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정다리
임병식 rbs1144@hanmail.net
추억은 아련하게 그리움을 몰고 온다. 그것도 순수 무구한 시절을 보낸 어릴적의 추억은 그립고도 달콤하다.그런 추억 속에는 몇 군데가 있는데 검정다리도 그 중의 하나다.
내 고향 득량은 호남정맥이 들보처럼 가로질러 떠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는데 그런 강물은 산을 뚫어서 흐르는 도수터널도 있다. 전력생산을 위해서인데 거기에 소용된 물이 간척지로 흘러내린다.
그것은 중간에 다리를 세 개나 품고 있다. 가장 위쪽은 차가 다니는 길, 그 아래는 철길, 그 어간에 사람만이 통행이 가능한 철다리가 놓여있다. 이 다리를 사람들은 ‘검정다리’라고 불렀다. 철제 구조물이 검정페인트칠로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 고향 득량은 보성읍내와 인접해 있지만 표고차가 상당히 낮다. 근 100 미터나 차이가 나는데 그러다보니 기온차도 확연하게 난다. 그래서 따뜻한 날씨만 믿고 얇은 옷을 입고서 읍내를 갔다간 낭패를 보기 일쑤다. 같은 군내지만 이렇듯 차이가 많이 난다.
득량은 알아주는 곡창지대이다. 간척지에서 생산된 쌀은 수확량도 많지만 미질이 좋기로도 유명하다. 득량(得糧)이란 지명은 쌀이 많이 나온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순신 장군이 쓴 난중일기에 보면 1597년 정유년에 장군이 백의종군 길에 올라 보성에서 군량미를 상당량 확보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조양창(兆陽倉)에서 확보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런 지명은 나중에 붙여진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는 것으로, 예전에 이 고을은 도촌면과 송곡면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그때는 득량이란 지명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 이름은 일제강점기 두 면이 통합되면서 득량면으로 개칭이 되었다. 그걸 보면 나중에 생겨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곳은 예로부터 너른 간석 지가 있던 곳이었다. 그러던 것을 보를 막아 농토로 개간을 하게 된 것이다. 그곳에 용수가 필요하게 되었다. 물은 1937년 겸백과 득량 간 산줄기에 뚫어서 끌어왔다. 그 과정에서 수차를 이용하여 발전소가 생겨난 것이다. 인접 면과 표고차가 크게 나 유역 변경식 발전소를 만든 것이다. 이것은 남한에서는 최초였다.
이곳 득량발전소에서는 한해 3120kw의 전기를 생산한다. 그 전력량이 한때는 호남 중부지역 일대를 담당했다. 이 발전소는 득량 명소이기도 하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단골로 소풍 장소였다. 그런 추억 때문에 시간이 나면 한 번씩 둘러보곤 하는데. 산중턱에서 내려 뻗은 관로도 볼만하지만 특히 봄철 에 만개한 벚꽃은 꽃 대궐을 이루어 선경을 연출한다.
이 도수통로를 뚫으면서 주변 경관은 크게 바뀌었다. 보성강은 댐이 조성되어 장관을 연출하고 그 부산물로 유명한 물방앗간이 생겨났다. 하류에는 검정다리가 놓여지고 . 이 물이 흘러서 득량만 간척지 530만평을 적셔준다.
이 검정다리는 철로 만든 구조물 위에다 널빤지를 깔았다. 그리고서 부식을 막고자 콜타르를 칠해놓아 검게 보인다. 이 다리는 흐르는 물줄기가 간척지로 들어가도록 보(堡)를 막은 것인데 그 위에 사람이 다니는 통행로를 만든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다리를 건너려면 몹시 겁이 났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다리를 건널 때면 늘 머리카락을 쭈뼛 서고 다리가 덜덜 떨렸다. 그래서 조심하여 걷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때는 왜 그리도 걷기가 무섭게 보였는지 모른다. 아마도 다리가 높기도 했지만 중간 중간에 널빤지가 떨어져 나가서 발 아래로 흐르는 푸른 물이 훤히 내다보여서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그래도 다른 아이들은 잘도 건너다니는데 나만 유독 무서워서 쩔쩔 맸다.
