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출문항 살펴보다가 발견하여 글을 남깁니다.
(* 제가 가끔 업로드하는 이런 게시물은 순전히 공익적인 목적입니다. 이 점 오해없길 바랍니다.)
이 문항에서 제가 짚고 싶은 점은 두 가지입니다:
1. 서로 다른 고전을 합성하여 하나의 사상인 것처럼 제시하는 문제
2. 문항에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
【 1. 지문합성의 문제 】
(나)지문은 『중용』에 나오는 그 유명한 "천명지위성 솔성지위도"인데, 그렇다면 원래는 그 다음에 "수도지위교"가 나와야 할 텐데 다른 부분이 등장했습니다. 그럼 『중용』의 해당 장이 너무 기니까 중간에 잘라서 축약한 거 아니냐 할 수도 있겠지만 1장에 저 뒷구절 자체가 나오질 않습니다. 보통 이런 경우는 해당 경전의 대표적인 주석서를 보면 거기서 일부 가져와 합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주희의 『중용장구』를 살펴보니 정말 있더군요.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고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라고 한다." - 『중용』 1-1 경문
"하늘이 음양과 오행으로 만물을 생겨나게 하니" - 『중용장구』 1-1 주석
"천지 만물은 본래 나와 일체이다." - 『중용장구』 1-5 주석
『중용』의 경전 본문 텍스트와 『중용장구』의 주석부분 텍스트는 당연히 동일한 텍스트가 아닙니다. 서로 관련성이 있다고는 할 수 있어도 주희의 주석이 곧 자사의 경전 그 자체인 것은 아닙니다. 한 경전에는 수많은 주석들이 있으며 서로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중용』은 전국시대의 자사의 작품이고 『중용장구』는 송나라 때 주희의 작품입니다. 양 텍스트를 동일한 하나로 간주하여 제시하는 일은 당연히 학술적으로 오류가 됩니다.
【 2. 정답 오류의 문제 】
물론 둘의 합성 여부를 안 따져도 (가)는 불교사상이고 (나)는 유교사상이니까 불vs유 가지고 풀 수 있고 따라서 별 문제가 안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선지에 대해서는, '무위' 개념이 나오니까 유가사상이 아닌데 (나)는 유가경전이므로 선지ㄹ은 오답이다 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선지 ㄹ의 내용 자체는 유가에서 긍정하기도 하는 내용입니다. 사실 '유가'라는 카테고리는 너무 넓어서 그 안에서 무위사상을 찾기란 전혀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편의상 우리 논의의 대상을 지문(나)의 출전들인 『중용』과 『중용장구』에만 국한시킨다고 해도, 이 문항은 오류입니다. 이 문항은 선지ㄹ 즉 ④가 오답이라고 하는 문항인데 선지ㄹ의 사상은 (나)지문의 사상과 매우 잘 부합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나)지문의 출전들이 '무위' 개념을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 텍스트상에서 확인되며, 선지ㄹ의 나머지 내용들 역시 (나)지문의 출전들의 사상과 부합한다는 점도 텍스트상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① 지문(나)는 "무위"를 부정하는가 긍정하는가?
첫째로 '무위' 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중용』 26장에서 "지극한 성실은 … 무위(無爲)하면서 이루어낸다. … 천지의 도는 만물을 생성함이 무궁하다"고 해서 무위를 긍정하고 있으며, 그에 대한 주희의 『중용장구』 주석내용도 역시 무위를 허용하면서 해설을 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선지 ㄹ에 '무위' 개념이 나온다고 해서 저 선지를 유가가 아니라는 이유로 오답 처리할 수는 없습니다. 『중용』과 『중용장구』는 무위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② 지문(나)는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따르게 해야 한다"를 부정하는가 긍정하는가?
둘째로 '무위'를 뺀 나머지 표현들을 살펴보겠습니다.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과연 유가적인 것이 아닌가? 그런데 사실 중국철학 전체를 통틀어 봐도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따르게 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하는 사상은 거의 없을 겁니다. 『중용장구』에서 찾자면 6군데 정도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1장 주석을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人]과 만물[物]이 각각 그 성(性)의 스스로 그러함[自然]을 따르게 되면 일용(日用) 사물(事物)의 사이에서 각기 마땅히 행해야 할 길이 있지 않음이 없으니 이것을 이른바 일컬어 도(道)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ㄹ에서 '무위'를 뺀 나머지 표현, 즉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한다"는 표현 역시 『중용장구』의 사상에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장에서도 찾을 수 있습니다. 22장에서 "사물의 성을 지극히 하면 천지의 화육을 도울 수 있게 된다"고 했는데 이 천지의 화육에 대해 32장에서는 "그 천지의 화육을 안다면(바로 앞인 31장과 연계하면 이 화육을 아는 사람은 성인을 의미함) 다른 의착할 것이 없다"고 했고, 그에 대한 『중용장구』의 주석부분에서는 "이 모든것이 지성무망의 스스로 그러한[自然] 공용이니 이외의 다른 외물에 의착할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성인에 대해 27장에서는 "성인의 도는 만물을 잘 발육되게 해준다"고도 했으니, 지금 언급한 것들을 종합해보면 자연스러움, 천지의 화육, 만물의 발육 등이 전부 상호간에 유기적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③ 지문(나)는 "만물이 무위의 자연스러움을 따르게 해야 한다"를 부정하는가 긍정하는가?
