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 :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출연 : I. 보브로브, 비트리스 비톨디, N. 폴타브세바, 줄리아 아인스타인,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브, 알렉산드르 안토노브, 세르게이 M. 에이젠슈타인, Aleksandr Levshin
전세계 영화평론가들에 의해서 항상 가장 위대한 영화로 손꼽혀 오는 고전 최고의 명작이다. 이 영화가 무성 영화이고 흑백 영화이면서도 아직도 그러한 세계 최고의 위치를 누릴 수 있는 까닭은 '몽타쥬'라고 불리우는 편집 기법과 화면 자체의 그래픽이 지니고 있는 놀라운 힘 때문이다. 여기에다 거의 다큐멘타리에 가까운 뛰어난 촬영 기법과 픽션이 훌륭하게 어우러져 역사를 재현하고 있다는 것.
오데사 계단에서의 민중학살 장면이나 포템킨호에서 함포사격하는 장면과 돌로 조각한 사자상의 교차편집은 영화사상 가장 빛나는 '몽타주 기법'으로 간주된다. 특히 브라이언 드팔마 감독의 <언터처블>의 열차역 사내에서 유모차가 굴러내려가는 장면을 기억하는 영화팬들은 그 장면이 바로 이 영화의 오데사 계단 장면을 차용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영화의 배경은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이고, 당시 제정 러시아 함대의 기함이던 전함 포템킨호의 수병들의 반란과 그 수병들에게 공감하여 시위를 일으킨 민중들을 짜르 군대가 학살한 유명한 '오뎃사 학살 사건'이 주요 내용이다. 이런 내용 이외에 요즘의 영화에서는 보편화되어버린 '몽타쥬'라는 편집 기법을 바로 이 에이젠스타인 감독에 의해 첫 선을 보였고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영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으로 평가되는 것이다. 에이젠스타인은 바로 이러한 점과 그의 영화에 대한 끝없는 탐구열로 인해 영화학도라면 반드시 거치고 연구해야할 중요 감독으로 지명된다. 에이젠스타인은 한때는 소련 최고의 영예인 문화 영웅 훈장까지도 받았지만 스탈린 치하에서는 그의 영화 이론 때문에 많은 박해를 받기도 한 감독이다. 한동안 국내에서도 그의 이론 및 작품이 금지되기도 했다. 또 이 영화는 영국에서도 1952년에 가서 정치적 금지가 풀림에 따라 상영되었다.
에이젠슈쩨인, 푸도푸킨, 도브첸코 등의 극영화와 메르토프의 실험적 다큐멘타리가 속속 발표되면서 1920년대의 소련 영화는 그 전성기를 맞이한다. 이 시기에는 대중들이 영화라는 새로운 예술에 열광하며 이들 젊은 작가들에게 지지를 보내는 한편, 부르조아 예술에 대항하는 사회주의적 예술양식으로써 영화의 본보기를 찾으려는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졌다.
1905년 일어났던 제1차 혁명 2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영화는, 불과 27세였던 에이젠 슈쩨인이, 당시 소련연방 중앙 집행위원회의 '1905년 혁명기념위원회' 아가쟈노바 슈트코의 시나리오(1905년) 연출을 맡게 됨으로써 인연은 시작되었다. 그해 7월에 <1905년>을 포템킨호의 봉기에 중점을 두는 것으로 전환, 각색하여 만든 것이 바로 <전함 포템킨>이다. 이 영화는 한 사건을 기록한 다큐멘터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드라마이며 연극 구조처럼 보이는 5막으로 나뉘어져 있다.
이 영화의 절정은 오뎃사 계단의 시민 학살 장면이다. 계단 위에서 반란군에 환호하는 시민들, 그러나 돌연 짜르의 진압군이 나타나고, 시민들은 혼비백산하여 흐트러진다. 일렬로 다가오는 진압군과 도망가는 시민들을 에이젠슈쩨인은 그 유명한 몽타쥬 기법으로 대비시켰다. 에이젠 슈쩨인은 영화의 리얼리티를 위해 직업 배우의 연기가 아닌 진짜 수병들과 오뎃사 시민들을 영화에 출연시켜 또다른 생동감을 준다.
