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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 여행9 - 에보시타케 전망대에서 대마도를 양분한 만제키 운하에 도착하다!
2024년 1월 26일 대마도(對馬 쓰시마) 히타카쓰(比田勝) “히토츠바타고 렌터카” 에서 차량을 인수하니
기름을 만땅으로 채워서 주어 좋은데 물론 나중에 차량을 반납할때도 가득 채워야 하며
우리나라와 달리 운전석이 오른쪽에 있으니 좌회전과 우회전이 우리나라와는 반대라 신경을 써야 합니다.
근 한시간을 달려서 드디어 에보시타케 전망대에 도착하는데 주차장에 차를 대고는 200여개 정도의
가파른 계단으로 산을 올라 전망대에 올라 360도 파노라마를 구경하고는 다시 렌터카를 타고
남쪽으로 달려 미쓰시마로 접어드니 대마도 공항이 있어 메일 4~5편 비행기가 후쿠오카로 간답니다.
그러고는 대마도를 6개 지역으로 가르는 구분 중에 하나인 미쓰시마(三ッ島) 의 만제키
운하에 도착하는데..... 만제키세토(万関瀬戸) 는 쓰시마섬(나가사키현 쓰시마시)
의 중앙부를... 아소만과 미우라만을 사이에 두고 있는 길이 500m 짜리의 운하 입니다.
쓰시마섬의 서안인 아소만과 동안인 미우라만을 연결시켜 주는 하나의 운하인 오후나코시세토
로 부터 2km 정도 떨어진 남쪽 지역에 있으며 개발보전 항로로 지정되어 있는데
여기 아소만은 대마도의 하롱베이라고 불릴정도로 리아스식 해안으로 하천의
침식을 받은 곳이 물에 잠겨 생성된 해안선이 복잡하고 물은 잔잔하니 양식의 적지라고 합니다.
쓰시마섬의 상도와 하도를 이어주는 경계 지점에 있어, 이 곳을 관통하는 국도 노선인 382번
국도를 이어주는 교량인 만제키바시(万関橋, 만관교) 로 운하를 건너 남섬으로 가니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반도를 향해 출항하는 배들은 여기 아소만에서 출발햇디고 합니다.
먼저 개통된건 오후나시코시세토(大船越瀬戸) 니 나가사키현 쓰시마시에 소재한 운하로 쓰시마
섬의 서안과 동안을 서로 이어주는 운하이며, 1661년(간분 원년)에 공식적으로 개통되었습니다.
1900년(메이지 33년) 북쪽으로 2km 더 이격한 만제키세토가 개통되어 예전의 오후나코시세토는
어항으로 이용된다는데 이 지역을 종단하는 382번 국도에 오후나코시 다리가 조성되었습니다.
만제키세토는 1900년에 옛 일본 제국 해군이 다케시키 요코부에서 쓰시마 동해상까지 걸리는 시간
을 줄이기 위한 항로로 굴착하였는데, 그러나 그 때 폭은 25m, 깊이는 건물 지하 1층 높이에
해당되는 3m 로 러일전쟁 때 쓰시마 해전에서 수뢰정 관련 부대가 이 지역을 통해 출격하였습니다.
쓰시마 해전이란 1905년 러일전쟁 때 러시아 제국과 일본 제국이 벌인 해전으로... 일본
함대가 쓰시마(대마도) 인근에서 러시아의 발트 함대를 격멸하였으며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어 일본이 한국을 통치하는 결과를 낳고 일본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졌습니다.
쓰시마 해전은 당시까지 세계 최대규모 해전이었는데 이후 제1차 세계대전의 유틀란트
해전,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 해군과 미국 해군이 격돌한
남태평양의 레이테 해전이 기록을 차례로 경신하며 '세계 최대의 해전' 이 되었습니다.
1904년 러일전쟁 발발과 동시에 러시아의 주요 군항 뤼순이 일본해군의 기습으로 태평양
함대는 큰 타격을 받아 항구에 봉쇄된 상태였으니 이 상황을 보고받은 러시아
정부는 태평양 함대의 봉쇄를 타파하고 제해권을 장악하기 위한 획기적인 대책을 강구합니다.
