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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다오 7 - 칭다오 해변 5.4 광장에서 LED 조명을 구경하고 완샨청에서 저녁을!
2025년 9월 7일 칭다오에서 웨이하이( 威海 위해) 에 가서 페리로 위궁다오 (刘公岛) 로 상륙해서는
갑오박물관에서 청일전쟁을 구경하고 웨이하이 국제 해수욕장 威海国际海水浴场 에 도착해
해변을 구경한 후에 웨이하이북역에서 기차로 칭다오 북역에 도착해 지하철로 5.4 광장역에 내립니다.
해변 앞에 5.4 광장에는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이틀간은 모든 건물에 오색 영롱한 LED 불이 들어오기 때문에
환상적인데..... 진정한 칭다오의 랜드마크는 5.4 광장 부근 빌딩들의 야간 라이트 쇼이니 고층 건물
들이 LED 처리가 되어 있어 야경을 보면 주변의 건물들이 하나의 큰 스크린으로 이어진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우쓰(5.4) 광장은 중국판 3.1 운동인 5.4 운동의 시발점이 칭다오인 것을 기념
하는 공원으로, 밤마다 칭다오 맥주 가판대가 성업하며 붉은 조형물
은 오월의 바람이란 작품으로.... 높이 30m 에 무게 700톤에 이른다고 합니다.
5.4 운동은 중화민국의 반제국주의 민중운동으로 좁게 보면 1919년 5월 4일 베이징시 학생들의
시위만 부르는 명칭이지만 전국적 으로 퍼져나간 시위와 신문화운동을 포괄해
5.4 운동이라고 부르니.... 후스는 1938년에 "5.4 운동은 아직 진행되고 있다." 고 언급했습니다.
1911년 무한에서 만주족 청왕조에 대항해 일어난 신해혁명 이후 중화민국은 혼란에 빠졌으니
위안스카이가 과욕으로 중화제국의 황제가 되려고 하다가 홧병으로 사망했고
북양 군벌도 직계, 환계, 나중에는 봉계까지 난립해 아귀다툼을 벌였으며, 1917년
에는 청 왕조의 복벽 시도와 쑨원의 광동 호법 정부의 구성으로 중앙정부 마저 둘로 쪼개집니다.
신해혁명으로 인한 자극, 사회주의 사상의 전파, 백화문 사용을 둘러싼 문학혁명 논쟁이 벌어졌고
게다가 신해혁명 이후 언론계가 엄청 확장되었기 때문에..... 1910년대 말의
베이징시는 민족주의에서 무정부주의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상들은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조선에서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렇게 무기력하게만 있을수는 없는 노릇이니 우리도
무언가 해야 한다" 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일기 시작했고 또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 주의도 산둥에 대한 권리를 회복해야 한다는 사고로 이어집니다.
청 말부터 유학생이 늘면서 서양 사상의 영향이 깊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노동자나 프랑스
유학생들의 열악한 대우가 알려지면서 민족주의를 자극했는데, 이들은 귀국
하면서 후일 1920년대 노동운동등 사회운동의 기반이 되었고 5.4 운동의 열기를 데운 원인이 됩니다.
5.4 운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파리 강화 회의였으니 일본은 1914년 8월 독일에 선전포고 를 한뒤
중국에 있던 독일의 조차지 칭다오시를 비롯 산둥 반도 전역에서 군사행동을 벌였고
이어서 1915년 1월 18일에는 위안스카이의 베이징 정부에 이른바 '21개조 요구' 를 제기했습니다.
이 탓에 중국인들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칭다오가 중국에게 반환되기 바라고 있었으니... 1918년
11월 11일에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정부는 3일간의 휴일을 공포했고 각지에서 축하 행사
가 거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연합국이 중국에 칭다오를 반환해 줄 것 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은 칭다오의 권리에 대해 중국 정부와 비밀 협상을 마친 상태였고, 연합국
역시 1차 대전에서 연합국으로 승전국인 일본에 권리가 있다고
보았으니.... 파리 강화회의는 칭다오에 대한 독일의 권리를 일본에 넘기기로 결정합니다.