1905년, 제정 러시아 시대. 전함 포템킨의 수병들은 장교들의 학대와 열약한 근무 조건에 불만을 가지게 된다. 썩은 고기를 식량으로 사용한 사실은 그들의 반란의 기폭제로 작용한다. 수병을 없애버리라는 장교의 명령에 포병들은 거역하고 수병과 포병은 힘을 합쳐 동지가 된다. 전함을 완전히 장악한 이들은 승리감에 젖어 흑해 오뎃사 항구로 향하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시민들은 수병들을 환영하러 부두로 나온다. 한편 짜르의 명령을 받은 정예 코자크 군대가 출동하여 그들에 반항하는 시민들에게 무차별 공격을 가한다. 전함 포템킨에 탄 수병들을 환영하려 했던 시민들은 갑작스런 군대에 의해 피를 흘리며 쓰러져 간다. 수 많은 희생자가 나지만, 분노한 시민들은 수병들과 합세하여 봉기, 짜르의 군대와 싸우며 혁명의 대열에 선다.
그리고 압제자에게 대항하여 승리를 쟁취한다.
혁명의 시대였고, 그런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만들어진 작품인 만큼 당시의 계몽적인 분위기도 많이 느껴지긴 했지만, 비교적 자유롭게 움직이는 카메라로 찍은 다양한 앵글의 커트들이 짧게 연결되는 편집은 몽타주기법이라는 영화사적 발견 말고도 배울 게 많은 영화였다. 지금은 혁명이란 단어가 어색해진 21세기다. 어쩌면 이제 이 단어가 갖는 골치 아픈 의미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구더기가 득시글거리는 썩은 고기로 끓인 스프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을 옥죄고 있다. 좀 더 나은 삶이라고 선전해대는 그들의 상품은 깊은 늪이 되어 결국엔 우리가 빠져나오기 힘들게 만든다. 휴대폰과 승용차와 신용카드 따위에 얽매어 사는 우리는, 그래서 아직도 혁명이 필요한 지도 모른다.
전함 포템킨은 니콜라예프스크 조선소에서 건조된 다음에 1904년에 흑해 함대의 일원으로 실전에 배치되었다. 배수량은 1만 2천 5백 톤이었고, 항해 속도는 시간당 29.6km, 그리고 승선인원은 730명이었다. 포템킨 호에서의 봉기는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봉기를 촉발시킨 원인은 영화에서 묘사된 바대로 1905년 6월 14일에 썩은 고기로 만든 음식을 먹기를 거절한 수병들에 대해 함장이 징벌을 가하려는 데 있었다. 봉기한 수병들은 증오의 대상이던 장교들을 처형하고, 다른 장교들은 체포하였다. 충돌 과정에서 봉기의 지도자이자 볼셰비크였던 바쿨렌추크(G. N. Vakulenchuk)는 치명상을 입었다. 수병들은 마튜센코(A. N. Matiushenko)를 지도자로 한 함상 위원회를 선출하였다. 전함 포템킨에 소속되어 있던 수뢰정 267번도 봉기에 가담하였다. 1905년 6월 14일 저녁에 전함은 총파업이 진행되고 있던 오데사에 붉은 깃발을 단 채 도착하였다. 전함이 도착한다는 소식에 노동자들은 환호하였다. 그렇지만 접촉을 맡은 오뎃사의 사회민주당 조직의 대표자들(볼셰비키, 멘셰비키, 분트주의자들)은 전함의 지휘부로 하여금 부대를 상륙시키며 노동자들의 무장을 돕는 등의 일에서 협력하도록 설득하지 못하였다.