본국으로 부터의 증원 함대였으니 러시아는 당시 태평양 함대 외에 흑해와 발트해
에 함대를 두고 있었는데, 흑해 함대는 오스만 제국에 대처해야 하는데다가
다르다넬스 - 보스포루스 해협의 군함 통과를 다른 열강이 용납하지 않아서
투입이 불가능했으니결국 러시아는 최후의 카드인 발트 함대를 꺼내들게 됩니다.
표트르 1세에 의해 창설되어 수백년간 러시아의 가장 막강한 해상전력으로 군림해온
히든 카드의 투입이었으니, 해군 중장 지노비 페트로비치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을 총사령관으로 하고 발트 함대를 제2태평양 함대로 개칭합니다.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은 1877년에 오스만 제국과 전쟁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세계 최강의 해군을 가진
영국에 해군무관으로 파견되어 신식 해군에 대한 이해도도 높은 편이었으며 차르의 눈에
들어 해군 행사에는 늘 참여하여 성공적으로 함포사격 시범이나 해상기동을 선보인 인물이었습니다.
투입 가능한 배는 극동으로 보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뒤, 잔존 제1태평양 함대 전력과 합세해 압도적인
해상전력을 바탕으로 일본군 함대를 격파 내지는 못해도 공세적 작전은 못하게끔 해서 제해권을 되찾는
것이니 그러면 본토에서 만주 까지 해상을 통한 보급로에 의존해야 하는 일본군은 보급로가 마비될 것입니다.
상트 페테르부르크 → 스웨덴 → 노르웨이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모로코 → 프랑스령 말리 →
가봉 → 독일령 나미비아 → 네덜란드령 남아프리카 → 마다가스카르 → 영국령 실론 섬 → 말레이시아 →
프랑스령 베트남 →미국령 필리핀 → 타이완 섬 → 청나라 → 대한제국에 이르는 엄청난 대장정 이었습니다.
1904년 10월 14일 상트페테르부르크 리바우항에서 출발한 제2태평양 함대가 일본으로 향해를 했으니
차르는 로제스트벤스키에게 노후함들을 수리하여 제3태평양 함대를 편성해 증원시킬 것을
약속했고, 합류했을 때 제2태평양 함대의 총 전력은 전함 7척, 순양함 7척, 보조순양함 5척,
구축함 9척등 총 28척의 전투함과 26척의 수송함 그리고 승무원 14,000명으로 당대의 대함대 였습니다.
하지만 11월 영국 도거 뱅크 해역에서 발트함대가 어선단에 포격을 하는 불상사가 발생하는데, 러시아
첩보기구에는 일본군 어뢰정이 유럽에 도착해 함대의 주요 행선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기습할
것이라는 첩보가 들어온 상태였는데, 일본 해군의 어뢰정은 단독으론 유럽까지 갈 능력이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리없는 러시아 함대는 북해에서 영국 어선들에 포격했고 하필이면 야간에 어선
의 기동이 일본 어뢰정에 의한 전함 측면 뇌격 시도와 흡사했기 때문에 오해할만
했는데.... 외교문제가 발생하였으나 함대는 항진해 스페인의 비고에서 함대가 나뉘어집니다.
함대는 11월 12일 프랑스령 다카르에 도착해 보급후에 12월 29일 마다가스카르 생트마리에 도착했는데
노지베에 도착한 것은 1월 초순으로 뤼순 요새가 함락되었다는 비보를 들었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하라는 새로운 명령을 받았지만 발트함대는 2개월 동안 발목을 잡히게 되는데 연료 보급 문제였습니다.
제2태평양 함대는 독일의 함부르크 - 아메리카 석탄선과 전속 계약을 맺고 있었는데, 계약이 노지베 섬에서
만료되었고 독일이 계약 연장에 비협조적인 태도라, 함대는 2개월 동안 꼼짝없이 발이 묶이고 만 것
이니 열대의 더위와 익숙하지 않은 음식, 그리고 풍토병과 맞서 싸우던 함대의 장병들에게는 악몽이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노지베를 출발한 함대는 분견대와 합류하여 4월 8일에 말라카 해협에
도달했고, 4월 14일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베트남)의 깜란항에 도착해
석탄 등을 보급받았으며 5월 9일에는 제3태평양 함대와 합류해 총 38척으로 늘어났습니다.
