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석(高壇石)입니다. 높은 바위 위에 제단같은 평지가 펼쳐진 돌을 이름합니다.
고단석은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는 시선이라는 의미가 있어 단순히 돌의 형태를 넘어서, 삶의 태도나 관점에도 비유되어 애석인에게 깊은 여운을 줍니다
남한강에서 온 이 오석은 겉모습이 마치 못생긴 사과 같기도 해서 자연의 손길이 빚어낸 단단한 생명력을 느낄 수 있습니다.
돌갗의 놀라운 씻김과 패임은 영원 아래 잠시 시간이 놀다가 떨구워놓고 간 것들입니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광택은 거기에 아름다움을 더해주며 완벽히 대칭적이거나 세련되지 않아서 삶의 단단함과 거침을 보여준다고 생각해봅니다.
이 돌을 보며 내 삶을 비교합니다.
내 삶의 높이와 무게는 어떠할까요.
이 고단석의 높이만큼 오르고 싶었고 이 돌의 무게만큼 땅을 듬직히 디디고 싶었는데 말이지요.
삶에 이것을 더하는 일은 단순히 지식을 많이 쌓는 것과는 다르겠지요.
얕고 넓게 흩어진 지식은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사라질 거지만, 시간과 마음을 담은 압축된 지혜가 있어야 이 높이와 무게가 생길테니말이에요.
이 돌에 놀러와 흔적을 남긴 시간처럼, 깊이 있는 사람은 말과 행동에 수많은 생각과 경험을 담아냅니다.
그들의 말은 상황에 맞게 정확히 반응하고, 행동은 시간 속에서 만들어진 깨달음과 통찰로 이어지지요.
개념이 없는 경험은 위험하고 경험이 없는 개념은 관념으로 전락할 수 있다고 하죠.
삶의 깊이는 단순히 기술이나 재주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마음의 소실점입니다.
삶의 깊이는 겉만 번지르르하게 꾸미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찾아내고 그것을 자신답게 표현하는 데서 시작되겠지요.
나는 돌을 통해 삶의 본질을 배웁니다.
돌은 태어날 때부터 대체할 수 없는 고유의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완벽한 원본처럼 말이죠.
하지만 내가 돌을 손에 올리는 순간, 돌과 세상은 나와의 만남을 통해 새로운 이야기를 품습니다.
돌은 본질을 잃지 않으면서도 내 손길과 교감을 통해 의미를 넓힙니다.
이는 곧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조용히 가르쳐줍니다.
나를 만나 기꺼이 사본이 되어주죠.
우리는 모두 처음에는 고유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살아가면서 다른 이의 표현을 빌려 씁니다.
언어는 우리의 생각을 담는 옷입니다.
하지만 가끔 우리가 입는 말의 옷이 과하거나, 너무 구겨져 있을 때도 있습니다.
무심코 쓰는 말들과 습관적인 표현은 때로 우리의 본래 생각을 감춥니다.
돌 앉음새를 따라 나무를 파내는 일은 언어를 가다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일과 비슷합니다.
자신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돌바닥에 나무모서리가 딱 맞게 깎아내는 작업과 닮아 있습니다.
잘 벼린 언어는 생각의 결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빛을 발하는 말 속에서 때로 낯설고 새로운 생각이 태어나기도 합니다.
감정을 미적분해 잘게 잘게 쪼개서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도 삶의 재미를 더합니다.
강가나 계곡, 땅 속 같은 낮은 곳에서 돌을 찾을 때마다 오래된 이야기를 만나는 기분이 듭니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돌도 시간의 테를 가지고 있습니다.
기쁨과 고통, 희망과 좌절이 돌 속에 새겨져 있지요.
삶이 시답잖게 느껴질 때, 나는 이런 돌들을 손에 올리고 천천히 들여다봅니다.
낮은 곳에서 시작하여 위를 올려다보는 순간, 삶은 조금 더 시詩답게 느껴집니다.
(발레리는 산문과 시를 비교하면서 산문과 시의 언어의 차이는 길을 걸어가는 것과 춤을 추는 것의 차이에 비교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길은 간다는 것은 한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 가는 것이고, 거기에 중요한 것은 효율적인 이동을 위한 몸동작입니다. 이에 대하여 무도에서 핵심에 놓이는 것은 어떤 실용적인 목적이 아니라 몸의 움직임이 그려 낼 수 있는 아름다움입니다. 산문에서 지표가 되는 것은 의미 전달이죠. 이때 언어는 사회적인 의미, 의사 또는 의도를 전달하며 그 언어는 사회 관습을 따르고 대화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라야 합니다. 그런데 시의 언어는 그 자체의 몸가짐을 보여 줍니다. 그리하여 언어가 가 지고 있는 소리, 음률, 형식 등이 중요하고, 어떤 경우에 있어서 시는 순수하게 음률적 요소만으로 구성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고 했지요. 삶이 스스로 충족된 상태로 춤을 추면서 어느새 가고자한 방향으로 저절로 이동하는 것이 시다운 삶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삶의 깊이도 낮은 곳에서 출발합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삶을 들여다보는 데서 시작된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겸손'은 남들 보라고 억지로 허리 굽히는 게 아니라, 진짜로 자신을 돌아보는 태도입니다.
이런 낮은 자세로 세상을 바라볼 때, 우리는 진정으로 깊이 있는 사람이 되는 시작점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돌처럼 단단해지는 길이기도 합니다.
돌을 찾고 좌대를 짜는 과정은 내 안의 본질을 드러내는 작업과도 같습니다.
돌이끼와 물때를 걷어낼 때 돌이 가진 본래의 빛이 드러나듯이, 우리도 더할 것이 없을 때가 아니라 뺄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겠지요.
돌은 낮은 곳에서 빛납니다.
그것은 높이 오르려는 세상과 반대되는 움직임입니다.
낮은 곳으로 내려가 돌을 찾고, 그 돌에 맞는 좌대를 짜며, 진정한 무게를 손끝으로 느끼는 일. 그 과정에서 나는 내 안의 이야기를 발견합니다.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나는 낮은 곳으로 갑니다.
강가에서 돌을 찾고, 그 돌의 이야기를 들으며 좌대를 짜는 시간. 그 시간이야말로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순간입니다.
깊이 있는 삶이란 결국 이렇게 만들어진다고 감히 이야기 해봅니다.
삶의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것을 나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
삶이 시답잖을 땐,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것도 꽤 괜찮은 선택입니다.
싸가지든, 돌이든, 삶이든 중요한 건 다 그곳에 숨어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