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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장
長詩 최 마루
1990년 어느 봄날 대충 몸에 맞는 군복을 어정쩡하게 착용하고
배치사단의 훈련소를 가던 날 오전 이었습니다
둔중하게 생긴 군용트럭은 어디론가 우리의 청춘을 한참 이끌고
강원도 전방으로 최전방으로 구불구불 달려 들어갔습니다
모든 것들이 어색한 상황에 동기생들은 저마다 군복의 묘한 차림새로
세면백을 허리에 차고 220여명이 행렬을 갖추어서 도열을 하니
소양호에서는 육군수송선이 장엄하게 대기중이었습니다
그날은 참으로 안온한 날씨였으며 동기들과 잠시 기립자세 도중에
옆으로 지나는 다정한 연인들을 보곤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컴컴한 배안으로 승차 후 두어 시간 남짓 지나자 고요한 자갈해변으로
하차하는 순간 또 다른 트럭 십여 대가 대기중이었습니다
착지한 지역은 정말 고요했습니다
도착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송병들이 실실 웃으며 군기를 잡는답시고
일미터 높이의 트럭 뒤 칸으로 승하차를 수십 번씩 오르내리게 하더군요
비로소 군에 입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하였습니다
강군 육성의 산실인 훈련소에서 피부로 강하게 느낀 것은
그간 어머니의 사소한 음식조차 얼마나 맛있었는지 집에서 반찬 투정하던
시절이 때늦은 후회로 밀려들었습니다
고된 훈련도중 물 한 모금조차 뜨거이 타들어가는 목을 축일 때
온몸으로 싸하게 퍼지는 액체화의 느낌이야말로 거의 환상이었습니다
짬밥은 깍두기 서너 개 내장이 달랑거리는 비릿한 고등어조림 한 토막
묘한 맛을 풍기는 두부조림 건더기가 거의 없는 묽은 된장국 등등
배는 불렀지만 매일의 먹거리와 맛들은 항상 그럭저럭이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맛은 라면으로 천상의 향미였지요
라면이 그렇게 맛난 음식인줄 군에서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대로 배치 받고서 일요일 아침 두 개씩 나오는 컵라면을
어느 아주 높은 분이
건강에 나쁘다며 입대한지 두어 달 만에 배식을 끊어버렸습니다
가련한 쫄다구들은 입맛을 잃어버린 짬밥보다
일요일 아침 식사를 목 빠지게 고대했건만 이조차 거부해버리더군요
마침
부대에서 포상공사 진행 중으로 식당을 아래 부대에서 지원을 받으니
뜨거워야할 라면의 식수도
거의 식은 물에 부어서 익지 않은 것을 먹어도 행복했는데 말입니다
상병 말호봉이나 병장쯤 되어주어야 편히 끓여 먹을 수 있는 별미를
윗분들은 전혀 모르시더군요
쳐다만 봐도 얻어터지는 졸병의 서러움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작대기 하나는 PX도 혼자서 못갑니다
과자는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았으며 먹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좋았지요
쫄다구 때 월급이 칠천여원이었는데 간식거리는 사먹을 수 있었습니다
군용담배는 백자를 배급하다가 솔로 바꾸어서 이틀에 한 갑을 주었는데
맛은 그저 심심했지만 그마저 고참이 달라면 주어야했습니다
어쩌다 배급받는 건빵은 목이 말라서 대충 먹곤 했지요
내무반에 처음 들어가던 날 경례구호 소리에 형광들이 안떨어졌다며
바로 원산폭격의 주문이 들어왔습니다
군화발이 그렇게 매서운 줄 그때 알았습니다
포병부대라서 그런지 부대원들의 신체 조건들이 정말 엄청났으며
모두 시커먼 게 꼭 산적들 같았습니다
이미 군복을 입는 순간부터 자존심은 아예 잃어버렸고
남자로 태어난 게 이 순간만큼은 증오스러웠습니다
유격시는 빨간 모자만 봐도 가슴이 옥죄어왔습니다
말도 안되는 것조차 통하는 곳이 군대였습니다
동작그만의 구호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더군요
약간만 웃어도 박살이 나는 곳이 군대였습니다
식사 후 식기 세척은 오로지 빨래비누로 해결했으며
훈련기간 식사의 속도는 마치 번개처럼 먹어야했습니다
항상 노련한 군기를 엄청나게 강조해왔습니다