이때까지는 대서양과 인도양을 건너고 태평양으로 지구를 반바퀴 돌아올 때까지 탈락한 함선이
하나도 없었다는 이유로 로제스트벤스키에 대한 인정은 세계적으로 매우 높았다고 합니다.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이 발트 함대의 수에즈운하 통행을 거부함에 따라 아프리카를 돌아 아시아로 가는
수개월의 여정을 해야했고,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했다는 얘기가 있지만.... 러시아 해군이
보유한 전함의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통항 제한 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통과하지 못한 것이라 합니다.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제독은 발트함대가 무사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하면
해전에서 못 이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 일본이 전쟁 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은, 초반 기습에 의한
제해권 확보에 있었으니 발트함대가 온전히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다면 제해권은 단번에 무너질 것입니다.
다행히 발트 함대가 마다가스카르에 머무르고 있던 1905년 1월 뤼순 공방전의 결과로 뤼순이
함락되고 태평양 함대의 잔존 세력이 모두 무너지면서 도고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으며 일본 함대는 대대적인 정비와 수리를 통해 최후의 일전을 시도할 수 있었습니다.
도고는 발트 함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들어가기 전에 격파해야 승산이 있다고 봤는데, 지구를
반 바퀴나 돌아온 함대가 정상적일리는 없으니 보급에 문제가 있고, 선박들도 정도
정비가 필요하지만 그런 문제는 블라디보스토크 입항 이전에는 해결될 수 없으니 즉,
입항 이전에 러시아 함대와 조우하면 러시아 함대는 악조건 속에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2·3태평양 함대 로제스트벤스키는 반퐁항을 출발하기 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기위한 항로
를 두고는..... '수보로프' 호에 주요 사령관과 함장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습니다.
모든 것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하느냐 이를 막느냐에 달려 있었는데, 이 점에서는
도고가 불리한 상황에 있었으니 로제스트벤스키에게는 3개의 선택지가
있었고, 도고는 방어하는 입장으로서 그 3개 중 하나를 고르고 천운에 맡겨야 했습니다.
그 3개는 각각 한국과 일본 사이에 있는 대한해협, 혼슈와 홋카이도 사이 쓰가루 해협, 홋카이도와 사할린
사이에 있는 소야(宗谷)해협이었는데, 이 3개를 모두 틀어막기에는 일본 함대의 전력이 부족했으니
함대를 분산했다가는 각개격파만 당하고 러시아 함대는 그대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입항할게 분명 했습니다.
소야 해협으로 들어서자는 의견과 큐슈, 시코쿠, 혼슈 연안을 공격하면서 쓰가루 해협을 통과
하자는 의견도 나왔으나, 대부분의 참모진의 의견은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을 통과
하는 것이였으며, 함대가 지구 반바퀴인 2만 8천 8백km을 항해해 지쳐있어 전투력이
떨어져있던 걸 알고있던 로제스트벤스키 사령관의 선택 또한 대한 해협 - 쓰시마 해협이었습니다.
나머지 2개의 대안에 비하면 거리가 가장 짧아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장 빨리 도착할 수 있었으며 베트남
의 깜라인만 출항 이후 더 이상 보급을 받을수 없는 석탄 문제도 무시할 수 없었으니 당시는
증기선시대였고, 러시아 해외 식민지가 전무한 상태에서 석탄 보급은 함대의 운명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로제스트벤스키 생각은 소야 해협과 쓰가루 해협으로 일본열도를 빙 돌아 가는 것은 한니발, 나폴레옹
의 알프스원정 처럼 도박이나 다름없었으니..... 지구 반 바퀴 도는 동안에는 동맹국인 프랑스
항구에서 석탄을 보급받았지만, 이마저도 프랑스의 다른 동맹국인 영국의 압력으로 여의치 않았습니다.
영국이 방해를 한 이유는 영일동맹을 맺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앞서의 어선 포격 사건의
보복 겸해서 방해를 한 것이고, 러시아도 자체적인 석탄 보급선을 운용하기는 했지만
역시 석탄을 지속적으로 공급받아야 했으니 로제스트벤스키는 일부 함선을
다른 곳으로 보내 상선단속 활동을 벌여 일본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는 기만전술을 씁니다.
