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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제사는 4대까지 지낼까!!? -
추석 대 명절을 앞두고 한 번쯤 읽어 보심 좋을 듯 해서 긴 글이지만 옮겨와 게시해 봅니다.
●''기(氣)와 영(靈)의 세계!!''
우리는 전통적인 관례로 4대조 이하 조상님들께 제사를 올린다. 왜 하필 5대조나 6대조가 아닌 4대조 이하 일까?
5대조부터 그 이상은 묘재를 택일 해서 재사를 모신다. 보통은 음력10 월에 모신다.
거기엔 이유가 있다. 사람이 죽으면 그 기(氣)의 파장이 약 100(120)년 동안 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氣의 파장이 변하지 않으므로 자기와 파장이 같은 후손과 함께 할 수가 있다.
1대를 25(30)년으로 하면 4대조는 100(120)년이 된다.돌아가신 분은 100(120)년 동안의 바로 자기의 가족이나 후손과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4대조 이하의 조상 영들은 후손과 파장이 맞으므로 후손과 함께 할 수 있고 후손의 삶을 좌우할 수 있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 영향력도 음과 양으로 좋은 쪽과 나쁜 쪽 양 갈래이다. 그것은 모두 그들 조상 영의 생전의 사람됨과 인격 그리고 업보에 따라 나타난다.
살아 생전에 착하고 어질게 살아 높은 영계에 가 계신 조상 영은 후손을 위해 여러가지 도움을 주고 보살펴 주려고 애쓰지만, 생전에 인간됨이 천박하거나 악독했던 사람, 혹은 어려서 세상물정 모르고 죽은 소위 철부지 귀신들은 후손을 못살게 굴고 온갖 나쁜 짓을 서슴치 않는다.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조상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후손의 몸을 빌지 않으면 안 된다. 조상은 영(靈) 으로 존재하고, 영은 곧 기(氣)이 므로 물질인 육체가 없이 기만으로 는 아무 것도 행할 수가 없다.
즉 천지조화가 불가능한 것이다.
파장이 맞는 고로 4대조 이하 조상영은 그 후손의 몸에 임할 수 있다. 조상의 영혼이 후손의 몸속에 들어오는 것은 우리가 텔레비젼의 채널을 맞추어서 어떤 특정 방송국 의 방송을 수신하는 것과 같은 이치 이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인가?
생유어사(生由於死)하고 사유어생(死由於生)이니라.
삶은 죽음으로부터 말미암고 죽음은 삶으로부터 말미암느니라. 죽음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다.
지상에서의 죽음은 천상에서 영혼으로 다시 태어나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제삿날 은 천상에서의 생일날과 같은 것이다.
사람에게는 혼(魂)과 넋(백魄)이 있어 혼은 하늘에 올라가 신(神)이 되어 제사를 받다가 4대가 지나면 영(靈)도 되고 혹 선(仙)도 되며 넋은 땅으로 돌아가 4대가 지나면 귀(鬼)가 되느니라.
이 말씀과 같이 사람의 몸은 육체와 유체로 구성되어 있다.육체(肉體)는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물질적으로 된 몸이고, 유체(幽體)는 ‘그윽하다, 숨어있다’는 뜻의 유(幽)자를 쓰는 데 이는 보이지 않는 몸이라는 뜻이다.
육체 속에는 넋이 깃들어 있고, 유체 속에는 혼이 깃들어 있다. 혼은 유체보다 더 영적이며, 유체는 혼이 깃들어 있는 그릇이라 할 수 있다.
육체와 유체는 혼줄로 연결되어 있는데 혼줄이 끊어지면 죽음에 이른다. 육체를 버리면서 지상에서 의 삶을 마감하고 천상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제사는 내 생명의 뿌리에 대한 보은 이다. 죽은 사람에게는 왜 절을 두 번 하는 것일까? 설날 같은 명절 때 할아버지나 부모님께 드리는 세배는 한번 절을 합니다. 그에 비해 돌아 가신 조상님의 제사를 지낼 때는 절을 두 번 합니다.
이처럼 산사람과 죽은 사람에게 절하는 횟수가 다른 이유는 무엇일 까요? 이것은 음양사상에 따른 것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1은 양을 뜻하고 2는 음을 뜻합니다. 즉 살아있는 사람은 양이고 죽은 사람은 음이랍니다.
그래서 절의 횟수도 음양으로 구분하여 산사람에게는 한번 절을 하고, 죽은 사람에게는 두 번 절을 한답니다.