학생들은 21개조 조약을 수락한 5월 7일에 2만 5천명의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하니 정부는 시위를
단속하려고 했지만 이는 오히려 분노를 야기하여 시위 날짜를 5월 4일로
사흘 앞당기는 결과만 낳았고 마침내 오전 10시에 학생 대표가 모여 시위를 강행하기로 결정합니다.
5월 4일 오후 1시 학생 3천여명이 천안문 광장에 집결하자 교육부 대표와 육군, 경찰 총감이 학생들을
달랬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대회와 데모를 치른 뒤 전북경학생 선언이 배포되었습니다.
산동의 상실은 중국의 영토 보전의 파괴다. 중국의 영토가 파괴되면 중국은 곧 멸망할 것이다. 오늘 대오를
갖춰서 각국 공사관으로 가서 정의를 지지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전국의 농공상
각계각층이 모두 일어나 국민대회를 열고 국적을 제거하기를 바란다. 중국은 망하려 한다. 동포여, 일어나라!
아, 국민이여! 경애하는 애국 동포여! 5대국은 일본이 우리에게 강요한 치욕적인 비밀조약과 오랫동안 희구하던
칭다오와 산둥의 독일 이권의 반환에 관한 그들의 결정에 대해 우리에게 동의를 구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이 문제들을 중일 간의 직접 협상으로 처리하기로 하였다. 이 흉보에 하늘도 빛을 잃었다.
독일과 알자스- 로렌을 위한 투쟁에서 프랑스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외쳤다.
아드리아해를 위한 투쟁에서 이탈리아인은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라고 외쳤다. 조선인도 독립투쟁에서 "우리에게 희망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를 외쳤다.
우리는 이제 나라가 복속의 위협을 당하고, 영토가 할양되려는 위기에 임박해있다. 노예와 소나 말 같은 고통을
참을 수 없기에 구국을 바라는 동포는 없는가? 우리나라는 절박한 위험에 빠져있다. 그 운명은 실낱 같다!
대회 후 2시에 학생들은 천안문에서 중국의 국기 5색기를 들고 그 뒤에는 전통적 중국의 장의용
두루마리 가 뒤따랐는데 거기에 "루쭝위(陸宗輿), 장쭝샹(章宗祥), 차오루린
(曹汝霖 의 이름은 천년간 악취가 나리라. 베이징 학생들은 눈물로 그들을 애도한다." 고 쓰여 있었다.
행렬이 공사관 구역의 입구에 들어서자 경찰들이 치외법권이었던 공사관 구역의 입장을 막아섰다.
학생 대표들이 부재중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공사들에게 진정서를
남겼다. 이후 2시간 동안 입장을 거부당하자 점차 학생들과 시민들의 감정이 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외교부로 가자!", "매국노 집으로 가자!" 를 외치기 시작했다. 워낙 갑작스러운 변화에 데모
지도자로 뽑힌 학생도 말리지 못했다. 그들은 북쪽으로 가면서 단기서를 위시로 한
군벌들과 외교관들의 이름을 불렀다. 4시 30분경 외교부 관사 근처의 차오루린의 집에 도착했다.
경찰과 헌병들은 학생들을 강제로 퇴거시키려 하였다. 이에 분노한 시위대는 돌과 백기를 창 안으로 던지고
정문을 열고는 집에 불을 질러버렸다. 이때 거실 안에서 장쭝샹이 발견되자 학생들은 구타
했으나 경찰이 개입해 곧바로 흩어지자 경찰이 32명을 체포했다. 이후 공사관구 주변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학생 시위대들은 7시경 인원 확인 결과 몇명이 돌아오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계엄령 아래서 재판 없이 즉결처분될수 있다는 소문에 크게 분노하여
베이징 대학 총장 차이위안페이를 포함한 회의를 열어 학생들을 석방시키자고 결의했다.