일본 참모진들은 발트 함대의 항선지를 사할린의 소야 해협을 예상하고 그곳을
지키기로 결정했으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의 생각은 달랐으니,
그는 참모진의 결정을 뒤엎고 대한 해협(대한제국의 진해)에 함대를 배치하였습니다.
그러나 러시아 함대가 출현하지 않자,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고 대본영에 홋카이도 쓰가루
해협으로 이동하겠다며 허가를 요청했으나, 대본영은 좀 더 기다려보자며 도고를
달랬고, 그후 러시아 함대의 석탄 보급선이 상하이시에 입항했다는 정보가 입수되었습니다.
석탄 보급선이 함대에서 떨어져 나왔다는 건, 러시아 함대가 최단 루트를 선택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도고
제독은 전 함대를 진해만에 집결시키고 일전을 기다렸고, 5월 17일에 베트남의 반퐁항을 출발해 대한
해협으로 향하던 제2태평양 함대는 전투를 피하기로 결정하고 5월 25일 속력도 늦추고 무전도
끊었으며 쓰시마 해협에 짙게 낀 안개와 야음을 틈타 모든 함정 탐조등도 끈 채 대한해협 통과를 시도합니다.
1905년 5월 27일 새벽 2시 45분, 발트 함대의 병원선인 '오룔호' 가 짙은 안개 속에서
밝게 켠 등불을 경순양함 시나노마루(信濃丸)가 발견하고는 은밀히 관측
하던 시나노마루는 4시경, 대규모 러시아 함대를 확인하고 급히 본대에 타전합니다.
러시아 함대 발견 소식을 들은 도고는 전 함대 출격명령을 내렸으니, 조심스레 러시아 함대를 추적하던
일본해군 연합함대는 러시아 함대가 해협에 다다를 때까지 기다리다가 그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오후 1시 55분, 도고는 기함 미카사에 전투개시를 알리며, Z기를 게양했으니 "황국의 흥폐, 이
전투에 달려 있다. 각 대원은 한층 분발 노력하라." 일본 해군은 쓰시마 해전 당시 T자 진형을 이룹니다.
가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일본 연합함대는 대부분의 군함들이 측면 방향으로 집중적인 함포 사격을 퍼부을 수
있었지만, 세로 방향으로 기동하는 러시아 발트함대는 선두의 소수 군함들만이 함포를 쏠 수 있는 불리한
조건에서 싸워야 했으니, 화력의 집중력, 규모 측면에서 일본 연합함대가 월등히 우세한 조건을 차지했습니다.
원래 도고는 어뢰정을 중심으로 하는 전법을 쓰려고 했으나 해협의 거센 풍랑으로 소형함인 어뢰정
의 작전이 어려워지자 대신 도고는 그 유명한 T자 전술을 들고 나왔으니 일본 함대가 T자 진형
을 취하는 동안 러시아 함대는 선제공격을 개시했으나.... 거리 문제로 명중탄을 얼마 내지 못했습니다.
새벽 이후 일본 함대와 꼬리잡기와 기동전 중에 함대진형이 3열로 바뀌면서 일본함대가 진형 정비를 마치는
시간동안 충분한 화력집중을 하지 못했으며, 일본 함대는 14노트로 기동하고 있었지만 러시아 함대는
11노트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고, 일본 함대가 6,000~7,300미터 까지 측정이 가능한 최신형 영국제
측거의를 장비하고 있었던 반면 러시아 함대의 측거의는 유효 측정거리 4,000미터 정도에 불과한 구형이라?
5분 만에 진형정비를 마친 일본 함대의 집중포화가 러시아 함대를 강타했으며 그 이후 일방적인
학살이었으니..... 기함 수브로프가 제일 심한 집중포화를 받았고 도고는 함대 지휘부 부터
무력화시킨다는 계획으로 모든 화력을 기함 수바로프와 고위급 제독들이 탄 함선에 퍼부었습니다.
사령관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으며, 사령관을 어뢰정으로 옮긴 이후 기함 수브로프는
침몰했고 오후 7시 40분, 러시아 함대 잔존함들이 도망치고 어둠이 깔린후에야 전투가 종결되었는데
러시아의 전함들이 쉽사리 격침당한 이유는 프랑스식 텀블홈 형식의 선체를 사용한 전함이기 때문 입니다.