상을 당한 초상집에 가서도 이런 경우를 쉽게 접하게 됩니다. 돌아 가신 분의 영정 앞에서는 두 번 절을하고 상주 분들에게는 한번 절을 하는거죠.
참고로 절에는 2배, 3배 뒤에 반절이라고 해서 붙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은 절 뒤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허리를 간단하게 숙이는 것을 말합니다.
산사람한테는 한번 절하는 일배 뒤에는 반절이 안 붙지만 죽은 사람에게 하는 재배나 혹은 불교 에서의 삼배 같은 절에는 반절이 붙는다는 것을 알아두시면 되겠습니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면 죽은 사람에게는 두배 반을 절한다고 여기시면 됩니다. 그리고 절은 무엇보다 공손하게 올리는 것이 예의입니다. 절을 할 경우 그 손가짐 도 헛갈리는 분이 많은데,
산사람에게 절을 할 때는 남자는 왼손을 오른손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절을 하고, 여자는 그와 반대로 오른손을 왼손 위에 올려놓고 절을 한답니다.
반면에 죽은 사람에게 절을 할 때는 위 경우와 남여 각각 반대로 하면 된답니다.......🥀
ㅡ효학박사 교육학 박사,孝泉 박종윤님의 글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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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가진 믿음만큼 성장한다(I grow as much as I have faith)
인간의 능력은 얼마든지
개발될 수 있고 성장할 수 있다.
본인과 주변 사람들이 ‘한계’라고 믿는 지점이
바로 자기 능력의 한계가 된다.
-김주환<GRIT(그릿)>
지능이나 능력에 대한 믿음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하나는 ‘능력불변믿음’입니다.
지능과 능력이 이미 정해져 있어
노력해도 변하지 않는다는 믿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능력성장믿음’입니다.
지능이나 능력은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향상될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능력불변믿음을 가지면
쉬운 문제만을 풀려고 합니다.
어려운 문제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머리가 좋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입니다.
머리가 나쁘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능력불변믿음을 가지면
한 번의 실패에 쉽게 굴복합니다.
실패를 하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의심합니다.
더 이상 발전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노력해도 할 수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능력불변믿음을 가지면
과정보다 결과에 집착합니다.
서슴지 않고 부정을 저지릅니다.
결과가 능력을 말해준다고 생각해서입니다.
남들보다 능력이 뛰어나게 보이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능력은 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그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믿는 능력에 맞는 문제를 풀고,
자신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면 쉽게 포기를 합니다.
지금의 결과가 영원한 결과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능력불변믿음이 아닌
능력성장믿음을 가져야 달라집니다.
어려운 문제에도 적극적으로 도전합니다.
한 번의 실패에 굴하지 않고 다시 도전합니다.
어려움에 부닥칠수록, 실패를 할수록
더 능력이 나아진다는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지금의 결과가 영원한 결과가 아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스탠퍼드 대학 캐롤 드웩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능력불변믿음’을 가진 아이들의 능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능력성장믿음’을 가진 아이들의 능력은
계속 성장했습니다.
자신이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능력이 달라진 것입니다.
능력에 한계를 긋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은 한계가 내 능력의 한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능력이 성장한다고 믿는 만큼
내가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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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놀아요 !
한형조의 "붓다의 치명적 농담"에
나오는 이바구다
“스님도 도를 닦고 있습 니까?”
“닦고 있지.”
“어떻게 하시는데요?”
“배고프면 먹고, 피곤하면 잔다.”
“에이, 그거야 아무나 하는 것 아닙니까?
도 닦는 게 그런 거라면 아무나 도를 닦고
있다고 하겠군요.”
“그렇지 않아.
그들은 밥 먹을 때 밥은 안 먹고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고 있고,
잠 잘 때 잠은 안자고
이런 저런 걱정에 시달리고 있지.”
전에 이 글을 읽고는 속된 말로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라고 여겼다.
그런데 요즘은 이게 보통 내공이 아니면
힘든 것이겠구나 싶다.
머리를 단순화 시키는 작업, 그것은 우연이나 성격이 아니라 부단한 노력과 수련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이 든다.
은퇴 하고 제일 많이 듣는 말이 있다.
"요즘은 뭐 하시며 지내세요"?
그때마다 이렇게 대답한다.
"그냥 놀아요"
그러면 모두들 의아하게 생각한다.
