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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자연풍광 속에 자리한 세이켄지(淸見寺)는 조선통신사들의 시흥을 불러일으킨 곳이자 '통신사 박물관'이나 다름없다.
5. 28세 아버지와 47세 아들
사찰 본당은 우리 통신사가 남긴 시판과 현판 등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그야말로 통신사 유물 전시관이나 다름없었다. 현지의 안내 봉사자인 후시미 고사쿠伏見鑛作 씨가 열심히 설명을 했고, 탐방단과 동행한 부산대 한태문 교수가 보충 설명을 하여 통신사의 묵향을 이해하는 데에는 다시없을 좋은 기회였다. 특히 한 교수는 이 부문의 최고 전문가여서 「세이켄지 소재 시문에 반영된 한일문화교류」라는 논문을 발표했고『세이켄지 소장 조선통신사 유물도록』의 해설을 맡기도 했다.
세이켄지는 조선통신사와 관련된 시문자료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어서 1994년 히로시마 현廣島縣이 후쿠젠지와 함께 조선통신사 유적으로 국지정사적國指定史跡으로 지정했다. 우리의 국가지정문화재와 같은 것이다. 이곳 세이켄지에는 53편의 시와 2통의 편지 등을 수록한 『조선국통신사시문첩朝鮮國通信使時文帖』, 19개의 시판詩板, 2폰의 괘폭장掛幅裝 및 7개의 편액篇額 등 다양한 시문자료가 존재한다. 한태문 교수는 앞의 논문에서 『조선국통신사시문첩』에 수록된 시는 게시의 효과가 큰 시판 또는 괘폭장으로 제작된 것이 많고, 1607년 사행의 삼사와 1655년 사행의 종사관 남용익이 남긴 시 및 세이켄지 주지의 시에서 보다시피 차운시次韻詩가 주류를 이루며, 사행록에서 찾을 수 없는 1607년 사행의 시문도 존재한다면서 세이켄지에 있는 시문자료의 특징을 기술했다.
본당에 걸린 ‘흥국興國’이라는 현판까지, 우리의 눈길을 끌지 않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에게 큰 여운을 안겨준 것은 아버지 남용익과 그 아들 남성중의 시가 함께 걸려 있는 것이었다. 남용익은 1655년 28세 때 제6차 통신사행에 종사관으로 참여하여 세이켄지에 들렀을 때 시를 남겼다. 그로부터 56년이 흐른 1711년 제8차 사행 때는 아들 남성중이 세이켄지를 방문하여 아버지의 필적을 발견하게 된다. 그의 나이 47세였는데, 아버지는 작고한 지 어언 20년이 지나 있었다. 아들은 아버지 글에서 차운하여 시를 남긴다.
막부에 올린 이름 선현에 부끄러운데
아비의 옛 자취를 남긴 시에서 되찾았네
안덕사(安德祠)에 남은 생애 다하지 못 해
오산(鰲山) 해 저무는 하늘 향해 눈물 뿌리네
아버지께 행차 머무시는 곳
어린 자식도 구슬신 신고 지나는데
다만 시편만 남아 있어
슬피 읊조리니 감회가 많네
특별히 상서로운 연기는 삼신산과 흡사하여
제천의 상서로운 비 만다라 꽃이 되어 날리는데
이끼 낀 옛 탑을 손으로 만지나니
선친께서 남긴 이름 몇 층에 있는고
한태문 교수는 원래의 한시를 한글로 옮겨 놓고 “먼 이국땅에서 아비의 필적을 발견한 자식의 애틋한 마음이 저절로 묻어난다. 이들 부자의 시는 현판으로 제작되어 나란히 세이켄지의 대방장大方丈에 걸려 있어 부자 상면의 감격을 오늘날까지 고스란히 전하고 있다"라고 했다. 또한 제자인 종사관 이방언李邦彦 역시 스승의 시문을 접하고 “나도 호곡 옹壺谷翁의 문객인지라 두 눈에 흐르는 눈물 차가운 하늘에 뿌릴 수밖에”라고 그 감회를 읊은 것을 함께 볼 수 있었다.
