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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92 장
미리 정하시고, 부르시고,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 (2)
천간지지(天干地支) => 10간 12지. / 10간 -> 甲乙丙丁戊己庚申壬癸 -> 하늘- 그 첫 번째가 갑. / 땅 지(地) -> 12지 - 子丑寅卯辰巳午未申酉戌亥 / 하늘의 10가지 기둥, 땅의 열두 짐승 / 열두 짐승은 용으로 대표 / 용은 나머지 열한 짐승의 특징을 모아서 가상으로 만들어 놓은 것 -> 짐승의 대장 / 그래서 성경에도 용이 나온다.
용 => 돼지 코, 뱀 몸뚱이, 쥐 꼬리, 닭 발, 호랑이 이빨 다 모아 놓은 것. / 짐승에 불과한 아래 것들이 天(하늘의 열 계명), 열을 제대로 알아 열둘이 되면, 열과 열둘이 하나하나씩 조합을 만들면 육십(60) 甲子가 된다. / 40=불혹(不惑), 50=知天命, 하늘의 뜻을 알았다. 60=환갑(還甲) / 환갑 = ‘아 그들이 다시 그걸 깨달아 하늘이 됐구나.’
환갑상은 늘 다른 이들과 같은 쪽에서 밥을 먹다가 맞은 편으로 가서 환갑상을 제사상으로 받는다. 다들 잘 몰라서 그런데 환갑상을 차리는 의식은 제사상과 같다. -> ‘당신은 진리를 알았군요. 그래서 땅에서 죽었군요.’라는 뜻이다. / 그래서 축하하는 것이다. 오래 살아서 축하하는 게 아니다. / 요즈음은 오래 산다고 환갑을 축하는 일도 없어졌다. -> 그 뜻이 뭔지 몰라서 그렇게 된 것.
그래서 사람은 죽으면 항상 병풍 뒤로 들어가게 되어 있다. 병풍은 열 폭 휘장을 똑같이 본떠서 만든 것. / 휘장은 그 사람의 육신의 숨이 멎어야 찢어진다 -> 비밀(‘무스테리온’)의 문이 열린다는 뜻.
아무리 우리가 가진 것 중에 최고 좋은 것(거기에는 내 몸도 들어 있다)을 드려도 그것은 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일 뿐이다. 하나님을 향하여 뭔가를 갚으려는 의도로 그분을 섬기면 하나님은 ‘네가 나를 대적한다.’고 하신다. 그걸 기특하다고 하지 않으신다.
아무리 예뻐지고 성숙하고 훌륭해져도 그것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 그걸 그분께 드리면서 ‘내 것을 드리니 칭찬하고 나를 예뻐해 주세요’ 하는 것은 황당한 태도이다. (다 내 것인데 그걸 갖고 와서 드린다고 해?) / 옆집 사람이 내 것을 갖고 와서 내게 주면서, “나 잘했죠?” 하면 “왜 내 것 가지고 생색을 내?” 그럴 것 아닌가?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왜 만드셨는가? / (창1:1)에서 ‘내가 아랫것으로 위의 것[= ‘샤마임(물)’이 있는 그곳]을 설명해 주기 위해 ‘에레쯔’[= 이 땅의 것, 이 세상]을 만들어 우리에게 설명해 주시려 한 것이다.’ / 그래서 만든 것이 천지만물이다. 이 땅의 것(아랫것)은 우리가 하나님(하늘의 것)을 알고나면 소멸되는 것인가? / 이 땅에서 우리가 만들어서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것은 아랫것밖에 없다. / 우리가 그걸 안다면 멸해질 아랫것을 드리면서 ‘예쁘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사무엘이 말한다(삼상 15장). ‘사울아, 네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살찐 소, 제물들을 남겨 갖고 왔는데 그건 마땅히 멸할 것 중에서 좋은 것 아니냐? 그걸 하나님이 받고 기뻐하실 것 같으냐? 아니다. 하나님의 말을 들으라고 했어! 진리를 들으라고 했지 누가 너더러 그런 것 갖고 오랬어? 마땅히 멸할 것 중에 좋은 것일 뿐인데.’
성전 안의 제단에서 드려지던 제물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모형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을 위하여 드릴 제물을 제단 위의 제물로 보여주신 것이다. / 물두멍은 우리보고 거기서 깨끗이 씻고 오라는 것인가? 아니면 하늘의 물, 말씀으로 너희를 깨끗이 씻겨서 내 백성으로 만들겠다는 것인가? ‘새 언약’을 보여주시기 위해 물두멍을 주신 것이다. 진설병은 하늘의 떡, 만나, 말씀, 진리로 너희를 먹일 것이란 의미이다. 하나님이 배가 고프시니 떡 좀 바치라고 하시는 그런 분이신가?