다음날 5월 28일 추격전이 시작되었으니 로제스트벤스키가 중상을 입은후 지휘권을 이양받은 네보가토프
제독은 무조건 항복했고, 도고는 포로들을 정당히 잘 대우해줄 것임을 약속했는데 전쟁 역사상
최고로 포로대우를 잘했으니 치료 부터 식사 제공, 우편서신, 개인소지품 소유등..... 같은 날
오후 로제스트벤스키가 타고 있던 고속정 부이니호가 일본 함대에 발각되어 최고사령관마저 포로가 됩니다.
러시아 최강 함대로 일컬어지던 발트 함대는 총 37척 가운데 전함 6척, 순양함 3척을 합해 19척이 격침되었고
주력 전함 2척을 포함한 7척이 항복, 나포되었으며 후방에 순양함 3척과 기타 선박들이 도주
했으며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운좋게 도착한 함정은 3척뿐으로 사실상 함대 전멸의 괴멸적 피해를 입었습니다.
기존의 태평양 함대가 여순에서 입은 피해까지 생각하면 러시아 해군은 사실상 소멸한 것이니
이제 러시아에 해군이라고 할만한 것은 흑해 함대가 유일했고 인명피해도 커서
장교, 사병을 합쳐 전사자도 5,380명에 달하고 중상자도 많았으며 포로도 6천여명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어뢰정 3척을 잃고 117명이 전사했을 뿐이니 세계해전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압승이었고
이 전투로 러일전쟁의 승기가 일본으로 완전히 넘어갔으며 일본 전역은 전승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이때 울릉도 연안에서 자침한 블라디미르 모노마흐급 장갑순양함인 드미트리 돈스코이함에
러시아군의 군자금인 금화가 잔뜩 실려 있었다는 소문이 있으니, 2018년 7월 모 투자
회사가 침몰한 돈스코이함의 선체를 해저에서 발견했다며 대규모 투자 사기를 쳤는데
증거 자료나 화면은 모두 타이타닉 같은 영화의 장면을 교모히 짜집기한 것에 불과 했습니다.
1900년 옛 일본 해군에 의해 가설된 철교는 길이 100미터에 폭 5.5미터 높이 36미터였다는데, 1955년에는
만제키바시가 다시 설치되었으니, 재차 설치된 만제키바시는 홍예교 형태를 띈 구조로 단장된 교량
이며 1974년 7월에는 개발보전항로로 지정되어 1975년 3월 폭 40m 와 수심 4.5m 로 확장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운하가 쓰시마섬의 상도와 하도를 서로 연결시킬 수 있는 경계선이기 때문에, 이 지역을
관통하는 국도 노선인 국도 제382호선이 이 교량을 관통시켜 주는 만제키바시
(万関橋)가 놓여 있으며 만제키전망대에 오르면 만관교와 리아스식 해안을 조망할수 있다고 합니다.
다시 렌터카에 올라 조금 달려서 허기가 지는지라 Foods Market Saiki 라는 곳으로 들어가서는
도시락과 빵 등을 구입해서 차 안에서 먹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에 해당하는
곳으로 큰 마트는 사이키 밸류라고 부르고 슈퍼 같은 작은 마트는 다케스에 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대마도에는 편의 점은 적으나 마트는 많으니 히타카츠항의 곤피라신사 맞은편에 히티카츠가 있고,
히타카츠 외곽에 오우라가 있으며, 도요타마에 같은 이름의 밸류가 잇으며 상도와 하도
중간에는 미쓰시마가 있고 이즈하라 외곽에는 맥스밸류 같은 대형 슈퍼마켓이 있으니 편의점
보다 다양한 즉석식품이 많으며, 가게 하나 없는 후미진 곳을 지날 때는 자판기는 어디에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근에는 아소베이파크라고 해서 캠핑장, 생태공원, 골프장, 광장, 전망대, 말타는 곳
까지 갖춘 큰 공원이 있으며 또 쓰시마 미니어처, 가리비 모양 천장을 가진 야외 무대,
테니스코트, 야구장, 미끄럴틀을 갖춘 쓰시마 그린파크 그리고 에메랄드 바다 빛이 반원을
그리며 초승달 모양의 해안을 가진 카쓰미 해수욕장이 있다지만 시간이 없어 들러지는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