세이켄지에서 남용익 부자의 시문에 대한 화제가 꽃을 피우자 안내봉사자 후시미 고사쿠 씨는 최근 자신이 겪었던 일화를 소개했다.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가 2006년 펴낸 『세이켄지 소장 조선통신사 유물도록』에서 자기 선조 경섬의 글을 발견한 대구大邱의 한 상공인이 최근에 나고야에서 열린 회의에 참가했는데, 일정을 하루 연기하여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세이켄지까지 찾아왔다고 한다. 이 도록을 계기로 조선통신사 삼사의 후손 조직이 만들어졌으니, 21세기 조선통신사 부활의 한 징표라고 하겠다.
강홍중의 『동사록』에 “절의 경내에는 기화요초琪花瑤草에 폭포수와 맑은 연못이 있으며······”라고 쓰인 그대로 세이켄지 경내는 지금도 기화요초가 만발하고 있었다. 우리 답사단은 ‘통신사의 박물관’과 같은 대방장을 한 바퀴 돌아보면서 세이켄지의 명물 폭포를 지켜보았다. 후원 너머 푸른 숲 사이로 흰 포말을 일으키며 쏟아지는 시원한 폭포수가 폭염의 위세까지 무력하게 만들었다. 지난해 5월에 왔을 때는 폭포수가 흘러내리지 않았는데 어쩐 일인가 했더니 우리 탐방단을 환영하느라 특별히 사찰 측에서 폭포의 물이 쏟아지도록 배려를 했다고 한다.
6. 마치 의상루에 앉은 듯
경섬의 『해사록』에서 기암괴석과 기화요초가 있는 작은 섬에 짧은 돌다리와 금잔디로 치장된 곳이라고 묘사된 후원의 연못은 폭포 소리가 어찌나 우렁찼던지 시작詩作을 방해할 정도였다고 했다. 절 앞의 바다와 뒤의 폭포는 세이켄지를 우리나라의 낙산사落山寺와 비견하게 했는데, 그러한 연유로 세이켄지에는 통신사가 그린 4폭 병풍 <산수화조도압회첩병풍山水花鳥圖押繪帖屛風>이 소장되어 있다. 세이켄지를 낙산사에 비견한 것은 앞에서 말한 바 있는 남용익이 처음이었다.
남용익은 에도로 향하는 새벽길에 지났지만 일정이 바빠 들르지 못하고 스쳐 지나야만 했다. 그는 “절을 지척에 두고 나그네는 오르지 못하니 … 돌아갈 때는 이 절의 부들방석 빌려 졸며 유쾌하게 선루禪樓 제일층에 기대보리라”라는 시로 아쉬운 마음을 대신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밤인데도 불구하고 세이켄지에 들러 그 풍광을 마음껏 누렸는데, 이때 세이켄지를 우리나라의 낙산사와 견주었던 것이다.
‘의성의 요청에 따라 어두운 뒤에 세이켄지에 잠깐 들어갔는데, 대개 갈 때는 걸음이 바빠서 좋은 경치를 구경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눈앞에 총총 벌여 있는 경치는 등불 밑이라 비록 자세히 볼 수는 없으나 앞의 바다와 뒤의 폭포가 맑고 그윽한 것이 우리나라 낙산사에 못지않을 듯하였다.’
남용익은 사행 기록인 『부상록』에 위와 같이 썼다. 그는 당시 일본의 외교승 등과 시문을 통해 ‘후지 산 - 금강산 우열논쟁’을 벌여 우리나라의 산수경관이 일본보다 빼어나다는 주장을 강하게 드러냈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세이켄지에서는 “앞의 바다와 뒤의 폭포가 맑고 그윽한 것이 우리나라 낙산사에 못지않을 듯하다”라며 긍정적으로 평가했던 것이다. 특히 이 사찰의 폭포를 높이 평가한 것이 주목된다. 세이켄지를 낙산사와 비교하는 전통은 이때부터 1763년 사행까지 이어졌다.
