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의정사(思義精舍)는 한양 조씨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趙源)의 종택으로
350년 전에 건립되었으나, 2002년에 기존의 종택을 철거한 후 현재의 모습으로 새롭게 중건하였다.
한양조씨의 영양 입향은 기묘사화(1519) 를 만나 정암 조광조 선생이 화를 당하자 한양조씨들이 화를
면하기 위해 뿔뿔이 흩어지면서 현감공 조종(趙琮)은 영주로
그의 손자인 참판공 조원(趙源)은 1535년 경북 영양에 입향하면서 한양조씨의 영양 세거가 시작되었다.
한양조씨 11세 손으로 영양 입향조인 참판공 조원 선생은 안동 풍산 땅에서 영양으로 들어와 함양 오(吳)씨를 맞아
光仁(광인), 光義(광의) 두 형제를 두었다.
한양조씨 12세 손인 광인(1537~1582) 에게는 검(儉)과 임(任)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 임진왜란 때 혁혁한 공을 세웠다.
장자 검은 조실부모 후 병든 조모를 구완하기 위해 빙판 위를 오르내리며
잉어를 구한 이야기로 마을 이름이 비릿골(飛鯉里)로 불리울 만큼 유명하였으며, 효행으로 향내(鄕內)에 널리 알려져
향인들의 추앙하는 바 컸다.
임진란이 일어나자 동생 임과 함께 홍의장군 곽망우당(郭忘憂堂) 휘하에서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
조검의 아우인사월공(沙月公) 조임은 1592년 임진란이 발발하자
20세의 나이로 맏형 조검과 함께 의령출신 의병장 곽재우의 휘하에 들어가
용감히 싸웠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에 전념했다.
1627년 정묘호란때는 사재를 털어 군량미로 바쳤으며 1636년 병자호란때는 연로하여 종군하지 못함을 안타까워하면서
청(淸)과의 화의(和議)를 반대하는 척화소(斥和疏)를 올리기도 했다.