그런 공포를 이겨낸 데는 거의 반년이나 걸렸다. 발아래를 내려다보지 않고 전방 2, 3미터를 바라보며 건너니 괜찮아 졌다. 무엇보다도 그리하니 이가 빠진 널빤지를 의식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터득한 후 한 시름을 놓게 되었다. 그러한 노하우는 읍내 학교로 진학을 할 때 크게 도움이 되었다. 학교 길에는 그보다도 훨씬 긴 철로 다리가 있었는데 별로 공포심을 느끼지 않고 수월하게 건널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때의 깊숙이 각인된 공포는 쉽게 지워지지 않았다. 그 생각은 다른 때는 거의 인식을 하지 못하다가도 꿈속에서 가끔씩 마주하는 때가 있다. 이때는 거의 벌벌 떨면서 오금이 저려와 잠을 깨고 만다. 그때 마다 이상하게 발을 오그리고 있어서 다시 자세를 고쳐야만 다시 자게 된다.
꿈속에서 한 번씩 검정다리를 건너며 시달리면서 가끔씩 떠올리는 것이 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내가 건너다니던 일은 일 년을 끝으로 전학을 가게 되어 다시는 그곳을 통과하는 일은 없었지만 함께 다니던 벗들은 그곳을 계속 이용했는데 어찌 지내고 있는지 자못 궁금한 것이다.
모두 70세가 넘었을 테니 상당수는 이미 고인이 되었을 것이고 살아 있는 사람들도 그리 건강을 장담하지는 못하는 형편일 것이다. 그런 사람들도 나처럼 그 검정다리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을까.
나는 당시 벌벌 떨면서 다니면서도 발을 헛디뎌서 빠지는 일은 없었지만 혹시 다른 사람은 살얼음이 덮인 그 위를 걷다가 미끄러지거나 발이 빠져서 혼 줄이 난 사람은 없었을까. 만나서 그런 후일담을 들어보고 싶은 생각이 불현듯 든다. (2017)
첫댓글 어려서 정겹게 다녔던 고향 <검정다리>를 통해 “들보, 개활지, 오슬오슬, 오금.” 이라는
글자들 오늘 한글날, 시멘트, 아스팔트, 고층건물, 수많은 차에서 나오는 대기 오염 속에 살면서,
상큼함과 산뜻함을 맛보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고향 향수에 젖어 봅니다.~^^
어려서 건너다니던 그 검정다리가 그때는 왜 그렇게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길이로 봐서야 한 20미터 남짓한 것이지만 십리길을 지난듯 무서웠습니다. 중간중간에 널빤지가 떨어져나가 아래로 시퍼른 물이 공포심을 일으켰습니다. 지금도 가끔 꿈속에 나타나 오금을 저리게 만듭니다.
호남정맥의 지맥에 둘러싸여 아늑한 분지를 이루고 있는 선생님의 고향 정경을 상상해 봅니다 보성강의 물을 이끌어 예당 들에 공급하는 도수로의 보에 놓인 검정다리는 초등학교 등하굣길이었군요 성장하심에 따라 군두 사거리로 나가 대처로 잔출하셨을 아득한 시절을 그려보다가 별안간에 정지용 시인의 '향수'가 떠오르니 어제 가본 사라진 제 고향마을이 서러워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득량은 다른 지역보다 표고가 150미터쯤 차이가 나 겨울에도 따뜻했지요.
특히 우리마을은 3흥리라 하여 분지로 싸여있는데 더욱 아늑했습니다. 초등학교
들어가서 1년간을 6키로비터쯤 떨어진 득량초등학교를 다녔지요.
그러다가 가까운 곳에 분교가 설치되어 그 검정다리를 건너지 않게 되었어요.
지금도 그 검정다리는 들판에 놓여있는데 볼때마다 많은 회상을 일으키게 합니다.
검정다리 추억이 재밌습니다. 세상이 변하면서 쓰는 용어들도 많이 바뀌어 가네요. 정감있는 우리말은 사라지고 정체불명의 외계어가 난무하니 안타깝습니다.
검정다리에 대한 추억이 많습니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본교에서 1년을 마쳤는데 그때 그곳을 건너 다녔지요. 중간에 널판지가 떨어져서 아래를 보면 무서워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