그렇다면 마지막으로, '무위'도 긍정하고 '만물이 자연스러움을 따라야 한다'도 긍정하는 건 알겠는데, 만물이 '무위의 자연스러움'을 따르라고 한 부분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이는 '자연스러움'이 '무위'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살펴보면 될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증거까지는 제시하기 어렵고, 간접적인 근거로서 여러 군데에 흩어져 있는 사상의 조각들을 섬세하게 분석해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성실[誠]은 자연히 이루어가는 것[自成]이다. … 성실함이 없으면 만물[物]도 없다." (『중용』 25-1·2)
"성실[誠]이란 자신을 이루는 것이지만 일단 자기를 스스로 이루어가게 되면 자연스럽게[自然] 다른사물[物]에로 미치지 않을 수 없다.(* 위의 25-1 구절과 함께 음미할 것) 그렇게 되면 도가 다른사물에게도 널리 행하여지지 않을 수 없다." (『중용장구』 25-3)
"지극한 성실[誠]은 쉼이 없는데 쉼이 없으면 유구하게 되고[久], … 널리 유구하면[久] 강제가 없다[無疆]. 이와 같은 자는 내보이지 않아도 드러나며, 움직이지 않고도 변화시키며, 무위(無爲)하면서 이루어준다[成]." (『중용』 26-1·5·6)
"무위(無爲)하면서 이루어준다[成]는 것이란 강제가 없음[無疆]을 가지고서 말한 것이다." (『중용장구』 25-6)
"성실[誠]이란, 만물[物]이 자연히 이루어감[自成]에 있어서 의거하는 바[所以]이다." (『중용장구』 25-1)
위의 인용문들을 보면, 우선 만물이 있으려면 우주의 '성실'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성실'은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성실에 있어서의 이루어감'은 '무위'하면서 이루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성실에 있어서의 이루어감은 자연스러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즉 무위적인 이루어감의 성질 중 자연스러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곧 '무위의 자연스러움'입니다. 그런데 이런 특징을 지닌 '성실함'이란 '만물이 자성하는 소이연'이며, '성실이 없으면 만물도 없다'고도 합니다. 이를 합치면 '만물은 무위한 자연스러움을 포괄하는 성실함에 따라야만 있을 수 있다'가 됩니다. 그럼 선지ㄹ과 부합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결론 】
이상은 문항의 지문 출전인 『중용(장구)』의 텍스트 상에서 확인되는 내용입니다. 그러므로 선지ㄹ의 내용은 지문(나)의 사상과 일치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ㄹ은 오답 선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문항은 사실상 답이 없는 문항이므로 출제 오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댓글 1. 지문이 합성지문인지는 좀 더 찾아볼 필요가 있기는 할텐데. 예를 들어 근사록 같은데에 위와 같이 나와 있을 수 있으니까요. 2. 무위를 주로 도가에서 쓴 것은 맞을텐데 유가에서도 가끔 쓴다하면 '무위'라는 말만으로는 유가다 도가다 말하기 어려워지겠네요. 이제까지 도식적으로 가르치던 것을 한단계 더 나아가 가르치는 것이 아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도식적인 내용만 진실이라고 말하기에도 학문성이 떨어지는 것이라. 참 어려운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단순해서 '도식적인 것'을 가르칩니다. 하지만 평가원은 그러면 안 되죠. 그런 모든 것을 감안해서 오류 없이 출제해야죠. 근데 그게 오류인지 어떤지도 모른다면, 문제가 많은 겁니다.
사실 저도 그래요. '무위'를 가르칠 때, 이 '무위'를 공자도 얘기했다고 말해줍니다. 이 과정이 참 힘들어요. 평가원 기출 문제의 오류, 연계교재의 오류 같은 것도...학생들이 저에 대한 신뢰를 갖기 전에는 그 설명 과정이 참으로 지난합니다. 그런데 이제 학생들이 저에 대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에 제 설명을 납득했다고 칩시다. 그럼 수능 보는 애들은 평가원이 그 오류를 출제하면 어떻게 하냐고 물어보죠. 그럼 저는
그런 경우에 이렇게 저렇게 대처해야 한다고 설명해줍니다. 너무나 번거로운 겁니다. 차라리 단순해서 모르고 있으면, 그래서 그냥 기출에 나온 대로, 연계교재에 나온 대로 가르치면 얼마나 편안하겠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1에 대해서는 엄밀히 따지자면 그럴 가능성도 있기는 합니다. 저도 단지 심증상 합성이리라고 생각되는 것일 뿐이고, 저 지문에 해당하는 그대로 어느 후대 텍스트에 있을지는 사실 모르는 일이지요. 그러나 그 증명, 즉 지문이 합성이 아니라는 증명은 평가원이 해야겠지요.