학생들의 시위에 북양정부는 크게 당황했지만 돤치루이는 자신을 공격한 대학들을 혐오해
강경 진압을 요구했고 군경을 증강시켰는데, 중국 민중의 대다수는 학생들을 옹호
하게 되었으먀 같은 날 베이징에서는 3천명의 학생들이 체포된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정부는 언론을 검열하고 해저전신을 단절시켰지만 무선통신 까지 막을수는 없었으니, 학생들은 텐진 조계
를 통해 전보를 보내 다음날 5.4 운동은 상하이시에도 알려지게 되었고 항의 전보가 쇄도했으며
5월 6일 상공회의소는 일본과 상업 관계를 단절시키고 매국노와 압제적 관료들을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또한 상하이에 체류하면서 광동 정부의 대표로 협상을 담당하던 탕사오이 역시 관대한 처분을 요구하였고,
쑨원 역시 학생들을 지지하고 베이징에 항의 전보를 보냈다. 광둥 정부 역시 학생들을
지지하는 회의 결과를 각 성에 통보하였는데 이게 원인중 하나가 되어 5월 15일 양측간 협상은 결렬되었다.
5.4 운동의 영향은 사방으로 퍼져나갔고 2주 만에 베이징시, 난징시, 톈진시, 상하이시, 우한시
와 같은 도시에서 대규모 시위가 진행되었으며 그 밖에도 허베이, 장쑤, 저장,
산둥, 후난, 산서, 섬서, 허난, 안후이, 장시, 푸젠, 광둥, 광시성에도 학생 시위가 발생하였다.
또 도쿄도에서도 5월 6일 4천명의 중국 유학생들이 시위를 전개해 70명 안팎의 경상자와 29명의
중상자를 내었고 32명이 체포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었다. 차오루린은 5.4 운동
당시 교통총장으로 산둥 21개조 체결 당시 외무총장이었고 장쭝샹은 5.4운동 당시
주일공사이며 루쭝위는 산둥 21개조 조인 당시 주일공사다. 이 셋은 대표적인 매국노로 악명을 떨쳤다.
북양정부는 사회단속을 강화했으니 '매국노' 로 지명된 외교관들의 사표를 거부하고 차이원페이를 해임하였으며
학생들에게 강경한 진압을 명령하니 육군총장은 베이징을 떠났고 후임 총장으로 친군벌 인물이
임명되었다. 분노한 베이징 학생들은 5월 19일에 총동맹휴학을 결의하면서 대총통 쉬스창에게 6가지 요구를 했다.
파리강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할 것
매국노 외교관들을 처벌할 것
교육총장과 베이징대 총장을 복직시킬 것
인권옹호를 위해 정부가 학생에게 가한 억압조치를 철회할 것
5월 7일 일본정부의 중국학생 공격, 체포에 항의하고 그들의 석방과
경찰의 처벌을 얻어낼 것, 5월 15일 정지된 상하이 평화협상을 재개할 것
동맹 휴학은 전국 각지로 파급되면서 200여 개에 달하는 도시에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5월 21일
정부는 공식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고, 일본이 항의하며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자 초조해진 정부는 무력으로 학생 운동을 진압하면서 학생들이 발행한 언론들에 탄압을 가했다.
6월 3일, 정부는 경찰을 동원해 1,150명의 학생을 구속했지만 학생들은 더욱 강경하게 나섰고,
더 이상 학생들을 체포해 수용할 공간이 없어진 정부는 군중을 해산시키는 방향으로
나갔는데 베이징의 여론은 정부에 학생들의 석방을 요구하는 방향으로 나가 정부에게 불리해졌다.