잠을 자다가도 근무 시는 각을 잡고 일어나야했으며 어느 순간
서서히 나조차 원격조정이 되어가더군요
점호 후 주번사관의 말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만들었습니다
아주 인간성이 나쁜 인간들도 있었지만 좋은 이도 많았습니다
솔직히 텃새를 얼마나 부리는지 아니꼬와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참으로 각양각색의 별종들이 많더군요
나무로 만든 군대휴지통은 내용물보다 휴지통이 더 무거웠습니다
푸세식 화장실에서 먹는 초코파이의 맛을 아시는지요
먹다가 인품이 고운 고참에게 들켰는데 하나를 더 주더군요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비가 내리던 어느 자정 근무를 다녀오니 그때까지 잠을 자질 않은
저혈압인 동기는 함께 탈영하자고 하얀 얼굴로 며칠을 조르더니
대대장께 소원수리를 몰래 올려 결국 국군병원에 입원하고 말았습니다
입대 전 나와의 약속이 있었기에 아무리 힘들어도 참아야했습니다
여기까지 와서 조금의 고난에도 굴복한다면
사회에서 아무것도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나 자신과의 싸움에 이기고 싶었습니다
후회스럽지 않는 젊음을 일평생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군대생활은 참으로 고달팠습니다
매일 넘치는 작업에 조금만 틈이 나도 마냥 졸았지요
총기는 내 이빨보다 더욱 정성껏 손질해야했습니다
그리곤 저녁 점호시간에 탈이 나면 무조건 박살이 났었지요
다 같이 고생하는데 못 잡아 먹어서 아주 환장한 놈들 같았습니다
인격조차 없고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온 가슴이 타버릴 만큼 열 받아도 참고 또 참아야했습니다
더구나 군인의 신분이고 보니 매우 용맹해야했습니다
하기사 젊은 날 그 위험의 지역에서 강인한 군기가 없었다면
어느 누구라도 어떠한 이유에서 최전선으로 먼저 나서지 않을 것입니다
깡패새끼들도 군복을 입혀놓으면 얌전한 강아지가 되는 곳이 군대였습니다
돈이 많던 학벌이 좋던 잘났던 못났던 군복을 입으면 달라져버립니다
늘 내무반의 공포스러운 분위기에 압도되어 누구나 명령에 따라
무조건 까닭없이 움직여야했습니다
명령에는 어떠한 이유나 조금의 인정이 없었습니다
바로 군화발이 사정없이 날아들었습니다
말대꾸나 자기의 생각이 통하지 않는 곳이 군대였습니다
무조건의 복종을 강요했는데 상관의 명령은 초헌법주의였습니다
나의 이름이 있는데도 고참놈들이 관등성명을 부를 때 어떠한 장난을 쳐도
그의 입맛에 맞추어 주어야 덜 피곤했습니다
또한 장단에 맞추어 주었다고 저들끼리 킥킥거리는 걸보면
아가리를 그냥 날리고 싶었지만 짬밥의 입지가 대단한 곳이 군대였습니다
꼬우면 먼저 입대하는 게 덜 억울할 정도였으니까요
여동생이나 누나가 있으면 무조건 처남이라 부르며 친한척합니다
남자들만 있는 곳이기에 침상에는 치약의 수난이 심각했습니다
특히 장군들이 방문한다면 야단도 아닙니다
죽을 만치 청소를 해놓으면 잘 오지도 않습니다
더러는 정강이에 까인 아픔보다 군복을 입고 있는 현실이
너무나도 치졸하고도 고통스러웠습니다
군생활 자체가 일평생 내 몸에 붙어있는 그림자조차도 무거웠으니
한마디로 매일 매시간 매초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손바닥만 한 이곳에 3년의 희한한 경험을 서술하려니 진땀이 나는군요
아! 그리고 지옥 같았던 기상 나팔소리
이른 시간 아침 점호부터 저녁 점호 때까지 쫄병들은 쉬는 시간이
아예 없습니다
아니 아플 새도 없습니다
휴일조차 잠시 종교활동을 빼고는 강도의 차이일 뿐
오로지 군기에 몰려 다녀야만 했습니다
매일마다 저녁 취침 전 한따가리에 단체기합에 온동네 북이 됩니다
서열대로 줄빠따가 쭉쭉 내려오지요
아예 어딘가 부러지고 터져야 좀 아프겠구나 생각해줍니다
그러던 어느 날 봉투에 낯익은 글자가 가슴을 메이게 합니다
어머니의 편지 한통에 복 받히어 이를 악물고 눈물을 훔치던 그때
칼날같은 집합소리에 주눅이 들었습니다
뻑하면 집합을 해댑니다 아니 인원점검을 엄청해댑니다
번호를 절도있게 외치다가 주요 과업이 떨어지면 똥구멍이 찢어지도록
무조건 해내야만했습니다
어느 날은 20여명이 투입해서 아예 산 하나를 가르마질하는 걸 보고