성전의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것을 그려놓은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께 바쳐야 할 것을 모형으로 준 것이 아니다. 성전 안의 기물, 차서, ‘티데미’된 것들을 글로 적어준 게 성경이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애를 써야 한다. 하나님이 나를 섬겨주신 진리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려고 애써야 한다. / 그런데 성경을 갖고 교회만 오면 무엇을 그렇게 갖다 바치려고들 하는지, 자기 몸뚱이까지도 바치려고 한다. 하나님이 그걸 두고 ‘자기를 대적한다 하셨는데도 말이다.
천하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주기 위한 도구이다. / ‘하나님 사랑, 하나님 섬김’은, 그분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창세 전에 택함 받은 당신의 백성들에게 진리를 흘려주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하나님은 ‘그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네가 나를 사랑하는구나!’ 하신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에 대한 부분은 성경에서 쏙 빼고, ‘이웃사랑을 강조하신다. “아가페 사랑, 내가 그 사랑이라는 걸 전해줘! 그게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거야!’ 엉뚱하게 네 것으로 나에게 갖다 바치지 마! 말씀하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입만 열면 “주님만 영광 받으세요, 주님만이 나의 사랑, 주님이 다 하셨고 나는 먼지예요.” 그런 엉뚱한 소리나 해대고 있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게 부러워서 ‘언제 나는 당신처럼 주님을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한다.
기독교 신앙을 섬김의 신앙(信仰), 드림의 신앙으로 착각하는 두 가지 유형이있다. / 그 한 가지는 열심을 부려서, 무엇이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어떤 것을 만들어 내려고 하는 율법주의적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그래요, 당신이 다 하셨어요. 당신의 피, 당신의 십자가가 다 이루셨어요. 그러니까 저는 아무것도 할 게 없어요.’ 하면서 그걸 우상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 둘은 서로 완전히 다르다며 욕하고 미워한다. / 너희들은 율법주의야! 너희는 너무 방종해! / 하지만 사실 둘은 똑같다.
십자가, 성경, 성전을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1) 율법적 열심을 부리거나, 2) 그걸 우상화 시켜놓고 자신은 거기서 제외시켜 버리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은 똑같은 자들이 서로 대척점에 서서 ‘내가 잘 났다.’ ‘네가 잘 났다.’하고 있는 것이다. 주님이 다 하셨고, 나는 먼지에 불과하다고 시인하는 게 틀렸다는 말이 아니다. / ‘나는 십자가, 주님을 섬기고 기념하는 데에 머물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잘못된 것이다. 그것은 내 밖의 우상이다.
내가 주님이 하신 일의 진의를 마음으로 알았다면 예수님과 그의 하신 일울 섬김과 기념의 대상으로 보전할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즉시 파괴해야 한다.
그래서 ‘구하라(아이테오)’ ‘찾으라(제테오)’ ‘두드려서 부수어라(크루오)’ -> 너희들이 구하고, 구해서 찾으면, 너희들이 섬김의 대상으로 갖고 있던 그것을 두들겨서 부술 것이다. 여기서 두들겨 부술 그것은 자신을 문이라고 했던 예수이다. 율법으로 오신 예수, 그분을 섬김의 대상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뜻이다.
옛날에 집을 지으면 입주식을 한다. -> 대목수가 문을 다는데, 문을 미리 잘라서 달지 않는다. 원래 하나로 된 나무를 대놓고, 입주식 할 때 톱으로 위로부터 아래로 문을 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밟아서 깨고, 불씨를 들고 들어간다. 즉, 문은 두드려서 깨는 것이다.
예수님이 그 문으로(문의 모양으로) 오셨다. 그래서 그 문 안으로 들어가려면 문을 두드려서(나카) [살해할 목적으로] 패서 없애 버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아브라함에게 그 자손(제라, 씨)가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주신 이삭이라는 아들을 죽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 ‘그건 이제 너에게 필요 없어!’ / 그때 아브라함이 ‘그래요! 맞아요! 제가 알아야 할 것은 이삭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저를 제라, 후손, 아들로 만들어내셨다는 그 진리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라며 죽여야 진짜 약속의 후손이 되는 것이다.
바울이 당시 율법주의의 침공으로 쑥대밭이 되어 있던 갈라디아 교회에 이런 편지를 썼다.