2에 대해서는 그 문제를 해결하려면 교과서 집필에 관련된 모든 것이 개혁되어야 해서 현실적으로 해결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원래는 유가 도가 등으로 '가'를 나누어 구분하는 방식은 선진시대에는 없었던 것이죠. 후대에 도서목록 정리하던 사람이 편의상 그렇게 범주화한 것이니, 그 이전 시기의 사상들은 '가'로 무리하게 나누지 말아야 한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한삶 (가) 지문 말씀하시는 거죠? 합성지문 맞습니다. 아무튼 님 같은 분이 윤리교육과 범주 안에 있거나 관심을 갖고 있다는 건 참으로 다행입니다. 윤리교육과 관계인 중에 님 같은 분이 몇이나 될까요? 10명만 있어도 바뀌지 싶습니다.
@힉스 그렇게 생각해주시니 감사하네요. 뜻있는 분들이 좀더 나타나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위의 리플은 지문(나) 얘기였는데, 합성이 아닐 가능성이라는 것은 굳이 구차하게 따질 때(가능성 0.1%라도) 얘기였고.. 솔직히 현행의 주요텍스트상에서 볼 때는 합성지문 맞다고 저도 생각해요
@한삶 아, 네 제가 착각했네요. 지문 (나)를 지칭했던 겁니다.
'뜻 있는 분들'이라고 하셨는데, 뜻이 있으려면 먼저 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윤리교육과 범주 안에 거의 없습니다. 전혀 없지는 않고요. 때때로 불교에 조예가 깊은 교사도 있고, 님처럼 유교-도가 쪽에 밝은 분도 있고 합니다만, 많지 않습니다.
님 지적이 전적으로 타당합니다. 합성 지문 맞고요. '무위'에 대한 지적도 타당합니다. 당장 "논어'만 보더라도 공자가 '무위'를 추구했다는 것이 나오죠(2-3군데 나옵니다.). '자연스러움'에 대한 님의 설명도 정확하고요.
지금 평가원 출제진, 특히 생윤 출제진에 문제가 많습니다. 님은 동양사상 전공이라서 이쪽만 보이시겠지만, 전반적으로 문제가 많아요. 심지어 '국어문제'도, 잘 보면 도출이 안 되는데 당연히 도출이 되는 것으로 하는 경우도 많고요. 정답이 넘 쉬워서 사람들이 별 생각 안 하고 넘어가는 거죠. 제가 작년에 윤사 오류 문항을 나열해대고, 생윤 오류 문항 나열해댄 것이 괜히 그런 게 아니라는 건, 이제 앞으로 차차 밝혀질 겁니다. 물론 님 같은 분들이 있어야 밝혀지는 것이죠.
합성지문의 경우, 같은 경전에서 그 사람이 한 얘기를 합성하는 것이라면 이 정도는 넘어가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까지 안 된다고 하면 사실상 적절한 제시문을 제시하는 게 어렵습니다. 적절한 제시문이 될 만한 것은 이미 다 사용했을 테니까요.
하지만 서로 다른 책에 나오는 지문을 합성하는 건 문제가 많은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 푸는 데 지장 없다고 하더라도, 원칙적으로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죠. 같은 책이라고 하더라도, 님이 지난번 얘기한 공자가 한 말과 증자가 한 말이 엄연히 다른데, 증자가 한 말을 공자가 한 말에 덧붙인다든가 하는 것도 안 되는 것이죠.
그런데 이 문제가 해결될까요? 답답합니다.
아까 학교에서는 대충 님의 글을 읽어 몰랐네요. 집에 와서 다시 찾아 보니 한삶님이 찾은 것이 맞습니다. 그러니까 (나) 지문은 중용. 과 그 해당 구절의 주석(주자)을 나란히 썼네요. 물론 전혀 다른 내용을 쓴 것은 아니지만 급이 다른 글을 마치 같은 라인에 연속으로 있는 것처럼 썼네요. 이렇게 지문을 구성하면 안되는 것인가? 이 문제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지문 구성의 허용 한계 같은 것 말이죠. 평가원에서 어떤 지침이 있는지 궁금하네요. 또 근사록에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찾아봤는데. ^^;; 없었습니다. 앵. 시간이... 이제 운동하러 나갑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21.01.26 15: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