6월 5일 상하이에서 동맹 휴업이 시작되어 대부분의 상점이 문을 닫았으며 또 같은 날부터 공장도 문을 닫기 시작
하여 6월 11일까지 8만명의 공장 노동자가 파업에 돌입 하였다. 노동자들의 파업을 파공(罷工), 상인들의
철시를 파시(罷市), 학생들의 동맹휴학을 파과(罷课) 라 하니 5.4 운동은 전 중국 민중의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결국 정부는 강경책으로 나가는걸 포기해 군경이 철수하였고 학생들을 풀어주는데 정부의 입장이 바뀐 건 베이징
근방의 파업으로 정부, 금융 기능이 마비된데다 경제가 마비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1922년에
칭다오는 미국등 강대국 압력에 의한 워싱턴 조약으로 중국에게 반환되지만 엄청난 보상금을 일본에 지불합니다.
중국의 5.4 운동에 영향을 준 한국의 3.1 운동은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에 대한 희망에서 비롯
되었으니..... 윌슨은 1918년 1월 8일 14개조 평화 원칙을 발표했으며 "민족적
열망은 존중되어야 한다" 며 국민들은 "자신의 동의에 의해서만" 통치될 수 있다고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면서 물거품이 되니, 식민 체제를 파괴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영국은 이라크와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을 차지했고 프랑스는 시리아와 레바논을
추가로 식민지로 얻었으며 윌슨의 미국이 제창한 국제연맹도 미국의회의 반대로 미국은 가입조차 못합니다.
영국과 프랑스 처럼 전승국은 새로 더 영토를 얻어야 하는 것이니 1차대전 전승국인 일본이 기존에 차지하고 있던
조선을 내놓는 것은 상상할수 없었던 것이며, 중국이 칭다오를 돌려받은 1922년 워싱턴 조약은 미국과 일본
이 군함 건조 경쟁으로 재정을 쏟아부으면서 적자가 누적되자 감당하기 어려워 군비축소를 위해 소집된 것입니다.
칭다오를 돌려받은건 5.4 운동등 중국이 힘을 발휘한게 아니고, 서양의 경제 식민지 중국에서 미국등
서양 세력들이 자기들 이익을 위해 일본 세력을 줄이려 강요한 것으로 러시아등의 강요로 요동
반도를 돌려받을 때 처럼 중국은 어마어마한 천문학적인 돈을 보상금으로 일본에 주어야만 했습니다.
또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는데 열강 중에 반대가 전혀 없었는데, 수많은 열강 중에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나라가 단 한 나라도 없었다는 것은..... 일본이 조선을 내 놓으면, 영국은 인도를 프랑스는 베트남을
미국은 필리핀을, 네델란드는 인도네시아를 포르투칼은 앙골라, 벨기에는 콩고,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스페인은 모로코, 이탈리아는 리비아를 내 놓아야 한다는? 일본은 전승국이니 오히려 새 영토를 더 얻어야...
여기 해변에서 야간 조명은 실컷 보았으니...... 이제 출출하니 저녁을 먹어야 하는지라
루위 (LUYU) 가 있는 칭다오 완샹청디안 ( 炉鱼 青岛 万象城店) 으로 가려고 합니다.
완샹청 믹스몰(쇼핑몰) Mix C 5층에 루위는 마늘 맛 농어찜 128 위안으로,
주문은 QR 코드 + 칭다오 맥주 + 콜라 + 공기밥 + 오이무침 +
감자사리 + 팽이버섯사리 = 총 178위안 (한화 34,000원 으로 네명 식사?
5.4 광장에서 식당 루위로 가기 위해 다시 인파를 헤치고 바다를 뒤로 하고는 천천히
걸어 나와 입구에서 지나가는 택시를 세워서 완샹청 (万象城) 으로 가자고 말합니다.
완샹청 (万象城) 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니 걸어 갈수도 있지만 이미 어두운 밤인데다가 우리는
오늘 고속철 기차를 타고 멀리 웨이하이를 다녀오느라 기진맥진한 상태러 그만 택시를 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탄 택시는 바로 가지는 못하고 옆 길로 한참을 돌아서 이윽고 완샹청에
도착하는데..... 택시 미터기 요금은 불과 15위안이 나오니 중국 물가가 싸긴 합니다.
