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관순의 손편지[324]
딜쿠샤의 추억
내 나이 100살. 이 풍진 세월을 용하게도 잘 견뎌냈다. 늙고 쇠한 몸에 무슨 낙이 있으랴 했는데, 뒤늦게 생각지 못한 복에 겨울 줄을 몰랐다. 잊힌 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생긴 행운 때문이다. 서울 종로구 사직로 2길 17. 내 이름은 ‘딜쿠샤’. 산 크리스트어로 ‘희망 궁전’이라는 뜻의 멋진 이름을 주인마님 메리가 붙여주었다. 그녀가 신혼여행을 보낸 인도에서 한눈에 보고 반했다는, 그 궁전의 이름을 따온 것이다.
내가 태어날 때 이곳은 구한말 곤궁한 사람들이 살던 언덕바지였다. 한때는 복숭아밭으로, 그 이전에는 인왕산 호랑이가 출몰하는 으스스한 곳이었다. 아이 울음소리가 끊긴 지 오래인, 빛바랜 삶들이 살던 곳. 찾는 이 없는 버려진 궁전이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청정한 잎과 누런 열매를 내주는 480년생 은행나무가 이 땅을 묵묵히 지키며 나의 외로움을 달래주었다. 버려진 66년 동안 내가 의지할 곳은 저 은행나무뿐이었다.
내게도 찬란한 봄의 시간이 있었다. 은행나무가 그 시절을 기억해 줄 것이다. 나의 탄생은 백 년 전 이곳을 산책하던 테일러 부부가 은행나무에 반해 그 앞에 집을 지어 이사를 오면서였다. 그러면서 안주인 메리가 내게 ‘딜쿠샤’라는 과분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영국 출신의 배우이자 화가였던 메리와 미국인 사업가 앨버트 테일러의 결혼은 이들 부부와 한국이 엮이는 인연의 시작점이었다. 테일러는 일본 공연 중이던 메리에게 매혹의 ‘호박 목걸이’를 선물로 청혼하면서 한국행이 이루어졌다.
이들이 인왕산 끝자락 한양 도성 아래, 시가지를 조망하는 언덕에 나를 짓고 정착한 것이 1924년. 이후 테일러 부부와 은행나무와 나는 한 몸이 돼 기쁨의 궁전을 만들며 살았다. 한국인이 나를 기억하는 것은 순전히 바깥주인 앨버트의 은공 때문이다. 사업가이자 AP통신원으로 활동하면서, 그가 보인 의로운 삶과 한국을 사랑했던 선함이 알려지면서였다.
독립의 함성이 터져 나온 1919년 2월. 세브란스병원에서 아들 브루스가 태어났다. 그즈음 앨버트는 고종 장례식을 취재하던 중 아내의 출산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앨버트는 뜻밖에도 아내와 아들이 누운 침대 밑에서 종이 뭉치를 발견하고 놀랐다. 우리말에 능통한 그는 한눈에 ‘대한 독립선언서’라는 것을 알아챘다. 누군가 다급하게 이곳에 숨겼던 모양이다. 테일러는 즉시 3.1 운동에 대한 기사를 써서 독립 선언서와 함께 동생 윌리암에게 맡기고, 비밀리에 반출할 것을 부탁했다.
윌리엄은 이를 구두 뒤축에 숨겨 일본으로 들어가는 데 성공했고, 외신 금지령이 떨어지기 직전, 기사를 AP 통신사로 송고하는데 성공했다. 이를 받아 뉴욕타임스는 세계 최초로 대한독립선언을 보도하면서 의로운 식민 저항이 해외에 파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삼일 운동의 숨은 조력자 앨버트는 이외에도 고종황제 국장, 제암리 학살사건 등 한국의 수난사를 해외에 알렸다.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는 6개월간 감금생활을 했고, 끝내 앨버트 부부는 1942년 조선총독부로부터 추방령을 받기에 이르렀다.
주인 부부가 정든 한국과 이별하고 미국으로 떠나면서 나만 홀로 쓸쓸히 버려지게 되었다. 하나 둘 삶의 흔적들이 사람들 기억 속에서 흩어지고, 내 운명도 쇠락을 맞았다. 주인을 잃은 나는 계속 바뀌는 주인을 받아들여야 했다. 나중에 국가가 건물을 압수하면서는 아예 빈집으로 방치되었고, 아름다웠던 딜쿠샤의 추억은 아련하게 멀어져 갔다.
주인이 떠난 후로 할 수 있는 일은 빈 내 품을 빌려주는 것뿐이었다. 꺼져가는 천정 아래로 갈 데 없는 사람들을 받아들여 창문을 구획으로 여러 세대가 나눠 살았다. 주인 서재에 한 가족, 거실에 세 가족, 침실과 부엌에도 살림을 차려 한 때는 식구가 15명에 달했다. 꿈을 놓지 못하는 무명 가수가 살고, 집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여자가 살고, 기구한 인생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지붕에는 고양이까지 더부살이를 했다.
그렇게 우리의 행복했던 추억과 기억은 흔적을 지웠다. 그러던 2006년 귀한 손님이 나를 찾을 줄이야! 주인의 외아들 브루스가 백발의 노인이 되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추억의 딜쿠샤를 찾은 것이다. 실로 66년 만의 감격스러운 재회였다. 그제야 나는 세월이 드리운 거미줄을 걷어내고 다시금 세상에 얼굴을 알리게 되었다.
그러나,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려고 애썼던 주인 앨버트는 심장마비로 미국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을 그리워했던 남편을 위해 부인 메리는 남편의 유해를 안고 한국 땅을 찾아, 언더우드 가족과 성공회 신부, 시동생 윌리엄 등의 도움으로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 이후 딜쿠샤의 문화재 가치를 인정한 서울시가 문화재 복원 공사에 나섰고, 이를 끝낸 것이 2020년. 이를 기념하여 서울시는 앨버트 부부의 유물 2000여 점을 기증받아 서울 역사박물관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그리고 이듬해 봄 본래의 내 이름으로 서울시 등록문화재에 등재돼 감격스러운 개관을 하게 되었다.
세월의 풍진은 삶의 모습을 사그라뜨렸지만, 사람들의 기억에서 딜쿠샤는 되살아 났다. 주인 테일러 부부가 가꾼 삶의 흔적이 아련하고, 메리에게 구혼의 징표로 준 ‘호박 목걸이’가 방문객들의 따뜻한 시선을 잡는다. 부부의 손떼가 묻은 생활 용품과 메리가 그린 한국 풍경화와 인물화 등 딜쿠샤 컬렉션이 농밀한 그 시절을 잔잔한 물결로 차오르게 한다.
딜쿠샤 100년을 오롯이 함께 한 건 은행나무뿐이다. 예나 지금이나 주인 없는 집을 장승처럼 지켜온 은행나무는 올해도 또 한 번 생성과 소멸의 옷을 벗었다. 무성하게 키운 청정한 은행잎들이 어느새 샛노란 은행잎을 우수수 떨구고 내년을 기약하고 있다. 역사를 짓는 일은 사자의 몫이지만, 기억하는 일은 살아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소설가 / daumcafe 이관순의 손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