기겁을 했지요
군대는 분명히 무엇이 달라도 달랐습니다
사회에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배수로 작업이었지만 우리들은 불도저처럼
하루만에 삽질만으로 산을 멋지게 갈라 놓아버렸습니다
항상 상황이 비슷하다 보니 차라리 근무를 지원하는 게 편했습니다
근데 전방이다 보니 경계근무도 장난이 아닙니다
더러 성질이 고약한 고참을 만나면 계속적인 갈굼과 얼차려가 주어집니다
군생활은 이래저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매일같이 무시당하며 온몸에 피멍이 들어도
최강의 군기로 버티면서 무시무시한 훈련을 받아내었고
검게 그을린 얼굴에 군화는 광을 내고 칼같이 다려 입은 군복으로
늠름하게 첫 휴가를 명받던 날 아아! 군인이라면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러나 휴가 후 복귀의 순간 그 후유증은 참담하기 그지 없었지요
부대원들을 위해 휴가 담배와 초코파이를 잔뜩 들고서 복귀합니다
그렇지만 소위말해 가슴속에 가스가 푸욱 차올라 죽을 지경이었지요
복귀 후 죽을 맛은 복무의 염증도 있었지만 시도 때도 없이 족구에
겨울이면 태권도에 특히 비만 오면 무조건 팬티만 입고 축구하자는
똘아이 고참놈들 때문에 돌아버릴 지경이었지요
군대축구는 완전 전투이며
부상자들이 속출하였고 규정은 고참들의 전유물이었습니다
승부에서 지면 그 시간부터 박살이 나는 거지요
머리를 박고 그 자리에서 전진하면 이마위로 피를 뿜으며 까져버리지요
그런데 이게 시작입니다 엄청난 공포가 순식간에 몰려오지요
군기랍시고 몽둥이가 미친 듯이 춤을 춥니다
부대원의 절반 이상이 매우 거칠고 험악하더군요
어차피
몸 자체가 병기가 되어야하며 저돌적이라야만 적군을 위협할 수 있으니
어쩌면 거친 게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한겨울 영하 20도에도 매일 알통구보로 한겨울을 보내는데
그냥 할만 하다지만 이것도 장난이 아닙니다
산악구보로 오르는데 뒤쳐지는 병사는 개거품을 물어도 용서가 없습니다
젊으니 하는 것이고 억지로 시키니 하는 것이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묘하게 뿌듯함은 있습니다
가장 안타까운 것은
견디기 힘들 정도의 편지를 몰래 읽어가는 어느 병사의 어깨가
심하게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아주 나쁜 년들 이지요
군복을 입은 사이에 배신을 했으니 그년의 아들은 그 병사의 아픔보다
수십 배의 고통을 받았으면 했습니다
왜 이토록 모진 마음을 먹었냐면 그 편지로 인하여 부대 전체의 사기에
의욕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군복을 입은 자들 모두가 겪을 수 있는 동변상련이었지요
그야 군복처럼 시퍼런 멍이 들어서 급기야 사랑이 돌변한 증오이겠습니다
특히 종교활동 중에 운좋게 전화라도 한 병사와 통화는 했지만 이별선고를
받은 병사의 표정은 상당히 대조적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여튼 어디서나 여자문제가 젊은 날을 송두리째 흔들어버렸습니다
젊은 군인들에게 적이라면 밖으로는 인민군이고 안으로는 여자들이었습니다
최전방을 지키는 나라의 몸이고 보니 평소 그 흔한 전화조차 규율 때문에
사용할 수도 없으며 오지라서 전화기도 아예 없습니다
서열이 너무나 엄해서 누군가와 대화조차 어렵습니다
그걸 못 참으면 수일 내 방아쇠는 버림받은 병사의 몫으로 남아서
스스로의 머리통을 날려버립니다
이것뿐만 아니라 군복을 입는 순간부터 항상 위험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수색 매복 행군도중 지뢰사고는 가끔 우리를 불안하게 했으며
군에서는 무조건 암기사항에 맞추어 빠른 동작을 집요하게 주문해왔습니다
군대는 3년 동안 훌륭한 체력과 뛰어난 머리를 요구했습니다
숱한 한이 서린 연병장에서 수많은 젊음이 흘린 땀과 발자욱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애잔하게 시려옵니다
야간 근무도 심각한 추위도 이겨낼 수 있었지만 엿같은 고참들의 갈굼이