6월 16일에 거행된 바쿨렌추크의 장례식은 정치적인 시위로 변모하였다. 바로 이 날에 전함 포템킨은 권력과 군대가 위치한 도시 지역에 두 발의 대포를 발사하였다. 오뎃사에는 혁명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보충병이 집결되었다. 정부는 전함 포템킨이 항복하도록 강요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전함을 침몰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하여 흑해함대에 소속된 2개 분견대가 파견되었는데, 이 두 분견대는 텐드라에서 6월 17일에 합류하였다. 전함 포템킨은 분함대에 맞서고자 출발하였다. 그리고 항복하라는 제안을 거절하고는 함대 대형을 통과하여 나아갔다. "침묵의 전투"는 혁명군의 승리로 돌아갔다. 분함대의 수병들은 전함 포템킨에 대해 사격하기를 거부하였고, 오히려 "게오르기 포베도노세츠" 전함은 "포템킨" 측으로 넘어갔다. 분함대는 세바스토폴로 이동하였고, 혁명 전함들은 다시 오뎃사로 향하였다. 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는 포템킨에서의 봉기를 지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레닌의 위임을 받아 봉기를 지도하기 위하여 오뎃사에 도착한 바실리예프-유쥔은 전함 포템킨을 만나지 못하였다.
6월 18일 저녁에 전함은 267번 어뢰정과 함께("게오르기 포베도노세츠"의 하사관들은 항복하고 배를 정부측에 넘겨주었다) 연료와 식량을 보충하기 위하여 루마니아의 콘스탄츠로 출발하였다. 여기서 선상 위원회는 6월 20일에 "모든 문명 세계에 대하여"와 "모든 유럽 열강들에게"라는 호소문을 전달하였다. 여기서 포템킨 수병들은 단호하게 차르 체제에 대항하여 싸울 것을 선언하였다. 루마니아 당국은 전함 포템킨에 필수품을 전달하기를 거절하였다. 전함 포템킨은 6월 22일에 페오도시야에 도착하였으나, 여기서도 석탄과 식량을 얻지 못하였다. 6월 23일에 포템킨 호는 다시 콘스탄츠로 돌아왔고, 6월 25일에 수병들은 루마니아 당국에 배를 인계하였다. 포템킨 호 수병들 중 일부는 1905년에 러시아로 돌아간 다음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다. 반면에 지휘부의 대부분은 1917년 2월 혁명 이후에야 조국으로 돌아갔다. 레닌이 지적한 바 있듯이, 포템킨 호에서의 봉기는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은 혁명군의 핵심의 성립의 최초의 시도였다. 차르 군대의 중요 부분이 최초로 혁명 측으로 넘어왔다.
루마니아 당국은 차르 정부에 전함을 돌려주었다. 전함은 1905년 10월에 "성 판텔레이몬"으로 개칭되었다. 1917년 5월에 전함은 다시 "포템킨"이라는 명칭을 되찾았다가, 1917년 5월에는 "자유의 전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전함은 1919년 4월에 세바스토폴에서 국제침략군에 의하여 폭파되었다. 1918-20년의 내전 이후에 전함은 인양되었으나, 손상 상태가 심하여 해체되고 말았다.
첫댓글 고전명작이라니..미가 생깁니다
solo님은 안 갖고 있는 영화가 없다는...
solo님 강수팀장에게 연락 못 받았슈 언넝 대답하고 입금하셔
아직도 델꼬 올 회원 모집중
'배경'으로 된 이름의 온라인 번호를 기억해야 될듯...나도 이런 글 비슷한 것 어디서 듣고 보았는데...
이 자룔 주시고 설명까지 주신 솔로님. 너무 감사드립니다. 영화 매니아는 영화 매니아를 알아보는 몇가지 방법이 있는데...그중 한가지를 갖고 계십니다. 존경스럽네요. 연락드릴일이 있습니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