들이 남기고 간 태
평의 세월 위로 하나 둘 겹쳐오는 음산한 구
름을 걷어 낼 방도는 없었다.
그렇게 왕조는 진행되고, 또 그러한 세
월 속에서도 청백리는 태어나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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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금전앞에 그누구도 자유로울수 없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복짖는 날 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