현직에 있을 때는 새벽에 일어나고
밤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이 생활 습관은 특별한 경우를 제외 하고는
은퇴 후에도 변한 것이 없다.
그런데 현직에 있을때는 모든 것이 일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것이 놀이다.
그들은 일도 놀이처럼 하는 내 생활을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놀이가 일이고 일이 놀이라고
생각하며 생활한다.
그러니 "그냥 놀아요" 가 내 대답이다.
오래전에 버틀런트 러셀의
"게으름에 대한 찬양"
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그 때는 별로 마음에 와 닿지 않았는데 나이가 쬐끔 들고 보니 "찬양"의 의미를 알 것도 같다.
우리 모두는 너무 바쁘게 산다.
"나 요즘 너무 바빠, 바빠서 정신이 없어"
이렇게 타인에게 말하면 뭔가 좀 있어 보이기도 한다.
바쁜 것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의 일원으로서 오랫동안 살다보니 우리 스스로도
뭔가 할 일이 없으면 불안해지거나,
불러주는 이가 없으면
소외감을 느끼거나,
늘상 무엇인가를
해야하고,
늘상 무엇인가에 쫓기듯 살아야
오히려 마음이 편하게 느껴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러셀"이 말하는 게으름이란 '개미와 베짱이' 에서의 베짱이 처럼 놀고 먹는 게으름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게으름이란 존재의 존엄성을 놓치지 않기 위한 여유로움과 여백이다 (뽈네 동네 여백 ?)
진정 행복해지려면 게으름을 즐기는 시간이 필요하고
그 시간을 통해서 진정한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
고 말하는 책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존재와 자유를 스스로 확보할 만한 여유가 없이 살아 가고 있다
"행복한 창조의 시간은 게으름 으로부터 나온다.
행복해지려면 게을러지라"
는 "러셀"의 처방이 저는 왠지 마음에 든다.
아일랜드 옛 시집에는
"어느 아일랜드 王의 충고" 라는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너무 나서지도 말고,
너무 물러서지도 말라.
너무 나서면 가벼운 사람으로 여길것 이고,
너무 물러서면 무시할 것이다.
너무 거만하지도 말고,
너무 겸손 하지도 말라.
너무 거만하면 까다로운 사람으로 여길 것이고,
너무 겸손하면 존중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떠들지도 말고,
너무 침묵하지도 말라.
너무 말이 많으면 말에 무게가 없고,
너무 침묵하면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너무 강하지도 말고,
너무 약하지도 말라.
너무 강하면 부러질 것이고,
너무 약하면 부서질 것이다."
결국 "너무"가 문제다.
너무 바쁘게 살지 말고 조금은 여백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야 보지 못했던 것이 보인다.
그래야 보이지 않았던 것이 보인다.
그래야 행복이 보인다.
* 덤으로 시 한편 ᆢ
사는 게 다 그런 거더라 / 박제영
지난 봄에 작은 텃밭 하나를
무상으로 임대받아
평상도 하나 만들고
밭에는 이것저것 씨를 뿌렸더라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안했나
뿌린 대로 거둔다 안했나
옥수수도 자라고 감자도 자라고
열무도 자랐는데
자라긴 자랐는데 이거야 원
씨를 뿌리지도 않은 온갖 잡초들
옥수수보다 더 크게 자랐더라
씨를 뿌리지도 않았는데 온갖 들꽃들 다투어 피었더라
이게 옥수수 밭인지
감자 밭인지 열무 밭인지
이를 어쩌나 싶은데
속 모르는 당신은 꽃 피었다고
꽃밭이 되어버린 텃밭을 저리 예뻐라 좋아라 하더라
에라이.
오늘 하루 소풍 나온 셈 치자고
꽃밭에 소풍 나온 셈 치자고
막걸리 한 사발 걸치고
평상에 벌러덩 누워 버렸더라
노고지리 우지진들 어떠랴
사래 긴 밭 나중에 갈면 또 어떠랴
에라, 모르겠다
한 숨 푹 자고 보자고
사는 게 다 그런 거더라.
오늘도 너무 바쁘게
숨너머가면서 뛰지 말고
한 번쯤 하늘도 보고
한 번쯤 사색도 하며
조금은 천천히 가시라.
그래야 삶이 즐겁다
첫댓글 아이야,
잔가득 부어라
쉬어간들 세상이 변할소냐
이렇게 저렇게 한세상 살다가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