절정이어서인지 국방부시계는 고장 난 것처럼 돌지를 않았습니다
오죽하면 저녁 점오구호가 아들 낳지 말자 였을까요
군대의 여정은 정말 혹독한 인고의 세월이었지요
모든 정신력을 총동원해서 내 목숨은 내가 지켜야했습니다
수많은 사랑 중에 특별한 사랑을 쉬이 정의롭게 내릴 수는 없지만
우여곡절과 숱한 경험들을 안고서 드디어 마침내 제대를 하였습니다
제대를 하고보니 사랑하는 외할머님 막내 숙부님 큰고모님이
모두 돌아가셨더군요
어머니 아버지는 또 왜 그렇게 늙으셨는지 참 3년 동안이 묘상했습니다
내가 무얼 하다 왔는지 당분간은 새벽마다 관등성명을 들이대며
식은땀을 줄줄 흘렸습니다
대포소리 탱크소리에 문득문득 악몽에 시달려야했습니다
군복무한 이들에게 얼마나 지독한 상처들이 기억 안에서 문신이 되었으면
아직까지도 가끔 군대 꿈을 꾸어댑니다
그런데도 말이지요
희한한건
제대 얼마까지는 설레임과 허전함이 내 마음을 후벼 파버렸습니다
영장을 받던 날부터 그동안의 세월들이 주마등처럼 스칩니다
나를 아주 힘들게 했던 고참놈들이 조금은 이해가 되었으며
훗날 내가 군에서 배운 정신을 일생에 또 다른 그림자로
진정 사랑할 것을 맹세하였습니다
죽을 때까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을
군에서는 가슴깊이에 훈장으로 주었던 것입니다
뿌듯한 개구리마크는 나에게 동기들에게 나약한 젊은 날을 군에서
조국 대한민국의 강건한 이름으로 반듯하게 세워주었습니다
결론을 내리자면 군복무는 잃어버린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습니다
일생에 훌륭하게 나아갈 또 다른 감성의 3년제 대학교 이상이었습니다
이토록 멋진 대학교를 나왔는데도 사회는 가산점을 인정해주지 않는
이기심이 참으로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평등을 외치면서 왜 그대들의 아들은 고생하고도 대우를 못 받아야만 하나요
고졸 대졸의 학벌은 존재하고 군 제대의 특수한 경우는 무엇이란 말인가요
그리고 면제된 것이랑 편한 복무는 자랑이 아니랍니다
이스라엘이 왜 나름은 최강의 나라인지 다들 아시겠어요
의무라면 양성을 가리지 말고 똑같은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가고 싶은 군대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총알은 노약자나 약한 자를 가리지 않습니다
내가 평화롭게 살려면 국방이 강해야만 할 것이며 선진국의 국민들은
절대 군복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욱 군인들을 인정해주면서 그들의 고통과 고뇌를 보듬어줍니다
통일의 그날까지 오늘도 고생하시는 우리의 국군에게 용기를 주자구요
불현듯 어느 날 옷장을 정리하다가
수십 년이 지났지만 그 모질었던 군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다시 한 번 충성을 다짐해봅니다
아마도 노병이 되어서도 그럴 테지요
나도 한때는 이 작은 군화발로
용감하게 전방을 30개월 동안 지켰던 대한민국 국군이었으니까요
* 군의 특성상 이유 불문하고 무조건 용맹해야하며
나약한 자들은 그 후줄근한 정신력부터 뽑아내어야 합니다
최소한 저 도전적인 북한의 남침을 없애고 중국과 일본을 겨냥하여
내 나라는 내가 지켜야만 합니다
역사 이래 우리민족은 숱한 외침들을 받아왔습니다
전시에 가장 큰 피해자는 무조건 노약자나 여성들입니다
대한민국에 총 하나 못 쏘는 못난 사람들이 없기를 바라면서
약간은 부정한 듯 하지만 이건 분명히 알아야합니다
여긴 한국이며 분단국가입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이 나라에서 살고 있는 대한국민들이구요
우리의 이웃과 내 부모형제는 우리나라 국민이기에 누구나 할 것 없이
우리들이 지켜내어야만 합니다
☆ 글쓴이 소개 ☆
*대한민국 시인 文明 최마루님의 글입니다.<저작권은 작가에게 있음>
*<주의*주의!!동의 없이 무단전재, 표절 및 재배포, 복사등 절대금지>
choe33281004@nate.com *여러분의 즐거운 감상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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