그러고는 현대적인 큰 빌딩인 칭다오 완샹청 ( 青岛 万象城 ) 믹스몰로 들어가는데... 여긴 IFC,
스타필드와 비슷한 복합 문화공간으로 쇼핑과 식사에 엔터테인먼트가 모두 가능하답니다.
완샹청 (万象城 MIXC) 은 2015년에 개장한 대형 쇼핑몰로 빽다방, 강호동 백정 등 한국
매장이 많이 들어와 있어 한국인들도 여행할 때마다 많이 찾으며 건물 옥상에
거대한 소닉 동상이 앉아 있는게 눈에 띄는 큰 특징이었으나 안전 문제로 내렸다고 합니다.
이제 인터넷에 자주 나오는 식당인 5층에 있다는 식당 루위 (LUYU)를 찾아야 하는데... 마침 1층에 큰 안내판
이 있기로 가서 보니 각 층별로 옷집이나 카페며 식당들이 나오는지라 처음에는 쉽게 찾을 것으로 생각
했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식당 루위( 炉鱼, LUYU) 는 보이지 않는지라 결국 처녀 2명에게 부탁을 합니다.
그들 2명의 처녀들도 찾아 보지만 보이지 않자 휴대폰 길찾기 앱 고덕지도로 찾는데 식당 이름을 알려
주어도 찾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빌딩에 들어올 때 문을 열어주고 안내를 해 주던 젊은
종업원이 생각이 나서 뒤로 돌아가 부탁을 하니..... 이 친구도 한참을 찾아도 결국에는 찾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냥 에스컬레이트를 타고 5층까지 무좃건 올라가 보기로 하는데.... 5층에 도착해 몇 사람에게
물어도 모른다기에 한참 이동해서는 어느 식당에 들어가 종업원 아가씨에게 물으니 조금 더 가랍니다.
그리고 걸어가다가 또 다른 식당에 들어가 종업원에게 물어서 결국 어렵게 찾았는데 어쨌든
한참 걸었으니 한쪽 외진 곳에 있는 것 같은데? 하기사 워낙 큰 빌딩이라 아닐수도....
그런데 식당에 들어가니 많은 사람들이 식사를 하는 중인데.... 종업원이 아니라기에 만석인가 싶어
대기로 기다릴까요 하고 물으니 그게 아니고 시간이 늦어 새 손님을 받을 수가 없답니다?
지금 시간이 8시 45분이니 그럼 8시 반 부터는 새 손님을 받지 않는 모양입니다.
지금 부터는 새 손님을 받지 않아야 10시경에는 영업을 마칠수 있을 것이라...
다시 돌아오다가 보니 아직 영업을 하는 식당들이 많은지라 사위와 함께 그중에
한 곳으로 들어가니 여기도 인테리어등이 세련된 것이 아주 고급 식당 입니다.
자리에 앉아서 보니 여기 테이블에 설치된 단말기에서 주문을 해야 하나본데....
이것 저것을 보다가 전복과 해산물 요리에다가 맥주를 시킵니다.
그런데 종업원이 맥주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데.... 우린 별 생각 없이 칭다오 병맥주를
시켰더니 가만히 들어보니 1.25 리터짜리를 시키는게 어떻느냐기에 그리 합니다.
그러고는 사위와 둘이서 조금후 날라져온 맥주에 요리를 먹다가 추가로 장어에다가 밥과 만두에 또 맥주를 하나
더 시켜 먹고는 나오니 음식값은 320 위안(6만여원) 인데..... 고급식당 치고는 그리 비싸지는 않은 셈입니다.
그러고는 싱컷 먹었으니 완샹청을 나와 밤길을 걸어서 호텔 근처에 도착해서는 둘러 보니....
여긴 중국군 인민병원 앞이기도 하니 중국 슈퍼와 또 반대편에 세븐일레븐이
있으니 들어가서 맥주와 안주를 사서 칭다오 푸신 호텔 Fuxin Hotel 로 돌아와 마시고는 잡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