경내를 거닐며 신선 부구(浮丘)를 따를까 생각하다
우연히 고승을 마주하여 선문답을 나누는데
바닷물 하늘 맞닿은 곳에 아침에 올라오니
마치 의상루(義湘樓)에 앉은 듯하여라
1748년 사행의 정사 홍계희洪啓禧는 세이켄지에서 맞이한 일출이 마치 낙산사 의상루에 앉은 것 같다는 감회를 위와 같이 썼다. 그는 당시 세이켄지 주지인 쇼카이 게이조性海惠丈의 시에서 차운次韻하여 위와 같은 시를 쓴 것이다. 이 시의 말미에 “선배들은 세이켄지가 우리나라 낙산사와 비슷하다고 하였는데, 낙산사에 의상루가 있기에 이른 말이다”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여기서 선배란 1655년 사행의 남용익을 가리킨다. 원중거元重擧는 『승사록乘槎錄』에서 “세이켄지는 호곡 이후로 우리 사행들이 항상 낙산사와 비교하여 백중伯仲이라고 일컬었다”며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대개 면류관을 쓴 듯한 모습이 높고 귀하며 웅장하게 뛰어남이 특히 빼어난 것은 낙산사로 진실로 천하의 명승이다. 그러나 평온하고 온화하며 영롱한 데다 겸하여 시내와 폭포의 빼어난 경치는 세이켄지가 뛰어나다. … 나지막한 산들이 점점이 바다로 들어가 안팎의 포구와 모래톱의 사람과 안개 및 소나무와 대나무가 길게 먼 형세를 이루며 배들이 그 사이에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이는 또한 낙산사에는 없는 것이다. 요컨대 낙산사와 백중이 된다고 하여도 해가 될 것이 없다.’
1763년 사행의 정사 조엄은 휘하의 화원에게 부탁하여 낙산사 그림을 그려 귀로에 주시기를 바란다는 세이켄지 주지의 간곡한 부탁을 받게 된다. 조엄은 사찰의 보배로 삼아 영구히 보관하겠다는 주지의 말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화원 김유성金有聲에게 낙산사와 금강산 그림을 그려주도록 명했다. 그 결과물이 세이켄지가 소장하고 있는 4폭 1척의 <산수화조도압회첩병풍>이다. 이 병풍에는 낙산사와 금강산 외에도 매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18세기 중엽 조선의 수묵화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세이켄지의 역대 승려는 시문창화 능력이 뛰어나서 통신사의 시문을 높이 사고 잘 보존해왔다. 그렇기에 지금의 세이켄지가 ‘통신사 박물관’과 다름없는 사적지로 이름을 높일 수 있었다. 가쓰시카 호쿠사이葛飾北齋의 <동해도오십삼차> 중 <유이由井>는 통신사 일행의 한 사람이 일본의 관리나 승려 앞에서 먹의 흔적도 선명하게 ‘세이켄지淸見寺’라고 적고 있는 그림이다. 이것은 상상도이지만 조선통신사와 세이켄지의 깊은 관계가 널리 알려진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조선통신사들이 찬미했던 세이켄지 정원은 지금 국가 지정 명승으로 이름이 높다. 또한 못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고 만든 산문山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접목한 매화나무, 어릴 때 이에야스가 공부했던 방 등이 잘 보존되고 있어 유서 깊은 사찰임을 웅변해준다. 무엇보다 이 사찰 경내의 산기슭에는 다양한 표정을 한 ‘오백나한五百羅漢’의 석상이 방문객의 눈길을 끈다. 에도 시대 슨푸에서 병사한 류큐琉球 왕자의 무덤도 있어서 에도 시대에 문화 교류가 왕성했음을 알려준다.
세이켄지는 스루가 만을 앞에 둔 풍경의 명아함과 함께 역대 승려들의 사문창화 교류 등으로 인해 지금까지 찬연하게 빛나고 있다. 하지만 통신사들이 그토록 찬미했던 이 사찰 주변의 경치는 지금 어떠한가? 현대화 물결에 밀려 망실되거나 가려지거나 하여 사라지다시피 했다. 절의 경내를 끊어 철길이 가로질러 가고 해변에는 고가도로와 창고 건물 등이 들어서 절경의 미호 송림도 보이지 않는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