(갈5:11-12)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핍박을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나는 지금까지 너희들에게 할례를 전하던 사람이다. / 우리는 할례로써 택한 백성이라는 표식을 스스로 자기 몸에 ‘스티그마(stigma, 흔적)’로 남기는 것이다. / 당시에는 날카로운 칼이 없었기 때문에 돌을 세게 던져서 파편이 튀게 하고 날카롭게 깨어진 돌을 하나 잡아서 표피를 잘라내었다. 그러니 그게 얼마나 아팠을 것이고, 그 부작용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하몰의 아들 세겜이 야곱의 딸 디나를 강간했을 때, 시므온과 레위가 ‘할례도 안 한 사람에게 내 동생 못 줘! 너희들 다 할례 해!’ / 다 할례를 하게 만들어 놓고 사흘째 되는 날 제일 아파서 일어나지도 못할 때 둘이 가서 모조리 죽여 버렸다. 할례는 그만큼 힘든 건데 난 지 8일 되는 아기들에게 그걸 행했다. 그건 “내 몸을 드려서라도 당신이 기뻐하는 사람으로 나는 변하고야 말겠습니다.”라는 의지(意志)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내가 할례를 그런 식으로 너희에게 줬니? 그건 나쁜 거야!’ 하셨다. / 그런데 이스라엘은 주구장창 그런 할례만 했다. / 바울도 당연히 할례를, 율법을 전하던 사람이었고. 그래서 교회를 핍박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하였으면 십자가의 거치는 것이 그쳤으리니’ -> (‘내가 십자가를 이야기할 때 거리끼는 게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할례를, 율법을 아니라 하고 다니니까 십자가를 전할 때 거치는 일이 생긴다.)
너희를 (율법으로)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아포콥토’ - 내가 십자가 복음을 전했을 때, 너희들을 미혹하는(너희들을 어지럽게 하는) 율법주의자들이 있었는데(<=갈라디아 교회의 문제점) 그걸 계속하려면 ‘아포콥토(아예 자르라)하라 그래!’ -> 비아냥이다. ‘베지 말고 아포콥토, 아예 삭둑 잘라!’라는 말이다. -> 율법을 그렇게 좋아하면 아예 잘라 버려라!)
(갈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 너희는 자유를 위해서 부름을 받았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할례만 하고 있어? 왜 몸을 드려 하나님을 섬기려고만 하고 있어?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자유를 준 것 아니냐?
(갈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 ‘하나님께 네 몸 드려서 뭐 할 거야? 아, 그렇게 좋으면 잘라!’ 그게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야. / ‘너희가 서로 그 진리의 말씀을 흘려줘야지. 그게 하나님 사랑 아니냐?’
(고전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먹이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면 그게 무슨 구제고, 무슨 선행이냐?)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 (‘푸쏘미조’ = 먹는 것을 공급하다.) ->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너희를 먹이고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슨 구제고 선행이냐? / 왜 구제 같은 것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해? / 사랑으로 기쁘게 해드려. 그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거야. 그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이유야.
생명, 생명 하니까 오해하는데, ‘나’라는 그 존귀한 존재를 위해 하나님이 자기 목숨까지도 버리셨다? -> 우리 같은 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자기 목숨까지 끊어버린 것인가? / 십자가가 그런 것인가? / 하나님은 영이신데 어떻게 생명을 잃어? 그러면 그게 무슨 말씀?
‘하나님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다.’라는 것은 ‘신의 자기 계시’. 신이 인간과 구별될 수 있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포착되지 않을 때이다. / 신이 자기를 계시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내가 너희에게만큼은 신의 자리를 포기하겠다. 내가 ‘너’를 ‘나’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 그걸 ‘신의 죽음’이라 한다.
성경은 예수 안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예수님은 ‘내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셨다. -> 그분 안에 있는 진리의 말씀이 생명(生命)이다. / 예수님이 생명을 주셨다. => ‘진리의 말씀’을 주셨다. / 단순히 목숨을 끊었다는 얘기가 아니다! -> 그 말에 너무 감동받지 말라. // ‘나 같은 걸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대!’로 가지 말고, ‘그분이 갖고 있던 유일한 생명! 이 세상에 없다고 하던 그 생명을 담은 육이 언약의 기둥에서 터져버리자 그 생명이 영으로 나에게 전해졌다.’ ==>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을 전해주신 진정한 의미.’
그분의 육신이 하신 말과 일을 율법이나 어떤 감동적인 사건으로 여기다가 그것이 삭제되었을 때 비로소 그것을 진리로 이해하게 된다. 그때 육인 예수가 죽고 그로 말미암아 예수의 생명이 나에게 오는 것이다. -> 그게 나에게 생명을 주셨다는 이야기이지, “나 같은 존귀한 아들을 위해 하나님이 목숨을 버리셨다는 얘기가 아니다.”
여러분이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전해서 ‘그가 생명을 얻게 하고 내가 죽는다’ => 내가 누군가에게 그 진리를 설명하면, 그 사람이 진짜 창세 전에 택함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었을 때, ‘그렇구나, 저 사람이 대단하게 공부를 많이 해서, 자기를 열심히 계발하고 성숙시켜서, 하나님께 구원받은 게 아니라, 그 진리와 사랑과 은혜가 나를 구원한 거구나!’라고 알게 되면 전한 자의 육이 먼저 죽고, 내 안에 있던 생명이 그에게 나누어지는 것 => 나를 죽여 그에게 생명을 주는 것. / 내가 죽도록 고생해서 그를 구원해 낸다는 말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